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2>플로리다 주 템파-에디 고 

- 전선 넘나들며 미군에 정보 제공 / 맥아더 상륙작전 감행 이틀 전엔
- 계획 알아차린 북한군 모두 죽여 / 상부보고 막아 작전 성공 이끌어
- 목숨걸고 등대도 밝혀 진격 도와 / 휴전 후 워싱턴서 보내달라 요청
- 영주권 받고 미군 근무하며 정착  / 요즘은 전쟁관련 명강사로 활동
- 6·25와 한국 알리는데 열정 쏟아  


에디 고 씨는 템파지역 초중고와 시민·봉사단체 등지에서 6·25전쟁과 코리아를 알리는 명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6·25 전쟁을 다룬 책 '잊혀진 전쟁'(남도현 지음)에 따르면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은 세기의 도박이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집념으로 이를 성공시켰다. 그 이면에는 14세의 한국 소년이 있었다. 흔히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소년을 소개하기 위해선 가정이 필요할 듯싶다. 만일 이 소년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었으며, 그럴 경우 전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됐을 수도 있었다. 

 미국 플로리다 템파에 거주하는 에디 고(79·한국명 고준경) 씨. 그는 지난해 템파 교외의 '참전용사 추모공원'에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를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강원도 철원 출신인 그의 부친은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여서 인민군의 요주의 관찰 대상이었다. 해방 이듬해 부친은 그의 형과 함께 임진강을 건너 남으로 탈출했다. 반역자 가족으로 몰린 어머니와 에디 고는 이후 쫓겨 다니다 1948년에야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당시 철원은 이북 땅이었다.   

 6·25전쟁 당시 인천 영흥도에서 상륙작전에 앞서 정찰대원들과 함께한 소년 에디 고.(뒷줄 왼쪽 세 번째) 뒷줄 왼쪽 네, 다섯, 일곱 번째가 각각 계인주 육군 대령, 연정 해군 소령, 클라크 대위.

 평화롭던 시절도 잠시, 1950년 전쟁이 발발했다. 동숭동 서울대 의대 광장에서 국군 30여 명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소년은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에 들렀지만 아무도 없자 인천 영흥도가 고향인 교회 친구가 떠올라 무작정 서쪽으로 걸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될 한 사람을 만났다.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 대위였다.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맥아더가 정보 수집을 위해 영흥도로 미리 보낸 정찰대원이었다. 클라크 대위는 당시 소년들을 모아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만 뭍에서 온 소년을 경계했다. 하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그 됨됨이를 관찰하더니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에게 배운 영어가 큰 도움이 됐다.

 주 임무는 인천항과 월미도 등지에서 인민군 동태를 관찰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소년들은 전시라도 제재를 받지 않고 전선을 드나들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6·25전쟁 당시 인천 영흥도에서 상륙작전에 앞서 정찰대원들과 함께한 소년 에디 고.(뒷줄 왼쪽 세 번째) 

                뒷줄 왼쪽 네, 다섯, 일곱 번째가 각각 계인주 육군 대령, 연정 해군 소령, 클라크 대위.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인 9월 13일 인천을 다녀오라는 클라크 대위의 명에 따라 친구와 함께 나섰다. 친구는 그때 "아무래도 유엔군이 인천으로 오려나 보다"고 말해 그제서야 전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도중 친구는 부모님을 뵈러 영흥도에 들렀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소년들이 미군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듯했다. 어디론가 끌려가더니 2시간쯤 뒤 친구는 부모와 함께 공개 처형을 당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소년은 친구가 고문에 의해 상륙작전 계획을 토설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행히 그날은 물때가 맞지 않아 인민군은 보고를 위해 배를 타지 못했다. 그날 밤 소년은 인민군들이 기생집에서 술판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주민 몇 명과 함께 새벽에 잠입, 상륙작전 계획을 알았을 법한 인민군들을 모두 죽였다. 이 대목에서 에디 고 씨는 처음 이 사실을 공개한다고 했다. 만일 다음날 그 인민군들이 인천으로 떠나 상륙작전 계획을 상부에 보고했다면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에디 고 씨의 설명이었다.

