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산' K2 베이스캠프 입구 둔덕에는 '메모리얼 힐'이라는 추모공간이 있다. K2에서 희생된 전 세계 산악인들을 애도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기자는 해발 5300m쯤 되는 K2 베이스캠프에서 홀로 다녀오느라 애깨나 먹었다. 이곳에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책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당사자인 영국의 아줌마 산악인 알리슨 하그리브스의 동판도 눈에 띈다. 1995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단독 등정한 그는 두 달간의 휴식 후 K2도 역시 무산소로 홀로 올랐지만 하산길에 목숨을 잃었다. 네 살, 여섯 살 난 두 아이를 두고서. 당시 첫째 아이가 공식회견장에서 아빠에게 엄마가 죽은 곳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아이와 아빠와의 K2트레킹이 현실화됐고, 이 트레킹 기록이 바로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내용이다. 당시 파키스탄은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트레킹을 지원했고, 영국의 BBC는 이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다시 한 번 전 세계 산악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인 히말라야에는 고금을 울리는 사연이 널려 있다. 지난 21일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길에 숨진 부산 산악인 서성호(34·부경대OB)의 사연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8000m 히말라야 12좌를 올랐다. 이 중 11좌를 이번에 세계 최단기간·아시아 최초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기록을 세운 김창호와 함께했다. 자일파트너로 친형제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2008년 세계 4위봉인 로체를 3일 만에 무산소로 올라 최단기간 기록 공인도 받았다. 
 

악계에선 김창호의 이번 기록을 깰 유일한 산악인으로 서성호를 꼽고 있지만 정작 서성호는 욕심이 없었다. 그는 평소 사석에서 "그저 산이 좋아 산에 올랐고, 가장 체력이 왕성할 때 고산등반의 기회가 생겨 열심히 하다 보니 운이 따랐다"고 겸손해했다.


 기록에 욕심이 있었다면 김창호보다 먼저 할 수도 있었다. 네팔인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오른 밍마 셰르파가 지난해 초 'K2·브로드피크 상업대'를 모집했다. 밍마는 2010년 7월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 부산원정대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며, 밍마의 동생은 같은 해 10월 시샤팡마 원정 때 역시 부산원정대의 신세를 졌다. 이런 인연으로 밍마는 부산원정대의 서성호가 K2와 브로드피크를 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곤 특별 초청했지만 서성호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남은 두 개를 올라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계에서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힘겹게 걸어온 그의 삶의 여정 때문이다. 어머니는 따로 살았고, 부친은 오랜 세월 중병을 앓았다. 대학 입학 후 그는 극심한 생활고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휴학 땐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과 각종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했다. 동생도 건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중 부친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제대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막노동 후 달밤엔 산악부 활동을 위해 운동장을 뛰고 철봉에 매달렸다. 2006년에는 부산원정대에 뽑혀 에베레스트도 올랐다. 다행히 그해 가을 10년 만에 하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됐다. 먹고사는 일이 더 급했던 그는 이듬해 여름 예정된 K2·브로드피크 등반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때 동행해 두 거봉을 올랐다면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그는 2011년 9월, 32세로 세계 최연소, 최단기간 히말라야 8000m 14좌 기록을 보유하게 됐으리라.


 '운명'이었을까. 재취업해 보통사람처럼 살고 있는 그에게 김창호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앞두고 도움을 요청했다. 생사를 같이 했던, 가장 좋아하던 '창호형'이었기에 기쁘게 함께했다.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채 펴보지도 못한 채.


 30일 오전 9시 부산시립의료원에서 부산산악연맹장으로 영결식이 열린다. 슬프다 안타깝다. 애오라지 산이 좋아 산에 살았던 그래서 산이 돼버린 서성호의 명복을 빈다.

 

2010년 낭가파트바트 때 정상에 선 김창호와 고 서성호.

 

2011년 발토르빙하에서. 왼쪽에서부터 홍보성 부산산악연맹 회장, 고 서성호, 김창호.

 

                           살아 생전의 서성호

 

 



 

스테레오스코프(stereoscope)라는, 입체경(立體鏡)으로 번역되는 광학기계가 있습니다. 안경처럼 생긴 이 문명의 이기(利器) 아래 동시에 찍은 항공사진 2장을 놓고 보면 처음엔 잘 보이지 않다가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 사진 속의 마천루나 수목들이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눈앞에 나타나지요.

 그 숱한 발길로 친숙한 동네 뒷산을 오르내려도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남근석 여근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걷기만 한다면 평생 지척에 두고도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겠지만 스테레오스코프를 보듯 꼼꼼히 살펴보면 영락없는 성기(性器)의 형상을 한 '거시기'가 한눈에 쏘옥 들어오지요.

 남근석은 흔히 양근석 입석 선돌 장군석 낭군석 좆바위 불알바위 등으로 불리고, 여근석은 밑바위 여궁 처녀바위 샅바위 등의 닉네임을 갖고 있지요. 또 남근과 여근이 함께 있으면 부부암, 비슷한 남근이 그 밑에 있으면 자식바위라 칭하고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관련 전문가들은 성석(性石)이라 표현하지요.

 성석을 닮은 바위나 폭포 구릉 등의 지형을 보면 점잖은 사람들은 애써 고개를 돌립니다. 평범한 장삼이사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냥 웃지요. 하지만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원을 드립니다.

 예부터 성석은 숭배 대상이었습니다. 그냥 웃고 넘길 피사체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지요.

 우선 성이 지닌 생산력이 곧 성기 숭배의 형태로 나타나 마을의 안녕과 풍년 및 풍어를 기원하는 토속신앙의 대상이 됐지요. 다랑이논으로 유명한 남해 가천마을 주민들이 매년 암수바위 앞에서 마을의 평화와 풍어를 기원하며 제를 지내는 것이 좋은 예가 되겠지요. 득남을 기원하는 성석인 기자석(祈子石)은 새끼줄에 둘린 채 곳곳에 널려 있어 두말하면 잔소리겠지요.

 풍수지리상의 음양조화를 이루기 위해 비보압승(裨補壓勝)의 대상으로도 성석이 이용됐답니다. 풍수지리상의 허한 곳이나 부정한 지형에 성석을 세워 마을의 평온을 바라는 형태지요. 혹은 애초부터 음양의 조화에 맞게 위치한 남근석과 여근석을 확인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심적 평온함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숭배로 봐도 무난하지요. 경주 오봉산 여근곡이나 거제 둔덕면 산방산 남자바위와 작은 여근곡이 단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성석 순례를 떠났습니다. 취재 도중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첨단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성석 숭배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소박할지라도 인간의 욕망은 영원하니까요.

 첨언 하나. 취재 대상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행여 외설로 낙인 찍히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사실 고민 아닌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성석은 낯뜨거울 것도 숨겨야 할 것도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하고많은 소중한 문화유산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 거제 둔덕면 애바위와 애애등

거제 둔덕면 산방산.

5,6부 능선쯤의 튀어나온 바위가 애바위다.


         거제 산방위 애바위와 마주보고 있는 애애등. 민둥산이었을 땐 선명했지만 지금은 자세히 관찰해야 
         확인할 수 있다. 산의 가운데 부분, 활엽수가 소나무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곳이 애애등이다.

거가대로가 뚫리면서 한층 가까워진 거제 둔덕면에는 청마 유치환의 부부 묘와 선영 그리고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청마기념관이 있다. 이곳에는 또 고려 의종이 정중부의 난 때 파천해 3년간 머물렀다는 둔덕기성(폐왕성)도 있다. 해서 마을사람들은 왕이 살았기 때문에 이곳 둔덕 땅만을 구분해 '전하도'라고도 부른다.

 둔덕면 방하리 둔덕들 한가운데 서면 우락부락한 바위산이 양팔을 벌려 마을을 감싸고 있다. 거제 11대 명산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산방산이다. 산 5, 6부 능선쯤에 한눈에 봐도 힘이 넘치는 바위 하나가 툭 튀어나와 눈길을 끈다.

 둔덕골 출신이자 청마기념관 명예관장 겸 자원봉사자인 김화순(63) 씨는 "어릴 때 할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어르신들이 '사랑 애(愛)' 자를 써 애바위라 불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마주보는 우두봉 자락의 작은 둔덕을 가리키며 "저곳은 여성의 음부를 닮아 '사랑 애' 자 두 개를 붙여 애애등이라 했다"고 덧붙였다. 쉽게 말해 남근석과 여근곡이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습은 청마기념관 2층 전망대에서 보면 대략 확인된다.

