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배나무가 많아 배내골이라 명명됐다는 설이 나올 정도로 배내골에는 돌배나무가 많았지만 지금은
       마을길을 넓히기 위해 수변의 돌배나무가 대부분 사라져 산기슭에만 일부 남아 있다. 하얀꽃이 돌배
       나무, 분홍빛은 산벚나무.
      배내산장 김성달 산장지기. 뒤로 보이는 느티나무가 바로 김 씨가 21년 전에 심은 것이다.
    벚꽃이 계곡 주변에 만개한 가운데 원동면 장선리의 송림이 한 폭의 한국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배내골은 어떤 곳

배내골은 울산시 울주군에서 발원, 양산 원동면을 거쳐 밀양호(댐)로 흘러들어가는 계곡을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수려한 경관 덕분에 울산 밀양 양산에선 각각 울산 배내골, 밀양 배내골, 양산 배내골로 부르지만, 흔히 말하는 배내골은 양산지역에 가장 많이 걸쳐 있어 대체로 양산 배내골로 보면 된다. 실제로 배내골은 '양산 8경'에만 포함돼 있을 뿐 '울산 12경'이나 밀양의 주요 관광지에는 언급조차 없다.

 산꾼들의 관점에서 보면 배내골은 천황 재약산으로 대표되는 영남알프스 남서부 능선과 간월 신불 영축산 등 영남알프스 남동부 능선을 잇는 고갯마루인 배내고개에서 밀양 금오산과 양산 안전 축천산을 잇는 배태고개까지의 70리(약 28㎞) 계곡을 의미한다. 

 
 좀 더 피부에 와닿게 설명하면 언양에서 석남사를 거쳐 밀양으로 넘어가는 옛 24번 국도를 타고 오다 만나는 갈림길에서 69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배내고개를 넘어도 되고, 원동역에서 원동휴양림과 신흥사를 잇따라 지나 상수도 보호구역임을 알리는 대형 이정석이 서 있는 배태고개를 지나면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경부고속도로 양산IC로 나와 어곡터널과 신불산 공원묘지나 에덴밸리스키장을 지나면 손쉽게 접근이 가능해 부산 쪽에선 대부분 이 길을 이용한다.

배태고개.

배내고개. 보이는 산은 능동산.



■배내골이라는 이름의 기원
배내산장지기 김성달 씨는 배내골이라는 이름의 기원을 여러 방면으로 나름대로 분석했다.
우선 땅의 생김새로 본 측면.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배내골은 배가 바다에 떠 있는 형상인, 전형적인 행주형(行舟形)의 지세다.

김 씨는 이를 주변 지세를 근거로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배내골을 하나의 배로 가정할 때 골짝의 두 진입로 중 해발고도가 낮은 배태고개를 뱃머리로, 약간 더 높은 배내고개를 배의 뒷부분인 선미로 분석했다. 또 배내골을 감싸고 있는 영남알프스 남서부, 남동부 능선은 각각 밀양 얼음골이나 양산 통도사에서 보면 거의 직벽이라 양쪽 산줄기를 배의 측면으로 간주했다. 덧붙이자면 예부터 행주형 지세에서 배가 떠나면 흉하다 하여 비보(裨補) 차원에서 인근에 지명으로나마 포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배태고개 아래의 원동면 영포리 내포리 등이 그 예에 해당된다고 한다.

배내골의 배내는 또 갓난아이의 저고리인 배냇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산으로 옴폭 둘러싸인 배내골이 어머니의 자궁(뱃속)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땅으로 풀이된다는 것. 배내산장이 위치한 양산 원동면 선리의 태봉(胎峰)이라는 마을 이름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또 하나는 예부터 냇가에 돌배나무가 즐비하다 하여 '배 리(梨)' 자와 '내 천(川)' 자의 뜻만 차용해 배내골로 불리게 됐다는 설이다.  가장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설이다. 이천리(梨川里)라는 지명 또한 실제로 울산 쪽 배내골의 명소인 철구소 인근에 존재한다. 아쉽게도 지금의 배내골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도로를 넓히고 펜션을 지으면서 냇가의 돌배나무는 거의 잘려나가 일부 산기슭에 명맥만 유지돼 매년 5월이면 겨우 하얀 배꽃을 볼 수 있을 정도다. 해서, 그 흔하디 흔한 돌배주 맛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게 됐다.

지워지지 않는 질곡의 삶 터전, 배내골
세상의 모든 만물이 음양의 조화에서 벗어날 수 없듯 사람 사는 땅도 예외가 아니다. 배내골은 수려한 산세와 빼어난 계곡미가 아름다워 천혜의 자연경관이라고는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거칠고 척박한 오지 중 오지였다는 것이 김성달 씨의 설명이다. 험준한 산줄기로 둘러싸여 외부와 단절돼 있고 사람의 왕래 또한 드문, 풍수적으로 음양의 균형이 깨진 전형적인 음(陰)의 땅이라는 것.

나그네에겐 눈앞의 풍광이 전부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거친 땅에서 억센 삶을 살다 간 민초들의 이야기가 계류에 실려 끊임없이 흘러내린 곳이다.

21년간 배내골을 지킨 김 씨는 "배내골 사람들은 도회지의 많은 무리 속에서 부대끼며 살기에 어딘가 모가 난, 속된 말로 '내 팔 내가 흔들며 자유분방하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크게 보면 그런 부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종가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땀의 대가로 사는 것을 천직으로 여겼다. 하지만 매터도가 판치는 세상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내골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선택의 폭이 적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배내골행을 과감하게 실행한 것이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결정에 말없이 따라준 사랑하는 부인과 두 아들이 없었다면 힘들었겠지만."

배내골에는 비단 김 씨뿐 아니라 가슴 아픈 사연의 민초들이 살다간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우선 떠오르는 분이 인근 죽전마을 당상나무집 욕쟁이 할매란다. 서른도 안 돼 청상과부로 배내골에 들어와 한 많은 삶을 살면서 북받쳐 오르는 한을 속으로 삭이다 못해 뱉어 놓은 것이 욕이었다. 산판일을 하는 일꾼들을 대상으로 주막을 했는데 그래도 오며가며 정 준 사람이 있어 성이 다른 딸을 셋 둔 욕쟁이 할매는 장대비 쏟아지는 7년 전 어느날 이승의 질긴 끈을 싹둑 자르고 팔순의 노구를 배내골에 묻었다.
 백련마을 어귀 최 보살과 마을에 버스가 들어와 잔치를 할 당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던 임 노인도 파란만장한 삶을 끝내고 이제 하늘나라로 되돌아갔다.

시간을 더 거슬러 조선시대에는 사림의 거봉 점필재 김종직을 비롯해 많은 유생들이 세상을 등지고 산수를 벗하며 세월을 보냈고, 조선 후기 천주교 탄압 땐 많은 신도들이 배내골로 들어와 질그릇을 구워 한피기고개를 넘어 통도사 인근 언양 신평장이나 표충사 인근 밀양 단장장에 내다팔아 의식주를 해결했다. 실제로 상북면 이천리 간월재 가는 도중 만나는 죽림굴은 기해박해 당시 잔혹했던 관아의 손길을 피해 모였던 피난처로 여기서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 입구는 좁지만 안쪽이 넓어 150명까지 지낼 수 있는 천연석굴 죽림굴은 현재 천주교 성지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일 줄 모른다.

죽림굴. 입구는 작지만 내부가 넓어 150명도 수용 가능하다.

죽림굴 올라가는 계단길.


죽림굴 안내판.

죽림굴 안내석.


아직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봉마을 산자락 옹기골에도 적지 않은 질그릇 파편과 함께 대작 가마까지 출토돼 이 또한 천주교인들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김 씨는 설명했다.

한국전쟁 땐 빨치산들이 덕유 지리를 거쳐 이곳 배내골로 내려와 지금의 원동면 장선리에 교육도당을 설치, 골육상잔의 비극의 현장으로 변했다. 이와 관련, 신불산 서릉의 955봉에는 '공비지휘소가 있던 곳'이라 적힌 비석이 서 있다. 비석 뒷면에는 한국전쟁 중 남부군 제5지대장이 이곳에 머물면서 신불산 일대의 부하들을 총지휘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실제로 이곳에 서면 비석 내용 그대로 주변 능선 계곡의 지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김 씨는 "밤엔 인민군이, 낮엔 우리나라 50사단 병력이 점령하는 등 당시 밤낮으로 배내골의 주인이 바뀌면서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며 "이후 다시 돌아온 원주민이나 앞서 언급한 세상을 등진 사람들 그리고 최근 펜션 등 민박이나 식당을 운영하기 위해 이방인이 하나 둘 찾아들면서 지금의 배내골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여전히 몸살 앓는 배내골
1990년대 후반부터 배내골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중장비의 굉음소리와 레미콘차가 쉴새없이 넘나들며 망나니 칼춤 추듯 지축을 흔들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 노래 가사처럼 수변의 돌배나무를 벤 후 마을길도 넓히고 산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휘황찬란한 펜션과 식당 전원주택 연수원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간의 더러운 손길이 미치자 배내골은 서서히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배내산장 식당건물 한 쪽 벽에는 눈길 끄는 글이 하나 붙어 있다. 올해 서울의 일류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산장지기 김 씨의 둘째 아들 종현이가 초등학교 때 쓴 '배내골'이란 생활문이다. 종현이는 5살 때 배내골로 들어왔다. '버스를 탔는데 아저씨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지금이야 깨끗하지. 한 10년 뒤엔 아주 더러워져 '배내똥'이라 불릴걸.(중략) 여름엔 피서객들이 음식을 다 먹지도 않고 반은 버리고 간다. 그것이 비가 오면 강에 흘러들어 오염이 되는 것이다. (중략) 음식물을 되가져 가는 것이 환경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생의 눈에 이렇게 보였으면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김 씨도 이렇게 회상했다. "식수로 길러 먹던 계곡물이 하도 맑아 하늘이 통째로 담긴 모습에 넋을 놓고 온종일 보내기도 했고, 매미 여치는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줬고, 두견새는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창가를 떠나지 않았어요. 어느날 아침 문득 잠에서 깨어나 들꽃 위에 실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이처럼 원시에 가까운 풍요로움이 가득한 배내골은 사바세계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온 한 맺힌 이방인들을 포근히 감싸 안아 주었다. 김 씨는 이를 배내골의 묘한 마력이라고 표현했다. 거친 삶을 살아온 필부들도 이 배내골에 들어오면 아픔조차도 충분히 삭여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보도록 도와주는 그 힘 말이다.

