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맛 - 선어회(鮮魚膾)

감칠맛 척도 이노신산 활어회의 10배
진짜 회맛 아는 수산꾼 등 식도락가들 선호

활어 즉사 후 5~10시간 숙성, 日 '스시' 보다 싱싱회에 해당

선어회.
숙성시키고 있는 돗돔. 잠시 꺼내 기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보통 직장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회식을 한다. 장소는 대개 고깃집이나 횟집이 애용된다. 그렇다면 고깃집이나 횟집 직원들은 어디서 회식을 할까. 영업장인 자신들의 식당에서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고깃집 직원들은 대개 횟집에서 회식을 하지만 횟집 직원들은 애오라지 생선회만을 고집한다. 회는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것일까.

국내 최대 연근해 수산물 위판장인 부산 공동어시장과 그 주변의 부산시수협, 대형기선저인망수협, 대형선망수협, 중도매인 등 수산 관련 종사자들도 한결같이 회식 때는 생선회를 찾는다고 한다.

흔히들 '생선회'하면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활어회(活魚膾)를 떠올린다. 부산시가 대표 음식으로 내세우는 생선회도 실상은 활어회다. 하지만 공동어시장 주변의 수산 관련 종사자들은 활어회 대신 선어회(鮮魚膾)를 즐긴다. 아니 선어회만 찾는다.

선어회는 원래 그물로 잡은 후 얼음이 가득한 어창에 넣은 고기를 선원들이 회로 떠서 먹던 방식이다. 어민들은 이를 빙장(氷藏)한 고기라고 한다. 활어를 잡아 피를 빼고 일정 온도에서 숙성시킨 것과 같은 원리이다.

수산 관련 종사자들은 한결같이 "선어회의 깊은 맛에 혀가 길들여지면 활어회는 심심해서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 활어회가 평범한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즐겨 먹는 생선회라면, 선어회는 회를 누구 못지 않게 잘 안다고 자부하는 부산의 진정한 '수산꾼'들이 고집하는 회인 것이다.

선어회·싱싱회·활어회
 
'생선회 박사'로 유명한 부경대 식품공학과 조영제(59) 교수에게 선어회에 대해 물었다.

"일본인들은 활어회를 먹지 않고 선어회를 먹어요. 참치와 방어 등 붉은살 생선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은 붉은살 생선이 흰살 생선보다 선도 저하가 빨라 보다 맛있게 먹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선어회를 고안했죠. 이미 세계화된 '스시'와 '사시미'는 모두 선어회지요. 그러니까 '선어회'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건너온 셈이지요. 일본의 생선회, 다시 말해 선어회는 활어를 즉사시킨 후 일정한 저온으로 숙성시킨 것이지요. 맛은 우리나라 활어에 비해 좋게 말하면 부드럽고 나쁘게 말하면 약간 퍼석하지요. 일본의 사시미가 두툼하게 썰려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또 스시용이면 연하고 부드러워야 되지 않겠어요. 반면 즉석에서 잡아 칼맛으로 먹는 활어회는 씹는 맛에서 월등하지요.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씹히는 회를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 싱싱회는 활어회와 선어회의 중간쯤으로 보면 됩니다. 결국 선어회는 즉사시킨 후 2~4일 숙성시킨 회, 싱싱회는 쫄깃함이 유지되는 임계치인 10시간 이내 숙성시킨 회, 활어회는 즉석에서 손질한 회인 셈이죠."

이렇다 보니 현재 국내에선 생선회와 관련,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현재 부산에서 선어회를 취급하는 횟집의 경우 경매가 이뤄지는 새벽 시간대나 밤늦게 생선을 사와 손질한 후 점심 또는 저녁시간에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이럴 경우 숙성 시간은 5~10시간쯤 돼 엄밀히 말해 싱싱회에 해당된다. 하지만 선어횟집은 오랜 전부터 사용해온 용어라 바꿀 생각이 거의 없다. 지금으로서는 선어회를 '싱싱회를 포함한 광의의 용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참고로 '한국형 선어회'라 할 수 있는 싱싱회는 7년 전쯤 조 교수가 새롭게 만들었다.

맛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씹히는 맛이 활어회보다 덜할 것이라 알려져 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조영제 교수는 "숙성시간이 4~5시간 정도면 육질의 단단함이 최고조에 이르러 활어회보다 오히려 씹히는 맛이 더 좋다"고 설명했다. 숙성 시간이 10시간쯤 되면 4~5시간대보다 차츰 육질의 단단함이 저하돼 활어회의 그것과 비슷해지지만, 감칠맛의 척도인 이노신산은 10배나 좋아져 혀로 느끼는 맛은 최고가 된다고 덧붙였다. 숙성시간이 일본처럼 2~4일 정도 되면 씹는 맛이 활어회보다 훨씬 떨어진다.

진정한 회맛은 선어회를 먹어봐야 안다

부산시수협 직원들이 단골인 집 '선어마을'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선어회의 깊은 맛에 중독됐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낮 12시께 서구 충무동교차로 인근 ABC볼링장 뒤 골목에 위치한 선어 전문횟집인'선어마을(051-255-9668)'에는 부산시수협 직원들이 모처럼 한데 모였다.

이 집은 공동어시장, 부산시수협, 대형선망수협, 대형기저수협 등 수산업 관련 종사자들의 단골집. 평소 공동어시장 내에서도 잘 보지 못하다가 식사시간 때 이곳 '선어마을'에서 더 자주 본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회에 관한 한 전문가 수준인 그들의 입맛은 몹시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생선회 도사'라는 그들이 즐겨 찾는 집인 점만 봐도 벌써 회맛을 짐작하고 남을 듯했다.

부산시수협 조항흠 총무과장은 "오랫동안 선어회에 입맛이 길들여져 활어회는 별 감흥이 없다"고 말했고, 부산시수협 남포동공판장 김태오 경매사도 "진짜 회맛을 아는 사람은 선어회만 고집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선어횟집이라 수조가 보이지 않는 허름한 이 집에는 테이블이 겨우 8개로 30여 명 남짓 앉을 수 있다. 식사 시간 땐 예약은 필수다.

조그만 나무 도마 위에 회가 나왔다. 보통 네댓 가지가 올라오는데 이날은 돗돔 눈다랑어 병어 가오리였다. 씹히는 맛이 강한 병어와 가오리는 얇게, 돗돔과 눈다랑어는 비교적 두툼하게 썰어져 나왔다.

아주 귀해 전설의 물고기라 불리는 돗돔은 워낙 커 부위별로 맛이 다르단다. 이날은 목 부위였다. 아주 담백해 눈 감고 먹으면 쇠고기 육회라 해도 믿을 정도. 기름기가 많은 눈다랑어 뱃살은 진한 향이 일품이었고, 병어는 구수했다. 가오리는 특유의 쫄깃함이 살아 있었다. 활어회에 비해 육질의 단단함 즉 씹는 맛이 전혀 손색 없었고 향은 정말 살아 있었다.

'선어마을' 강화순 대표는 맛있게 먹는 법을 일러줬다. "병어 등 흰살생선은 된장, 붉은살 생선은 고추냉이, 가오리는 초장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어요. 신김치에 싸서 먹어도 별미죠."

살짝 데친 돗돔 껍질. 손이 떨려.... 이 놈의 수전증이.....
생선뼈를 고와 미나리와 무에 소금간을 한 맑은탕.

살짝 데친 돗돔 껍질은 꼬들꼬들한 느낌이고, 생선뼈를 고와 미나리와 무에 소금간을 한 맑은탕은 속이 확 풀린다. 횟집에 와서 이렇게 감동하며 먹은 기억이 실로 오래간만인 것 같았다. 해운대, 녹산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단골이 있다는 강 대표의 말에 수긍이 간다.

요즘 활어횟집에서도 고기를 썬 후 수분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육질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5~10분 정도 냉장고에 넣었다 손님들에게 내놓는 것도 결국 선어회의 장점을 일부 수용한 것으로 보면 된다. 결국 회맛은 선어회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선어마을' 강화순 대표 인터뷰

- "좋은 횟감이라면 아무리 비싸도 구입, 제값 받고 단골에 대접"   
 
"손님들에게 맛있는 선어회를 대접하려면 좋은 고기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선어 전문횟집 '선어마을' 강화순(55·사진) 대표는 "이 가게를 하기 전에 '자갈치 아지매'를 한 20년 했다"며 "생선에 관한한 그 어느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말했다.

20여 년 동안 생선과 씨름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긴 강 대표는 5년 전 기존의 '선어마을'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자신이 주체가 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선어마을'은 우선 제철에 나오는 다양한 횟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오랫동안 자갈치와 공동어시장 주변에 쌓아 놓은 인맥 덕분에 좋은 고기를 많이 확보할 수 있다. 선주나 어민들이 간혹 그물에 귀한 횟감이 올라올 경우 선상에서 직접 강 대표에게 연락하거나, 경남 삼천포 통영 심지어 전라도 쪽에서도 특이한 고기가 있으면 탑차에 실어 보낸다는 것.