 동행한 산경표연구소 박의석(57) 소장은 "남성을 상징하는 정동쪽 좌청룡 자리에 애바위가 있고, 반대쪽 우백호 자리에 여근곡인 애애등이 마주 보고 있으며, '흙 토(土)'를 상징하는 그 사이 너른 둔덕 들녘이 비옥해 음양오행에 따른 풍수지리가 이보다 좋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애애등이 애바위보다 미미한 데다 방향 또한 약간 틀어져 있어 아쉽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 명예관장은 "수십 년 전엔 민둥산이어서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여근 그 자체였지만 지금은 숲이 울창해 그 흔적이 미미할 뿐이며, 음부를 닮은 애애등에는 예부터 물이 끊이질 않아 어릴 때 소먹이던 일종의 우마장 역할을 했지만 이후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지금은 산길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자세히 보려면 애애등 아래 비닐하우스 인근으로 다가가야 된다. 잎을 떨군 활엽수가 여근 부분을 동그랗게 비보하며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마을사람들은 음양오행에 따른 풍수지리가 좋아 마을 전체가 지금까지 평온한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경주 여근곡

   경주 오봉산 여근곡 겨울. 가운데 부분이다.
   가을엔 여근곡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여근곡 여름.

경부고속도로서 본 여근곡.

고속도로에서 당겨서 본 모습.


우리 땅 대부분의 여근이 쪼개진 바위나 폭포이지만 경주 건천읍 여근곡은 산 전체를 통째로 여근이라 봐도 무난할 정도로 우선 크다. 오봉산이라는 멀쩡한 산 이름이 있지만 생긴 모습이 워낙 여성의 성기와 닮아 여근곡이 대표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성(性) 관련 민간신앙 대상물인 여근곡은 삼국유사 지기삼사(知幾三事) 편에서 신라 선덕여왕의 뛰어난 예지력을 보여주는 대목에 언급될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드라마 '선덕여왕' 마지막회 때 여왕이 깎아지른 너른 절벽 위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여근곡이 위치한 오봉산 정상 바로 밑의 마당바위(지맥석)이다.

'선덕여왕' 마지막회 때 나온 마당바위.

드라마 '동이' 때도 마당바위가 나왔단다.



 건천읍 신평2리에 위치한 여근곡은 경부고속도로 건천나들목과 경주터널 사이, 상행선일 경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보인다. 위압감을 주지는 않지만 병풍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은 오봉산 한가운데 위치한 여근곡은 둥근 모양의 두둑과 골이 절묘하게 조합돼 누가 보더라도 음문 형상임을 알 수 있다. 그 음문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까지 고려한다면 벌거숭이 여인의 하체를 적나라하게 보고 있는 듯해 민망할 정도다. 이 모습은 신평2리 마을회관 옆 여근곡 성 테마 박물관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가장 뚜렷하게 확인된다. 사계절 만추의 여근곡(오른쪽 사진)이 제일 선명하다.


 여근곡과 관련된 구전도 재밌다. 옛날 새로 부임하는 경주 부윤은 그 음탕한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건천보다 먼 길인 동쪽의 안강 땅을 통해 경주로 들어왔고,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은 애써 고개를 돌려 지나갔다고 한다. 한국전쟁 땐 이동하던 미군들이 여근곡을 보며 탄성과 야유를 질렀다고 한다.

 숲(오봉산)을 봤으면 이제 나무(여근곡)를 볼 차례. 오봉산 여근곡 등산로의 들머리는 유학사. 절에서 300m만 걸으면 여근곡 샘터를 만난다. 바로 옆엔 '옥문지'라는 팻말이 서 있다. 호스를 묻어 대웅전 옆 샘터로 뽑아 쓰고 있지만 샘터 주변은 늘 축축하게 젖어 있다.15년 전 오봉산에 불이 나 산이 홀랑 다 탔을 때도 샘터가 위치한 음부 주위는 화마를 피했다고 한다.

 샘터를 중심으로 한 수목 대비도 뚜렷하다. 샘터 주위에는 잎을 떨어낸 활엽수가 있지만 그 경계에는 소나무가 동그랗게 감싸고 있다. 멀리서 봤을 때 음부가 식별되는 이유이다.                      
   

여근곡 옥문지.

오봉산 여근곡 산행 들머리.

          
 신평2리 촌로들에 따르면 예부터 여근곡 샘을 작대기로 휘저으면 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에 마을에선 청년들이 샘을 지키기도 했다. 이런 차원에서 지난 1970년대 초까지 마을에선 여근곡을 신성시하며 동제를 지냈다고 전해온다.

 여성이 있으면 남성이 있기 마련. 여근곡 쪽에서 맞은편 신평리 쪽 너른 들판을 바라본다. 신평리 원신마을을 기점으로 앞으론 경부고속도로, 뒤론 중앙선 철로와 영천과 포항을 잇는 4번 국도가 횡으로 나란히 내달린다.

 여근곡 성 테마 박물관 박용(76) 관장은 "옛날에는 여근곡 맞은편 봉우리가 남근 모양을 하며 여근곡을 향하는 형상이었지만 철도와 국도가 뚫리면서 그 모습이 사라져 지금은 흉물스런 산사면이 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곳 또한 우백호(서쪽) 자리에 여근곡이, 비록 잘려나갔지만 좌청룡(동쪽) 자리에 남근 형상, 그리고 그 사이 '흙 土'를 상징하는 신평리엔 너른 벌판이 있어 음양오행에 따른 풍수지리가 완벽하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여근곡 자리에 지화곡(只火谷), 맞은편 남근 형상 봉우리엔 접포산(蝶布山)이라 표기돼 있다. 지화곡과 접포산은 각각 꿀과 나비를 의미하므로 음양의 조화가 딱 맞음을 보여준다.

어휴! 망측해라, 곳곳의 남근석 여근석

  경북 의성 비봉산의 암릉 우측 끝단 소나무 아래 절묘한 위치에 숨어 있는 남근석. 남근 그 자체다.

경북 의성 비봉산의 암릉 끝자락에 남근석이 숨어 있다. 산꾼들은 흔히 금성산~비봉산 코스를 산행한다. 금성산과 비봉산 정상을 잇따라 지나 급경사 사면을 밧줄에 의지해 내려와 고개를 돌리면 암릉 맨 우측 끝단 소나무 아래 절묘한 위치에 남근석이 숨어 있다. 선명한 귀두 모양이 영락없는 남근 그 자체다.

 억새로 유명한 장흥 천관산에는 양근석과 금수굴이 마주보고 있다. 높이 4m쯤 되는 양근석은 발기한 모습이며 그 아래에는 불알 모양의 동그란 바위 두 개가 붙어 있다. 자연석이 이처럼 비례에 맞춰 완벽한 형상을 갖춘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와 마주 보는 능선에는 여성의 음부를 닮은 금수굴이 있어 자연의 오묘한 조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천관산 금수굴.

천관산 양근석. 둘은 마주본다.


 문경 주흘산의 여궁폭포는 여근을 떠오르게 한다. 제1관문인 주흘관을 지나 우측 곡충골 방면으로 1㎞쯤 오르면 만난다. 높이 20m인 이 폭포는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일곱 선녀가 노닐었다고 전해온다.

 기암괴석이 지천이라 '천구만별'(千龜萬鼈·천 마리의 거북이와 만 마리의 자라)이라 불리는 금정산에도 최근 남근바위와 여근바위가 발견됐다. 남근석은 금샘 동쪽 아래, 여근석은 상계봉 아래 수박샘 바로 위에 숨어 있다. 둘 다 등산로를 벗어나 있어 찾기는 쉽지 않다.

부산 금정산 남근바위.

부산 금정산 여근바위.


 음양의 조화를 위한 남근석도 있다. 거창 미녀봉은 임신한 여인이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누워있는 형상. 산아래 가조면 사병리 생초마을 벌판에는 선돌인 남근석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마을사람들은 과도한 음기를 벌충하기 위한 비보 성격의 남근으로 풀이하고 있다.
   임신한 여인이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누워있는 형상인 미녀봉과 남근석이 마주보고 있다. 거창군청 제공

 월악산에도 남근석이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이 산은 음기가 왕성한 산이다. 덕주사 뒤편인 제천시 덕산면에서 보면 월악산은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을 닮았다. 선조들은 월악의 음(陰)의 지기(地氣)를 누르고 음양의 조화를 위해 덕주산 입구에 남근석을 세웠다.
           월악산 남근석.

 제주도에도 성석이 발견된다.
 산방산 중턱 산방굴사 우측 벼랑에 남근석이 서 있으며, 라온GC 클럽하우스 입구의 자연동굴에도 남근석과 여근석이 마주 보고 있다. 타이거 우즈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남근석과 여근석을 만지고 갔다 한다.