김 씨는 이런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원시에 가까운 풍요로움은 비록 사라진 돌배꽃 전설처럼 서서히 묻혀버리고 있지만 그래도 배내골은 여전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하지만 이 아름다움의 이면에 묻혀 있는 배내골의 정서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진정 바위 틈에 핀 들풀 한 포기도 소중히 다가올 것이라고.

<떠나기 전에>-죽림굴 파래소폭포 철구소 등 볼거리 및 먹을거리 무궁무진

         
배내골 전경.

도심에선 이미 벚꽃이 난분분 꽃비를 뿌린 후 아기 손톱 크기의 새순이 돋고 있지만 산골마을이라 봄이 늦게 찾아오는 배내골은 이제서야 산벚꽃과 몇 안 되는 하얀 돌배꽃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하지만 지금 배내골은 의외로 한산하다. 벚꽃이 한창일 때 사람들은 벚꽃이 유명한 쌍계사나 경주 등지로 떠나 찾는 이가 거의 없다가 벚꽃놀이철이 끝나야 사람들이 찾는단다. 가을에도 마찬가지다. 각 지자체의 축제가 몰린 9월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역시 일순간 발길이 끊긴 후 억새나 단풍이 모습이 보이면 또 다시 몰린다고 한다.

사전 정보없이 배내골을 찾으면 밋밋하고 심심하다. 그래도 볼거리는 꽤 있다. 천주교 성지인 죽림굴은 간월재 아래 위치해 있고, 배내산장 맞은편 신불산폭포 자연휴양림에는 파래소폭포가 유명하다. 만추 단풍이 황홀한 주암계곡에는 여름철 최고의 명소 철구소가 있다. 시퍼런 물이 한눈에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어 밀양 호박소, 신불산 파래소폭포와 함께 영남알프스 3대 소(沼)로 손꼽힌다. 또 통도골에는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조폭들이 물속에서 누가 오래 있나 내기를 했던 곳으로 유명한 선녀탕이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5분에서 많게는 30분 정도의 발품을 팔아야 한다.

밀양호(댐)로 가는 멋진 드라이브길도 달려보자. 도중 휴게소에서 바라본 밀양호의 풍광은 일품이다. 정자 앞에는 망향비가 서 있다. 1990년 밀양댐이 조성되면서 수몰된 단장면 고점리의 덕달 사희동 죽촌 고점 등 4개 마을의 안타까운 사연이 적혀 있다. 배내골 하류에 해당되는 이곳에는 농짝같은 암장이 치솟아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농암대다. 사림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이 말년에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밀양호 휴게소. 망향비와 농암정이 보인다.

점필재 김종식이 말년이 머물렀던 농암대. 농암정 정자 안에 사진이 걸려 있다.


배내산장의 특미 '흑염소 숯불구이'.

'흑염소 숯불구이' 상차림.


배내골 맛집을 소개한다. 음식보다 배내골의 정서와 문화를 팔고 싶다는 김성달 씨가 운영하는 배내산장(055-387-3292)은 흑염소 숯불구이와 버섯전골이 유명하다. 영축산 산행의 들머리인 청수골산장(052-254-0875)은 흑돼지구이를 잘 하고, 수림가든(055-387-1016)은 꿩탕과 순두부, 대추나무집(055-387-5312)은 오리불고기와 메기매운탕 전문이다. 경부고속도로 양산IC로 나와 에덴밸리 쪽으로 올 경우 만나는 세검정(055-388-5757)은 생갈비와 돼지갈비로 유명하다. 원동면 장선리에는 50년 전통의 선리양조장(055-363-8933)이 있다. 

(1)편은 여기 클릭해 주세요.
'굴러온 돌' 21년 산장지기에게 듣는 배내골 이야기 http://hung.kookje.co.kr/392

하늘로 간 영혼들과 상처받은 생존자들의 아픔을 아는지 지난 14일 활짝 핀 진달래는 유난히 곱고 빛이 선명합니다. 창녕군청 제공.

지난 2월 9일 정월대보름을 맞아 억새태우기 행사를 하다 7명이 숨지고 81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형 참사가 빚어졌던 경남 창녕군 화왕산(해발 757m) 정상부에 지금 연분홍 진달래가 온 산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창녕은 예부터 낙동강과 우포늪의 범람으로 홍수가 잦아 주민들이 물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창녕의 진산 이름을 '불기운이 왕성하다'는 의미의 화왕산(火旺山)으로 명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난히 산불이 많이 발생해 키 큰 나무들은 오간데 없어 산 '가을의 전령' 억새와 연분홍 진달래가 고 산 정상부를 뒤덮고 있습니다.

무심한 산도 아직 2개월전의 대참사를 기억하고 있는지 올해 진달래의 연분홍빛이 유난히 선명합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대자연은 위대한가 봅니다.

시간이 나면 화왕산에 올라봅시다.
창양읍내 화왕산 군립공원 자하곡 주차장에서 출발하면 깔딱고개를 넘어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화왕산은 산 정상부에 화왕산성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큰 공을 세운 곳입니다. 남동쪽의 경우 돌로 성을 쌓았지만 서북쪽은 절벽능선이라 자연성벽입니다. 그 가운데가 십리억새밭으로 그 면적은 18만4800㎢(5만6000평)에 달합니다. 가을엔 광활한 억새밭으로, 이 봄엔 진달래 군무로 아주 유명하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곽일주를 합니다. 통상 난전이 펼쳐진 서문에서 정상으로 올라 시계방향으로 돕니다. 반대편으로 돌아도 상관없습니다. 지난번 참사의 현장이었던 배바위 방향으로 말입니다. 화왕산 정상과 배바위는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한 바퀴 돌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립니다.

잊지 말아야 하겠죠. 진달래 한 송이 한 송이를 어루만지며 당시 숨진 영혼들의 아픔을 달래며 명복을 빌어 줍시다.

아래 사진은 2006년 봄 진달래 사진입니다.


지난 2월 참사 때의 사진입니다.

 꽃샘추위가 이제 아련한 옛 추억이 돼 버린 완연한 봄. 봄의 전령으로 자처하던 매화와 산수유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대로 이번엔 벚꽃이 예의 화려함을 뽐내기 위해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화려한 벚꽃길을 가진 전국의 각 지자체는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야단 법석이고, 올해야말로 벚꽃 구경을 꼭 하려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어디를 택해야할 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벚꽃만 보고 오면 사실 너무 섭섭하다. 조금만 더 발품을 팔고, 조금만 더 핸들을 잡으면 주변 관광지와 유명 맛집도 한번에 경험할 수 있다. 대개 벚꽃의 절정 시점에 맞춰 각 지자체는 벚꽃축제를 열지만 꼭 그렇치만은 않다. 매년 반복되는 대자연의 섭리, 올해는 또 어떤 모습으로 뭇 객을 맞을지, 어서 떠나보자

#백리벚꽃길 합천호 드라이브
처음엔 잘못 봤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벚꽃길 앞에 붙는 수식어가 '십리(4㎞)'가 아닌 '백리(40㎞)'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가보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합천호로 가기 전 통과 의례로 들러는 곳이 하나 있다. 악견산 자락의 황강가 도로변 3만 평 부지에 자리잡고 있는 합천영상테마파크다. 수 년 전 국내 최고의 흥행신화를 이룩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평양시가지 전투장면을 촬영하면서 외부에 알려지지 시작해 이후 드라마 '서울 1945' '영웅시대' '에덴의 동쪽'도 찍었다.

 영상테마파크를 나와 합천호와 나란히 이어지는 호반도로를 달려보자. 합천이 자랑하는 백리벚꽃길이다. 드라이브 코스로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여기에 팝콘처럼 피어난 벚꽃이 바람에 휘날리며 꽃비를 내릴 땐 마치 꿈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이름 그대로 가도가도 끝이 없는 그림같은 벚꽃길이요 장관이다. 호수 주변 산비탈을 따라 만든 계단식 논 또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호수변 송씨고가와 바로 옆 사의정이라는 객사는 벚꽃과 더불어 고풍스런 자태가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사의정 뒤 자리한 '고가식당'에선 7대째 내려오는 고가송주와 제포두부 메밀묵채 등을 맛볼 수 있다.

 합천호 주변에 황매산 모산재 기슭에 위치한 영암사지와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황강변의 유서깊은 누각 함벽루도 있다. 벚꽃과 어우러진 풍광이 무척 아름답다.

#화개장터 벚꽃축제

        섬진강과 나란히 내달리는 19번 국도 벚꽃길.
벚꽃과 어우러진 녹차밭.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가는 십리벚꽃길.

 남해고속도로 하동IC로 19번 국도를 따라 하동읍 방향으로 내달리면 만나는 화개장터 일원에서 4월 3~5일 '화개장터 벚꽃축제'가 열린다. 전라도 구례와 경상도 하동의 접경지역이자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배경인 화개장터는 조영남의 노랫말처럼 '있어야 할건 다 있는' 우리네 정이 가득 넘치는 전형적인 시골장터다.

 지리산에서 직접 따온 향긋한 야생 봄나물을 구입한 후 섬진강에서 자란 은어회와 참게탕 그리고 재첩국으로 허기를 달랜다.

 벚꽃길의 압권은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초입에 이르는 소위 십리벚꽃길. 가지를 활짝 펴고 서 있는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만든 벚꽃터널은 숫제 하늘을 가릴 정도로 아름답와 황홀경에 빠질 정도. 특히 이 길은 예부터 서로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고 하여 일명 '혼례길'로 불린다.

 난분분 떨어찌는 꽃비를 맞으며 벚꽃 터널을 걷노라면 없던 사랑도 생겨날 정도라고 하동사람들은 말한다.

 이 길은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차가 재배되기 시작한 차 시배지. 신라 김대렴이 당에서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이곳은 심은 것이 국내 차 역사의 효시가 됐다고 한다. 실제로 쌍계사 아래 장죽전(長竹田)에 차 시배지가 있으며 인근에는 수령 천 년이 넘는 야생 차나무도 있으니 놓치지 마시길.

 시간이 허락된다면 화개장터에서 구례까지 이어지는 섬진강 드라이브도 즐겨보자. 이 길 또한 꽤 유명해 섬진강 백리 벚꽃길이라 불린다. 섬진강과 함께 내달려 되레 운치있고 사람이 덜 붐빈다. 도중 만나는 연곡사 화엄사 천은사도 한번쯤 들러보길 권한다.