그렇다고 마냥 갖다 주는 고기만 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강 대표는 매일 새벽 공동어시장 위판장이나 밤 10시부터 여는 부산시수협 남포동공판장을 직접 찾아 횟감으로 쓸 선도 좋은 고기를 직접 고른다. "비싸서 안 사는 경우는 없어요. 좋은 횟감이라면 아무리 비싸도 구입해서 단골들에게 제값을 받고 대접을 하지요."

여기에 피가 살에 묻지 않게 요령있게 생선을 장만하는 기술과 아끼지 않고 손님들에게 퍼주는 통 큰 심성까지 갖춰 문을 연 지 5년 만에 단골들이 급증, 이제는 식사 시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을 정도가 돼 버렸다.

흔히 선어회는 활어회보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강 대표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양식 고기를 절대 쓰지 않고 무엇보다 그날 그날 공수해서 쓰기 때문에 활어회 가격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이 집 선어모둠회는 소(2인용) 3만5000원, 중(3~4인용) 5만 원, 대(4~5인용) 7만 원이다.

"선어회는 물량 자체가 적어 이윤이 많지 않아요. 만일 돈이 되면 이런 집이 많이 생기지 않겠어요." 실제로 선어회를 취급하는 횟집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 충무동 '선어마을' 과 '거제횟집', 중앙동의 '중앙식당' '오뚜기식당', 그리고 자갈치시장의 '명물횟집'이 있다. 명물횟집은 너무 비싸다.

'선어마을'.

경남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 늘밭마을 '자연생활의 집'(2)

- 9박10일 자연 체험 프로그램 통해 건강 회복 
- 대부분 암환자 찾아와 가정서의 투병생활 예습
- 해발 450미터 맑은 공기 마시며 산속에서 기체조
- 매끼 정성 다하고 색다른 푸짐한 유기농 자연뷔페식
- 병마로 인한 조급함·두려움, 웃음치료·명상 등 통해 극복

'자연생활의 집'의 자연식 식단은 아침이 가장 푸짐하다. 직장암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19년째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송학운 원장과 자연식 식단을 개발한 그의 부인 김옥경 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연생활의 집' 송학운 원장은 암환자들은 예외없이 문의전화에서부터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난다고 했다. 이후 프로그램 첫날 얼굴을 마주 대해보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거나 어떤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이미 숱한 병원 치료와 민간요법 끝에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아요. 투병생활에 이골이 나 병이 하루 이틀 사이에 좋아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여전히 병에 대한 조급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송 원장은 암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우선 조급함과 두려움 그리고 이유 없는 분노를 하루빨리 버리라고 조언한다. 암은 감정의 절제 없이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병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생활의 집'에서 시행하고 있는 자연체험 9박10일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특별한 것이 없다. 암환자들이 마냥 여기 있을 수만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향후 각자의 가정에서 지켜야 할 생활법과 식사법을 미리 체험해보는 일종의 예습으로 보면 된다고 한다. 암을 먼저 극복한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줄이면 조금은 쉽게 투병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하루 일과는 이랬다. 오전 6시 맨손체조, 오전 7시30분 아침, 낮 12시30분 점심, 오후 5시30분 저녁, 오후 7시30분 송 원장의 건강강의. 나머지 시간은 산책이나 등산 등 자유시간을 갖는다.


맨손체조와 기(氣)체조

고교 체육교사 출신인 송학운 원장과 함께 오전 6시면 어김없이 맨손체조를 한다.


'자연생활의 집'은 양산 원동자연휴양림 뒤로 열린 길을 따라 4.5㎞나 되는 구절양장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야 만난다. 해발 450m 깊은 산속. 청량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공기는 아주 맑지만 산속이라 아직 춥다. 정면으로 토곡산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이곳은 주변 풍광과 앉은 터만 볼 때 도시인들이 한 번쯤 꿈꿔온 그야말로 대자연 속의 전원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전 6시. 고교 체육교사였던 송 원장의 구호 아래 맨손체조를 한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 말고는 대부분 참여한다. 절실한 목표가 있기에 다들 진지하다.

체조 말미엔 서로 어깨도 주물러주고 구호도 크게 외친다. 마당 한쪽 정자에 걸린 현판에 적힌 문구처럼. '나는 다 나았다!'


체조가 끝나면 약속이나 한 듯 대부분 발걸음을 산 쪽으로 옮긴다. 신선한 아침 공기에 맑은 새소리, 이 모두가 암환자들을 위한 숲치료제들이다. 20분쯤 쉬엄쉬엄 오르면 만나는 쉼터에서 기(氣)체조를 하기 위해서다. 이는 암환자들의 자발적인 행위이다.

간암 수술 후 2년 전 입소한 최고령 이훈경(82) 씨의 주도하에 이뤄진다. 이때쯤이면 쉼터 건너편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쉼호흡을 크게 하며 간절한 자기 암시에 들어간다. '우리는 어떠한 난관도 돌파한다. 마음엔 자신과 용기가 샘솟는다. 세포여 깨어나라'.

유방암으로 8년째 투병 중인 김금희(가명) 씨는 "새벽의 체조와 자연식 식단 덕분에 점점 몸 상태가 좋아짐을 느낀다"고 말했다.

기체조는 간암 수술 후 2년 전 입소한 최고령 이훈경(82) 씨의 주도하에 이뤄진다.

■웃음치료, 숲치료, 건강강의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웃음치료 강의도 열린다. 10년 전 직장암에 걸려 이곳에서 송 원장의 적극적인 삶을 배워 건강을 회복한 황재수(51) 씨가 강사로 나온다. 본업이 치과기공사로 웃음치료사인 그는 그 누구보다 실의에 빠져 있는 암환자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매 기수마다 자발적으로 환자들을 찾는다.

웃음치료 강의에서 크게 웃는 암환자들.

암환자들은 '명랑 바보'가 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그는 웃음과 음악은 투병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며 어른들이 따라 하기에는 유치한 노래와 율동으로 참석자들의 혼을 쏘옥 빼놓는다.

수술 후유증으로 아직도 기저귀를 해야 하는 그는 암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맑은 공기와 웃음이라며 바보처럼 자주 웃으면 몸속의 암이 유치해서 그냥 나간다며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웃을 것을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거울은 절대로 먼저 웃지 않는다"며 "거울을 볼 때마다 큰 소리로 웃으라"고 충고했다.   
 
숲치료는 송 원장과 같은 학교에서 같은 날 명예퇴직한 친구이자 동료 교사였던 하영욱 씨가 산행가이드를 하는 일종의 등산교실. 하 씨는 '자연생활의 집' 이웃에 살고 있다. 주로 남자 암환자들이 참여해 하 씨의 안내에 따라 보통 2시간에서 길게는 4시간 정도 산행을 한다. 위암환자 김길수(가명) 씨는 "산속에 살며 등산을 매일 하다 보니 몸이 아주 가벼워져 건강이 호전돼감을 느낀다"고 산행예찬론을 펼쳤다.

암환자들은 시간이 날 때면 등산을 한다. 산행 후 정면 저 멀리 토곡산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암환자들.

뭐니뭐니해도 '자연생활의 집'의 최고 인기 강좌는 송 원장의 건강강의. 매일 저녁 식사 후 오후 7시30분 열린다.

"지금까지 썼던 책 내용을 중심으로 자연식·등산과 운동·자연환경·심리(자신감) 등을 주제로 강의하는데 재수강자들이 많기 때문에 항상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돼 꽤 신경 쓰이지만 결국 환자 스스로가 해답을 찾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강의하고 있어요."

이날 강의는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마음에서 건강은 저절로 회복된다는 것이 주된 요지였다. 한 참석자는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암을 이겨낸 '인간승리' 송 원장님 강의는 절대로 빼먹지 않고 챙긴다"며 "큰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송학운 원장의 건강 강의. 암환자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자연식 식단이 보약이지요

모든 일과가 대자연 속에서 이뤄지는 '자연생활의 집'에 암환자들이 몰리는 진짜 이유는 송 원장의 부인 김옥경 씨의 정성 어린 자연식 식단 덕분이다.

송학운 원장의 부인 김옥경 씨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아침.

점심1.

점심2.