제주 라온골프클럽의 동굴 속 남근.

동굴 속 여근.둘은 마주보고 있다.


        제주 산방산 중턱 산방굴사 우측 벼랑에 서 있는 남근석.

"경주 오봉산 여근곡 성(性) 테마박물관 놓치면 후회"
-개인 수집가 박용(사진 오른쪽) 관장 370여 점 전시


경주 건천읍 신평2리 오봉산 여근곡 입구 원신마을에는 빠뜨려선 안 될 명소가 한 곳 있다. '여근곡 성 테마 박물관'(054-751-2229)이 바로 그것이다. 박용(76) 관장이 40여 년 동안 발품을 팔아 모은 남근과 여근을 닮은 희귀 수석 등을 비롯하여 전 세계 어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다양한
문양석이 370여 점 전시돼 있다.

 고향이 경주인 박 관장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여근곡을 본 후 이곳이 세계적으로 드문 자연예술품이라는 사실을 인식, 지난 2004년 여근곡이 가장 잘 보이는 지금의 터를 사들여 건물을 짓고 이듬해 4월 문을 열었다. 여근곡과 여근곡 성 테마 박물관이 세트로 입소문을 타면서 명소화돼 지금은 경주시가 적극 나서 마을 진입로를 넓히고 있으며, 주차장도 이후 건립할 계획이다.

 박 관장은 "개인적으로 석복(石福)이 있어 적지 않은 희귀 성석(性石)을 많이 모았다"며 "수석에 관심이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무료로 개방하던 여근곡 성 테마 박물관은 내달부터 입장료를 받는다. 대인 3000원, 학생(초중고) 및 단체(20인 이상) 2000원.
           여근곡 성(性) 테마 박물관 내 성석(性石).

박물관 내


박물관 내 성석(性石)들.

문경 주흘산 여궁폭포.



맛집 둘
금강산도 식후경. 맛집 두 곳 소개한다.
여근곡이 위치한 건천읍에는 흑염소 불고기(아래 사진)가 아주 유명하다. 23년 전통의 '당나무식당'(054-751-0975)이 잘한다. 흔히 여성을 위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신농본초경과 동의보감에 따르면 흑염소 수놈은 남성강화 식품이다. 1인분 1만 3000원. 육개장이 아주 맛있다. 건천IC에서 차로 1분 거리.


 거제 둔덕면에선 '88횟집'(055-634-1626)을 권한다. 겨울철 별미인 밀치(참숭어긿 3만, 4만, 5만 원)를 주문하면 뼈째 썬 것과 포를 뜬 것으로 나눠 올라온다. 주인장의 칼 솜씨가 빼어나 밀치의 진면목을 알게 해준다. 국물이 시원한 물메기탕(7000원)도 별미이다.

 



 일본 규슈 미야자키현의 신모에다케 화산폭발을 보면서 뜬금없게도 '용감한' 한국인을 떠올렸습니다.

  본격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전에 먼저 보충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라쿠니다케 등산로 입구의 입간판. 화산 폭발 위험 때문에 신모에다케의 등산을 금한다고 적혀 있다.

조금 더 넓게 본 들머리.

약간 올라와서 내려다본 들머리.


   가라쿠니다케 정상 바로 아래에서 본 기리시마 산군. 가운데 푹 꺼진 곳이 지난해 7월과 올 1월 말 화산 폭발을
   일으킨 신모에다케이고 맨 뒤 높은 봉우리가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다카치호미네이다.
  가라쿠니다케에서 기리시마 산군에서 가장 큰 칼데라호(지름 1 ㎞)인 오나미이케(大浪池)로 가는 길이 아름답다.
   한자 표기로 봐선 큰 파도가 일렁이는 못이라는 의미의, 지름이 1 ㎞인 오나미이케(大浪池).


 지난해 11월 초 미야자키현을 다녀왔습니다. 이곳에는 가라쿠니다케라는 산이 있는데 한자 표기가 '韓國岳'이랍니다. 정상적이라면 한국을 의미하는 '강고쿠'를 붙여 '강고쿠다케'라 불러야 하지만 이 산은 '가락국'을 의미한다며 '가라(가야)/ 쿠니(국)/ 다케(산)'로 풀이하더군요.

 '일본서기'에 따르면 4세기 한반도에서는 거듭된 전쟁 때문에 새로운 생활 무대로 일본 열도가 대두하자 가야 백제 신라 유민들이 집단 이주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당시 열도에는 통일된 국가라기보다 호족이 지배하는 소국이 산재해 언어 관습 등이 지역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을 '멀리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의 '도래인'(渡來人)으로 불렀답니다. '도래인'은 토목 양잠 등 당시로선 선진기술을 사용했고, 한문으로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등 일본인의 생활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고향을 떠나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야자키에 정착한 '도래인'도 예외가 아니었겠지요. 보름달이 뜨면 그들은 미야자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가라쿠니다케에 올라 고향인 한반도 방향을 바라보며 수구초심의 마음을 느끼며 흐느꼈겠지요.

 실제론 가라쿠니다케에서 한국은 아예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다는 열망의 우회적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라쿠니다케는 미야자키의 서쪽 끝 가고시마와의 경계에 솟아 있습니다. 행정구역으론 미야자키현 고바야市에 똬리를 틀고 있는 셈이지요.

 서론이 너무 길었지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가라쿠니다케는 이번에 화산 폭발이 일어난 신모에다케와 함께 기리시마 연봉이라는 큰 산군에 같이 포함돼 있습니다. 두 봉우리는 걸어서 3시간쯤 걸립니다. 아주 가깝지요.

 기리시마 연봉은 이곳에서 남쪽 60㎞ 해상에 떠있는 섬 야쿠시마와 함께 '기리시마 야쿠시마'라 불리며 일본 국립공원 1호입니다. 각각 화산지형과 울울창창한 삼나무 숲이라는 독특한 자연환경을 보유한 일본의 명승지이지요.

 곳곳에 분화구와 칼데라가 산재해 이국적 풍광을 선사하는 기리시마 산군은 이웃한 가고시마현의 사쿠라지마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 활화산 지대입니다.

 기리시마 연봉에는 크고 작은 봉우리가 많습니다. 주요 봉우리로는 가라쿠니다케(1700m) 시시고다케(1428m) 신모에다케(1421m) 나카다케(1345m) 다카치호미네(1574m) 등 5개. 거리는 13.7㎞로 산행 시간은 넉넉잡아 6시30분이면 충분합니다.

 일본인들은 일본국을 세운 신들이 내려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다카치호미네를 주로 찾지만 한국인들은 가라쿠니다케를 선호합니다.

 해서, 한국인들은 기리시마 연봉 산행 때 들머리를 가라쿠니다케로 잡습니다.
 필자도 한국인인지라 가라쿠니다케의 들머리인 에비노고원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가이드는 '기리시마 네이처가이드클럽' 후루조노(64) 씨였습니다.

 고향이 이곳인 그는 가라쿠니다케만 아마도 수천 번을 올랐답니다. 눈 감고도 오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날은 마침 서울서 왔다는 단체 산행팀 등 한국팀도 두세 팀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기리시마 연봉은 그야말로 화산지대였습니다. 들머리 건너편의 이오야마라는 화산은 243년 전에 폭발했다가 30년 전쯤에 연기는 났지만 폭발은 하지 않았답니다. 회색빛 화산재가 넘쳐가는 둔덕이었습니다.

 기리사마 연봉 주변에는 화산 폭발의 흔적인 칼데라호가 보였습니다. 지름 1㎞가 넘는 오나미노이케(大浪池)를 비롯 후도이케, 롯칸논미이케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가라쿠니다케 정상 못 미친 지점에선 앞서 말한 5개의 봉우리가 모두 보였습니다. 이번에 폭발을 일으킨 신모에다케는 가운데 푹 꺼진 분화구가 있었습니다. 거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신성시한다는 다카치호미네도 멀지만 선명하게 확인됐습니다.

 사단은 가라쿠니다케 정상에서 발생했습니다. 동행한 서울팀이 가라쿠니다케에서 이웃 봉우리인 시시고다케로 갈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는 여기까지만 보고 하산할 계획입니다. 잘 다녀오십시요."
 "비싼 돈주고 왔는데 끝까지 종주는 해야죠.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인사를 하자 옆에 있던 가이드 후루조노 씨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모에다케는 지난해 5월 초부터 폭발 징후가 보여 입산이 금지돼 있습니다. 결국 지난해 7월 화산 폭발이 있었습니다. 에비노고원에서 출발할 때 입간판을 못 보셨습니까. 이곳에서 지금까지 산행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밖에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매너가 좋지 않아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모두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루조노 씨는 자신이 말을 심하게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농담이다"라고 말한 후 밝은 표정을 지으며 딴청을 피웠지만 그 순간의 어색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정말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좀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입에서 '한국인의 산행 매너 문제'가 바로 나왔다는 사실은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법을 어기는 모습을 봐왔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며 그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지난 7월 화산 폭발 당시의 신모에다케. 이 사진은 후루노조 씨의 친구가 위험을 무릅쓰고 찍었다.
  지난달 27일 폭발을 일으킨 신모에다케.