 클라크 대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때문에 앞서 인천의 관문인 팔미도 등대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클라크 대위와 소년 에디 고를 비롯한 정찰대는 전날 밤 작은 보트를 타고 팔미도에 내려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을 물리친 후 D데이 0시12분에 등대를 밝혔다. 동시에 261척의 유엔군 함정이 인천으로 진격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소년은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가겠다고 하자 클라크 대위는 추천장을 써 주었다. 덕분에 소년은 미 해병 1사단의 정식 정보원이 됐다. 이후 소년은 미군과 함께 정보 수집을 위해 원산 흥남 함흥 장진 등지를 오가다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다행히 중공군 장교는 보스턴서 공부한 엘리트로 영어를 잘했다. 소년은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라고 하며 동정심을 유발했다. 그 장교는 12만의 중공군이 장진호 주변에 배치돼 있고, 20만 명은 만주에 대기 중이라 미군의 승리는 어렵다고 설명한 후 소년을 풀어줬다.

 미 해병에 재합류한 소년은 이 사실을 보고한 후 장진호 전투 등에 참전하며 정보 수집에 매진했다. 그해 12월 흥남부두 철수 땐 피란민들의 안전 승선을 위해 마지막 배가 떠날 때까지 돕고는 걸어서 남하했다. 휴전 때까지 그는 미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휴전 후 가족과 상봉한 그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미군 전우 3명에게 편지를 썼다. 그 중 한 명이 부친에게 6·25 때 에디 고의 활약상을 소개했고, 부친은 이를 친구인 상원의원과 워싱턴DC 정가에 전달했다.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에게 에디 고를 찾아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편지가 전해졌다. 실제로 1955년 미 영사가 여권을 만들어 에디 고를 찾아와 마침내 그는 그해 6월 뉴욕에 도착했다. 이후 미 영주권을 받은 에디 고 씨는 다시 미군으로 입대, 한국에서 CIC(주한미방첩대) 요원으로 1년 8개월간 근무했다. 제대 후 그는 대학에서 항공학을 전공, 항공회사에 근무하다 뉴욕에서 무역회사를 차려 제법 돈을 모았다. 한국 여인과의 결혼도 이즈음 했다.

 1989년 그는 플로리다 템파로 이주해 10년 전까지 골프장 두 개를 운영했다. 2000년부턴 6·25 참전용사들에게 입은 은혜를 조금이나 갚기 위해 매년 이 지역의 참전용사들을 골프장으로 초대, 라운드와 함께 식사를 대접했다. 

 모든 사업을 정리한 그는 현재 6·25전쟁과 코리아를 알리는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지역 초중고와 로타리 등 봉사단체, 그리고 군부대 등에서 전쟁 관련 특강을 하고 있다. "6, 7년째 관련 자료도 찾고 공부를 하다 보니 제가 생각해도 실력이 늘었어요." 명강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올 한 해 강의 일정은 이미 지난해 말 모두 잡혔다. 

 템파지역 한국전 참전용사회 회원으로, 그들을 위해 한국을 대신해 헌신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에디 고 씨는 "현지 한인들도 애쓰고 있지만 한국정부도 이제 외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참전용사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미군 상륙작전 때 맨 먼저 방벽 넘어 싸우다 전사

- 로페즈 중위 기려 인천서 공수한 돌로 美에 기념비    

   인천상륙작전 때 템파 출신의 로페즈 중위가 상륙정에서 방벽을 넘고 있다. 당시 종준기자에 의해 사진이 찍히자마자 그는

    아쉽게도 전사했다.

 플로리다 템파 교외에 위치한 '참전용사 추모공원' 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옆에는 85㎏의 제법 큰 둥근 돌이 기단 위에 소중히 올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인천상륙작전 때 전사했던 로페즈 중위의 기념비이다.

 템파 출신으로 해병 1사단 1대대 소대장이었던 그는 상륙정이 연안에 도착했지만 인민군이 내뿜는 자동화기에 대원들이 망설이자 맨 먼저 방벽을 넘었다. 첫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그는 두 번째 수류탄의 핀을 빼 던지려는 찰라 총탄에 가슴과 오른쪽 어깨를 맞아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순간 로페즈 중위는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부상에도 불구하고 수류탄을 안고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산화했다. 쌍안경을 들고 있는 맥아더와 함께 방벽을 넘는 그의 뒷모습은 인천상륙작전의 기념비적 사진으로 꼽히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 사진이 찍힌 직후 전사했다. 그는 후에 미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추서받았다.