혹자는 채식이 곧 자연식이 아니냐고 문의하지만 엄연히 다르다고 김 씨는 답한다.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되 자연 그대로의 천연 소스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식이라 강조한다. 설탕 대신 천연꿀이나 호박조청을, 식초 대신 매실청이나 레몬즙을 쓰는 식이다. 표고버섯 다시마 양파 등을 말린 가루로 천연조미료를 만들고, 채소국물을 늘 주방에 갖춰 감칠맛을 내게 한다. 치자와 비트 등 식품에서 얻은 천연색소를 사용, 눈을 즐겁게 해 식욕을 돋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자연식을 한다고 해서 영양을 고려하지 않고 몸에 좋다는 음식만 먹는 것도 아니다. 영양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탄수화물 60%, 단백질 지방질 비타민 무기질 각 10%'가 이곳 '자연생활의 집' 자연식의 황금비율이다.

육류·생선류·계란·우유 등을 올리지 않는 자연식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단백질이나 지방질을 보충할까. 김 씨는 "단백질은 콩류로, 지방질은 견과류로, 비타민과 무기질은 채소류에서 섭취하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그럼 이곳의 하루 식단은. 모두 뷔페식이며 대개 13~15가지 음식이 제공된다.

아침은 탄수화물을 위주로 하되 단백질 무기질 지방질 비타민 등 5대 영양소를 두루 갖춘 푸짐한 식단이 마련된다. 이날은 통밀빵 밤 무화과 인절미 무순 알로에 사과 죽 삶은 고구마와 각종 야채가 나왔다. 점심은 하루 중 가장 포만감을 느낄 수 있도록 탄수화물 위주로 꾸며진다. 이를테면 풍성한 채소와 버섯 콩나물 밀고기 두부 잡채 같은 요리에 현미밥을 먹는다. 반면 저녁은 국수류나 수제비에 고구마 등을 곁들이는 간단한 메뉴가 나온다. 수면 상태에서 음식물은 위와 소화기관에 부담을 줘 아침에 그만큼 노폐물이 많이 생겨 개운한 아침을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자가 찾은 날 저녁엔 메밀비빔국수와 녹두송편, 녹두죽 그리고 각종 야채 등이 나왔다.

세 끼 모두 훌륭한 식사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맛과 정성이 가득했다. 여성 암환자들은 "매 끼니를 이렇게 내놓는 안주인 김 씨의 정성에 감복할 정도"라며 칭찬 일색이다. 이곳 암환자들은 일주일 정도 자연식을 하면 변이 달라지는 등 몸 상태가 나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김 씨는 "이달 중순부터 텃밭을 갈아 엎어 직접 채소를 가꾸게 되면 진정한 유기농 자연식 식단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 씨는 자연식을 어디서 배웠을까. 사연이 있었다.

남편 송 원장이 직장암 수술 후 처가 쪽인 경북 청도 산골로 가서 6개월 정도 생식을 했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자 한 지인이 자연식 요법을 하는 곳을 일러 주었다. 양산의 모 요양원이었다.

하지만 그땐 병치료로 집을 날리는 등 돈이 바닥난 상태여서 송 원장만 혼자 입소하고 부인 김 씨는 처가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처음 부부가 떨어져 있게 됐단다. 부인 김 씨는 이틀 만에 면회를 가 원장 부인에게 사정을 했고, 그게 받아들여져 요양원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됐다. 자연식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타고난 요리솜씨에 부지런함 그리고 남편을 위해 정성까지 담아내는 김 씨의 일솜씨에 감탄한 원장 부인은 아예 김 씨에게 주방장 역할을 맡겼다.

원래 이 요양원의 자연식은 서양에서 들여온 서양식 요리의 일종이었다. 틈나는 대로 김 씨가 한식으로 바꿔보니 환자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내친 김에 우리 체질에 맞는 자연식 식단을 하나씩 개발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송 원장 부부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식 밥상과 산속에서의 맑은 공기, 암을 이겨내야겠다는 긍정적 마음가짐이야말로 암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055)381-8153

밀고기를 만드는 김옥경 씨.

소독은 철저히. 150도에 맞춰 식기를 굽다시피 한다.


송학운 원장이 점심 식사 후 모처럼 마당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옥경 씨의 고무신이 눈에 띈다.

암환자인 부인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애처롭다.

아직 겨울인 산속에서 활짝 핀 꽃화분을 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암환자들. 꽃이 희망의 끈으로 보였다.


'자연생활의 집' 텃밭. 이달 중순부터 땅을 갈아엎어 유기농 야채를 재배할 계획이다.

현대의학도 포기한 환자들 대자연생활로 이긴다-자연생활의 집(1)
를 보시려면 여길 클릭하세요
http://hung.kookje.co.kr/464
 

경남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 늘밭마을 '자연생활의 집'(1)
                           -대자연 생활로 병마를 이겨내는 사람들

   

양산시 원동면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 '자연생활의 집'에 입소한 암환자들이 건너편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산에 올라 기(氣) 체조를 하고 있다.

 경남 김해에서 남편과 함께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권순자(47) 씨. 10년 전만 해도 그는 1년을 살기 힘들다는 암환자였다. 남편의 위장 내시경 검사에 동행했다 우연하게 난생 처음 받아본 내시경 검사에서 뜻밖에도 위암 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위의 상당 부분과 쓸개를 제거하는 대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이는 후유증이 너무 심했다. 메스껍고 구역질도 나고 밤엔 잠을 못 이뤘다. 그는 이러다간 병원에서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2차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도망치다시피 퇴원했다. 무엇보다 2차 항암치료를 해도 생존 확률이 절반이라는 병원 측의 설명이 못 미더웠다. 어린 두 딸은 울고 남편도 울었다. 그때 처음 뼈저리게 느꼈다. 암환자 한 명이 있으면 멀쩡한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난다는 사실을.

서울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김명희(58) 씨는 권 씨보다 정도가 심한 경우. 평소 병원 한 번 가본 적 없는 그는 8년 전 바이어와의 미팅 중 배가 아파 잠시 화장실을 찾았다. 항문으로 설사하듯 피를 쏟아냈다. 결국 그는 바이어와의 만남을 모두 끝내고 4시간 후 병원을 찾았다. 직장암 3기였다. 몸을 돌보지 않은 결과였다. 직장 제거 수술 후 건강을 되찾은 듯 했지만 4년 뒤 다시 몸이 안 좋아 병원을 찾았다. 이번엔 폐암이었다. 1년 뒤엔 부신암으로까지 전이됐다. 결국 대수술 두 번과 여러 차례의 항암치료로 몸은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실의에 빠진 두 사람. 그들이 우연히 문을 두드린 곳은 19년 전 직장암으로 6개월 선고를 받고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송학운(61) 씨가 운영하는 양산에 위치한 '자연생활의 집'.

권 씨는 서점에서 송 원장이 쓴 일종의 투병기를 보고, 김 씨는 TV에서 자연식으로 암을 이긴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보고서였다.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살 길을 찾던 그들에게 그 책과 그 프로그램은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양산 원동면 내포리 원동자연휴양림 뒤 토곡산 자락 해발 450m 산골짝에 위치한 '자연생활의 집'엔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찾는다. 현대의학이 포기한 사람들(20%), 수술 후 병원을 다니면서 몸의 균형을 되찾으려는 사람들(70%) 그리고 자연식 등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10%).

"이곳엔 암환자를 위한 특별한 비법이 없다." '자연생활의 집' 송 원장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식과 맑은 공기 속의 꾸준한 운동 그리고 병을 이겨내겠다는 긍정적 마인드가 비법이라면 비법"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1996~2000년 양산 덕계의 한 산기슭에서 '자연생활의 집'을 운영하다 주변에 공단이 들어서자 공기 좋은 지금의 이곳 산속으로 옮겨 9박 10일짜리 자연체험 프로그램을 무려 184회나 운영했다. 한 기수가 75명인 점을 감안하면 지금까지 1만4000여 명이 다녀갔고, 덕계까지 포함하면 2만 명에 육박한다. 이곳이 특히 세간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현대의학이 포기한 암환자들이 찾아와 건강을 회복하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일 이곳을 찾아 암환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산에 오르는 등 24시간을 보냈다. 역시 비법은 없었다. 굳이 찾자면 널리 알려진 대로 자연식과 맑은 공기, 그리고 긍정적 마음가짐이었다.

권 씨와 김 씨는 어땠을까. 권 씨는 수술 후 한 달 만에 이곳에 입소, 다섯 차례 송 원장의 9박 10일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말 입소한 김 씨는 12월 중순 CT촬영을 한 결과 신약이 나오면 연락하겠다는, 사실상 '치료 불가' 진단을 받았지만 현재 산 정상에도 오르는 등 건강한 생활을 하며 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난데없이 암을 만난 사람들은 십중팔구 평소 건강에 자신 있던 사람이랍니다. 화창한 이 봄,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은 건강할 때 챙기고, 혹 탈이 나면 대자연 속에서 정답을 찾으세요." 송 원장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뼈 있는 충고였다.