 그로부터 6개월 뒤 신모에다케는 엄청한 파괴력으로 폭발을 일으켰지요.

 만일 일본인 가이드가 동행하지 않고 아무 정보 없이 한국인들이 산행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산하면서 에비노고원의 들머리를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입간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
 더군요.

 "신모에다케는 분화의 위험이 높기 때문에 등산할 수 없습니다." 평성 22년 5월 6일이니까 지난해 즉 2010년이었습니다. 물론 영어 중국어로도 적혀 있었습니다.

 하산 후 차 안에서 후루조노 씨는 지난해 7월 신모에다케가 폭발했을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와서 그 사진을 꺼내 비교해보니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귀국한 지 석 달도 채 안 된 지금 신모에다케의 화산 폭발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래서 '화산 폭발 위험을 무시하고 용감하게 달려나간 부끄러운 한국인의 등산 매너'였습니다.

 


고성 운흥사 터줏대감 먹쇠

사람 나이로 치자면 80세
절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주지스님만 세분 모셔

불가의 계율 알고 있는지
짐승들 봐도 짖지도 않아
고기 대신 우유 빵 좋아해




먹쇠는 주인인 경담 스님이 주지실에 계실 때는 언제나 흰 고무신이 놓여 있는 댓돌 앞에서 보초를 서며 휴식을 취한다.

흔히들 '충견'이라고 하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견공을 의미한다. 인간세계와 비교하자면 살신성인의 표본이라고 하면 될까. 오래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오수의 개'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 견공들은 지금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충견을 만나보았다. 이 견공들은 영리하고 사려 깊고 비범했다. 어쩌면 영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한결같은 주지 스님의 그림자

 경담 스님과 먹쇠와의 질긴 인연은 2004년 4월 스님이 이곳 운흥사 주지로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통상 절집의 개는 주지 스님이 떠날 때 함께 움직이지만 먹쇠는 4년만 살고 간 전임 주지 스님이 부임하기 전 이미 절에 있던 터라 떠나면서 그대로 두고 갔다. 먹쇠에게 경담 스님은 결국 세 번째 주인이었다.


예쁘게 보이려고 빗질하는 스님.

식사중인 먹쇠. 절집개라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이놈은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참 좋아요. 처음에는 미적미적하더니 제가 주지실을 들락거리자 서서히 주인으로 인정하며 자세를 낮추고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어요. 하루 만이었지요. 한 주인을 섬기는 진돗개와 달리 삽살개는 낯선 사람이 오면 상황 판단을 빨리하며 금방 친해지는 융통성이 있더군요. 어찌 보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될 수도 있지요."

 먹쇠는 그때부터 스님의 그림자가 됐다. 주지실에서 공부를 하거나 손님을 만날 때도 흰 고무신이 놓인 댓돌 앞에서 보초를 서며 휴식을 취했다. 기자가 찾은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래 산 부부는 표정만 보고도 속내를 알 수 있듯 먹쇠 또한 주지 스님의 표정만 봐도 알아서 척척 행동으로 실천한다. "신기해요. 흑갈색의 털북숭이인 먹쇠 얼굴을 보면 긴 털에 가려 코밖에 안 보여요. 어떨 땐 저놈의 표정이 어떨까 하고 생각을 하며 저 혼자 씩 웃어요."

 먹쇠는 아침 일찍 방문을 열고 나오는 스님의 복장만 보면 향후 스님의 일정을 파악한다.
 평상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으면 혼자 좋아서 껑충껑충 뛴다. 뒷산에 가기 때문이다. 이때 먹쇠의 본분은 길 안내자. 항상 2~3m 앞서 가며 길 안내를 자처한다. 행여 스님이 꽃이나 풀을 관찰할 땐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 있는다. 스님이 속도를 내면 약간 빠른 걸음으로, 된비알에서 발걸음이 더뎌지면 스님의 보폭에 맞춰 항상 일정 간격을 유지한다. 도중 다람쥐나 토끼 등 날짐승이 보이면 본능적으로 짖으며 한 번쯤 뒤쫓아갈 법도 한데 무덤덤하게 스님과 행동을 같이한다. 절집에서 오래 살아 '살생은 금물'이라는 불가의 계율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럴 땐 저도 내색은 안 하지만 먹쇠가 도인처럼 느껴져요. 저도 먹쇠에게 배우고 있지요."

 먹쇠는 스님이 출타 중일 때는 몰라도 경내에 있을 땐 절대 혼자서 산에 가지 않는다. "저와 절을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스님이 외출복을 입고 방에서 나올 때 먹쇠는 잠시 헤어짐을 아는지 가만히 서 있다. 스님이 "집 잘 봐"라는 말을 던지면 그저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 뿐 따라오지 않는다. 차를 타고 가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스님의 차 소리를 알기 때문에 돌아올 땐 주차장으로 달려온다.

 저녁 식사 후 절 뒤 암자인 천진암을 찾을 때도 먹쇠는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혹 늦을 것 같아 먹쇠를 절에 두고 차를 타고 가면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고 언제 왔는지 천진암 주지실 댓돌 앞에서 밤 10시건 11시건 기다린다. 추운 겨울에도 변함이 없다.
 먹쇠는 스님의 말도 잘 알아듣는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먹쇠는 기분이 좋을 땐 스님의 가슴까지 앞발을 올리며 아양을 떤다. 비가 올 땐 그만 옷을 다 적신다. 이럴 경우 스님은 정색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타이르면 그 다음부터 절대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신도들이 많이 찾는 부처님 오신 날과 영산재 때를 제외하곤 자유의 몸인 먹쇠는 평소 장삼이사들이 절을 찾을 경우 다가가 냄새를 맡는다. 절대 물지 않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곤 주지실 앞에서 그들을 주시한다. 다만 그들이 이유 없이 주지실 앞으로 뛰어올 경우 아주 예민해진다.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주인에 대한 보호 본능의 발로라고 스님은 말한다. 이따금 모자를 쓰고 화려한 색상의 등산복을 입어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먹쇠의 식성도 특이하다. 개 사료를 먹이지만 절집 개여서 그런지 고기를 주면 잘 먹지 않는다. 대신 빵과 우유, 감자전 호박전 등 부침개류와 백설기 등 떡을 좋아한다.

개 사료를 주로 먹지는 고기는 별로, 빵과 우유를 좋아하는 먹쇠.

주지실 옆에 먹쇠 집이 있지만 주로 주지실 댓실 앞에 있다.


집앞엔 그래도 개조심이라 적혀 있다.

영산전을 배경으로 스님과 한 컷.


요즘 스님은 먹쇠를 보면 마음이 아리다. 지난해 봄부터 행동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가을쯤 되자 지금처럼 급격히 몸 움직임이 둔해졌기 때문이다. "제가 여기 생활 7년, 전 주지스님이 4년, 전전 주지스님이 9년을 살다 가셨어요. 전전 주지스님이 먹쇠를 데리고 왔지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을 못 하더군요. 5, 6년쯤 잡으면 결국 16, 17세라는 셈이죠. 최근 진주의 수의사 한 분이 절을 찾아 뒤뚱뒤뚱 걷는 먹쇠를 관찰한 후 인간으로 치자면 80세를 넘어 이제 수명을 다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힘이 들어 산에도 제대로 동행하지 못하고 주차장까지도 겨우 와요. 그래서 요즘 제 마음이 편치 못해요."

 경담 스님은 이런 말을 던졌다. "비록 이승에서의 인연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마도 저승에서 이 인연은 계속될 거예요. 그땐 제가 먹쇠를 위한 삶을 살아야죠." 그러면서 스님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먹쇠가 생을 마감하면 극락왕생하라고 염불을 하고 장례를 치러줄 겁니다. 양지바른 곳에 조그만 묘를 하나 쓴 후 49재도 지낼 것입니다. 조그만 비석도 세울 겁니다. 문구는 생각 중입니다."