#구중심처 보성 대원사 벚꽃길


대원사는 서기 503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백제 천년 고찰이지만 아직도 부산경남권에서 낯선 절집이다. 차밭으로 유명한 전남 보성의 북단 천봉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사실 벚꽃 보다는 8년 전 문을 연 '티벳박물관'이 문을 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절 입구에 위치한 박물관에는 주지인 현장 스님이 15년간 모은 1000여 점의 티베트 예술품이 전시돼 있다. 달라이 라마도 박물관이 설립된 그 해 이곳을 방문, 티베트 불상을 선물했다. 박물관 앞에는 15m 높이의 티베트식 불탑인 수미광명탑이 보이고, 불경이 적힌 오색찬란한 깃발인 룽다가 펄럭이고 있어 마치 티베트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대원사 벚꽃길은 진입로인 6㎞ 구간.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터널을 이룬다. 절에서는 절 진입로인 벚꽃길을 풍수지리학적으로 탯줄, 절터가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해서, 대원사는 낙태나 유산으로 죽은 아기의 영혼이 태아령을 위한 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극락전 우측에는 태아를 안고 있는 태안지장보살상이 있고, 경내 곳곳에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낙태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빨간 모자를 쓴 동장승이 많이 보인다.

 대원사 경내에는 특히 볼거리가 많다.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인 구품연지 아래에는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사철나무가 두 손을 맞잡고 있으며, 극락전 뒤 맑은 계류가 흐르는 전망좋은 곳에는 수관정이라는 조그만 정각에 텅 빈 관이 하나 있다. 일종의 저승체험실이다.

 대원사에는 여름철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7개의 연못에 백련 홍련 등 연꽃과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108종의 수련 및 50여 종의 수생식물이 극락의 향기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청풍호반 벚꽃축제


 바람 맑고 달 밝은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시는 10~12일 청풍호 주변에서 벚꽃축제를 연다. 지난 1985년 건설된 충주호는 댐이 충주에 위치해 공식명칭은 '충주호'이지만 제천사람들만 '충주호' 대신 '청풍호'라 부른다. 만일 제천땅에서 충주호라고 호칭하면 싫어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대꾸도 하지 않으니 반드시 유의하길.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청풍호 주변에는 합천호와 마찬가지로 벚꽃길이 조성돼 있다. 합천호 주변이 자연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면 청풍호 주변에는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유람선과 주변에 펼쳐진 구담봉과 옥순봉 그리고 호수 건너편에는 다양한 레저시설인 청풍랜드가 조성돼 있다. 유람선을 타고 바라보는 벚꽃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청풍랜드에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62m 번지점프와 사람을 시계추처럼 매달아서 흔드는 빅스윙, 역시 사람을 쇠의자에 묶어 의자째 대포알처럼 날려보내는 이젝션시크는 상상할 초월할 정도의 짜릿함을 선사한다.

 청풍호반에서 차로 40분이면 월악산. 벚꽃길을 따라 내달리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의 애틋한 사연이 담긴 덕주사 마애불과 미륵리사지를 볼 수 있다.

#마이산 벚꽃축제


청풍호반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늦게 벚꽃이 만개하는 마이산 벚꽃은 오는 4월 10일 전후로 만개한다. 축제는 4월 12일 열린다. 주차장에서 탑사에 이르는 십리 벚꽃터널은 장관을 이룬다. 특히 탑사로 향하는 도중 만나는 작은 호수인 탑영제에 비친 벚꽃행렬과 대여섯 척의 오리배가 떠다니는 풍경은 평온하며 여유롭다.

 뾰족한 암봉인 숫마이봉과 상대적으로 둥그스름해 산행길이 열려 있는 암마이봉으로 이뤄진 마이산에는 무엇보다 볼거리가 풍부하다.

 두 암봉 사이에 위치한 탑사는 크고 작은 돌탑 80여 기가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룬다. 이들 돌탑들은 세찬 바람에도 약간 흔들릴 뿐 무너지지 않으며, 한겨울 탑 아래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면 사발에서 고드름이 자라나는 경이로움을 간직해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밀양 삼랑진 양수발전소 벚꽃길


삼랑진 양수발전소는 지난 1986년 청평에 이어 국내에선 두 번째로 건설된 양수식 발전소. 상하부댐을 만들어 전력수요가 많은 주간에 낙차를 이용,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삼랑진의 경우 상부댐이 천태호, 하부댐이 안태호다.

지금 발전소 입구인 홍보관에서 천태호에 이르는 5㎞의 벚꽃길은 터널을 이뤄 장관이다. 아름답지만 상대적으로 인파가 덜 몰리는 이곳은 드라이브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삼랑진은 우리나라 딸기 시배지이기도 하다.
 
#진해 군항제

로망스다리로 더 유명한 진해의 여좌천 다리.

 전국 최대 규모의 벚꽃축제인 마흔 일곱번째 진해군항제는 지난 26일 개막, 4월 5일까지 열린다.

 군항제 행사기간 시내 벚꽃길 중에는 드라마 '로망스' 촬영지였던 여좌천 주변과 제황산 공원, 안민고개, 장복산공원, 해군작전사령부 영내 등을 찾으면 후회없이 벚꽃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진해의 입구인 파크랜드에서 진해여고까지 여좌천을 따라 약 1.5Km의 벚꽃터널이 펼쳐져 있어 마치 설원 속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볼 수 있다.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제황산공원에는 일명 일년 계단이라 불리우는 365계단 옆으로 지난 26일부터 운행을 시작한 모노레일카를 타고 시가지의 화려한 벚꽃과 푸른 바다를 한눈에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군항제 기간에만 특별히 개방되는 해군사관학교와 해군기지사령부에는 평소 보기 힘든 수령이 50~60년된 웅장한 벚꽃들이 가득해 군항제 최대의 명소로 꼽힌다.

 부대 인근 여좌동 남부내수면연구소 환경생태공원 내에는 벚나무를 포함한 수만그루의 나무가 자연 그대로의 숲을 이뤄 벚꽃이 낙화하는 풍경은 일품이며 열찻길을 따라 벚꽃이 손이 잡힐 듯한 경화역에도 빠트릴 수 없는 사진촬영 장소다.

 올해 군항제 기간 최고의 볼거리는 역시 내달 3일부터 5일까지 열리는 '2009 진해 세계군악의장페스티벌'.

 우리나라 육.해.공군본부 및 해병대사령부 군악대와 의장대를 비롯해 미8군 군악대와 중국,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스코틀랜드 등 6개국, 13개팀이 참가해 거리퍼레이드와 콘서트.프린지공연 등 절도있고 흥겨운 군악.의장대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경포대 벚꽃축제


경포대를 중심으로 경포호수를 둘러싼 4.3km  호수의 아름다움을 이어가는 봄꽃 축제가 운치가 있다. 벚꽃이 만발하면 경포대 입구에서부터 벚꽃터널이 형성되고, 벚꽃 사이로 바라다보이는 쪽빛 호수가 더욱 빛을 발한다. 축제는 4월 3~12일 열린다. 축제기간에는 경포대 진입로 3km 에서부터 꽃 축제 경연 전시 등의 다양한 문화예술행사가 마련된다.

 #천년고도 경주 벚꽃길

경주 보문단지을 둘러싼 벚꽃.

3월말부터 경주는 도시 전체에 벚꽃이 만발해 연분홍 숲을 이룬다. 남산 가는 길, 대릉원 감길도, 보문단지,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토함산 산길 등 곳곳이 벚꽃단지다. 경주 벚꽃여행의 재미는 자전거를 타고 꽃놀이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전거도로가 잘 닦여져 있고, 대여시설도 마련돼 있어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사천 선진리성 벚꽃


사천은 한국의 베니스라는 별칭이 붙은 미항 삼천포를 품고 있는 곳이다. 매년 4월이면 사천의 선진리성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선진리성은 임진왜란 때 이 충무공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전투를 치른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는 수령 100년이 넘는 벚나무 1000여 그루가 만발해 남해의 쪽빛 바다를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성 서쪽으로 사천만이 바로 붙어 있어 저녁 무렵 석양에 비치는 사천만의 넓은 갯벌이 운치를 더한다.

#마곡사 왕벚꽃
공주 마곡사 주변에는 왕벚꽃뿐 아니라 산수유 자목련 등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전형적인 봄꽃 여행지이다.


 지리산에도 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겨우내 꽁꽁 얼어 있던 불일폭포가 녹기 시작했습니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하동 화개골 쌍계사에서 오르는 길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쌍계사의 유일한 산내암자인 국사암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쌍계사에선 2.4㎞로 상대적으로 먼 데다 오름길의 연속이어서 꽤 힘이 들지요. 해서 국사암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비교적 쉽고 길이 부드러워 이곳을 들머리로 잡았습니다.

 이 길은 지리산 남부능선 삼신봉으로 이어지지만 가파르기만 하고 조망이 좋지 않아 눈밝은 산꾼들은 들머리로 애용하지 않고 날머리로 이용합니다.

하지만 불일폭포까지의 이 길은 부드럽고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이어서 아주아주 환상적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매년 4월말이면 이 길은 화엄세계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국사암은 신라 흥덕왕 때 진감 선사가 창건했습니다. 진감의 출생은 다소 독특합니다. 원래 어부 출신으로 그의 나이 36세 때 노를 젓는 고꾼으로 우연히 중국으로 갔다가 중국 승 마조 문하에 늦깎이로 출가, 동방 성인 혹은 얼굴이 검다 하여 흑두타, 즉 검은 얼굴의 부처로 존경받는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참고하시길.

               눈에 봐도 겨울은 가고, 산꾼들의 복장도 그렇고 봄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산행
초입부분입니다.

고운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로 환학대라고 합니다.





산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어언 45분. 일순간 뜻밖에도 너른 평지가 기다립니다. 세석평전 돼지평전처럼 지리산에서 몇 안되는 산중 너른 터인 불일평전입니다. 이곳에는 재작년 작고한 변규화 옹이 30여 년간 머문 일명 '봉명산방'이라 불리는 불일평전 오두막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불일폭포휴게소'입니다. 해발은 600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이 오두막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노고단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봉명산방에는 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고 변규화 옹은 1967년 성균관대 졸업 후 바로 출가했습니다. 4년 뒤인 1971년 환속해서 1978년 이곳 불일평전에 조그만 초막을 하여 짓고 결혼해서 살았지만 1986년 상처한 후 작고하기 전까지 홀로 외롭게 지내셨지요.

변성배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불일평전 봉명산방의 이 시선 같은 사람은 텁수룩하게 길게 자란 수염으로 지리산에서도 이름난 털보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난해 5월 지리산 종주 200회를 하신 부산 산꾼 이광전 씨는 그의 저서 '지금도 지리산과 연애중'에서 고 변규화 옹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수염으로 보면 70대 노인 같았으나 맑고 해맑은 웃음과 잔잔한 목소리를 들으면 30대로도 보인다'.

