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르 단풍 시즌이다.
 산에 전혀 가지 않는 사람들도 연중 행사로 산을 찾는 시기가 있다면 아마도 이맘 때라 보면 된다. 그 만큼 흡입력이 크다. 여염집 아낙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는 시장통 아줌마도, 기력없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관광버스에 몸을 싣는 풍경이 이제는 자연스럽다.
 봄철 진달래와 철쭉이 온 산을 불태우는 시기보다 오히려 흡입력면에서 한 수 위인 것 같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만 앞세워 멋모르고 떠났다가는 단풍은 고사하고 실컷 고생만 하고 돌아오기 일쑤이다. 심지어는 진입도 못해보고 관광버스를 되돌려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번 주말 설악산이 좋은 예다. 한 아는 지인은 조금 늦게 도착하니 버스가 진입을 못해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은 버스를 되돌렸다 한다.
 단풍철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단풍 구경을 할 수 있을까. 잠시 되짚어보자.

 1. 단풍으로 유명한 산은 단풍 절정기엔 가급적 피하자.
 설악산 지리산 등이 단적인 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라땅 어디에서건 애오라지 그 명성 하나만으로 설악산과 지리산을 찾는다. 새벽에 일찍 도착했다면 그나마 괜찮지만 어정쩡한 시각에 도착하면 단풍 구경은 말짱 도루묵이다.
 차라리 약간 남쪽의 오대산이나 치악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그나마 단풍 구경을 할 수 있다. 오대산과 치악산도 설악의 단풍에는 비할 바 못 되지만 산세는 전혀 뒤지지 않는다. 단풍 또한 여느 산보다는 한 수 위다.

 2. 주말 대신 평일은 그나마 좀 낫다.
 평소 산을 타는 사람들은 단풍철엔 절대로 주말에 산을 가질 않는다. 대표적인 단풍 코스는 설악산 천불동계곡이나 지리산 피아골.
 국립공원은 덱이나 철계단이 있어 등산로 상에서 체증이 일어난다.

 두 사람이 교호할 수 있는 덱이나 철계단에서 걸음이 느린, 다시 말해 일년 중 한번쯤 산에 온다는 아줌마 부대가 앞서 간다고 상상해보자. 걸음걸이나 느린 데다 웃으며 서로 얘기한다고 도무지 앞으로 가질 않는다. 그렇다고 요령껏 새치기를 하고 싶어도 마주보는 쪽에서 계속 산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에 정말 성질 급한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기 마련이다.
 지난해 대둔산에 갔을 때다. 거의 50도쯤 되는 철계단 중간쯤에서 한 아주머니가 무섭다고 고개를 숙이며 주저앉아 버리는 상황이 발생해 거의 10분 동안 오가는 사람들이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일행들이야 안타까워했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3. 단풍 시기는 국립(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 물어봐라.
 언론에선 '이번 주가 절정이다'라고 보도를 하지만 사실 100% 정확하지 않다. 같은 산이라도 코스마다 단풍의 절정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정답은 거의 매일 해당 산을 오르내리는, 그렇지 않다면 산을 오르내리는 산꾼들과 하루종일 접하는 공원 관리소 직원들이 갖고 있다. 공원 관리사무소는 114에 문의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매주 산행 기사를 보도하는 국제신문 산행팀에 문의해도 소용없다. 산행팀은 요즘 하루 평균 4~5통은 받는다. 어차피 산행팀도 공원 관리사무소에 문의해서 답을 해주는 전달자일 뿐이다.

 4. 산 아래와 산속의 단풍 절정기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지난해 계룡산에 갔을 때. 산 아래엔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지만 산정 쪽엔 사실상 겨울산이나 다름없다.

 흔히 단풍산이라 불리는 내장산이나 백암산을 예로 들어보자. 두 산 모두 진입로에는 단풍 터널이 생길 만큼 입구부터 감탄에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같은 시기 산속은 단풍이 아예 없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그만큼 차이가 많이 난다.
 반대로 산속에 단풍이 만개해 있으면 산 아래엔 단풍이 거의 없다.
 이 때문에 단풍 관련 뉴스가 나오면 산속인지 산 아래인지 정확히 구분을 해야 한다. 하지만 뉴스도 이렇게 구분해서 보도하지 않는다. 그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등산을 하는 산꾼들을 위해서인지, 등산은 하지 않고 산 아래 단풍만 구경하는 사람들을 위한 뉴스인지 TV뉴스가 속시원하게 보도하지 않는다.