 한편 운흥사에는 먹쇠 외에 견공 두 마리가 더 있다. 대웅전 우측 한쪽에는 '지혜롭고 순하게 자라라'는 의미의 삽살개 '혜순'(6세)이가 있고, 주지실인 보광전 좌측 끄트머리에는 '운흥사를 잘 지키라'는 뜻의 진돗개 잡종인 '운수'(5세)가 있다. 아쉽게도 먹쇠처럼 수양이 덜 돼 낯선 사람을 보면 짖고 물 수도 있어 묶여 있다. 혜순이와 운수는 암컷이고 먹쇠는 수컷이다.

진돗개 잡종인 운수.

삽살개 잡종인 혜순이.


 ■ 초보 산꾼들들의 길잡이 흰둥이

용감무쌍해 보이는 흰둥이.

산꾼들이 쉴 땐 흰둥이도 쉰다.


 최근 전남 고흥 팔영산 산행 때 진돗개로 추정되는 견공이 들머리 격인 천년고찰 능가사 입구에서부터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하다 말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일행이 도중에 멈춰 산세를 얘기하고 있으면 이놈도 기다리고, 다시 출발하면 그도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역삼각형 얼굴에 꼬리가 등쪽으로 말려 있는 전형적인 진돗개여서 기자를 비롯한 일행은 '흰둥이'라 명명했다.

 흰둥이는 경사진 가풀막을 오를 땐 기다려주고, 일부러 속도를 늦춰봐도 일정 간격을 유지한다. 능가사에서 출발한 지 50분. 마침내 주능선에 올라 휴식을 취할 때는 다소곳이 다가와 그냥 앉아 있다. 과자를 주면 조용히 그것만 받아먹을 뿐 더 달라고 보채지도 않는다. 비범해 보였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때까지 안내하고 하산하는 흰둥이.

 다소 오래 쉬니까 산행을 계속하자고 몸짓을 보낸다. 팔영산을 자주 찾는다는 한 산꾼이 지나치다 한마디 던졌다. "이놈이 다른 팀을 안내하고 있네."
 그랬다. 흰둥이는 '팔영산 자원봉사 안내견'이었다. 흰둥이는 쇠줄이 걸려 있는 암봉 입구에 이르러서야 임무를 완성한 듯 아쉬움을 표하며 발길을 돌렸다.

 하산 후 능가사 주변에서 흰둥이를 찾았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씩 절에서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늘 절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도 잘 보지 못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산행팀을 안내하러 산으로 올라갔을까.


# 전설같은 숨은 충견들

 현재 국내에 알려져 있는 충견의 사연은 시대와 배경은 달라도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주인은 개와 항상 같이 다닌다. 먼 길을 오가던 주인이 피곤해 잠시 눈을 붙인 사이 불이 난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개는 근처 웅덩이나 개울로 달려가 온몸에 물을 적셔 주인 주변의 풀숲을 뒹굴어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다. 개는 지쳐 끝내 연기에 질식해 죽는다.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쓰러진 개와 주변 정황을 살핀 후 개가 자신을 구했다고 슬퍼한다. 후대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이 견공의 동상이나 비를 세운다. 국내에는 그 같은 사연을 담은 충견 동상과 비석, 비각 동판 등이 여럿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전북 임실군의 '오수의 개' 의견비와 의견상. 오수면 면사무소 인근 시장통 내 원동산 공원에 있다. 고려 문인 최자의 '보한집'에 그 내용이 실려 있으며, 1972년 전북 민속자료 1호로 지정됐다. 임실군은 이 오수의 개를 주제로 매년 4월 말 의견문화제를 열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국내를 넘어 세계적 애견 성지로 자리매김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임실군은 문화관광과 내 관광애견계(3명)를 따로 두고 있다. 최근에는 의견공원도 조성했다.

주인 김개인과 오수의 개.

오수의 개 동상.


돼지국밥의 원조로 불리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에도 의구비와 의견상이 있다. 무안면 마흘리 점동에서 지정마을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 정상에 300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의구비가 있다.

의구비가 눈에 잘 띄지 않자 건너편에 10여 년 전 밀양교육청이 의견상을 세워 놓았다. 주변 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개고개라 부른다.
           밀양 의견상. 사람들은 이곳을 개고개라 부른다.

 부산에도 알고 보니 충견이 있었다. 금정구 회동동과 기장군 철마면을 잇는 개좌고개가 그 배경. 그 사연은 회동동에서 철마면으로 접어든 후 40m쯤 뒤 도로 좌측 큰 돌에 박힌 동판에 음각돼 있다. 다른 충견의 사연과 달리 주인인 서홍이라는 청년은 무척 효자였다는 점이다. 지금도 철마면 면사무소 인근 연구리 철마체육공원 게이트볼 경기장 옆에 서홍의 효자비가 남아 있다. 회동동 아홉산에서 개좌고개를 거쳐 이어지는 봉우리 이름은 개좌산이며, 개좌고개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 주변의 마을을 총칭해 개좌골이라 한다.

개좌고개의 사연을 적은 동판.

기장군 연구리의 서홍의 효자비각 내 효자비.




 이 밖에 경북 구미 도개면의 의구총, 충남 부여 홍산면의 개탑, 전남 순천 승주읍 의구비 등이 있다.

 일본 도쿄 시부야역 앞에도 의견상이 있다. 매일 저녁 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하치코'라는 개(아래 사진)는 주인이 사망한 후에도 10년간 주인을 기다렸다고 한다. 시부야의 대표적 약속 장소이다.



















 운흥사 먹쇠 이야기 전편(운흥사 주지스님과 삽삽개 먹쇠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hung.kookje.co.kr/485





- 경남 고성 운흥사 충견 

  삽살개 먹쇠 이야기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비뚤어져도 이놈은 한결같아"



운흥사 주지 경담 스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삽살개 먹쇠. 스님은 "먹쇠가 최근 기력이 쇠해져 마음이 무척 아리다"고 전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주지 스님이 빗질을 한 번 했지만 워낙 털북숭이라 코밖에 보이지 않는다.  

경남 고성 땅 와룡산 향로봉 중턱에는 운흥사라는 절집이 있습니다.
중생대 '공룡의 무도장'이라 불리는 상족암 군립공원이 차로 15분 거리에 있지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 절은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지휘했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수륙 양면 작전을 꾀하기 위해 세 번이나 다녀간 곳이라고 합니다.
운흥사는 매년 음력 3월 3일 임진왜란 때 산화한 승병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때부터 영산재를 지냅니다.
예부터 이 재를 세 번만 보면 죽어서 극락 간다는 말이 전해오는 데다 조선시대 불화의 대가 의겸 스님이 조성한 대형 괘불(가로 8.18, 세로 12.72m·보물 제1317호)이 걸려 있어 전국에서 불교 신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옵니다.
이 괘불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가져가려고 세 번이나 사천 앞바다로 옮겨 배에 실었으나 심한 풍랑으로 번번이 좌절됐다 합니다.

운흥사의 아담한 장독대도 꽤나 유명하답니다. 낮은 흙돌담을 동그랗게 쌓아 기와를 얹어 운치가 그만입니다. 흔히 장독대는 외진 곳에 두지만 이곳에서는 그 예쁨을 뽐내려는지 경내 한가운데 두고 있습니다. 장독대 뒤로는 영산전으로 이어지는 투박한 돌계단이 있습니다.
이 돌계단은 장독대와 어우러져 우리 고유의 토속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절을 찾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사시사철 줄을 잇지요.
이들 작가들은 하나같이 풍경을 무명의 도공이 일궈낸 막사발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흙돌담에 기와를 얹은 운흥사 장독대. 흔히 장독대는 외진 곳에 두지만 이곳에는 경내 한가운데 있다.

운흥사에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명물이 있습니다.
이 절집의 지킴이 삽살개 먹쇠입니다.
절집의 마스코트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절을 찾으면 지나치기 쉬운 견공이지요.
주지 경담 스님은 "전생에 부처님이나 스님과의 인연이 있었는지 먹쇠는 어려서부터 절간에서 수도승처럼 생활해 내세에는 인간으로 환생해 좋은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지 스님을 세 분이나 모시며 고성 땅 산골짝에서 절밥을 먹은 지 16년 정도로 추정되는 먹쇠.  사람 나이로 치자면 80세쯤 되는 노인인 먹쇠는 평소에는 순하고 영리한 데다 그날그날 주지 스님의 심기까지 챙깁니다.
손댈 데 하나 없는 충견이랍니다.

 먹쇠는 최근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해졌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이 견공에게도 적용되는가 봅니다. 스님을 보필하며 지금까지의 '천직'인 절집 지킴이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절집 식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지요. 그래도 나태하지 않은 강직한 모습은 변함없습니다.
이번 주 테마를 충견으로 잡았습니다. 주인을 위해 자기 한 몸을 기꺼이 바치고 있는 견공들의 이야기입니다.