봉명산방이란 이름은 절친하게 지내셨던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잠시 짬을 내 봉명산방과 그 주변을 둘러보겠습니다.

커다란 나무는 야생감나무인 고욤나무입니다.

연못 속의 개구리 알인 듯 합니다.

불일평전 한쪽에는 옛 야영장 옆 수돗가 내지 세면장 인듯합니다.

옛 세면장의 외형입니다.


봉명산방 옆 휴게소. 산꾼들의 쉼터인듯 합니다.

고욤나무와 쉼터.


무인판매대.

고로쇠물도 맛볼 수 있답니다.


봉명산방 좌측, 다시말해 불일평전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는 소망탑이 있습니다. 소망탑이란 글은 봉명산방을 지을 때 참여한 젊은 사람들이 바위에 음각해 만든 것이며 그 주변의 돌탑들은 땅을 고르다 나온 돌을 하나 둘씩 쌓아 올린 것입니다.

요즘에는 해빙기라 그런지 소망탑이 간혹 쓰러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곳은 홍인수 씨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요가와 기(氣) 공부를 하는 분들입니다.

소망탑 아래에는 샘터가 있습니다. 물맛 또한 아주 좋습니다.

독일산 롯드와일러입니다. 이제 4개월 정도 됐답니다.

사람이 다가가도 깨지 않고 팔자좋게 자는 이 개는 히틀러의 경비견으로 유명하답니다. 개 역시 환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일평전에서 이제 불일폭포로 가는 길입니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봄 분위기가 나지 않습니까. 봉명산방에서 불일암까지는 6, 7분이면 충분합니다.

고로쇠 파이프도 보입니다.

불일암. 1980년대 초에 화재로 인해 완전 소실돼 사라졌으나 지난 2005년 4월 다시 신축됐습니다.

불일암 대웅전.
불일암에서 바라본 풍광입니다.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산줄기가 섬진강 너머 백운산입니다.

불일암 입구의 돌배나무.

불일폭는 불임암에서 2, 3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폭포수 소리와 함께 나무 사이로 폭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내려옵니다.
            겨우내 얼어 있던 폭포가 드디어 얼음이 녹으면서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봄이 온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폭포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놓았습니다.


불일폭포 최상류의 모습을 당겨서 봤습니다. 얼음이 거의 다 녹아 있습니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도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폭포의 가운데 부분입니다. 역시 얼음이 녹고 있습니다.

불일폭포는 고려시대의 승려인 보조국사 지눌(1158~1210년)이 폭포 입구에 있는 암자에서 수도를 했답니다. 이에 고려 21대 왕인 희종(1181~1237년)이 지눌의 덕망과 불심에 감동하여 불일보조라는 시호를 내렸답니다.
그 시호를 따라 이 폭포를 불일폭포라 하였고 그가 수도하였던 암자를 불임암이라 불렀답니다.

불일폭포는 좌측의 청학봉, 우측의 백학봉 사이의 협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60m에 이르며 주변의 기암괴석이 잘 어울어져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하산은 쌍계사로 했습니다.

쌍계사 일주문입니다. '삼신사 쌍계사'라 적힌 편액은 근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친 해강 김규진이 단정한 예서체로 썼습니다.

한쪽편에는 산꾼들을 위한 이정표가 보입니다. 불일폭포까지는 2.4㎞.
대웅전입니다.
                        쌍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물인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 대공탑비입니다.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이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라 정강왕 2년(887년)에 세워진 것입니다. 고운 최치원이 쓴 사산비 중 하나입니다. 진감선사의 치열했던 생애가 최치원의 문장을 만나서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쌍계사 마애여래좌상.

쌍계사 마애여래좌상으로 일명 마애불로 불립니다. 대중전에서 명부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바위에 조각된 이 마애불은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선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쌍계사 구층석탑.

쌍계사 구층석탑으로 고산스님이 인도성지 순례 후 스리랑카에서 직접 갖고온 석가여해 진신사리 삼과와 산내암자인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 진신사리 이과 그리고 전단나무 부처님 일위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순천 조계산 도립공원 '동서횡단로', 곧장 갈까 쉬어 갈까
선암사~송광사 裸木 사이로 걷는 옛길, 일명 변두리길
가는길 '셀프' 보리밥집 손짓…곳곳에 전설·볼거리 풍성
낙엽 융단길 걷는 멋도 일품…쉬엄쉬엄 걸어도 3시간

조계산 동서횡단로 상에 위치한 전통의 보리밥집. 부엌에 가서 직접 받아와 평상에 앉아 먹는 그 맛은 꿀맛이다. 
                     유홍준 교수가 국내 최고의 명상로라고 한 조계산 진입로.
 
 벌써 3월이다. 이제 추위가 완전히 한풀 꺾였다. 가족과 함께 부담없이 나들이할 때도 됐다.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문경새재 조령이나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도 좋겠지만 순천 조계산 동서횡단로는 어떨까. 

산 아래 동서 양쪽에 각각 태고종의 총림인 선암사와 승보사찰 송광사라는 천년고찰을 품고 있는 데다 두 사찰의 중간 즈음에 24년 전통의 보리밥집이 있다. 굴곡이 너무 없으면 싱거울까봐 넉넉한 두 개의 고갯마루가 일정 간격을 두고 있고, 황홀한 낙엽융단길이 줄곧 기다린다.

찬찬히 걷고 보리밥을 먹어도 3시간 남짓. 최근에는 길 곳곳에 구수한 전설과 역사를 담은 안내글도 걸려 있어 무료함을 달래준다. 한마디로 나라땅 최고의 옛길이 아닐까 싶다.
   

점선은 일반적인 원점회귀 등산로이고, 검은 선 부분이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동서횡단로이다.
 
그냥 갈 수 없잖아, 선암사


출발점은 태고종의 본산인 선암사. 조금만 서두르면 절간 순례도 가능하다. 으레 있을 법한 국보급 문화재 하나 없지만 단청없는 전각과 색바랜 기왓장, 고색창연한 돌계단 그리고 사시사철 꽃이 지지 않는 매력은 전문가들로부터 국내 산사 중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영화 '동승' '아제아제 바라아제'나 드라마 '상도' 등의 촬영지로 애용됐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신선이 되어 오르는 다리'인 승선교(昇仙橋) 아래로 '신선들이 내려와 노니는 누각'인 강선루(降仙樓)가 시야에 들어온다.
정호승의 시 '선암사'에도 등장하는, 그 유명한 선암사 누운 소나무. 
선암사의 400년 된 화장실인 '뒤깐'. 아마도 화장실이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세계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사하촌에서 일주문까지의 1.5㎞쯤 되는 흙길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전국 최고의 명상로. 도심에서 묻혀온 온갖 번뇌와 번거로운 일상을 벗고 비로소 깨달음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 즈음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인 승선교(昇仙橋)와 강선루(降仙樓)가 시야에 들어온다. '신선이 되어 오르는 다리'와 '신선들이 내려와 노니는 누각'. 자태만큼이나 이름에도 운치가 묻어난다. 승선교 아래 다리를 건너 잠시 계곡으로 내려서자. 승선교의 둥근 천장 아래로 보이는 강선루의 자태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선암사도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풍수지리적 측면을 고려했다고 한다. 기가 빠져 나간다는 계곡 지점에는 강선루를 지어 막았고, 기가 가장 센 북쪽 끝 지점엔 각황전을 건립해 철불을 모셔 보완했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 작은 연못인 삼인당과 절 곳곳에는 약수가 흐른다.

 오랫동안 절에 불이 잦자 도선국사가 물길을 냈다고 전해온다. 이를 입증하듯 '호남제일선원'이란 편액이 붙은 일주문 뒤 '청량산 해천사(海川寺)'라는 옛 절 이름이 눈에 띈다. 심지어 전각 벽면에도 '물 수(水)' 자와 '바다 해(海)' 자가 조각돼 있다.

 400년 된 뒷간도 놓쳐선 안 될 볼거리. 국내 화장실 중 가장 깊고 아름다워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아마도 화장실이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이 해우소는 지금도 건축 전공 대학생들이 찾아와 사진촬영과 함께 짜임새를 조사하는 등 연구대상으로 인기가 높다.

정호승의 시 '선암사'에도 등장하는 누운 소나무의 자태도 빠뜨리지 말자.

최근에는 볼거리가 또 하나 늘었다. 44억 원을 들여 지난달 4일 문을 연 야생차체험관(061-749-4202)이 바로 그것이다. 한옥 8개동에 야생차 전시관, 강당, 차 만들기 체험실, 산방 체험동, 시음 및 판매실 등을 갖춰 순천 야생차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조계산 동서횡단로와 보리밥집

조계산은 전형적인 육산. 그 만큼 산길이 부드럽다. 일년 탐방객은 연간 55만 명으로 웬만한 국립공원에 버금간다. 선암사나 송광사를 들머리로 해서 정상인 장군봉(884m)을 거쳐 한 바퀴 돌면 적어도 5시간은 걸어야 한다. 한데 조계산에는 나이 지긋한,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지 않은 소위 '헐렁한' 산꾼들이 자주 눈에 띈다.

바로 조계산을 동서로 횡단하는 일명 변두리 코스라 불리는 동서횡단로 때문이다. 북쪽에 위치한 장군봉을 거치지 않고 선암사~송광사를 오가는 옛길이다.

 원래 1000여 년 전부터 선암사 및 송광사 스님들과 절 아래 사하촌 민초들이 오가던 길로 총 길이는 6.8㎞. 찬찬히 담소하며 보리밥 한 그릇을 비우고 쉬엄쉬엄 산보하듯 걸어도 3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굴곡없는 편평한 문경새재길을 연상하면 곤란하다. 선암굴목재와 송광굴목재라는 두 개의 고갯마루를 슬쩍 넘어야 한다. 위치 또한 출발점에서 각각 2㎞ 남짓한 지점에 있고, 그 사이에 보리밥집이 자리잡고 있어 평일에도 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선암굴목재까지는 대체로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지고 보리밥집부터 송광굴목재를 거쳐 송광사까지는 그리 힘들지 않은 낙엽융단길이어서 콧노래를 부르며 거닐 수 있다.

들머리는 삼인당 인근 기념품 가게인 선각당 우측으로 길이 열려 있다. 물론 이정표가 친절하게 서 있다. '송광사 또는 선암굴목재'라 적힌 이정표만 따라 가면 된다. 생태체험 야외학습장과 편백숲, 야생화단지를 지난다. 사바세계에는 이제 봄이 왔건만 산속에는 앙상한 가지의 나목이 아직 겨울산의 한가운데 서 있음을 깨닫는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변두리길인 동서횡단로에는 여수해경에 근무하는 일명 인오라는 경찰관 한 분이 사진에서처럼 한 여러 바위에 얽힌 전설과 송광사나 선암사 순례를 위한 도움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어 놓았다.  