 템파 한국전 참전용사회는 에디 고 씨의 주도로 2007년 재향군인의 날, 인천 앞바다에서 공수해 온 이 돌에 'The Green Beach Point of Incheon Landing Operation'이라는 문구를 적어 템파 인근 키스톤 에드레디스 공원 한국전쟁기념광장에 로페즈 중위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지난해 7월 27일 여기서 차로 10분 거리인 '참전용사 추모공원' 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제막식에 맞춰 로페즈 중위 기념비를 이곳으로 옮겼다. 함께 공수된 작은 돌은 에디 고 씨의 제안으로 로페즈 중위의 모교인 힐스보로고교에 기증돼, 그의 유품과 함께 전시돼 있다.    

개인 기부와 함께 템파 한국전 참전용사회의 모금 등으로 기념비를 세운 에디 고 씨는 "당시 인천에서 직접 공수해 온 돌을 보고 참전용사회도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에디 고 씨 등 템파지역 참전용사회가 세운 로페즈 중위 기념비.

■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1> 프롤로그

- 한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 /  인천상륙작전·장진호 전투 등
- 시간 흘러도 그날의 기억 생생 /  자유민주주의 지켜냈다 자부심

- 실패한 전쟁 평가에 가슴 아파 /  책·영화로 한국전 알리기 열정
- 당시 폐허가 된 서울 최근 방문 /  상전벽해 발전상에 눈물 흘려


미국 플로리다 템파 시에 위치한 '참전용사 추모공원'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6·25 참전용사 포드 머독(왼쪽) 씨와 에디 고 씨. 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 플로리다 주 정부 예산과 한인회의 기부금 등으로 뒤늦게 조성됐다.


 미국 플로리다의 중서부 해안도시 템파. 이곳 템파의 다운타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는 '참전용사 추모공원'이 있다. 아름드리 수목들 사이로 헬기와 전차 등이 곳곳에 전시돼 있고, 조그만 호수 주변엔 벤치가 조성돼 있는 이곳에는 한국의 6·25전쟁을 비롯 베트남전, 1·2차 세계대전 등 미국이 치른 12개 전쟁의 참전용사비가 서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에야 뒤늦게 세워졌다.

 이곳에서 만난 포드 머독(83) 씨. 6·25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그는 중사 계급장이 선명한 검은색 예복을 입고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맞아주었다. 보청기에 돋보기 안경, 주름 사이로 검버섯이 곳곳에 핀 바싹 마른 얼굴이었지만 대화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그는 책을 한 권 꺼내 보여주었다. '더 달라스 타임즈' 기자 출신의 빌 슬론이 2009년 쓴 'The Darkest Summer-Pusan and Inchon 1950'이었다. 탱크 위에 앉아 전우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책 속의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 땅을 밟은 후 한강철교를 건너 4일 만에 서울로 입성한 얘기부터 전봇대 위에 올라 화염병을 탱크에 던지며 저항하던 인민군, 동상에 걸려 발톱이 뽑히고 총탄이 가슴에 박혔지만 기적처럼 살아난 사실 등 당시의 절박하고도 치열했던 상황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설명했다.

 2010년 한국을 방문한 그는 전쟁 당시 폐허가 된 서울이 상전벽해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곤 눈물을 흘렸다. 그는 "목숨 바쳐 참전한 한국전쟁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였지만 그동안 미국 정부는 한국참전용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다행히 최근들어 주 정부와 한인회가 늦었지만 함께 참전용사 추모비를 세우고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어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지속해온 참전용사들의 한국에 대한 짝사랑이 최근 들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초신 퓨'와 '굳세어라 금순아'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에 앉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헤어질 무렵 머독 씨의 차 후미에 'THE CHOSHIN FEW / NOVEMBER-1950-DECEMBER / CHOSHIN RESERVOIR·KOREA'라 적힌 번호판 크기의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초신(CHOSHIN)'은 함경남도 장진(長津)의 일본식 독음. 6·25 당시 미군은 일본이 제작한 지도를 그대로 사용해 그들은 '장진'을 그렇게 불렀다. 장진호(湖)는 장진강에 발전용 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이다.  