배신과 변절, 회유 등 온갖 구태가 판을 치는 속세에서 오롯이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충성스러운 견공의 우직함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작은 시금석이 될 것 같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들을 찾아봤습니다.
휴가철이 다가왔습니다. 아직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한려해상 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고성군 바다와 산을 찾아 잠시 먹쇠가 살고 있는 운흥사를 한번 방문해 보시면 어떨까요.

 운흥사 먹쇠 이야기 후속편( "저승에선 제가 먹쇠를 위한 삶을 살아야죠")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hung.kookje.co.kr/486









    

경남 남해 망운산에서 발견된 희귀식물인 흰진달래. 사진제공=국립산림과학원 남부산림연구소

매년 이맘 때면 온 산을 연분홍빛으로 불태우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꽃 진달래가 흰색이라면 믿어시겠습니까.
사실이라면 이렇게 읊겠죠. '온 산이 온통 하얗게 물든…' . 왠지 어색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이런 풍광이 사실로 재현될 것 같습니다.
경남 남해의 망운산 자락에 흰진달래가 자생하고 있는 것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잠시 망운산을 살펴보겠습니다.
천년 고찰이자 관음기도처로 유명한 보리암을 품고 있는 금산이 남해를 찾는 외지인들의 필수 코스라면 남해 망운산은 남해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그래서 더이상 외지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어머니품 같은 산입니다.
망운산은 해발 785m로 우리나라 섬 산 중 제주도 한라산, 울릉도 성인봉 다음으로 높습니다. 부초처럼 점점이 떠있는 다도해의 섬들을 누르고 남해땅 한가운데 우뚝 솟아 남해바다 최고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국립산림과학원 남부산림연구소는 최근 남부자원수종에 대한 탐사활동을 벌이던 중 희귀식물로 알려진 흰진달래(Rhododendron mucronulatum for. albiflorum)의 자생지를 남해 망운산에서 발견했습니다. 
흰진달래의 자생지는 약 2ha의 면적에 모두 10여 그루로 키는 2~3m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흔히 진달래는 햇볕이 잘 들고 배수가 잘 되는 사양토를 좋아하는데 이번에 발견된 자생지의 숲은 주변 수목들이 울창해지면서 햇볕 부족으로 나무의 상태가 많이 쇠약해져 있다고 합니다.

흰진달래는 진달래의 변이종으로 과거에는 드물게 산야에서 자생하고 있었으나 서식환경의 변화와 무분별한 채취 등으로 남획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인되는 개체가 적은 아주 희귀식물입니다.

신현철 남부산림연구소 박사는 "조경수로 자생수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흰진달래도 주목받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향후 이 흰진달래도 가을에 씨앗을 채취하여 복원할 계획"이라고 향후 포부를 밝혔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산하에 하얀색 진달래 군락지를 볼 날을 기대해봅니다.

 무릇 산 이름은 산 아래 마을사람들이 산세나 산의 모양 그리고 지명 전설 등을 근거로 해 명명하거나 고서에 표기된 이름을 찾아 복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산의 진산 금정산 고당봉을 김해 사람들은 명필봉이라 부른다. 실제 김해지역에선 금정산이 마치 붓끝을 연상시키는 뾰족한 암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금정산 고당봉은 명필봉이란 닉네임을 갖고 있지만 공식 이름은 고당봉이다. 해서, 정상석에는 '금정산 고당봉'이라 적혀 있다.

산의 정상에 세워진 정상석에 적힌 이름이 공식적인 산이름인 셈이다.
10여 년 동안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매주 산행기를 싣고 있는 국제신문 산행팀은 국토지리정보원이 발간하는 지형도에도 없는 산 이름을 적지 않게 발굴했다. 현지 마을의 어르신이나 산속 암자의 노승, 그리고 문헌 등을 통해 자칫 영구히 묻혀버릴 수도 있는 산 이름을 발굴했다. 대표적인 곳이 양산 천마산, 경주 정족산, 울산 배내봉 등. 이런 산은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국내 주요 산 전문 사이트에도 이름이 오르고, 정상석도 세워지고 있다.

'정상석!'. 산꾼들은 이 정상석을 참 좋아한다. 사실 산이 좋다고 하지만 막상 급경사 된비알을 오르다 보면 힘이 드는 게 인지상정. 이 때문에 정상에 오르면 해냈다고 성취감과 함께 더이상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그렇게 정상석이 고마울 수 없다.
 
 오랫동안 산행을 담당해온 기자는 지금까지 산행 도중 정상석과 관련, 보고 들은 적지 않은 사연을 몇 가지 소개한다.

 먼저 밀양 금오산(761m).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딸기를 재배한 시배지인 삼랑진읍에 우뚝 선 금오산은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의 충절이 서려 있는 구미 금오산과 남해 보리암과 기도 효험이 빼어난 향일암을 품고 있는 여수 금오산에 비해 지명도는 낮지만 헌걸찬 근육질의 암봉에 영산알프스 산군이 시원하게 펼쳐져 알토란 같은 숨은 명산이다. 여기에 보석 같은 낙엽길이 이어져 적지 않은 산꾼들이 즐겨 찾는다.

금오산 정상석 왼쪽 뒤 바위 위에는 과거 어떤 비석 내지 정상석을 세웠다 떼어낸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이 바로 경남고 모 기수 동기생들이 정상석을 세운 흔적이다. 

 이 금오산 정상에는 정상석과 관련한 웃지 못할 사연이 하나 있다. 오래 전 경남고의 모 기수 동기생들이 이곳 금오산 정상에 정상석을 세우고 그들의 모산으로 정했다. 세월이 흘러흘러 밀양시가 정상석을 세우기 위해 금오산에 올라보니 시유지에 불법(?)으로 세운 정상석이 하나 서 있지 않은가. 이후 시는 수소문 끝에 해당 경남고 동기회에 정상석의 철거명령 최고장을 보냈다. 현재의 정상석 옆 철거 자국은 바로 당시의 웃지 못할 해프닝 때문에 남은 흔적이다.

 다음은 부산 철마산.
지난해 '부산 5산 종주'를 세 차례에 걸쳐 끝낸 기자는 두 번째 구간 마지막 봉우리인 부산 기장군 철마산을 어둠이 시작되는 오후 7시께 올랐다. 조그만 정상석과 커다란 정상석이 나란히 서 있었다. 문득 기자는 4년 전 이들 정상석 때문에 큰 곤혹을 치렀던 생각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조그만 정상석이 서 있는 철마산 정상.
조그만 정상석 옆에 커다란 정상석이 서 있는 철마산 정상.

내용은 대충 이렇다.
산행팀은 4년 전인 2005년 3월 거문산~철마산 코스를 소개했다. 당시 산행팀이 철마산에 올랐을 땐 지금의 커다란 정상석 대신 바로 옆의 조그만 정상석만 하나 달랑 있었다.

문제는 산행팀이 다녀간 뒤부터 신문에 소개되기까지의 10일 정도 되는 기간 중에 부산의 '철마거문산악회' 회원들이 조그만 정상석 바로 옆에 커다란 정상석을 세웠다는 것. 산행팀은 거문산~철마산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평소에는 전혀 취급하지 않던 정상석 사진을 그날따라 신문에 게재까지 했으니 여러 곳에서 문의전화가 올 수밖에.
전화내용이 거의 다 이랬다. "산행팀 정말로 철마산에 간 것이 확실합니까" 아니면 "신문에 난 그 사진은 언제적 사진입니까". 기자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한 것은 당연지사.
신문을 보고 철마산을 찾은 한 지인은 신문에도 없는 커다란 정상석이 새로 생긴 사실을 보고 그날 정상에서 모두들 "국제신문 산행팀이 정말 다녀간 것 맞냐"는 뼈있는 농담을 했다고 전했다.

아마 문의전화가 한달쯤 계속된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부산 기장의 철마산 옆 억새군락지이지 빼어난 전망대인 574봉 돌탑 옆에 지난해 8월 부산의 모 산행단체가 정상석을 하나 세웠다. 그 이름은 뜻밖에도 당나귀봉. 이해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알고 보니 '신과 한 만남'의 약어였다.
사진 가운데 달음산과 그 뒤로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억새군락지이지 전망대인 574봉. 

 574봉 돌탑 옆에 '당나귀봉 574m'라고 적힌 정상석이 하나 서 있다.

'당나귀봉'이라 불리게 된 이유가 적혀 있다.

'당나귀봉'이라 적힌 정상석 뒤로 천성산이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 본 '당나귀봉' 정상석. 저 멀리 보이는 암봉은 달음산.