               동서횡단로인 이 길은 편평하지 않고 적당하게 오르내리는 굴곡이 있다.
조계산 등로 중 산꾼들의 발길이 가장 잦은 선암사 굴목재다리.

 그래도 길동무는 곳곳에 숨어 있다. 여수해경에 근무하는 한 경찰관이 친절하게 등로 곳곳에 위치한 여러 바위에 얽힌 전설과 송광사나 선암사 순례를 위한 도움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어 놓았다.

 제천바위 전설, 조계산 이름의 내력, 숯가마터, 호랑이 턱걸이 바위 전설, 소설 '태백산맥'과 조계산, 산꾼들을 위한 맥으로 본 조계산, 배도사 대피소의 내력, 걸친바위 전설 등이 그것이다.
   
 
넉넉잡아 1시간이면 (조계산) 보리밥집(061-754-3756)에 도착한다. 이 원조 보리밥집이 유명해지면서 언제부턴가 인근에 짝퉁인 '아래 보리밥집'과 '면산골 보리밥집'이 생겼다. 그래도 대다수의 나그네들은 원조집만 고집한다.

보리밥집은 선암사와 송광사의 중간쯤 지점에 위치해 있다.
손님들은 비닐하우스에서, 또는 야외 편상에 앉아 식사를 한다.
산에서 보리밥을 먹으면 누구나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한 그릇 뚝딱 비운다. 
보리밥집에선 음식을 직접 받아와야 하는 '셀프' 스타일이다.
보리밥집 바로 아래에는 조그만 물레방아가 하나 있다. 8, 9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보리밥집을 밝혀주던 유일한 발전 수단이었다.


 식탁도 밥상도 없이 나무 아래 평상만 10여 개가 있으며 지금은 찬바람을 막기 위해 커다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놨다. 일손이 적어 부엌에 가서 밥값을 치르고 커다란 쟁반에 직접 받아와야 하며, 가마솥에 끓는 숭늉 또한 직접 떠마셔야 한다. 모든 게 '셀프'다.

 원래 산에선 신 김치 쪼가리에 맨밥을 먹어도 맛있는 법. 하물며 고소한 참기름과 고추장 양념이 담긴 대접에 보리밥과 갖은 야채를 담은 후 쓱쓱 비벼먹는 그 맛이란 진수성찬의 그것에 다름아니다.

 허기진 배를 채웠으면 아래 물가 쪽으로 내려가보자. 조그만 물레방아가 하나 있다. 8, 9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보리밥집을 밝혀주던 유일한 발전 수단이었단다.

 주인장 최석두(57) 씨는 "이 물레방아로 불을 밝혀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공부도 하고 TV도 봤다"고 말했다. 계곡 옆 나무 위엔 산꾼들이 뭔가를 따고 있다. 다래였다. 인심도 후덕해 한두 알씩 맛보라며 건넨다. 속은 영판 키위와 닮았지만 맛은 한 수 위다. 보리밥집에서 송광사까지는 경사가 완만하다. 산길을 빠져나오면 우측에 송광사가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숯가마터도 만난다.
송광사에 가까워오면 대피소가 하나 있다.
사거리인 송광굴목재. 해발 720미터로 웬만한 산 정상 높이와 맞먹는다. 우로 오르면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 좌로 향하면 쌍향수로 유명한 천자암으로 이어진다. 직진하면 송광사.

16국사 배출한 승보사찰 송광사

신라말 혜린선사가 창건한 송광사는 고려부터 조선까지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한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16국사의 진영을 모신 국사전(국보 제56호)의 내벽은 흥미롭게도 18칸. 앞으로 두 분의 큰 스님이 배출되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란다.   

마침내 송광사. 아래 사진은 송광사의 세 가지 명물 중 하나인 비사리구시. 쌀 7가마 분량을 저장할 수 있는 배모양의 나무밥통이다.
 
 송광사에는 세 가지 명물이 있다. 비사리구시, 능견난사, 쌍향수가 바로 그것. 승보전 옆에 놓인 비사리구시는 쌀 7가마 분량을 저장할 수 있는 배모양의 나무밥통이다. 성보박물관에 있는 능견난사(能見難思)는 문자 그대로 '능히 보기는 해도 그 이치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을 가진 그릇. 어느 순서로 포개어도 포개지는 그릇을 두고 조선 숙종이 장인에게 만들어보라고 하자 어느 누구도 똑같이 만들 수 없었다는 후문이 전해온다.

곱향나무인 일명 쌍향수는 송광사 산내암자인 천자암에 있다. 송광굴목재에서 1.7㎞, 걸어선 대략 30분 걸린다. 두 그루의 향나무가 같은 모습을 한 쌍향수는 나무 전체가 엿가락처럼 꼬여 있고 가지가 모두 땅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동서횡단로에서 쌍향수를 보고 다시 오려면 1시간은 족히 잡아야 한다. 천자암에서 동서횡단로로 오지 않고 곧바로 송광사로 넘어 가더라도 역시 1시간 가량 더 걸린다.

경내로 들어가는 우화각 인근에는 뼈대만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다. 일명 '고향수'다. 보조국사 지눌이 지팡이를 꼽았다는 이 전설의 나무는 무려 800년이 지나도 쓰러지지 않아 불가사의로 손꼽힌다.

교통편 - 순천서 부산 막차 오후 8시30분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승주IC~승주·야생화체험관 방향 우회전~선암사 방향 우회전~낙안온천·낙안민속마을~삼거리서 857번 지방도 선암사 방향 우회전~선암사.

 만일 차를 선암사에 두고 동서횡단로를 거쳐 송광사로 갔다면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송광사 앞에서 111번 시내버스를 타고 승주읍(쌍암)에 내린 후 선암사행 1번 버스를 타면 된다. 두 버스 모두 배차 간격은 30분. 시간이 여의치 않을 경우 택시(061-754-2000)를 이용하면 편리하지만 요금이 꽤 비싸다. 3만 원.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순천행 시외버스는 오전 6시30분, 7시10분, 8시10분, 8시50분, 9시10분에 출발한다. 1만1200원. 2시간40분 소요. 터미널 앞에서 순천교통 1번 시내버스를 타고 선암사에서 내린다. 송광사에서 터미널행 버스는 오후 30~40분 간격으로 있으며 막차는 밤 10시. 순천에서 부산행 시외버스는 오후 4시20분, 5시10분, 5시20분, 6시25분, 7시, 8시30분(막차)에 있다.

 맛집 한 곳 소개한다. 진일 기사식당(061-754-5320). 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나와 선암사 방향으로 가는 857번 지방도 입구에 위치해 있다. 간판도 아주 커 찾기 쉽다. 메뉴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단 하나, 김치찌개. 냄비가 아닌 프라이팬에 끓여내 우선 독특하다. 맛의 비결은 별도로 담근 찌개용 김치에 큰 솥에 미리 볶아놓은 시골 돼지고기를 넣어 한 번 더 끓이기 때문이다. 반찬은 15가지 정도. 혼자 와도 독상을 받을 수 있다. 5000원.


 

         19번 국도와 마주보고 있는 861번 지방도로변에 섬진강을 배경으로 핀 홍매화의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당겨서 본 홍매화의 자태.


섬진강변으로 떠나자. 같은 하늘 아래 조국산천의 한 봄이지만 왜 이토록 봄만 되면 상춘객들이 섬진강변으로 끊임없이 몰려들까.

 아마 십중팔구는 섬진강가에 섬진강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때문일게다. 이 땅에 피는 꽃치고 이쁘지 않은 꽃이 없으려만 유독 이 곳에 피는 꽃에 특히 정이 가는 것은 눈물나도록 살가운 그 섬진강 때문이리라.

섬진강변은 갖가지 봄꽃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자연섭리를 정확히 따르며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섬진강의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강가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가 요즘 들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산수유꽃도 뒤이어 봉오리를 틔우고 있다. 매화와 산수유꽃이 빛을 잃으면 그 화려함이 두번째라면 서러워할 벚꽃이 만개하고 이에 뒤질세라 배꽃이 섬진강가 봄꽃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섬진강 드라이브는 그래서 봄맞이에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남도대교를 통해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상춘가를 불러보자.

#섬진강 강변길



고려말 왜구가 침입, 하동쪽에서 강을 건너려 하자 수만마리의 두꺼비가 몰려들어 울부짖는 통에 왜구들이 놀라 도망쳤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두꺼비 섬, 나루 진’자를 써 섬진강(蟾津江). 하동에서 광양으로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섬진교에서 구례방면으로 3㎞ 남짓, 지금의 섬진나루터 수월정 근처가 그 전설의 현장이다.

흔히 경남 하동~전남 구례 19번 국도는 벚꽃과 배꽃이 연이어 필 4월이면 국내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선 섬진강을 가운데 두고 19번 국도와 나란히 달리는 광양쪽 861번 지방도를 권하고 싶다.

예전 같으면 광양 매화마을을 구경한 후 섬진교를 다시 건너 하동을 거쳐 구례로 향했지만 지금은 동서화합의 다리인 남도대교 덕분에 861번 도로를 타고 가다 남도대교를 건너도 되기 때문이다.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 홍매화.

광양 청매실농원에서 남도대교까지는 16㎞, 지금은 매화천국이다. 그 이름하여 매화꽃 드라이브. 벚꽃 드라이브에 익숙한 경상도 쪽에선 약간 생소하기까지 하다.

흔히 19번 국도의 벚꽃길이 화려함의 극치라면 강건너 861번 지방도의 매화꽃길은 오히려 소박한 시골아낙의 포근함이 느껴진다.

오른쪽 강가의 대나무가 섬진강을 가리면 매화가 만발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강변이 온통 백사장이면 저 멀리 지리산자락을 올려다 보자. 19번 국도와는 달리 오가는 차가 적어 길가에 정차한 채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 

 만일 구례에서 다시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IC쪽으로 이동한다면 섬진강변으로 접근할 수 있는 송림백사장공원과 하동포구로 가보자. 따스한 강바람이 부는 가운데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숲과 굽이 너른 백사장을 끼고 맑게 흐르는 섬진강을 몸으로 느껴보자.

#흩날리는 매화꽃잎-광양 매화마을

청매실농원에서 바라본 섬진강변.
청매실농원 보호수.
청매실농원 뒤 산책로.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 청매실농원의 장독.
청매실농원의 산책로. 황홀하다.

행정구역상으로 전남 광양시 다압면. 고로쇠약수로 유명한 백운산 자락에 몸을 맡긴 채 지리산과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 이름은 섬진마을이지만 이 마을 70여가구 대부분이 매실농사를 짓고 있어 매화마을로 불린다.