'자연생활의 집'의 점심 식사. 자연식은 암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대자연과 함께 하며 밥상과 일상에서 건강을 찾는다-자연생활의 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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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베티, 일본 미요코 "어머님 아버님, 제 한국요리 솜씨 기대하세요"


필리핀 베티(왼쪽)와 일본 미요코(오른쪽). 가운데는 박경숙 실기 선생님.

우리나라 사람들도 쉽게 따기 어렵다는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 시험.
한국산업인력공단 부산남부지사에 따르면 최근 3년간 한식조리기능사 시험 응시자의 필기합격률은 30~40%에 이르지만, 이론 시험을 통과한 수험생들만 볼 수 있는 실기시험의 평균 합격률은 겨우 15% 안팎에 불과하답니다. 10명 중 2명도 채 안 된다는 얘깁니다.

 시험의 특성상 독학은 사실상 불가능해 응시자들은 대개 일반 요리학원에 등록, 2개월 과정으로 이론과 실기를 배웁니다. 그런데도 이 정도 합격률밖에 나오지 않으니 꽤나 어려운 시험인가 봅니다.

 이와 관련, 지난 3월말 경남 함양에선 믿지 못할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한글과 우리나라말에도 서툰 외국인 결혼이민자 두 여성이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기 때문입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필리핀 출신의 데시에엠 베티(32)와 일본서 온 야마모토 미요코(40) 입니다.

 어떻게 해서 시험에 합격했냐구요. 이 두 아줌마는 함양군에서 군민들을 대상으로 매년 개최하고 있는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반에 등록했답니다. 이 과정은 군이 지역 특산물인 머위 두릅 참죽 등을 응용한 요리를 널리 알리기 위한 기초 단계로 8년 전부터 개설, 지금까지 시행해오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베티의 경우 딸 셋에 현재 임신 중이며, 미요코 씨는 슬하에 2남 2녀를 둔, 요즘 함양군으로 봐선 당연히 상을 줘야 할 다산(多産) 여성이라는 겁니다. 보통 우리나라의 젊은 주부라면 아이 뒷바라지 하느라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찬 악조건이지만 이들 두 외국인 여성은 애기를 업고서라도 수업에 참가하는 열정을 보여줘 주변 사람들의 감탄케 했답니다.

 베티와 미요코는 하나같이 "애기를 데리고 가면 실기의 경우 직접 해볼 수는 없지만 대신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선택"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그렇다면 베티와 미요코는 이토록 힘든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한식조리기능사 시험에 왜 응시했을까요.

 남편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음식을 배웠지만 하면 할수록 큰 벽에 부딪혔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나아가 시부모님에게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떳떳하게 대접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결국 한계에 이른 것이었죠. 마냥 인스턴트 음식이나 된장찌개 김치찌개만 늘 내놓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우리와 정서가 다른 필리핀이나 일본 음식만을 반복해서 상 위에 올릴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애오라지 남편만 믿고 이역만리 한국으로 날아온 이 여성들의 작은 몸부림이 결국 한식조리기능사 시험으로 귀결된 셈입니다.

  베티와 미요코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수줍으면서도 야무지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어버이날에는 한식조리기능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배운 여러가지 요리 중 하나를 골라 시부모님께 직접 해드리고 싶어요."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베티와 미요코의 작지만 아름다운 가족 사랑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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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신 3개월의 필리핀 데시에엠 베티 "좋은 며느리 아내 엄마 될래요"

주변 우려 불구 한식조리기능사 시험 당당히 합격
이론 및 실기 선생님과 남편 외조 덕분이라며 겸손
"이번엔 반드시 아늘 낳아야" 한국인 거의 다 돼
"직업도 갖고 싶고 온 가족과 함께 여행도 가고파"

현재 임신 3개월인 베티네 가족이 모처럼 집 근처 함양 상림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함양군 요리강좌에서 동료 수강생 아주머니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베티(가운데).

마냥 신이 난 막내 노미(4).

요리하는 베티.

 

베티(오른쪽)와 미요코.
오른쪽부터 베티, 박경숙 실기 선생님, 미요코.

 데시에엠 베티(32)의 첫인상은 사랑스럽다. 쌍꺼풀진 왕방울만 한 눈, 수줍은 듯하면서도 늘 떠나지 않는 미소. 그녀와 단 5분만 대화하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 필리핀 민다나오섬 출신인 베티는 농사를 짓는 부모님 아래 9남매 중 맏이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고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낮에는 조그만 마트에서 일하고 밤이면 여덟 동생을 돌봐야 하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

 한국과는 6년 전인 지난 2003년 인연을 맺었다. 신랑은 먼저 한국으로 시집간 같은 마을의 아는 언니 남편의 소개로 만났다.
 "사진을 봤는데 첫 인상이 좋았어요. 만나보니 괜찮았어요.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제가 잘 돼 고향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결심을 굳혔어요."

 전문대를 나온 남편과의 의사소통은 영어와 보디랭귀지였고 이마저 막히면 사전에 의지했다. 요리는 남편에게서 배웠다. 거창서 농사를 짓는 시부모님은 한 달에 두 번 찾아뵙지만 외국서 온 며느리가 뭘 하겠냐며 직접 요리를 다해 배울 기회가 없었다.

 낯선 땅 한국에서의 삶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타일 기술자인 남편을 따라다니며 일을 도왔다. 힘들었다. 하지만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 나아 계속 따라다녔다. 임신이 되면서 일은 그만 뒀다. 약간 무료했지만 조국 필리핀에서 온 여성들과의 모임에 나가면서 차츰 한국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시민연대'라는 단체에서 주최하는 한글공부방에도 나갔다. 당시엔 한글공부보다 필리핀 등 외국인 결혼이민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좀체 빠지지 않았다. 염불보단 잿밥이었다.

 한국 국적은 뒤늦게 취득했다. 결혼 후 2년이 지나면 취득 가능했지만 베티는 스스로 연기했다. 필리핀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베티는 딸 노미(4)를 낳고 비로소 한국인이 됐다.

 이후 베티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계기가 찾아왔다. 집 근처 성민보육원에서 외국인 이주여성들을 위한 한국어 및 한국요리 강좌에 우연히 나가면서부터였다. 보육원에서 이주여성을 담당하는 이휘숙 씨가 베티의 밝은 성격과 총명함을 알아보고 군에서 실시하는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반을 권했던 것.

 "처음엔 제가 어떻게 그런 시험을 칠 수 있을까 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곧 생각을 바꿨어요. 한국요리를 많이 배워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시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맛있는 요리를 대접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어요." 수업료 14만 원은 성민보육원에서 제공했다. 일반 요리학원의 경우 수업료(이론 실기 포함)는 대개 100만 원 안팎이다.

 올 1월부터 베티는 한식조리기능사 시험 수험생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웠다. 한글도 서툰 상태에서 시작한 이론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다. 포기하려고 했지만 이론 선생님인 이현지(창원전문대 외래교수) 씨가 큰 도움을 줬다.

 "생각해 보세요. 식품학 영양학 조리원리 등 준비해야 할 과목만 5개예요. 일반인들이 한두 달 공부해도 벅찬데 베티가 제대로 따라올 수 없는 것은 당연했지요. 여기에 군에서 배당된 이론 수업은 2시간씩 10번밖에 없었어요."

 이 교수는 시쳇말로 쪽집게식 문제풀이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베티의 경우 수업을 마친 후 별도로 과외를 하다시피 했다. 워낙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강해 이 교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시험이 임박했을 땐 최후의 수단으로 기출문제를 통째로 외우도록 했다.

 남편의 도움도 컸다. 어려운 단어가 나올 땐 일일히 도와줬고 집안일과 아기 보는 일도 거의 도맡아 했다. 이와 관련, 남편 임영노(39) 씨는 "뭐든 스스로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어서 제가 특별히 한 것은 없다"며 부인을 치켜세웠다.

 부산에서 본 첫 시험에선 합격선인 60점에서 7점이 모라자 쓴 잔을 마셨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 교수도 첫 결과를 보고 자신감을 가졌다. 보름 뒤 창원에서 본 두 번째 시험에선 당당히 합격했다. 이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의 '기적'이었다.

 이젠 실기 차례. 예시된 51가지의 한식요리 중 2가지를 주어진 시간 안에 완성해야 되는 시험이다. 역시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일정상 하루에 두 가지 이상을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실기 강사 박경숙(뉴영남요리직업전문학교 원장) 씨는 베티를 이렇게 떠올렸다. "항상 '선생님 못 알아듣겠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어요. 그래서 가까운 자리에 두고 특별지도를 했지요. 임신 중이라 오래 서 있지도 못하고, 아기도 가끔씩 데리고 와 요리하느라 아기보느라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최악의 조건이었지요. 동료들이 번갈아 도와주지 않았으면 아마 중도에 포기했을 거예요."