'당나귀봉'이라 적힌 574봉 옆에는 철마산이 손에 잡힌다. 이 때문에 산행팀은 574봉을 '철마산 중봉'이 적당할 듯 싶다.


당시 동행한 이창우 산행대장은 "산깨나 좀 탄다는 산꾼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발생했다"며 "굳이 정상석을 세우려면 574봉이 철마산의 전위봉임을 감안할 때 '가지산 중봉'처럼 '철마산 중봉'이나 소산벌 뒷산이기 때문에 '소산봉'쯤으로 명명했다면 모든 산꾼들이 수긍하며 박수를 쳤을텐데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부산 해운대를 품은 장산과 능선으로 이어지는 기장군의 수령산도 산꾼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준다.
 장산에서 수령산으로 이어지는 대형 안내판과 도중에 만나는 조그만 이정표에는 산성산과 수령산이 줄곧 혼영돼 초행자들에게는 다른 산이라는 암시를 주더니 막상 산 정상에는 '수령산(성산)'이라 적힌 정상석이 서 있다. 

'기장 수령산'이라 적힌 이정표.
'산성산'이라 적힌 이정표.
대형 안내판 약간의 우측 상단에는 산성산이라는 표시가 보인다. 

 기장산성의 흔적.
수령산(성산)이라 적힌 정상석. 산불초소 우측으로는 광활한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산행팀은 산행 도중 한번만이라도 '산성산(수령산)'이라고 표기했으면 큰 혼란을 야기시키진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수령산 정상 직전에 '기장산성'이라는 안내판을 보고서야 오래 전에 (기장)산성이 있어 산성산이라는 이름이 있었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다. 이쯤 되면 기장의 관련 공무원들은 모두 징계 내지 집에 가야 되지 않느냐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이 기사가 나간 후 기장군에서는 산행팀에 이정표와 관련한 문의전화를 걸어왔다. 산행팀이 지적한 기장군의 엉터리 이정표는 사실 수령산뿐 아니라 여렷 있다.
산행팀은 본대로 느낀대로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러곤 이후 생업(?) 때문에 확인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확인 후 결과를 포스팅할 계획이다. 

 부산의 진산 금정산의 '파류봉'에 세워진 '파리봉'이란 정상석은 산행팀에게 큰 곤욕을 안겨줬다. 파류봉은 금정산성 제1망루 북쪽에 위치한 하나의 준봉. 참고로 제1망루 남쪽에는 상계봉이 위치해 있다.

 파류봉에는 부산의 모 산악회가 '파리봉'이라는 정상석을 세워 놓았다. 국제신문 산행팀은 산행기에서 파류봉이라 언급하고 지도에는 파류(파리)봉이라 표기했다.
 이에 한 독자는 정상석에 엄연히 '파리봉'이라 적혀 있는데 산행팀이 '파류봉'이라 적었다는 이유로 전화를 걸어 틀렸다고 항의를 하지 않는가. 부산시가 공식적으로 세운 정상석도 아닌데 말이다.

 적지 않은 자료를 뒤져봐도 딱히 어느 것 하나 '이것이 맞다' 라고 입증할 문구는 없다. 산행팀도 당시 고민이 많아 가까운 지인들에게 문의를 해본 결과 파류봉이 일반적으로 많이 회자된다는 사실에 입각해 파류봉으로 사용했음을 밝혀둔다.

 이와 관련, 부산시 관계자는 "법적으로 산악회는 산 정상에 정상석을 세울 수 없다"고 말한 후 "그 정상석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야기 된다면 뽑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원론적인 답만 했을 뿐이었다.


 '파리봉'이라 적힌 정상석.


 국립공원 월악산은 신라의 마지만 왕자인 비운의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부친인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내주자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입산하기 전 이곳 월악산에 들러 망국의 한을 달랬습니다. 
 그의 여동생인 덕주공주 또한 이곳 월악산으로 들어와 덕주사에 머물며 높이 13m의 마애불(보물 제406호)을 조성,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옵니다. 마애불은 지금의 덕주사에서 1.5㎞ 정도 산 속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의태자의 누이 덕주공주가 월악산으로 들어와 자신을 닮은 불상을 새겼다고 전해오는 
            높이 13m의 마애불(보물 제406호).

           미륵리사지의 돌부처.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여동생 덕주공주의 자화상으로 전해오는 마애불이
           있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마의태자 또한 절을 세워 기도를 했다고 전해옵니다.
그가 기도를 했음직한 자리에 커다란 돌부처와 비석없는 거북상만이 남아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미륵리사지라고 부릅니다. 

 이 두 유적이 세간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마의태자가 조성했다는 돌부처가 1㎞ 정도 떨어진 그의 여동생 덕주공주의 자화상으로 전해오는 마애불이 위치한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돌부처가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국내에서는 유일하죠.

 두 유적 모두 최근 고려의 것으로 밝혀졌지만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의 애틋한 사연을 내세에서도 이어주려는 후세인들의 노력으로 봐야 할 듯합니다.

'이쯤 흔들려 줘야 흔들바위 축에 끼지'
 전국의 숨은 흔들바위를 찾아서

 최근 연합뉴스에서 부산서 가까운 김해 무척산에서 다이아몬드 모양을 한 흔들바위(아래 사진)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대부분의 언론들도 이 기사를 인용, 보도했다.

 잠시 요약하면 이렇다. 김해 생림면사무소에 따르면 무척산 대형 주차장에서 석굴암 방향으로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이 흔들바위는 높이 3.4m, 둘레 9.2m, 바위를 지탱하는 밑둘레 2.4m 크기로 멀리서 보면 작은 다이아몬드가 산에 박혀 있는 형상을 띠고 있다. 이 바위는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도 1~2㎝ 정도의 진폭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이 바위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앞면과 달리 뒷면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조각한 것처럼 보여 주민들이 신기해하고 있다.


 이 흔들바위는 전국에서 설악산과 안성시 팔봉산 흔들바위에 이어 세 번째로 발견됐고 남부지방에서는 첫 흔들바위로 추정된다고 적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국제신문 주말레저팀이 오랜 기간 발품을 팔면서 발견한 전국에 산재하는 흔들바위를 소개한다.    


 ①양산쪽 금정산 흔들바위- 산행팀이 발견…양산 가산리 중리마을 8부 능선

흔히 부산의 진산으로 불리는 금정산(801m)에도 흔들바위가 있다. 하지만 금정산 흔들바위는 부산 쪽에서 오르면 찾을 수 없고 부산과 인접한 양산시 동면 가산리 중리마을에서 출발할 경우 대략 8부 능선쯤에 만날 수 있다. 이 코스는 주말이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등산로에서 어깨가 부딪힐 만큼 북적대는 부산 쪽과 달리 한적하면서도 여유롭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

혹자들은 경남도 유형문화재인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이 위치한 그 능선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지만 바로 이웃한 능선이라 산행 중 마애여래입상이 새겨진 바위를 확인할 수 있다. 등산로 우측 바위 끄트머리에 있어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으며 높이는 어른 키보다 약간 작다. 과연 흔들릴까. 혼신의 힘을 다해 밀면 약간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근교산&그너머 582회에 소개됐다. 이 코스는 유명세는 타고 있지만 산꾼들이 잘 가지 않는 금샘 원효암 의상대까지 훑고 있어 한번 가볼 만하다.


②경북 의성 금성산 건들바위- 어른키 두 배…오랜 풍상 견딘 금성산 지킴이


 마늘로 유명한 경북 의성 너른 벌판 위에 비봉산과 마주보고 서 있는 금성산(530m)에도 흔들바위가 있다. 이 바위의 정식 이름은 건들바위이다. 금성산은 이웃한 비봉산과 묶어 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성산으로 혹은 비봉산으로 오르든 100% 원점회귀 가능하다. 정확한 위치는 금성산 정상을 지나 비봉산으로 가는 길에 있다. 송림길을 따라 솔향기에 취해 걷다 보면 메인 산길에서 90m쯤 비탈길로 내려가면 만난다. 입구에 '건들바위'라고 적힌 안내판이 서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다. 높이는 어른 키의 두 배쯤 된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흔들바위로도 불린다. 원래 하나의 바위가 세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만들어진 자연석으로 흔들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하면서도 오랜 풍상을 다 겪으며 금성산의 지킴이 노릇을 하고 있다.' 실제 밀어보면 약간 흔들리는 기분이 든다. 건들바위 너머로 펼쳐지는 배나무골을 포함한 금성면 일대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③여수 봉황~금오산 흔들바위- 봉황산 자락에 위치…있는 힘껏 밀어야 흔들

'해를 향한 암자'라 불리는 여수 향일암에서 남해바다 쪽을 내려다보면 금거북이 바다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향일암은 바다 건너에 위치한 남해 금산 보리암,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 낙가산 보문사와 함께 기도 효험이 빼어난 국내 4대 관음기도도량. 이 향일암을 품은 산이 금오산(360m)이다.