남해고속도로 하동IC를 나와 19번 국도를 따라 섬진교를 건너 우회전해 들어간다. 워낙 유명하다보니 이정표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마을 입구 여염집 담벼락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강가나 산등성이에도 매화가 지천으로 꽃을 피워 놓았다.

섬진강을 내다보고 들어앉은 수월정을 지나면 매화마을 관광의 절정인 청매실농원이다. 국가 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후 모 방송국 인기프로 ‘성공시대’에도 소개된 홍쌍리(67)씨가 회장으로 있는 곳. 섬진강변 매화골의 원조격.

이웃 농원이나 하동서 매화로 유명한 먹점마을이나 흥룡마을의 멋스런 매화도 알고보면 이미 오래전 이 곳 청매실농원에서 이식됐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

‘천지간에 꽃입니다/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꽃이 피고…’. 

청매실농원에 오면 김용택 시인이 읊은 것처럼 5만여평의 산자락이 백매화 홍매화 청매화의 꽃잎으로 넘쳐난다. 혹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이 스쳐지나갈 때면 흩날리는 오편화 꽃잎에 꽃멀미가 날 정도다.

농원 전시홍보관 옆으로 난 산책로를 걸어보자. 올해부터는 상춘객을 위해 입구에 안내도를 만들어 놓았다. 영화 ‘흑수선’ ‘취화선’ ‘북경반점’과 드라마 ‘다모’ 촬영지도 일일이 표시했다.

매화도 매화지만 초록비단을 펼친 듯 매화나무 사이로 풋보리와 클로버가 잘 자라 초록과 흰색의 조화가 일품이다. 올해부턴 구절초 씀바귀 도라지 취나물 야생철쭉 등을 심어 보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은은한 소리를 내는 대나무숲이나 매실장아찌와 매실액이 익어가는 2000여개의 장독대도 시공을 초월한 공감각적 미의 극치.

매화꽃 사이로 내려다보는 섬진강 풍경은 꽃과 산, 그리고 강이 한데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에 버금간다. 재첩캐는 아낙과 그 주변을 맴도는 백로나 왜가리가 같은 화폭에 들어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노란 꽃물결 산수유 속으로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 활짝 핀 산수유꽃.

 매화가 질 무렵이면 구례쪽에선 산수유꽃이 만발한다. 흔히 산동면 상위마을이 산수유마을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지리산온천단지에서 산동군 꼭대기인 상위마을에 이르는 10리길이 온통 샛노란 꽃길로 변한다.

 산수유도 기온이 올라가는 이번 주말부터 서서히 꽃부리를 펼쳐낼 태세다. 현재 20% 개화된 상태.

 
논두렁 밭두렁 산기슭의 산수유꽃도 멋지지만 지리산 특유의 검은돌이 널부러져 있는 계곡을 따라 피는 산수유는 압권이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배춧잎에 김 한 장을 올려놓고 실파와 마늘 고추 등 각종 야채와 미역을 곁들인 다음 과메기 한 점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그 맛은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과메기 생산의 1번지 구룡포. 정확히 말하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약간 비릿한 바다내음에 쫄깃하면서도 고소한 살맛이 입안에 착착 달라붙는 과메기. 언제 먹어도 식상하지 않고 되레 반갑기만 하다.

  과메기는 1월이 지나면 사실상 끝이라고 하지만 막상 가보니 2월말까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족보있는 음식 '과메기'
구룡포항을 벗어나 31번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과메기'라고 적힌 커다란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과메기 덕장이 푸른 바다와 하얀 포말과 한데 어울려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과메기를 굳이 범부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꽁치 숙성회' 혹은 '꽁치 말림'. 원래 과메기는 꼬챙이로 청어의 눈을 꿰어 말렸다는 '관목어'(貫目魚)에서 유래한 말. 영일만 부근에선 '목'(目)이란 말을 흔히 '메기'로 불렀기 때문에 '관목'이란 말이 '관메기'로 불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과메기'로 정착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예부터 구룡포 연안은 청어의 주산지. 겨울철 특별한 먹을 거리가 없던 구룡포에서는 이 청어가 더없이 좋은 식량자원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를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들은 부엌 살창(채광을 겸한 통풍구) 입구에 청어를 걸어 찬바람에 얼렸다가 부엌 땔감의 연기에 녹였다를 반복, 얼말린 과메기를 만든 것. 당시엔 술안주보다는 밥 반찬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과메기는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문헌에도 기록이 나와 족보있는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서 청어가 연안에서 자취를 감추자 대체어로 꽁치가 사용됐고, 이어 연안에서 꽁치 조차 어획량이 급격히 줄자 10여년 전부터 러시아 쿠릴열도 부근에서 잡은 원양꽁치가 과메기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원양꽁치로 만든 과메기가 국내 연안의 청어나 꽁치에 비해 불포화지방산 등 영양학적 측면에서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증돼 이제는 과메기 재료로 입지를 완전히 굳혔다는 것.

 이외에도 과메기는 숙취해소를 돕는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애주가의 사랑을 덤뿍 받고 있다.

 과메기는 '통마리'와 '배지기' 두 종류가 있다. 통마리는 말그대로 통째로 숙성시킨 것이고 배지기는 배를 따 뼈와 내장을 걷어내고 말린 것. 현지인들은 피가 나오고 내장이 흘러내리는 통마리를 즐긴다. 배지기는 과메기가 외지에 알려지면서 외지인들을 위해 고안된 것. 외지인들이 통마리를 약간 혐오스러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구룡포 과메기생산자 영어조합법인 김점돌 회장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이곳 사람들은 원래 과메기를 초고추장에 찍어 김에 싸먹었다"며 "지금과 같이 각종 야채를 곁들이는 방법은 외지에서 개발돼 역수입된 것 같다"고 말했다.

 막상 덕장에 가보니 그냥 해풍에 말리면 저절로 숙성되는 줄 알았던 과메기는 온도 습도 바람 등을 고려해야 하는 그야말로 과학과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먹을거리였다.

 "무작정 햇빛에 말리면 딱딱해집니다. 또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밤에 실외에 그대로 놔두면 얼어 하얗게 변합니다. 그러면 상품성은 제로이지요. 제 자식처럼 사랑과 관심을 듬뿍 줘야 먹음직스러운 과메기로 태어납니다." 구룡포 진강수산 최정만 대표의 설명이다.

 과메기는 우선 세척과정을 필수입니다. 바닷물로 한번, 바닷물과 민물을 섞은 기수로 한번, 그냥 민물로 한번 등 세번의 세척이 되야 비린내와 기름 및 불순물이 제거된답니다.

세척과정입니다.

세 차례 세척한 꽁치를 건조대에 옮깁니다.
햇빛에 말립니다.

.

여러 대의 선풍기가 천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온도계도 있습니다. 창문도 많습니다.

연탄난로도 준비돼 있습니다.


진강수산 최진만 대표가 과메기 숙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으로 가른 과메기가 붙으면 안 된다며 작대기로 일일이 분리시키는 최진만 대표.

정말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과메기입니다.



바람은 북서풍이 90% 일때가 제일 좋다고 합니다. 최 대표는 바람에 따라 과메기의 비린내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 모든 조건이 맞지 않으면 건조실로 들어갑니다.

 건조실은 온도 습도 바람 조절을 위해 창문이 아주 많습니다. 온도계와 선풍기 연탄난로 등이 준비돼 있습니다. 급작스런 기후 변화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랍니다.

 일반적으로 과메기의 숙성 조건은 습도는 45~55%이며 30% 이하로 떨어지면 아삭아삭해진답니다. 온도는 10~20도일 경우 2박3일~3박4일, 5~10도 일땐 4박5일 정도가 지나야 숙성된답니다.

 여기에 반 가른 과메기가 붙으면, 그 붙은 부위의 숙성이 달라진다면 일일이 긴 대나무 꼬챙이 분리해야 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된답니다. 

사실 저는 그냥 햇빛에 말리는줄 알았습니다. 한 톨의 쌀알이 농부의
땀방울이듯 과메기 한 점도 덕장의 적지 않은 사람들의 노고가 배어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날 냉동 수입산 꽁치가 들어왔습니다. 제일 아래 사진은 냉동실입니다.

한반도 동쪽 끝단임을 알리는 대형 입간판.

 스무고개입니다.
 1. 섬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에서 최동단과 최남단은 어디일까요. 이건 누구나 맞출 수 있는 아주 쉬운문제. 답은 경북 울릉군 독도와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 

 2. 그럼 맨 서쪽과 최북단은. 이건 '퀴즈 대한민국' 최종 라운드 진출을 꿈꾸며 준비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어려운 문제. 답은 서쪽은 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와 북쪽은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 

 3. 자 이젠, 섬을 뺀 육지로 한정합니다. 맞춰보세요. 역시 '퀴즈 대한민국' 최종 라운드급 수준입니다. 그럴 경우 최북단은 그대로이고 최남단은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토말로 소위 말하는 땅끝마을입니다. 그럼 맨 동쪽과 맨 서쪽은 어디일까요. 답은 각각 함북 경흥군 노서면과 평북 용천군 용천면입니다. 

 4. 자 이제 진짜 문제가 나갑니다. 그렇다면 섬을 뺀 한반도 남한땅으로 한정할 때 가장 동쪽은 어디일까요. 이 또한 '퀴즈 대한민국' 최종 라운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별 고민없이 이 문제를 맞춘다면 대단한 실력가로 봐도 무난할 듯합니다.

 흔히 섬을 제외한 남한땅 맨 동쪽은 일출 명소로 유명한 포항 대보면 호미곶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이렇게 나오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토지리정보원(www.ngi.go.kr)에 따르면 남한땅에서 가장 동쪽은 호미곶광장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석병리(동경 129도 35분 10초)입니다. 

 이곳 석병리에는 지난 1980년대 중반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측량해 최동단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이 10년전쯤 농로를 포장하면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 없애버렸지만 3년 전 국토지리정보원이 다시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요. 
구룡포항을 지나 31번 해안도로를 타고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단, 최근 포항시에서 만든 말끔한 새 국도를 타면 안 됩니다. 구 도로를 타야 됩니다.
 
 그러면 길 우측에 '한반도 동쪽 땅끝마을'이라 적힌 커다란 입간판이 보입니다. 워낙 커서 놓칠 수가 없습니다. 확신합니다. 우회전해 들어가면 바닷가가 보이며, 방파제 우측으로 가두리 양식장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 뒤로 낚시꾼들이 아주 좋아할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바위 위를 자세히 보면 동그란 조형물이 보입니다. 이게 육지의 동쪽 끝단임을 표식입니다.