 실습 시험의 과제는 돼지갈비찜과 무쑥장아찌. 양념순서 요리과정 맛 색깔 위생 등 감독관이 까다롭게 채점을 했지만 베티는 덜컥 그것도 한 번만에 합격했다. 두 번이나 '기적'이 찾아온 것이었다.

 지난해 베티는 가정에 식구가 한명 더 늘었다. 그간 할머니집에 살던 전 부인의 딸 연정(12)이가 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말도 잘 듣고 동생 희정(6)이와 노미(4)를 잘 돌봐줘 무척 고맙다고 했다.

 베티는 이번 어버이날 즈음 해서 거창에 계신 시부모님을 찾아 한국요리를 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돼 따뜻한 가정을 꾸미고 싶어요. 직업도 갖고 싶어요. 그리고 항상 바쁜 남편과도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도 가보고 싶어요."

 그리곤 약간 나온 배를 만지며 "이번엔 아들을 낳아야 할 텐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문득 한국인이 다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티가 만든 잡채

베티가 만든 잡채(오른쪽)와 미요코가 만든 쇠고기 불고기.

 궁금했다. 사실 요리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래서 즉석에서 요리를 부탁했다.
잡채였다. "필리핀도 한국의 잡채와 비슷한 요리가 있어요."
 차이점은 우리가 흔히 쇠고기를 사용하는 데 반해 필리핀은 돼지고기와 양배추를 많이 넣는 것이 특징이다. 오이나 당근을 채 써는 솜씨나 당면을 삶고 찬물에 헹궈 양념해서 볶는 솜씨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맛은 우리나라 잡채와 큰 차이가 없다. 양배추가 많이 들어가 오히려 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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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2녀 둔 '또순이' 야마모토 미요코 "아이들은 요리사, 남편은 장금이래요"

통일교 신도...종교적 신념 때문에 한국과 인연
끊임없는 노력파...정이 많고 차분, 예의도 발라
취업 생각 없고 시부모 남편 아이 위해 요리할 터
"이 세상에서 뭐니뭐니해도 가정이 가장 소중"

'요리사' 엄마 미요코가 만든 스파게티를 먹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정겹다.
2층 난간 앞에서 포즈를 취한 미요코네 가족들.
함양군 요리강좌에 참여, 포즈를 취한 미요코와 동료.
셋째 동현(6)과 막내 동현(3). 표정이 영판 개구장이다.

야마모토 미요코(40)는 일본 지바현 출신이다. "도쿄와 가까우며 이승엽이 한때 맹활약했던 롯데 마린스의 본거지이자 나리타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에요."
 지바현을 모를 것 같은 기자에게 친절하게 막힘없이 설명하는 미요코. 마치 한국인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언어 구사력이나 정서 등 모든 면에서 그랬다.
 미요코는 독실한 통일교 신도이다. 그러니까 그의 한국행은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다.
 사회복지를 전공,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조그만 무역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미요코는 어느날 거리에서 통일교를 알리는 소식지를 우연히 접하면서 인생의 항로가 달라졌다.
 "지난 1995년 서울 잠실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렸어요. 당시 36만 쌍의 부부가 탄생했지요. 저희 부부도 그 중의 하나였어요. 부모님의 반대가 완강했어요. 통일교 자체를 반대했고, 무엇보다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심지어 저더러 미쳤다고도 했어요. 부모님이 저의 행복을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았지만 저 또한 종교적 신념 때문에 굽힐 수 없었어요. 제가 행복한 삶을 산다면 언젠가 저희 부모님도 저희들을 용서할 것이라 확신했어요."
 한국에서의 신접 살림은 남편의 직장 때문에 1997년 서울에서 시작했다. 2년간의 공백은 결혼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일본에서 몸조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편이 한국과 일본을 자주 오갔다. 5년 후 대구로 옮겨 1년 정도 살다 지난 2003년 남편의 고향인 함양에 정착했다. 남편은 현재 조경 사업을 하고 있다.
 슬하에 자녀는 2남2녀. 최은진(11) 은성(9) 동현(6) 효성(3). 우선 남편이 가급적 많은 아이를 원했고, 남동생만 하나 있어 약간 외로웠던 미요코 자신도 이에 동의했다. 다산을 할 수 있게 건강한 신체를 주신 부모님께 고맙다고도 했다.
 함양에 정착한 미요코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1층에선 시부모님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미요코 가족은 2층에 산다. 하지만 시부모님이 바쁘신 데다 아기가 4명이나 돼 사실상 독립된 삶을 살고 있다.
 함양에선 함양문화원의 도움을 받았다. 외국인 이주여성들의 적응을 도와주는 데다 한국어 교육도 새롭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식조리기능사 시험도 문화원이 권했다.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어 방문교사도 "미요코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심어줘 비로소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요코 역시 중도에 포기하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이현지 이론 강사가 "이왕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죠"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미요코에 대한 이현지 강사의 코멘트. "미요코는 모르는 부분은 포스트잇을 붙여 수업시간마다 일일이 물었고 일본어로 주석을 달아 외우고 또 외우더군요. 응용문제도 풀 수 있을 정도였어요. 베티는 반신반의했지만 미요코는 사실 합격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또 집에 가면 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며 수업을 마치고도 1시간씩 공부를 하고 귀가했어요."
 실기 강사 박경숙(뉴영남 요리직업전문학교) 원장의 미요코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말도 능수능란한 미요코는 물론 나이가 있어 그런 면도 있지만 차분하고 한마디를 해도 굉장히 예의가 발라요. 워낙 차분하고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시간 내 완성해야 되는 요리도 제한 시간을 넘기더군요. 좀 빨리 하라고 채근해도 잘 고쳐지지가 않았어요."
 미요코가 다시 받아 한마디 거든다. "저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빨리 해보려고 집에서도 한번 해봤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어요."
 가족들의 격려 또한 큰 힘이 됐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면 미요코는 지친 나머지 요리할 힘이 없어 양이 적더라도 그날 실습한 음식을 모두 가져갔다. 다행히 아이들은 "우리 엄마는 요리사"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자랑했고, 남편 최성태(40) 씨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음식이 있었냐"고 반문하며 "알고 보니 우리집에 몟장금몠이가 있었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늘도 미요코의 노력에 감복했는지 미요코는 일사천리로 이론과 실기를 가볍게 통과했다.
 최종 합격 후 미요코는 가장 먼저 실기 강사인 박 원장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 합격했어요. 그리고 선생님께 칭찬을 듣고 싶어요."
 발표날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박 원장은 "많은 합격생을 배출했지만 미요코처럼 정이 많고 예의 바른 학생은 사실 드물다"며 아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다.
 "미요코는 3번 정도 막내를 업고 실기 수업에 참가했어요. 아기 때문에 직접 요리 연습은 못하더라도 눈으로만 봐도 공부가 된다며 아기를 업고 꼼꼼히 눈여겨보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미요코는 이번 어버이날 시부모님께 식사를 대접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기 핑계를 대고 만날 얻어 먹기만 해서 사실 마음의 빚이 많았는데 앞으로는 지금까지 배운 한식을 응용, 제대로 된 효도를 하고 싶다고 활짝 웃었다.
 "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으로 취업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우리 가족과 시부보님을 위해 보다 다양하고 맛있는 한국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뭐니뭐니해도 가정이 제일 소중하잖아요."

미요코가 만든 쇠고기 불고기

미요코가 만든 쇠고기 불고기(왼쪽)와 베티가 만든 잡채.

"쇠고기의 경우 일본에선 특별한 날일 경우 쇠고기 불고기를 해먹고 보통 때는 주로 샤브샤브를 많이 해먹어요."
  미요코는 마치 TV 요리프로그램에 출연한 요리사처럼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쇠고기는 등심이나 안심으로 골라 얇게 저며 잔칼질을 한다거나, 고기는 한 점씩 떼어 양념장에 주물러 간이 고루 배게 한다는 등등. 완성한 쇠고기 불고기는 맛도 좋고 모양도 좋다. 시금치 당근 버섯 등의 색감은 미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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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오순도순… 부모님과 일본여행… 외국인도 설문화 배워야죠 
   
설이 코앞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설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다. 신문이며 방송이며 할 것 없이 사상 최악의 불황에 구조조정 명예퇴직 실업난 등 전혀 반갑지 않은 단어가 도배를 하고 있는데 어찌 명절 분위기가 나겠는가.

705호 김 부장 아저씨도,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 대오에 들어갈 판인 305호 막내딸도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고, 늘 자상한 웃음을 보이던 자영업 하시는 윗집 아주머니도 요즘 표정이 영 신통치 않다. 이는 비단 그들만의 사연은 아닐 터. 그들은 단지 표본 추출된 우리네 서민들의 자화상일 뿐이다.