흔들바위는 금오산과 능선으로 이어지는 봉황산(461m) 자락에 있다. 금오산과 봉황산 사이에는 고갯마루이자 중간기착지인 율림치가 있다. 흔들바위는 봉황산을 지나 율림치 직전의 능선 상에 남해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발아래 대율마을에서 세운 '흔들바위'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다. 바위 둘을 포갠 듯한 이 흔들바위는 아주 세게 밀 경우 미세하게 움직일 뿐 웬만해선 꼼짝을 하지 않는다.    
   
④고성 구절산 흔들바위- 인부 20명 붙어도 꿈쩍 않던 게 한사람 힘으론 흔들

 공룡나라' 고성군의 동쪽 끝단에 위치,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바다인 동해면의 한가운데 위치한 구절산(559m)에도 흔들바위가 숨어 있다. 구절산은 아주 조망이 빼어나다. 북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닭의 목처럼 길고 좁은 당항만의 지형을 이용해 왜선 26척을 격침한 당항포 앞바다와 마산 진동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남으론 거제도와 통영 및 그에 딸린 올망졸망한 부속섬들이 품에 안긴다. 흔들바위는 들머리 외곡리 폭포암 천불전 뒤편 등산로 입구에 있다. 어른 키의 1.5배 정도로 그리 크지 않은 둥근 모양의 바위지만 한 사람이 밀어도 흔들, 다섯 사람이 밀어도 흔들린다. 주지 스님은 "절벽 끄트머리에 위치해 몇 해전 인부 20명이 지렛대를 이용해 제거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며 "그때 이후론 구절산 폭포암의 명물로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⑤영동 천태산 고래바위- 삼층석탑 바로 옆에 위치…고래·물개 형상


아름다운 사찰 영국사와 1300년 된 은행나무 그리고 산꾼들에겐 75m쯤 되는 암벽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는 '충북의 설악' 천태산에도 독특한 형상의 흔들바위가 있다. 영국사에서 은행나무를 지나 나무로 만든 구름다리를 지나면 망탑봉. 그 옆에는 보물 제535호인 삼층석탑이 바위 위에 절묘하게 얹혀 있다. 흔들바위는 바로 옆에 있다. 이 바위는 기존의 흔들바위 모양과 달리 고래 형상을 하고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물개를 닮았다고도 한다. 이 흔들바위도 힘껏 밀면 약간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⑥강진 주작산 흔들바위- 절벽 끝에서 위태위태…장정 여럿 붙어야 미동

휴양림이 있는 강진 주작산(428m) 중턱에도 흔들바위가 있다. 지름이 4m는 족히 될 듯한 아주 동그란 원형바위로,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 있다. 생긴 모양이 둥글둥글해 산 아래 주민들 사이에선 '동구리바위'로 불리는 이 바위는 한가운데 부분이 칼로 잘라 놓은 듯 금이 가 있다. 바위가 세워져 있는 바닥에 약간 경사는 졌는데 구르지 않도록 70~80㎝ 크기의 조그만 바위가 떡 받치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 힘센 장정들이 바위를 흔들면 조금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한 사람이 밀면 거의 꼼짝도 하지 않는다.

⑦속초 설악산 흔들바위- 흔들바위의 지존…설악산 팔기 가운데 하나


설악산 울산바위 아래 신흥사 산내 암자인 계조암 경내에 위치한 흔들바위는 지명도로 봐선 단연 전국 최고. 일명 쇠뿔바위(또는 우각암)라고 한다. 한 사람이 흔드나 여러 사람이 흔드나 똑같이 흔들리기 때문에 설악산 팔기(八奇)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크기는 어른 키보다 조금 더 크고 네댓 사람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다.

⑧안성 팔봉산 흔들바위-엄지손가락으로도 흔들…둘레 10m 넘어


경기도 안성시 죽산성지 뒷산인 팔봉산에도 엄지손가락으로 움직일 수 있는 흔들바위가 있다. 높이 2.1m, 둘레 10.4m나 되는 거대한 이 바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이 바위를 떼어 내려고 절반 정도 뒤집었으나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팀스피리트 훈련 때 미군 9명이 역시 이 바위를 넘기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전해온다.

⑨고흥 팔영산 흔들바위-아무리 밀어도 꿈쩍 않는 마당바위

도립공원인 팔영산(609m)에도 있다. 고흥반도 최고봉인 팔영산은 이름에서 짐작이 가듯 여덟 개의 암봉과 주봉인 깃대봉이 작은 병풍처럼 나란히 이어져 있는 봉우리. 암릉 종주산행의 고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팔영산에도 흔들바위가 있다. 본격 암봉으로 진입하기 직전 '흔들바위'라고 적힌 팻말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봐도 움직이지 않는다. 해서, 사람들은 마당바위로 부른다.

⑩김해 용지봉 용바위 - 첫 인상은 고릴라 얼굴 빼닮아…미동도 있어


김해와 창원의 경계에 위치한 낙남정맥 상의 한 봉우리인 용지봉은 부산서 아주 가까워 부산 산꾼들도 부담없이 즐겨찾는 봉우리이다.
 장유폭포가 있어 한여름 계곡산행지로도 있기 있는 용지봉은 가야 문화와 남방불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놓쳐선 안 될 필수 코스이다. 말발굽 모양의 용지봉 한쪽 기슭에 둥지를 튼 장유사가 가락국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의 전설이 베어 있기 때문이다. 장유사는 천태산의 부원암, 무척산의 모원암, 지리산의 칠불사와 함께 가락국의 전설이 서려 있는 암자.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의 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이 용지봉에도 흔들바위가 있다. 하지만 이름은 용바위. 등산로 상에 안내판이 있어 놓치진 않는다. 첫 인상은 고릴라. 왜 용바위인지 자뭇 궁금하다. 세게 밀어보니 약간의 미동이 있다. 차라리 흔들바위라고 명명했으면 그 명성이 오래 그리고 널리 퍼졌을텐데. 아쉽다.




 앉은 터가 봉황의 머리라고 알려진 곡성 봉두산 기슭에 자리한 천년 고찰 태안사는 절집의 아름다움에 비해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다. 산사로 들어가는 약 1.5㎞의 진입로는 아직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옛길이다.

 지그재그형의 옛길은 내로라 국내 여느 사찰의 진입로와 견주어도 전혀 뒤질게 없어 산책코스로 그저 그만이다.
태안사 진입로.

 
 옛길이 끝날 즈음 일순간 자연석으로 석축을 쌓고 지붕을 얹은 다리 모양의 누각을 만난다. 능파각(凌坡閣)이다.

 능파각은 속세를 벗어나 도량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능파란 계곡과 물굽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는 의미이다.
 이 능파각을 지나면 아름드리 거목들이 들어서 있고,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일주문을 만난다.
 
     능파각. 태안사에서 주변 풍광이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능파각을 지나지 않고 바로 직진해서 올라가면 뜻밖에도 국립묘지나 UN묘지와 같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커다란 탑을 볼 수 있다. 알고 보니 경찰충혼탑이었다.

 신성한 천년 고찰 내에 경찰충혼탑이라니. 알고 보니 사연은 이랬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의 남침으로 1개월만에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남한의 전지역이 북한군에 점령되자 곡성경찰은 이 지역을 지키겠다는 일념하에 당시 한정일 경찰서장을 비롯한 전 직원이 굳게 결의하고 이곳 태안사 보제루에 경찰 작전지휘소를 설치했다.

 곡성경찰은 같은해 7월 29일 북한군 603기갑연대가 경남 하동에서 전북 남원으로 이동하기 위해 곡성군 죽곡면 압록교를 지난다는 첩보를 입수한 후 압록교 주변에서 매복 공격하여 4시간만에 북한군 55명을 생포, 사살하고 트럭  싸이카 및 총 70여점 등을 획득했다.

 북한군은 이후 가만히 물러서지 않았다. 북한군은 8월 6일 새벽 이곳 태안사 경찰작전지휘소를 기습 공격해, 치열한 전투끝에 곡성 경찰관 48명을 사살했다.
 이후 장열하게 전사한 곡성 경찰관을 위해 참전동지들이 성금을 모아 충혼탑을 세우고, 매년 8월 6일 제사를 지내오다 지난 1985년 국가 차원에서 지금의 충혼탑과 호국관을 건립해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