 5. 과대포장된 단풍 산, 뜻밖의 단풍 산도 있더라.
 상당히 조심스렇지만 경험한 사실을 그대로 적어 본다.
 흔히 담양 추월산(秋月山)을 두고 단풍으로 화사하게 단장한 모습이 아름답고 은은하게 내리 비치는 달빛 아래의 자태가 매혹적이라고 한다. 이름에서 가을 추, 달 월 자가 들어가지 않는가.
 하지만 추월산은 단풍 나무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동행한 한 산꾼은 발아래 멋진 담양호가 없었더라면 담양군이 어떻게 쏟아지는 불만을 무마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름을 그대로 믿고 단풍 구경을 하러 추월산에 가는 것은 한번쯤 말리고 싶다. 테마를 '기암괴석과 발아래 펼쳐지는 담양호의 수려함'이라고 바꾸면 괜찮을 듯하다.
 붉은 적, 치마 상 자를 쓰는 무주 적상산도 기대 만큼은 사실 못하다. 매년 이맘때 치마바위 주변에 단풍이 물들면 다소곳한 여인네가 붉은 치마를 두른 듯 온 산이 활활 타오른다고 한다. 누구나 한번쯤 치마바위 주변에 산이 붉게 물든 사진을 한번쯤 봤을 것이다. 그리고는 마치 산 전체에 각양각색의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 같다고 한다.
 솔직히 그 정도의 단풍산은 찾아보면 적지 않다.
 경북 봉화의 청량산이나 호남의 강천산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끝으로 국제신문 산행팀이 유명세는 타고 있지 않지만 괜찮은 두 개의 단풍산을 소개한다.
 무주의 석기봉과 진안의 운장산이 바로 그것이다.

석기봉은 해발 800m대의 산 중턱 이상까지 단풍나무 군락지여서 단풍 명산 목록에 새로 추가해도 될 듯하다.

 백두대간 삼도봉과 민주지산의 중간에 위치한 석기봉(1180m)은 해발 800m대의 산 중턱 이상까지 단풍나무 군락지가 있어 단풍 명산 목록에 새로 추가해도 될 듯하다.
 마이산 구봉산과 함께 진안의 3대 명산으로 손꼽히는  운장산(1126m)도 빼어난 조망과 함께 단풍을 맘껏 즐길 수 있다. 두 산은 무엇보다 여유있게 산행을 하며 단풍을 볼 수 있다.

                          운장산도 단풍나무가 은근히 많은 단풍산으로 손꼽아도 될 듯싶다.

 

 단풍철에는 등산객들이 한꺼번에 대거 몰리는 단풍 명소보다 단풍이 약간 적어도 한적하면서도 여유있게 산행을 할 수 있는 산이 좋습니다.

단풍산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단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혹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서는 자신들만 알고 있는 단풍산을 댓글로 올려주시겠습니까. 동네 뒷산도 좋습니다.

 국제신문 산행팀이 현재 매주 한 번 소개하는 기획물인 '근교산&그 너머'는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어느새 훌쩍 넘어 현재 600회를 앞두고 있다. 전국의 모든의 시리즈 기사 중 최장수를 달리고 있다. 매주 한 번 게재될 때마다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이 기록은 언론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지금이야 신문을 대표하는 시리즈 기사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돌이켜보면 정말 곡절도 많았다. 내부적으론 너무 오래 됐으니 이제 막을 내리자는 고비를 두 어 번이나 넘겼고, 외부적으론 질시의 대상이 돼 한동안 산행 안내 리본이 난도질 당하는 아픔도 수 차례 겪었다.
 거쳐간 기자만도 무려 7명. 현재 담당까지 포함하면 8명이다.

 그동안 소개됐던 기사를 새롭게 엮은 책만 해도 무려 10권이다. 손꼽아보면 '다시 찾는 근교산' 상긿하, 상긿하를 한 권으로 묶은 하이라이트 격인 증보판, '新근교산' 상긿하와 역시 증보판, '신나는 근교산', '야호! 근교산', 그리고 기자가 쓴 '원점회귀 근교산' 상,중이 그것이다.
 신문에 보도된 상세한 산행기사를 보고, 산행팀이 묶어놓은 안내리본를 확인하며 걷는 산행문화는 국제신문 산행팀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보면 된다.
 하지만 산행팀은 이따금 독자들이나 지인들로부터 사석에서 이런 불만 아닌 불만을 듣는다.