하지만 살림살이가 팍팍하고 고단하고 춥더라도 설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아니겠는가. 지금 2500만 명이 마치 귀소본능을 지닌 연어 떼처럼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이 재연된다. 매년 반복되는 현상이지만 그들은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는 홍역을 치르면서도 길게는 10시간 이상 걸리는 여정을 무던하게 버티며 애오라지 고향으로 향한다.

차 안에서 장삼이사들의 생각 또한 천태만상일 듯. 학수고대하던 취업이나 시험에 붙은 사람들이야 발걸음이 무척 가볍겠지만 대다수의 필부들은 그다지 밝은 표정은 아닐 듯 싶다. 혼기를 놓친 노처녀 노총각들은 여전히 부모님의 등쌀을 부담스러워 할 테고 아직까지 많은 우리네 며느리들은 벌써부터 설 음식준비 및 손님맞이가 머릿속을 맴돌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뵙는다는 들뜬 기분에 자녀들은 차 안에서 내내 즐겁기만 하다.

시대가 바뀌고 설에 대한 인식이 유연해지면서 풍속도도 달라지고 있다. 설음식과 차례상을 주문하는 것은 이제 고전이 돼 버렸다. 호텔이나 유명 스키장 리조트에선 설날 아침 차례상을 제공하는 패키지 상품을 내놓았고 아예 설 연휴를 이용해 해외여행을 떠나는 가족들도 늘고 있다.

이번 설 연휴를 앞두고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다양한 가정들이 어떻게 설을 보내는지 한번 들여다봤다.

여전히 3대가 함께 거주하며 우리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충렬사 안락서원 김부갑 중경원장댁. 그들도 변하고 있었다. 며느리가 힘들다며 아들과 손자가 상을 차리는 것은 물론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그런 모습을 부모들은 당연시하고 있었다.

4대째 모태신앙으로 내려오는 개신교 집안 김경숙 씨네. 비록 종교 때문에 명절제사는 지내지 않지만 음식은 똑같이 한다. 2남4녀인 이 집은 이번 설날 아침 시집간 네 딸이 친정부모를 모시고 일본으로 온천여행을 떠난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잘 올리는 제사보다 살아계실 때 잘하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한국인 부인과 함께 사는 일본인 도미타 씨 가정도 찾아봤다. 설 연휴면 해외여행을 떠나는 여느 외국인 가정과 달리 그들은 한국 설음식을 직접 만들어볼 계획이다. 처음 입어본 한복도 너무 맘에 들어 이참에 장만할 거란다.

자, 이들 세 가족의 설날을 미리 들여다보자.


충렬사 안락서원 김부갑 중경원장댁

"명절증후군이요? 우린 그런거 몰라요"

5대째 명장동 거주, 강릉김씨 종가-사촌 등 친척 20여 명 찾아와 시끌벅적
명절증후군은 유대감 결여에서 나와-아들 손자 등 남자들이 설거지 등 도와

설을 쇠기 위해 키가 2m인 동국대 농구선수인 손자 김동량(맨 오른쪽)이 집을 찾아오자 가족들이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설 풍속도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가정도 있다. 바로 종손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가이다.

예부터 양반고을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밀양 안동 등지에선 아직도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 전통방식의 제사를 모시는 종가가 더러 있지만 도심에선 거의 찾기 어렵다. 이번 취재를 위해 그럴 가능성이 있을 법한 가정이 부산에 아직 있는지 동래향교 유림들에게 여쭤봤지만 찾기 어려웠다.

대신 3대가 함께 살며 제사를 모시는 가정을 소개받았다. 바로 충렬사 안락서원 김부갑(77) 중경원장 댁이다. 그는 부산시 지정 무형문화재 5호(대축) 기능 보유자이자 충렬사 전통 제향무형문화보존회 회장이다. 부산을 대표하는 유림의 어른인 셈.

강릉 김 씨 시조 연원세계 제39대 손인 김 원장은 현재 동래구 명장1동 주택에 외아들 부부와 손자 손녀 등 3대가 함께 살고 있는 소위 종손 집안이다.

과연 이 종가는 설을 어떻게 쇨까. "우리 집안은 5대째 이곳 명장동 주변에서 살고 있어요. 아직도 주변에 사촌 등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어 설 명절이나 기제사 때면 20여 명이 찾아 마루가 꽉 차서 시끌벅적하답니다. 손자들까지 포함하면 정말 정신이 없어요." 전통 제례의 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궁금했다. 그럼 차례 음식들은 어떻게 준비하는지. 옆에 있던 부인 정영수(77) 씨가 한마디 거든다. 그 또한 동래향교 여성유도회 회장을 역임한 후 지금은 고문으로 있다. "설 제수용품은 제가 시간 나는 대로 재래시장을 찾아 하나씩 장만하지요. 차례 음식은 수년 전부터 제가 건강이 좋지 않아 거의 며느리가 다해요. 수고가 너무 많아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며느리 최영순(48) 씨는 손사래를 친다. "저희 친정도 종가여서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어요. 음식은 모두 시어머니가 친정엄마처럼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지요. 매년 반복되는 일인 데다 남편과 아이들이 잘 도와줘 전혀 힘들지 않아요. 무엇보다 요즘은 조리기구들이 편리하잖아요."

항간에 들리는 며느리들의 '명절 증후군'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육체적 고통보다 저는 오히려 인간적인 유대감의 결여에서 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더 드는데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적들을 보면 반갑지 않나요." 이 말이 대견한 듯 시부모는 딸이 부럽지 않은 며느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게 옛날 방식대로만 있지 않았다. 종가도 변화하고 있었다. '남자가 어디 부모 있는 데서 설거지를…'이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은 발붙일 데가 없었다. 며느리에 대한 배려인 듯 제사 후 설거지 등 뒷정리는 아들과 손자가 도맡아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밤 12시에 지내던 기제사도 10시30분으로 앞당기고,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한번에 몰아서 올린단다.

시어머니 정영수 씨는 "사실 일이야 많지 않습니까. 저도 해봐서 알잖아요. 시대가 변하고 있지만 내색않고 묵묵히 해주는 며느리가 없으면 지금까지 지켜온 전통은 사라지잖아요."

정 씨는 한마디만 더 하자고 했다. 부산 농구의 명문 동아고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 동국대 농구부에 있는 손자 김동량 자랑이었다. 키가 무려 2m라고 했다. 알고 보니 한국 농구를 이끌 차세대 기대주였다. 들어올 땐 몰랐는데 나올 때 이 종가의 모두가 장신이었다.


김경숙 씨 네 자매와 친정 부모

"
훌륭한 제사보다 살아계실때 잘해야죠"

4대째 모태신앙 개신교 집안 네 자매, 친정부모와 첫 해외여행 위해 돈 모아
친척들 목회자만 5명 거의 당회 수준, 제수음식·절만 안할 뿐 다른 집과 비슷

시집간 네 자매와 부산을 찾은 친정부모님이 한복을 곱게 입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시집간 네 자매가 설날 아침 고향인 경남 통영 한산도에 계신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으로 2박3일 일정의 온천 여행을 떠나는 가족이 있다.

4대째 모태신앙으로 내려오는 개신교 집안의 네 자매는 김은순(54) 경숙(51) 임숙(48) 인숙(40) 씨. 원래 2남6녀로 오빠 상문(57), 다섯째 상덕(46) 씨가 있지만 이번 설에는 출가한 자매만의 행사로 치르기로 했다.

네 자매는 10여 년 전부터 십시일반으로 매월 돈을 모았다. 집안 대소사 때 남자 형제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것 같아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중 일부는 자녀 교육을 위해 1970년대 부산으로 이주한 친정 부모들이 8년 전 늘그막에 고향 한산도로 귀향할 때 살림살이 비용으로 쓰였다.

이후 네 자매는 평생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다 보니 그 흔한 해외여행조차 못해 본 부모님을 위해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계획했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아버지 김기정(84) 씨는 장로, 어머니 박다순(81) 씨는 권사를 역임했다. 하지만 최근 건강이 악화돼 장거리 여행이 불가능해 일본 온천여행으로 바꿨다. 공교롭게도 이들 네 자매의 시댁 어른들은 돌아가셨거나, 여건이 허락돼 여행을 떠나는 데는 아무 장벽이 없다.

흔히들 개신교인들은 명절 때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 네 자매는 단지 차례상을 차리고 절만 하지 않을 뿐 떡이나 전 등 명절음식은 똑같이 한다고 한다. 차례 음식이라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아 평소 먹고 싶었던 음식 등을 되레 더 많이 한다.