포드 머독 씨의 차 후미에 '초신 퓨'라 적힌 스티커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 않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승기를 잡은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이 "성탄절을 고향에서 맞게 해 주겠다"고 속도 경쟁을 부추기자 미군들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원산항으로 상륙한 미 해병 1사단 1만2000명은 서부전선에서 북진 중인 미 8군과 압록강에서 합류해 전쟁을 끝낼 계획으로 장진호 계곡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하지만 개마고원 입구 장진호 주변에서 12만 명의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놓였다. 해발 2000m대의 고봉준령과 협곡, 그리고 영하 30도를 밑도는 한파 속에서 미 해병 1사단은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간 중공군의 겹봉쇄망을 뚫고 흥남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동시에 방어선을 구축, 피란민과 병력의 흥남 탈출을 위한 시간을 벌어준다.

 영도다리와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경인 '바람 찬 흥남부두'는 이때 퇴각한 병력 10만여 명과 민간인 10만여 명이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193척의 군함을 타고 탈출하는 과정을 묘사한 노래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2500여 명 사망, 2000명 실종, 5000명이 부상당했으며, 중공군은 사망·부상자가 4만 명을 넘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전사(戰史)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으며, 당시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했다. '초신 퓨(CHOSHIN FEW)'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몇 안 되는 전우들이 1983년 만든 모임 이름이다. 이날 포드 머독 씨와 동행한 한국 출신의 또 다른 '초신 퓨' 회원인 에디 고 씨는 "'초신 퓨' 회원들은 한국전쟁 참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우리는 6·25와 장진호 전투 그리고 코리아를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장진호 전투 등 6·25 전쟁을 잠시 잊은 사이 미국은 2000년 워싱턴DC 해군기념광장에서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초신 퓨' 6000여 회원 대부분이 이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포드 머독 씨는 "'초신 퓨' 회원들 대부분이 지금은 80대 이상의 고령이라 차츰 그 수가 줄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초신 퓨' 회원들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 분야에서 애쓰고 있다. 장진호 전투에 소총수로 참전한 마틴 러스 씨는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웬 씨는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라는 책을 썼다. 미 지명위원회는 2012년 알래스카의 한 무명봉을 '초신 퓨 산(Mount Chosin Few)'으로, 미 해군도 순양함 한 척을 '초신 퓨'로 공식 명명했다. 2년 전 개봉된 3D 최초의 전쟁영화 '17 Days of Winter'도 장진호 전투가 배경이다. 시간이 흘러도 미국에선 한국전쟁이 잊히지 않고 역사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 바쳐 참전… 꿈에도 못 잊어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에서 만난 참전용사 덴질 밧슨(86) 씨는 "코리아가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했지만 그곳에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숨걸고 싸웠다"며 "만일 한국전쟁이 또 일어난다 해도 다시 나가 싸우겠다"고 말했다. 당시 미 3사단에서 리틀 지브롤타, 피의 능선 등에서 싸운 그는 귀국 후 한국전쟁을 미국에선 '치안 활동' 내지 '내전' 정도로 폄하하는 것을 보고는 6·25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다큐 형식의 책(Korea, We Called it War)을 펴냈다. 이 책을 토대로 지역방송에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으며, 미주리 주립대에선 전쟁사 관련 교재로도 채택돼 학생들에게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만난 참전용사 다놀드 훼드먼(86) 씨는 한인교회에서 자원봉사로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참전 후 정신적 외상장애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길바닥에 내려앉게 될 딱한 사정의 한인 가족들을 조건없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와 함께 살고 있다. 

 미국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빛바랜 수첩과 앨범, 지도 등 전쟁 당시의 자료들을 신줏단지 모시듯했다. 집착일까.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한국사랑의 외적 표현이지 않을까.

 그들은 이기지 못한 실패한 전쟁이라고 폄하되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전쟁의 참전용사처럼 환영받지 못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들은 전쟁 발발 64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을 잊지 못하고 고향에서나마 6·25와 코리아를 가슴에 묻고 널리 알리고 있었다.

 본지는 '6·25 참전용사의 한국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을 찾아 전쟁 당시의 절박한 상황과 전역 후 코리아에 대한 짝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함께 되돌아봤다.


올란도 디즈니월드/ 휠체어 타고 탑승

장애인 의외로 많아 / 국내선 언제 그럴까

 

 지난해 말 미국 남부 플로리다를 취재차 다녀왔다. 뉴욕 시카고 등 미국 땅 동부와 중서부가 영하 20도 안팎을 기록할 때 플로리다는 긴소매 셔츠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뜻했고 사방은 온통 푸르렀다. 이곳이 왜 미국 부자들의 겨울 휴양지인지 그간의 궁금증이 확 풀렸다. 그야말로 축복의 땅이었다.