방파제길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고, 사진 우측 저 멀리 보이는 동그란 조형물이 동쪽 끝단임을 알리는 표식입니다.
조금 뒤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철조망으로 막힌 방파제길 대신 가두리 양식장 사이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반대편에서 가두리 양식장을 촬영한 것입니다. 

 섬으로 가는 방파제길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습니다. 아마도 안전사고를 우려한듯 합니다. 대신 가두리 양식장를 섹터로 나눈, 즉 어민들이 다니는 길로 걸어가면 조형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조형물에는 동그랗게 깎은 지구본 모양의 돌에 우리나라 지도를 양각해 동쪽의 끝단임을 표시해놓고 있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한반도 동쪽 땅끝,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동경(경도) 129 35 10, 북위(위도) 36 2 51'.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이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녀와서 반추해보면 별 것 아닌데도 뭔가 큰 것을 발견한 것처럼 당시엔 감정이 약간 북받쳐 오르는 들었습니다. 한번 다녀오시면 공감하실 겁니다.

 동쪽 끝단 조형물에서 정면 그러니까 북쪽이겠죠, 이 북쪽 해안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바다쪽으로 돌출된 땅이 보입니다. 저곳은 구룡포읍 강사2리입니다.
 
 재밌는 점은 저곳이 이곳 석병리, 정확히는 석병2리와 한때 동쪽 끝이라고 경쟁을 벌였던 마을입니다. 결국은 국토지리정보원이 측량 후 명확한 판결을 내려 이제 잠잠해졌습니다.

바다 건너 보이는 땅이 동쪽 땅끝마을과 동쪽 끝이라고 경쟁을 벌였던 강사2리입니다. 사진 상으로 표가 안 나지만 실제로 보면 석병리가 약간 해안쪽으로 더 나온 것 같습니다.
 

 동행한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한마디를 더 하더군요.

 땅끝마을이란 이름은 해남에 선점당했으니 '등끝'이라 불렀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호랑이등의 끝이라는 의미의 '등끝'은 옛 지명이기도 하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우리말로 동쪽 끝이라는 의미의 '샛끝'이란 이름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합디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키는 포항시 즉 '관'이 쥐고 있습니다.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높으신 이 분들이 움직여야 고쳐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눈에 봐도 일본가옥거리임을 알 수 있는 구룡포 적산가옥 거리.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로 과메기뿐 아니라 대게 오징어의 국내 생산량 1위인 포항 구룡포항은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후
이듬해 일본 자국 어민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구룡포읍과 포항시에 따르면 오까야마, 가가와, 아이찌 등 세토나까이 주변 일대 어민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수산업이 포화상태여서 어민들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아주 심해 뭔가 돌파구가 필요할 때였다. 무엇보다 동해 구룡포의 어족자원이 무궁무진했던 것이 집단 이주를 가능케한 요인이었다.

 여기에 일본의 어선들은 동력선이어서 돛단배를 이용하는 우리 어업기술에 비해 무려 100년 정도 앞서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 어민들이 이주해야 될 필요충분조건이 모두 갖춰진 셈이었다.

30여년 전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 찌그러져 가는 여인숙 간판.



 100년이 지난 지금도 구룡포에는 당시의 일본 어민들이 집단 이주해 살았던 그 시절의 일본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적산(敵産)가옥거리, 다시말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장안동 골목을 천천히 걷노라면 영화속 한 장면처럼 아직도 일본풍이 물씬 풍겨난다.

 아무 정보 없이 구룡포항을 찾는다면 이 적산가옥 거리는 찾기 어렵다. 구룡포항 내 도로를 건너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쉽게 만난다. 그렇지 않다면 구룡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원래 지금의 구룡포항내 공유지와 도로는 오래전 매립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 적산가옥거리가 바다와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한눈에 일본풍이 느껴지는 이 거리는 오래전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 거리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시점과 종점의 거리는 대략 470m. 일직선이 아니라 꼬불꼬불하게 약간 굽어 있어 운치가 있다.

 가옥은 대략 50가구. 절반 가까이 빈 집이다. 빈 집에 들어가보면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창문이나 문틀을 자세히 보면 눈길 끄는 문양이 있다. 동그란 구멍이 있는가 하면 선사시대의 알 수 없는 무늬가 아주 세실하게 조각돼 있다.

 동행한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그들도 사람인지라 아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러한 문양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동그란 구멍과 그 옆으로 그으진 선을 두고 서 부소장은 일본의 마음에 항상 있는 최고봉인 후지산의 정상과 천지못이라고 설명했다. 지그재그로 그려진 것은 고향인 일본의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라고 덧붙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일본풍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골목을 걷다 보면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 속에 자리잡은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론 이층 목조가옥 창문이 열리면서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인네가 '곤니치와'하고 인사를 건넬 것 같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이 거리는 1930년대 번성했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며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들러봐야 할 공간"이라고 말했다.

 현재 결정된 계획은 없지만 포항시가 현재 이 적산가옥거리를 일본인 관광객들을 겨냥한 일본인 거리를 조성하려고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 부소장은 "왜색풍이 넘치는 일본인 거리보다는 차라리 이 거리를 적절히 보존하면서 일본의 만행과 당시의 우리 삶을 아우르는 가칭 근대역사 거리로 후대에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잠시 안을 들여다봤다. 빨래가 널려 있지만 흡사 난민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는 빈집.
적산가옥 거리 중간중간에는 우리네 집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풍이다.

적산가옥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이 새겨 놓은 다양한 문양이 눈길을 끈다.

양지바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듯하다.
이 적산가옥 거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깔끔한 집이어서 물어보니 당시 약국집이었단다.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인 구룡포항을 약간만 벗어나면 과메기 덕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이 줄곧 이어진다.

춥다 춥다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던 겨울이 어느새 끝물이다. 작은 바람에도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가는 만추를 아쉬워하던 게 엊그제 같은 데 지나고 보니 정말 눈깜박할 사이다. 시골 여염집 기둥이나 대들보엔 이미 봄을 알리는 입춘첩이 붙어 있고, 대동강 물이 풀리기 시작한다는 우수 또한 턱밑에 다가와 있다.

 봄소식은 화신(花信)이다. 통상 이맘 때면 신문 방송 등 언론매체에선 앞다투어 봄소식의 선두격인 매향(梅香)을 전하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단골 명소는 구례 화엄사, 순천 선암사 금둔사, 산청 단속사지 등. 이곳에는 나라땅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수백년 된 운치있는 매화나무가 탐매객을 유혹한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일 년을 학수고대한 마니아들이야 감탄에 또 감탄을 하겠지만, 뚜렷한 목적없이 그저 신문이나 방송에서 소개된 한 장면을 보기 위해 운전대를 잡은 장삼이사들은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고 발길을 돌리며 혼잣말을 할 게다. "만개한 것도 아니고 겨우 매화 꽃잎 몇 개를 보려고 몇 시간씩 구불구불한 길을 내달려 왔단 말인가."

 2월은 여행 기자들에게 고민의 계절이다. 어정쩡한 봄과 휘청거리는 겨울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동장군은 시나브로 꼬리를 내리려고 하고 있고,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글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그것이다. 겨울과 봄, 무엇보다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섣불리 떠나기도, 소개하기도 조심스럽다. 고심 끝에 주말레저팀은 결정했다. 어정쩡한 봄보다는 떠나려는 겨울을 붙잡아 보기로.

 흔히 2월 하고도 중순이면 스키장은 일반인의 뇌리에서 사라진다. 해발 1000m에 육박하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보니 눈이 늦게까지 내린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도심에 비가 오면 산엔 눈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대자연의 원리를 잊고 있는 것.    
   
 지난 시즌의 경우 양산 에덴밸리는 3월 9일, 무주리조트는 3월 17일까지 영업을 했다. 스키장 측에 따르면 2월 스키장을 찾으면 숙박 리프트 렌털 등을 묶은 패키지 상품이 아주 저렴한 데다 무엇보다 북적이는 1월보다 사람들이 훨씬 적어 맘껏 즐길 수 있다. 여기에 예기치 않은 눈까지 내린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과메기로 유명한 포항 구룡포와 국내 최대 대구 집산지인 거제도 외포항은 겨울 식도락 여행지로 제격이다. 이곳 또한 삭풍이 몰아치는 12월과 1월 두 달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2월 말까지 싱싱한 그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원래 축제가 한창 때는 별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뜸해지는 끝물 즈음에 찾으면 적당히 대접을 받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사실 아니겠는가.

주5일제와 여행문화의 발달로 우리나라 관광지의 경우 사실 알려지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지만 구룡포는 예외인 것 같다. 일본인 집단 거주촌이 남아 있는 데다 원조 어선인 목선을 만드는 장인들이 아직도 뱃공장을 지키고 있다. 자, 선택은 이제 독자들의 몫. 주말이나 아니면 모처럼 주중에 휴가를 내고 가족들과 연인들과 함께 떠나보자.

■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 포항 구룡포

과메기 오징어 대게 골라먹는 재미 쏠쏠
겨울 낭만보단 뱃고동 울리는 
고깃배 모습 더 인상적
대게·활오징어·트롤오징어 등 대형 위판장 무려 세 곳 

동해안 최대 어업전지기지인 구룡포항 전경.

장삼이사들은 구룡포 하면 우선 과메기를 떠올린다. 일출 명소로 유명한 호미곶이 위치한 북쪽의 대보면 등과 함께 과메기 특구로 지정된 이곳은 국내 전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구룡포항에는 식당가 말고는 과메기 덕장을 구경할 수 없다. 구룡포항을 벗어나야 된다. 호미곶으로 이어지는 31번 해안국도변에 '과메기'라고 적힌 커다란 입간판을 따라 가면 과메기 덕장을 만날 수 있다.

과메기는 쉽게 풀어쓰면 꽁치 숙성회. 원래 과메기의 재료는 청어였다. 하지만 청어가 구룡포에서 잡히지 않자 연안 꽁치로 대체됐고, 이후 꽁치조차 자취를 감추자 러시아 쿠릴열도 부근의 원양꽁치가 쓰였다. 재밌는 점은 원양 꽁치가 연안 꽁치보다 불포화지방산 등 영양학적 측면에서 앞선다는 점이다.

