■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1> 프롤로그

- 한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 /  인천상륙작전·장진호 전투 등
- 시간 흘러도 그날의 기억 생생 /  자유민주주의 지켜냈다 자부심

- 실패한 전쟁 평가에 가슴 아파 /  책·영화로 한국전 알리기 열정
- 당시 폐허가 된 서울 최근 방문 /  상전벽해 발전상에 눈물 흘려


미국 플로리다 템파 시에 위치한 '참전용사 추모공원'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6·25 참전용사 포드 머독(왼쪽) 씨와 에디 고 씨. 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 플로리다 주 정부 예산과 한인회의 기부금 등으로 뒤늦게 조성됐다.


 미국 플로리다의 중서부 해안도시 템파. 이곳 템파의 다운타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는 '참전용사 추모공원'이 있다. 아름드리 수목들 사이로 헬기와 전차 등이 곳곳에 전시돼 있고, 조그만 호수 주변엔 벤치가 조성돼 있는 이곳에는 한국의 6·25전쟁을 비롯 베트남전, 1·2차 세계대전 등 미국이 치른 12개 전쟁의 참전용사비가 서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에야 뒤늦게 세워졌다.

 이곳에서 만난 포드 머독(83) 씨. 6·25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그는 중사 계급장이 선명한 검은색 예복을 입고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맞아주었다. 보청기에 돋보기 안경, 주름 사이로 검버섯이 곳곳에 핀 바싹 마른 얼굴이었지만 대화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그는 책을 한 권 꺼내 보여주었다. '더 달라스 타임즈' 기자 출신의 빌 슬론이 2009년 쓴 'The Darkest Summer-Pusan and Inchon 1950'이었다. 탱크 위에 앉아 전우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책 속의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 땅을 밟은 후 한강철교를 건너 4일 만에 서울로 입성한 얘기부터 전봇대 위에 올라 화염병을 탱크에 던지며 저항하던 인민군, 동상에 걸려 발톱이 뽑히고 총탄이 가슴에 박혔지만 기적처럼 살아난 사실 등 당시의 절박하고도 치열했던 상황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설명했다.

 2010년 한국을 방문한 그는 전쟁 당시 폐허가 된 서울이 상전벽해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곤 눈물을 흘렸다. 그는 "목숨 바쳐 참전한 한국전쟁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였지만 그동안 미국 정부는 한국참전용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다행히 최근들어 주 정부와 한인회가 늦었지만 함께 참전용사 추모비를 세우고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어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지속해온 참전용사들의 한국에 대한 짝사랑이 최근 들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초신 퓨'와 '굳세어라 금순아'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에 앉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헤어질 무렵 머독 씨의 차 후미에 'THE CHOSHIN FEW / NOVEMBER-1950-DECEMBER / CHOSHIN RESERVOIR·KOREA'라 적힌 번호판 크기의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초신(CHOSHIN)'은 함경남도 장진(長津)의 일본식 독음. 6·25 당시 미군은 일본이 제작한 지도를 그대로 사용해 그들은 '장진'을 그렇게 불렀다. 장진호(湖)는 장진강에 발전용 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이다.  














포드 머독 씨의 차 후미에 '초신 퓨'라 적힌 스티커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 않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승기를 잡은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이 "성탄절을 고향에서 맞게 해 주겠다"고 속도 경쟁을 부추기자 미군들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원산항으로 상륙한 미 해병 1사단 1만2000명은 서부전선에서 북진 중인 미 8군과 압록강에서 합류해 전쟁을 끝낼 계획으로 장진호 계곡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하지만 개마고원 입구 장진호 주변에서 12만 명의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놓였다. 해발 2000m대의 고봉준령과 협곡, 그리고 영하 30도를 밑도는 한파 속에서 미 해병 1사단은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간 중공군의 겹봉쇄망을 뚫고 흥남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동시에 방어선을 구축, 피란민과 병력의 흥남 탈출을 위한 시간을 벌어준다.

 영도다리와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경인 '바람 찬 흥남부두'는 이때 퇴각한 병력 10만여 명과 민간인 10만여 명이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193척의 군함을 타고 탈출하는 과정을 묘사한 노래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2500여 명 사망, 2000명 실종, 5000명이 부상당했으며, 중공군은 사망·부상자가 4만 명을 넘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전사(戰史)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으며, 당시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했다. '초신 퓨(CHOSHIN FEW)'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몇 안 되는 전우들이 1983년 만든 모임 이름이다. 이날 포드 머독 씨와 동행한 한국 출신의 또 다른 '초신 퓨' 회원인 에디 고 씨는 "'초신 퓨' 회원들은 한국전쟁 참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우리는 6·25와 장진호 전투 그리고 코리아를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장진호 전투 등 6·25 전쟁을 잠시 잊은 사이 미국은 2000년 워싱턴DC 해군기념광장에서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초신 퓨' 6000여 회원 대부분이 이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포드 머독 씨는 "'초신 퓨' 회원들 대부분이 지금은 80대 이상의 고령이라 차츰 그 수가 줄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초신 퓨' 회원들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 분야에서 애쓰고 있다. 장진호 전투에 소총수로 참전한 마틴 러스 씨는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웬 씨는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라는 책을 썼다. 미 지명위원회는 2012년 알래스카의 한 무명봉을 '초신 퓨 산(Mount Chosin Few)'으로, 미 해군도 순양함 한 척을 '초신 퓨'로 공식 명명했다. 2년 전 개봉된 3D 최초의 전쟁영화 '17 Days of Winter'도 장진호 전투가 배경이다. 시간이 흘러도 미국에선 한국전쟁이 잊히지 않고 역사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 바쳐 참전… 꿈에도 못 잊어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에서 만난 참전용사 덴질 밧슨(86) 씨는 "코리아가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했지만 그곳에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숨걸고 싸웠다"며 "만일 한국전쟁이 또 일어난다 해도 다시 나가 싸우겠다"고 말했다. 당시 미 3사단에서 리틀 지브롤타, 피의 능선 등에서 싸운 그는 귀국 후 한국전쟁을 미국에선 '치안 활동' 내지 '내전' 정도로 폄하하는 것을 보고는 6·25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다큐 형식의 책(Korea, We Called it War)을 펴냈다. 이 책을 토대로 지역방송에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으며, 미주리 주립대에선 전쟁사 관련 교재로도 채택돼 학생들에게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만난 참전용사 다놀드 훼드먼(86) 씨는 한인교회에서 자원봉사로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참전 후 정신적 외상장애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길바닥에 내려앉게 될 딱한 사정의 한인 가족들을 조건없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와 함께 살고 있다. 

 미국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빛바랜 수첩과 앨범, 지도 등 전쟁 당시의 자료들을 신줏단지 모시듯했다. 집착일까.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한국사랑의 외적 표현이지 않을까.

 그들은 이기지 못한 실패한 전쟁이라고 폄하되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전쟁의 참전용사처럼 환영받지 못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들은 전쟁 발발 64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을 잊지 못하고 고향에서나마 6·25와 코리아를 가슴에 묻고 널리 알리고 있었다.

 본지는 '6·25 참전용사의 한국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을 찾아 전쟁 당시의 절박한 상황과 전역 후 코리아에 대한 짝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함께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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