 취재가 잘 돼 하루 반나절 정도 일정이 비었다. 비행만 20시간인 이곳 플로리다를 언제 또 찾겠느냐며 주변에서 올란드행을 권했다. 차로 3시간쯤 걸린다기에 잠시 망설이자 돌아오는 대답이 걸작이다. 이 정도 거리면 한국에서 집 앞 반찬가게에 두부 사러가는 거나 진배 없다나.

 올란도의 '디즈니월드'는 상상을 초월했다. 매직킹덤, 애니멀킹덤, 할리우드 스튜디오, 앱콧 등 4개의 테마파크 각각이 LA나 도쿄, 홍콩의 '디즈니랜드'보다 규모가 크다. 개장 때 서둘러 입장, 두 끼를 대충 떼우고 쉼 없이 좇아다녀도 테마파크 하나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첨단 놀이기구를 가장 과학적으로 잘 구현해낸 신세계였다. 

진짜 상상을 초월한 장면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였다. 온종일 본 휠체어를 탄 사람들만 족히 100명은 넘었다. 휠체어와 테마파크. 얼핏 궁합이 안 맞는 듯 했지만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휠체어를 탄 채 장애인(노약자 포함)들이 놀이기구 탑승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충 본 후 가방 속에 쑤셔놓았던 브로슈어를 열어봤다. 안내지도에는 장애인과 ATM(현금자동입출금기) 표시가 먼저 눈에 띄었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우면서도 약자들의 배려를 잊지 않는 미국의 건강함이 새삼 느껴졌다. 장애인 탑승 가능 놀이기구가 그림과 함께 네 가지 범례로 꼼꼼하게 설명돼 있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이용, 휠체어를 옮겨타야 하는 경우, 전동휠체어 대신 스탠다드 휠체어로 바꿔 타야 하는 경우 등등. 부러우면서 존경심마저 들었다. 어린 장애아들이 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지 이해할 만했다.

 귀국 후 기자는 발목을 접질러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보름 입원 후 깁스를 한 채 퇴원, 목발에 의지해 출퇴근을 했다. 며칠간은 택시로 출퇴근했지만 이후 대중교통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본의 아닌 생계형 장애인 체험이었다. 깁스한 채 보름, 깁스 풀고 보조기를 착용한 채 보름여 간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했다. 지하철엔 노약석이 있어 그럭저럭 앉아갔다. 홈페이지에 엘리베이트 위치 표시가 안 돼 있는 것이 옥에 티였다. 수천억 원을 들여 잘 만들어놓고 화룡점정을 하지 못한 격이다. 공직에 장애인이 부족하니 아마 장애인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시민들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무척 부족했다. 이는 정말 예상 밖이어서 실망스러웠다. 버스가 도착하자 목발을 짚고 있는데도 부딪힐 듯 서둘러 앞질러 가거나, 뻔히 보고도 자리 양보는 거의 없었다. 

 깁스를 푼 후 천천히 운전도 시작했다. 문제는 주차였다. 아파트 지상주차장엔 멀쩡한 차량들이 장애인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애인스티커'에서 '주차불가' 부분을 아파트 스티커로 가린 얌체족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지하 3층에 주차한 후 힘겹게 올라올 땐 씁쓸하기까지 했다. 시대 흐름에 따라 관(官)은 지하철 엘리베이트나 저상버스 도입 등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점차 늘리고 있지만 정작 이를 주도해야 할 시민의식은 되레 낙제에 가까웠다.

 보행이 불편하면 심적으로 무척 위축된다. 기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장애인의 인간승리는 더 한층 우르러 보인다. 10여년 전 만난 미국 오하이오라이트주립대 차인홍 교수가 생각난다.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집안 사정도 어려워 9세 때 재활원에서 맡겨진 후 1990년 24세 때 모 재단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2000년 83대 1의 경쟁을 뚫고 바이올린 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됐다. 당시 그는 "장애인은 강인한 정신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어쩌면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우리사회가 그를 혹독하게 키워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오는 4월이면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동물원 '더 파크'가 문을 연다. 기장에도 동부산관광단지에 테마파크가 들어설 예정이다. 올란도의 '디즈니월드'만큼은 아니더라도 장애인들이 불편하지 않게 지금부터라도 좀 더 배려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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