구룡포가 과메기 최대 집산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 포항은 낙동정맥이 고도를 낮추는 지점이라 북서풍과 염분을 머금은 영일만의 해풍이 뒤섞이며 과메기를 숙성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과메기는 바람뿐 아니라 적당한 햇빛과 습도 온도 등 네박자를 갖춰야 하는 까다로운 먹을거리였다. 기자가 찾은 진강수산 덕장의 건조실에는 습도 조절을 위해 많은 창문이 뚫려 있는 데다 선풍기 연탄난로 등을 비치, 시간대별로 온도와 습도를 체크하면서 ON-OFF를 반복하는 복잡한 작업이 계속됐다. 바람이 잘 통하는 햇빛에 그냥 말리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대나무 꽂이에 걸려 있는 과메기 덕장의 모습은 한폭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한편으로 탐스럽다.

구룡포 과메기 덕장.

구룡포는 동해안 최대 어항답게 대게 및 오징어의 국내 최대 집산지이다. 겨울바다의 낭만 보다는 갈매기의 호위를 받아 뱃고동을 울리며 드나드는 비릿한 고깃배의 모습이 더 살갑게 다가오는 어항이다. 그렇다 보니 경매가 이뤄지는 위판장도 대게, 오징어활어, 트롤 오징어 및 잡어 위판장 등 세 곳이나 된다. 새벽 잠깐 떠들썩한 다른 어항 보다 거의 온종일 시끌벅적하다.
과메기와 함께 구룡포 해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반건조 오징어인 피데기.

구룡포는 전국 대게 위판량의 60%를 차지한다. 이곳 대게의 상당량이 영덕으로 올라가 영덕대게로 옷을 갈아 입는다. 
 
구룡포수협에 따르면 대게는 국내 생산의 60%가 위판되며, 오징어는 국내 생산의 절반 가까이 모여든다. 브랜드에서 밀릴 뿐 이곳 대게가 상당 부분 영덕으로 올라간단다. 오징어도 울릉도 보다 더 많이 잡힌다. 소문만 나지 않았을 뿐 이곳 구룡포에 오면 싱싱하면서도 저렴한 대게와 오징어 과메기를 맘껏 맛볼 수 있다.

구룡포에선 놓쳐선 안 될 알려지지 않은 볼거리가 몇 곳 있다. 우선 일본인 집단 거주촌인 적산가옥. 화려한 구룡포항 도로 바로 뒤편, 장안동 골목이 바로 그곳이다.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일본은 동력선을 앞세워 어자원이 풍부한 구룡포에 어민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믿기 힘들겠지만 100년 전 일본 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에는 지금의 항구와 도로가 모두 바다여서 이 적산가옥이 바다와 인접했다고 한다.

꼬불꼬불한 골목길 사이로 일본식 대문과 이층 가옥을 걷다 보면 불현듯 이층 창문이 열리면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곤니치와'하며 인사를 건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빈 집에 들어가보면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고 문에는 후지산과 천지못 등 고향을 그리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오래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거리 촬영지로 활용됐다.
 
동행한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서인만 부소장은 "50호 정도가 일본가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중 20호 정도는 근대문화재로 등록이 가능할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고 설명했다.

적산가옥 거리 중간쯤엔 돌계단이 조성돼 있다. 예전엔 신사가 모셔져 있었지만 지금은 구룡포공원으로 변모, 충혼탑과 용왕당이 들어서 있다. 구룡포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곳 주변에는 여전히 신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룡포 입구에는 뱃공장이 있다. 목선 조선소였던 이곳 대성조선소는 1980년대 FRP선이 나오면서 침체에 빠지지 시작, 지금은 생계를 위해 철선과 FRP선 수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속으로는 언제나 목선 주문이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이 시대 마지막 목선 장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구룡포를 찾으면 역시 꼭 맛보고 가야 될 먹을거리가 있다. 50년 전통의 '철규분식'(054-276-2298). 구룡포초등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연탄불에 팥을 밤새 삶은 단팥죽(2000원), 감자가루를 적절히 섞어 만든 쫀득쫀득한 찐빵(3개 1000원), 양은냄비에 담아 주는 국수(2000원)는 어딜 내놔도 별미 중의 별미로 꼽힌다.

'철규분식'의 단팥죽과 찐빵. 이렇게 2000원.

'까꾸네'의 모리국수.


 이름이 다소 독특한 모리국수집인 40년 된 '까꾸네'(054-276-2298). 구룡포에서만 맛볼 수 있는 모리국수(5000원)는 원래 어부들이 배에서 내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갖은 생선을 넣고 끓인 뒤 국수를 말아먹던 음식. 경상도 말로 생선을 '모디(모아)' 넣고 '모디가(모여서)' 먹는다는 의미로 처음엔 '모디국수'로 불리다 어느날 자연스럽게 '모리국수'로 정착됐단다. 삶은 육수에 아구와 대게를 넣고 콩나물 파 고춧가루 마늘 등을 넣어 시원하다.

경부고속도로 경주IC~보문단지~감은사지~문무대왕릉~감포~구룡포 순으로 가도 되고,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해운대~대변~임랑~고리~서생~울산~정자해변~감포~구룡포 순으로 해변 드라이브를 하며 내달려도 된다. 구룡포에서 등대박물관과 상생의 손이 반가이 맞이하는 호미곶까지는 대략 30㎞. 도중에는 우리나라 최동단 땅끝(등끝)마을도 만날 수 있다. 안내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 거제도 장목면 외포항

왕처럼 대구찜 한번 먹어볼까, 임금님 진상품 대구 아직도 잡혀
근처 YS생가도 한번 둘러볼만,
카페리 이용하면 훨씬 더 편리

                   대구 요리 25년을 자랑하는 외포식당 곽송주 씨가 대구를 받쳐들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대구찜'.

시원한 대구탕.


겨울철 남해안을 대표하는 대구의 최대 집산지는 YS의 고향인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외포항. 예부터 임금님 진상품으로 올랐다는 거제산 대구는 누구나 한번쯤 먹고 싶어했던 바다의 귀족. 1m에 달하는 쭉 뻗은 몸매와 탱탱한 피부는 수입산 냉동 대구는 명함을 못낼 정도.

한때 대구잡이 어민들도 시련이 있었다.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거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혹 1~2마리 잡히면 최고 위판가가 60만 원에 달할 정도여서 '금대구'로 불리었다. '잃어버린 10년'이었던 셈이다. 다행히 꾸준한 대구알 방류사업으로 2000년대부터 다시 잡히기 시작해 지금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성수기 때와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2월의 외포항은 대구와 물메기 등으로 아침이면 부산하다. 외포위판장 관계자는 "지금이야 대구가 넘쳐나지만 한참 귀할 땐 미식가들 4명이 돈을 나눠 30만~40만 원하던 대구를 직접 사러 왔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외포리 농협 맞은편에서 '외포식당'(055-636-7205) 곽송주 씨는 "이곳의 대구탕은 다른 양념은 필요없고 소금 간만 약간 한다"고 말했다. 곽 씨는 시어머니로부터 대구요리를 전수받아 25년째 고수하고 있다. 전통이 있다 보니 이 집은 거제도의 정관계 및 교육계 인사,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고위층이 단골 고객이다.

 네댓 명이 먹을 수 있는 '대구찜'을 주문하면 대구탕 물메기회 아구수육 등 거제에서 맛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메뉴를 만날 수 있다. 대구찜은 생대구를 대나무 소쿠리에 얹어 묵은지 콩나물 등과 갖은 양념을 곁들여 별미로 손꼽힌다. 9만 원. 반드시 전날 예약 필수.

외포식당이 위치한 외포마을에서 고개를 하나 살짝 넘으면 대계마을. YS 생가가 위치해 있다. 생가에는 눈길을 끄는 것들이 있다. 1960년 5월 공비가 쏜 총탄에 절명한 YS의 모친 박부련 여사의 사진과 그 아래 놓인 장농이다. 그 장농에는 당시 공비가 쏜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진해 안골에서 카페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성우카페리(055-636-5676), 풍양카페리(1688-4808).


■ 스키타기 지금이 오히려 적기 

사람 붐비던 지난해12월, 올 1월보다 한적, 맘껏 즐길 수 있어
지난해 무주스키장 3월9일, 양산 에덴밸리 3월16일까지 영업
가격 또한 성수기의 50% 수준으로 대폭 할인

2월에 스키장을 찾으면 한적하게 맘껏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진은 무주리조트.

지난 14일 무주스키장 만선베이스에서 만난 직장인 김 모 씨는 "지금까지 왜 인파가 넘치는 1월 그것도 주말에 찾아 몇 번 타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렸는지 억울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찾은 김 씨는 2월에 와도 1월 못지 않게 설질이 좋아 스키 타기에는 그저 그만이라고 활짝 웃었다.

황삼원 홍보 담당은 "2월에 오면 저렴한 가격으로 알차게 스키나 보드를 탈 수 있다"고 전했다. 우선 22개 전 슬로프를 개방하는 데다 하프파이프 보드파크 모글코스 등 마니아들의 공간까지 완벽하게 오픈해 1월보다 오히려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무주의 경우 이웃한 진안 장수와 함께 원래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인 데다 국내 5위봉인 덕유산 향적봉에 위치해 있어 슬로프 자체가 1200~1300m에서 시작돼 2월말까지도 쾌적하게 스키를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숙박 리프트 렌털이 묶인 가족호텔 주중 패키지가 1인당 6, 7만 원대로 무려 성수기의 50%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 3인 기준으로 22만6000원, 5인 기준 34만 원에 판매한다. 국민호텔의 경우 주중 패키지는 2인 기준 11만 원, 5인 기준 26만2000원에 내놓아 알뜰족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 가격대는 버스를 이용, 리프트 렌털을 할 수 있는 여행사 패키지 상품이 7만5000원(강습 제외)인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해고속도로에서 대전통영 고속도로 덕유산IC에서 빠지면 된다.

부산서 가까운 양산 에덴밸리스키장도 사정은 마찬가지.

조용호 홍보팀장은 "영남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이곳 에덴밸리는 슬로프가 해발 800m대로 무주에 비해 낮지만 베이스 전면이 정북향이어서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보강 제설한 눈의 보전성이 높아 좋은 설질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2월말까지 눈까지 자주 내려 스키 타기에는 제격이라는 것.

가격 또한 저렴해졌다. 성수기 때 숙박비용만 19만 원(16평), 28만 원(23평)이던 것이 2월부터는 숙박뿐 아니라 조식 사우나&찜질방 리프트(50%) 렌털(50%) 강습(50%)을 포함해 16평형의 경우 2인 기준 22만1000원, 3인 28만4000원, 4인 34만7000원, 23평형은 4인 39만2000원, 5인 45만5000원, 6인 51만8000원이라는 파격가로 내놓았다. 경부고속도로 양산IC~어곡양산지방공단 배내골 방향.

부산과 인접한 양산 에덴밸리스키장.

에덴밸리의 보더.

에덴밸리의 스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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