김기정 씨 가족은 알고 보니 통영에서 가장 먼저 개신교를 받아들인 가정이었다. 기정 씨의 선친, 다시 말해 경숙 씨 자매의 할아버지가 100여 년 전 선교를 위해 한산도를 찾은 호주 선교사가 마을사람들에게 박대받는 것을 보고 애처러워 식사라도 대접하기 위해 집으로 모셨다. 그것이 인연이 돼 하나님을 믿게 된 것. 이후 마당 한 쪽에 조그만 교회가 세워지고 마을주민들은 경숙 씨의 집을 '예배당집'이라고 불렀다.

설날 온 가족이 모이면 경숙 씨네는 예배문을 드리고 찬송과 기도를 올린다. 돌아가신 분의 유언을 떠올리고 후손들이 부끄럽지 않은 알찬 삶을 영위하도록 맹세를 한다. 그리곤 고스톱도 치고, 노래방도 가는 등 여느 가족과 큰 차이가 없다.

경숙 씨 가족 구성원은 모두 교회에서 직무를 맡고 있다. 큰언니인 은순 씨는 권사, 둘째 경숙 넷째 인숙 씨는 집사, 셋째인 마산 사는 임숙 씨는 부군이 목사로 사모를 맡고 있다. 사위 등 일가 친척들까지 포함하면 목회자만 5명이다. 모두 모이면 웬만한 교회의 당회 수준이다.

이번 설을 앞두고 경숙 씨 등 네 자매와 남자형제들은 미리 성묘를 다녀와 장남인 오빠 상문 씨 댁에 모여 설을 며칠 앞당겨 미리 예배를 드린다. 큰언니인 은순 씨는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위해 당신들의 삶을 희생해가며 반듯하게 키워주신 부모님께 진작 이런 자리를 마련해 드렸어야 했는데 여든이 넘은 지금에서야 하게 돼 정말 몸들 바를 모르겠다"며 "앞으로도 부모님의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자주 이런 행사를 가질 계획"이라며 활짝 웃었다.

친정 부모님과 함께하는 이번 설은 은순 경숙 임숙 인숙 네 자매에게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듯하다.
 
일본인 도미타 씨 가족의 설날

"일본인 남편도 한국 설문화 배워야죠"

2003년 항만IT회사 설립 부산 정착, 1929~45년 선친 군산서 교육자 역임 인연
"올핸 한국 차례음식 만들 계획", 취재위해 협찬받은 한복에 매료, 구입 예정

     한국인 부인과 함께 사는 일본인 도미타 씨 가족이 부산여자대학 다촌관 마당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복협찬=김현숙 한복연구소 '홍단'.
   일본인 도미타 씨 가족이 부산여대 다촌관에서 운치있는 자수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가오는 이번 설에는 온 가족이 모여 한국인들의 설날 음식인 산적과 전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사실 설이라 해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어요. 시장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사서 먹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남편, 아이들과 함께 시장에 가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들어 볼 거예요."

일본인 도미타 히라쿠(56) 씨네는 부산에 사는 다문화 가정이다. 부인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부인 구명희(46) 씨는 남편과 아들 도미타 데이빗(21·부산외대 컴퓨터공학과), 늦둥이 도미타 다니엘(10)을 두고 있다.

경북 대구가 고향인 부인은 일본으로 유학 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짖궂게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남편이 일본어 어학원 선생님의 친구였단다.

알고 보니 도미타 씨 가족은 한국과의 인연이 꽤 깊었다. 선친인 도미타 도시미츠 씨가 1929년부터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16년간 군산에서 교장선생님과 교육감을 역임했다.

해서, 8남매(4남4녀) 중 막내인 그와 바로 위의 형만 고향인 규슈 구마모토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형과 누나는 모두 전라도립병원에서 출생했다.

도미타 씨가 떠올리는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추억 한 대목.

"어렸을 때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울 땐 선친께선 항상 교육열이 높은 한국인들을 예로 드셨죠. 낮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일을 해야만 하는 한국 아이들은 밤이면 저희 집을 찾아 선친께 공부를 배웠어요. 한국인 부모들은 그들이 농사 지은 무 배추 감 등 농산물을 학비 대신 갖고 왔어요. 선친께선 그 농산물은 그들이 안 먹고 갖고온 것이라 절대 받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한국에서 배운 김장을 구마모토에서도 직접 담가 구마모토에 김장 문화 전도사 역할을 했어요. 해서 일본에서도 김치를 먹었지요."

이런 한국과의 인연으로 대학 졸업 후 도미타 씨는 옛 조양상선 일본지사에 취업, 17년간 근무한 후 지난 1994년 항만물류 및 선박자동화시스템 회사인 (주)토탈소프트뱅크로 스카우트됐다. 영어, 선박회사 근무 경력, 컴퓨터라는 3박자를 갖춘 덕분이었다. 부산과의 첫 인연이 시작된 셈이다. 여기서 도미타 씨는 이집트 두바이 말레이시아 등의 업무를 전담하며 9년간 근무하다 2003년 항만IT 외국인투자회사인 (주)IPS를 설립해 줄곧 부산서 생활하고 있다.

"예전엔 명절 때 주로 남편의 고향인 구마모토에 다녀왔어요. 하지만 최근 들어 생각이 좀 바뀌었죠. 한국에 살면서 한국을 잘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남편 생각도 마찬가지였어요."

도미타 씨네는 올 설 연휴땐 한국 차례 음식을 해먹고, 아이들 외가가 있는 경북 의성을 찾을 생각이다. 도중 신라 천년고도 경주도 들를 계획이다. 명절 때 교통 체증이야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크게 두려울 게 없단다.

6년 전부터 국제신문 애독자인 도미타 씨네는 사실 취재 때 처음으로 한복을 입어본다고 했다. 한복은 취재용으로 협찬받았다.

자녀들은 물론 도미타 씨도, 부인 구명희 씨도 "한복이 이렇게 예쁘고 좋은 줄 몰랐다"며 "가족들 모두 한복을 구입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번 설이 유난히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부산 산악계 히말라야 등반사
                           -①도전의 시작

"한계…불가능…,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 8번째로 오른 자랑스런 한국의 '77에베레스트 원정대'.
오색 룽다가 펄럭이고 있는 가운데 에베레스트 등정 후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서 철수하기 전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초체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기에 모두들 표정이 밝다. 뒷줄 왼쪽에서 4~6번째가 각각 부산의 전명찬(작고), 곽수웅,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작고) 대원이며,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영도 원정대장.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선 티베트의 북동릉 쪽과는 달리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04년 3월 대한산악연맹 부산연맹(이하 대산연 부산연맹) 총회에서 회장으로 오른 하해룡 회장은 취임일성으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고봉이라는 상징성 하나밖에 없는 에베레스트 대신 등반성과 후진양성을 위해 8000m급 다른 봉우리를 택하자는 일부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대산연 산하 시도연맹 중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지 못한 곳은 부산 대전 제주뿐이라는 사실을 접하고는 자존심 회복 차원에서 에베레스트로 결정됐다.

부산연맹은 부산시와 국제신문의 특별 후원으로 2006년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를 꾸려 2년 후인 2006년 5월 16일 마침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 부산연맹이 새롭게 거듭나는 토대를 구축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 베이스캠프를 떠나기 전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4~6번째가 각각 부산의 전명찬(작고), 곽수웅,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작고) 대원이며,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영도 원정대장.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선 티베트의 북동릉 쪽과는 달리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감을 얻은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는 이듬해인 2007년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 K2와 브로드피크에 이어 올해엔 마칼루와 로체를 단숨에 올라 부산 산악인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렸다.

세계의 지붕이자 자연의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히말라야는 산악인들에게 궁극적 목표이자 희망이다. 왜 산에 오르느냐는 물음에 조지 말로리는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다소 선문답적인 명언을 남겼다지만 일반 산악인들은 그런 질문을 가급적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결같이 '싫은 일을 왜 하겠어요'라고 말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인간의 한계를 몸소 체험하려 한다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그저 산에 가는 것이 좋고 오르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고 나아가 미래도 없는 법.

부산 산악인들의 지금과 같은 위상은 과거 선배 산악인들의 발자취가 큰 힘이 됐다. 그 발자취가 땀과 눈물이 뒤섞인 시행착오가 됐든 추위와 굶주림이라는 역경을 이겨내고 이뤄낸 불굴의 의지이든 선배들의 영향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와 늘 함께 해온 국제신문은 부산 산악인들의 영욕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네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히말라야의 정의  
넓은 의미 히말라야는 중앙아시아 거봉군 전체
그레이트·카라코람·힌두쿠시로 다시 세분화

 
우선 히말라야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6000만년 전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 세계의 지붕으로 우뚝 선 히말라야.

'만년설의 집'이라는 의미의 히말라야는 넓은 의미로는 인도 네팔 파키스탄 부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거봉군 전체를 의미하지만 현지에선 크게 '그레이트 히말라야', '카라코람 히말라야', '힌두쿠시 산맥'으로 구분해 사용된다.

그레이트 히말라야는 장삼이사들이 흔히 말하는 히말라야를 의미한다. 동쪽으로 부탄과 미얀마의 경계에서부터 서쪽으로 네팔 인도북부를 거쳐 파키스탄 일부까지 이르는 총길이 3000㎞에 이르는 대산군이다.

8000m급 히말라야 14좌 중 동쪽에서부터 캉첸중가(8586m) 마칼루(8463m) 로체(8516m) 에베레스트(8848m) 초오유(8201m) 시샤팡마(8027m) 마나슬루(8163m) 안나푸르나(8091m) 다울라기리(8167m) 낭가파르바트(8125m) 등 10개가 포함돼 있다. 이 8000m급 거봉 10개가 모두 네팔에서, 또는 네팔을 경유해야 등정이 가능해 일명 네말 히말라야로 부르기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샤팡마는 티베트에서, 낭가파르바트는 파카스탄에서 오른다.

  '검은 암석의 땅'을 의미하는 카라코람은 파키스탄 북부지역의 산군으로, 여기에는 '죽음의 산' K2(8611m) 브로드피크(8047m) 가셔브롬2(8035m) 가셔브롬1(8068m) 등 히말라야 14좌 중 4개가 포진해 있다. 총길이는 약 500㎞.

그레이트 히말라야에 비해 위도가 5도 정도 북쪽에 위치한 까닭에 고온다습한 인도양 기후의 영향을 덜 받아 매우 건조해 동식물이 생존하기 어려운 불모지대다.

또 다른 산군인 힌두쿠시는 파미르 남부에서 파키스탄 북부를 거쳐 아프가니스탄 중앙부로 뻗은 600㎞의 산맥.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따라 길게 도열돼 있다 보면 된다. 힌두쿠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넘어 인도를 침공했다 전해온다. 힌두쿠시의 최고봉은 티리치미르(7700m)로, 이곳에는 7000m급 산들이 많다.


#초창기 한국 히말라야 진출
학술조사·개척등반서 60년대 이후 극한 알피니즘 눈길
곽수웅 전명찬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부산 대표 참가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 벽에 걸린 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대원들은 비행기에서 술을 마셔 대부분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 대원들은 기자회견 후 청와대에 초청받고 지금으로 치면 올림픽 금메달에 해당되는 훈장까지 받는 칙사대접을 받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히말라야로의 진출은 자국내에서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그 등반영역을 확장하는 순으로 나타난다.

해외등반에 관심을 갖게 된 196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의 등산문화는 한국산악회와 대학산악부를 중심으로 국토규명 학술조사로 출발했다. 이후 설악 한라 지리산 등지에서의 적설기 등반과 암장 개척등반이 주를 이루면서 이러한 열기가 부산을 비롯한 지방으로 확산됐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 점차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내 산악계는 고전적 등반에서 탈피, 극한 등반을 추구함과 동시에 새로운 등반 대상지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점차 해외원정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히말라야 원정은 1962년 다울라기리2봉(7751m) 정찰대가 시초이다. 이 원정대는 다울라기리 남쪽 접근로의 발견과 6700m 무명봉을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0년부터 시작된 8000m급 히말라야 14좌는 티베트에 위치한 시샤팡마(8027m)만 미답봉으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이미 초등된 상태였다. 그만큼 출발점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다는 것.

두 번째 원정은 1970년 한국산악회 추렌히말(7371m) 동봉 원정대. 이때 첫 등정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원정사에 처음 이름을 올리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같은 해 로체샤르(8382m)를 시작으로 1971, 1972, 1976년 세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8163m)에 도전장을 던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마침내 1977년, 대산연이 파견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지구의 용마루에 올라섰다. 세계에서 8번째 등정국가로, 고 고상돈 대원은 58번째 등정자로 기록됐다. 서구 산악계가 1950년 8000m급인 안나푸르나를 초등할 때까지 55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반면 한국은 히말라야의 장을 연 지 불과 15년만에 개척기를 마감하고 세계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당시 김영도 대장을 비롯해 18명의 대원이 참가한 원정대에 대륙산악회 곽수웅(33), 청봉산악회 전명찬(25·작고)이 참가, 부산산악계의 역량을 펼쳤다. 안타까운 점은 엑셀시오알파인클럽 송준송(31)이 1976년 설악산에서 훈련 도중 눈사태로 동료대원 2명과 함께 사망해 부산 산악인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77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부산연맹의 대원으로 참여한 곽수웅(33 현 대륙산악회 고문, 왼쪽) 전명찬(25, 작고) 대원이 부산역에 도착한 후 환영식을 갖고 있다. 젊은 시절 곽수웅 씨는 현 롯데 자이언츠 4번 타자 이대호를 아주 닮았다.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한 곽수웅 대륙산악회 고문은 "당시 대원선발 과정이 워낙 까다로워 우스갯소리로 시험쳐서 뽑았다고 할 정도로 엄격했다"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54명이 5차 훈련까지 거친 끝에 18명으로 최종 결정됐다"고 기억했다.

곽 고문은 "국가적 차원의 원정대인 만큼 각 시도 연맹 소속 대원들을 골고루 선발하려 했지만 훈련이 워낙 힘들어 결국 서울 부산 충북 충남 경북연맹의 대원들이 네팔로 떠났다"며 "등정에 성공한 고상돈 대원도 고향은 제주였지만 충북연맹 소속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부산 산악인의 히말라야 최초 도전은 1972년 2차 마나슬루 원정대(대장 김정섭)의 대원으로 참가한 청봉산악회의 송준행(32)이다. 그러나 손준행은 등반 도중 캠프3(6500m)에서 발생한 눈사태로 일본인 1명 등 대원 5명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로 세르파 10명도 숨졌다.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 참사였다.

부산 산악계는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등정에 자극받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부산연맹과 부산학생산악연맹 그리고 전통의 산악회들이 히말라야로 잇단 출사표를 던지게 된다.

에베레스트 남동릉 캠프2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대원과 세르파. 뒤로 보이는 지점이 사우스콜이다.

77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사다리를 이용해 빙하지역을 오르고 있다.

# "히말라야 부산원정대 뭉쳤다" 서미트클럽 결성
   
2000년대 들어 부산 산악계는 지금까지 히말라야로 원정대를 지속적으로 파견하고 있다. 네팔지역 5개 팀, 카라코람 쪽인 파키스탄 2개 팀, 중국 지역 4개 팀 등 모두 11개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향했다.

무엇보다 눈길 끄는 점은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이 주도하는 '다이내믹 원정대'의 등장이다. 부산시와 국제신문의 특별후원으로 결성된 '다이내믹 원정대'는 지자체에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거봉 14좌 완등이란 목표를 세우고 2006년부터 에베레스트 K2 브로드피크 마칼루 로체 등 5개 거봉을 올랐다.

참가 대원들이 점차 늘면서 원정대원으로서의 경험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을 방지하고 대원들의 노하우를 결집시키는 방안이 논의되던 끝에 친목단체인 '서미트 클럽'이 최근 결성돼 지역 산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7월 창립 발기인대회를 가진 '서미트 클럽'은 지난 8월 31일 부산의 진산 금정산에서 창립 기념산행을 가졌다.

클럽은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에서 '다이내믹 부산'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원정대를 구성해 파견한 '2006 에베레스트', '2007 K2 & 브로드피크', '2008 마칼루 & 로체' 그리고 '2001 초오유' 원정대원들을 주축으로 구성됐다.

초대 회장은 2004~2006년 부산연맹 20, 21대 회장을 연임한 하해룡(59·대륙) 부산연맹 명예회장이 맡았다. 회원은 2001년 초오유 원정대장 김복우(55·봐인), 2006~2008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장 홍보성(52·부경대OB)을 비롯, 조창래(49·대륙) 박종일(47·상봉) 김진태(45·상봉) 하영호(44·다솔) 신용우(44·청봉) 김창호(39·부경대OB) 김희수(37·한오름) 권경일(36·대륙) 박정용(32·부산빌라알파인클럽) 정용석(32·한오름) 유향미(30·동주대OB) 서성호(28·부경대OB) 박주원(28·다솔) 이세현(23·해양대) 등. 원정대 취재를 동행한 언론계의 이흥곤(국제신문) 김백수 임혁규(이상 KNN)도 포함됐다.

서미트 클럽은 해외 거봉 등반의 인재풀외에도 고산등반과 도전 정신을 추구하는 청장년층을 위한 각종 등반 자료와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계획이다.
문의 박종일 총무(010-5780-3939)

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사진 제공=곽수웅 대륙산악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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