 내용이 무미건조하다는 것이다.
 좀 더 살을 붙이자면 산행기사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객관성의 담보라는 대의명분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딱딱한 숫자와 방향 안내만 시종일관 반복되고 있을 뿐 무엇 하나 감동으로 다가오는 게 조금도 없다라는 것이었다. 또 적어도 신문이나 서적의 활자로 인쇄될 정도라면 좀 더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해야 더 잘 팔릴 것이라는 고언도 적지 않게 들었다.
 일리있고 고마운 지적이다. 하지만 기자는 산행기를 '떡'에 비유해 그같은 지적에 답하고 싶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사진으로 포장된 타 매체의 산 관련 기사는 '보기 좋은 떡'인 반면 건조해 심지어 목이 메이기까지 한 국제신문 산행기사는 '먹기 좋은 떡'이라고.

 이렇게 묻고 싶다. 그 '보기 좋은 떡' 다시 말해 화려한 사진과 산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 그리고 개괄적인 코스, 가볼 만한 맛집 등으로 채워진 기사를 갖고 과연 초보자가 산행을 할 수 있는 지. 한 발 더 나아가 '월간 산'을 비롯한 산 잡지에 실린 기사를 보면서 과연 초보자가 산행을 완주할 수 있는 지. 100% 불가능하다.

 월간지는 일반 산악회의 산행대장급이나 노련한 산꾼들에게 도움이 되지만 초보자에겐 실제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중간에 갈림길만 하나 나와도 당황하게 되는 건 산을 조금이라도 다녀본 사람이라면 수긍이 할 듯싶다.
 하지만 국제신문 산행기사는 가능하다. 기사 속에 '~갈림길. 여기서 좌측으로 10분쯤 힘겹게 오르면 어디어디에 닿고~'하는 식으로 아주 건조하게 전개되는 국제신문 산행기는 초보자도 산행을 완주하게끔 도움을 준다.

 산행기의 객관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먹기 좋은 떡'인 국제신문 산행기는 초보 아줌마 산꾼들도 자녀와 함께 산행을 무사히 마치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국제신문의 근교산 시리즈가 전국의 독자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비결은 현지 취재에 따른 철저한 현장답사와 산행 후 미비점을 자료분석과 함께 전화로 재차 확인하는 취재의 기본을 한결같이 유지한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숨은 계곡과 능선이 지면을 통해 새로운 등산로로 등장하면 산행에 나서고 싶어도 산길을 몰라 감히 떠나지 못했던 초보 산꾼들도 누구나 쉽게 국제신문 리본을 보고 산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초보 산꾼은 물론 베테랑 산꾼들도 '이곳에 이런 코스도 있었나'라며 감탄을 잊지 않는다.
 간월산 공룡능선, 가지산 북릉, 천성산 중앙능선, 신불산 홍류계곡, 밀양 구천산 정승봉, 배내골의 배내봉 등 국내 주요 산 전문 사이트에서도 등장하는 이런 명칭은 바로 국제신문 산행팀이 개척해 명명한 것이 보편화된 것이다. 얼핏 30개는 될 법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산행기를 보고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산행이 가능한 산행기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국제신문 산행팀이 개척하고 명명한 간월산 공룡능선.


대규모 억새군락지인 화엄벌은 지난 1999년 처음으로 고산습지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한동안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화엄벌은 펜스 덕분에 그나마 보호돼다 지난 2002년 당시 환경부로부터 '화엄늪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화엄벌 억새는 신불산 억새와 함께 키가 작은 것으로 유명하다.



신라 원효 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1000명의 스님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성인이 되게 한데서 붙여진 이름양산 천성산(千聖山).

 원효는 이곳 천성산에 불국토를 꿈구고 89개나 되는 암자를 세웠다고 전해오지만 지금은 내원사 원효암 홍룡사 노전암 등 20개 가까운 암자들만 산문을 열어놓고 있다.
 정상에 군부대에 있어 아쉽기는 하지만 천성산은 산세가 빼어나 사시사철 많은 산꾼들이 즐겨찾는 명산으로 손꼽힌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만산홍엽을 이루고 여름에는 내원사계곡 홍룡폭포 무지개폭도 등 계곡산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가을이면 단풍과 더불어 화엄벌의 억새 장관이 산꾼들을 불러 모으고 겨울이면 내륙에선 아주 드물게 동해의 일출을 빨리 볼 수 있어 역시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그 중에서도 화엄벌 억새가 가장 유명세를 타 가을이면 유독 많은 산꾼들이 특히 많이 찾는다.
 10여 년전부터 전국의 산을 소개하고 있는 국제신문 산행팀은 천성산을 지난 2001년 처음 소개했다. 지금이야 이따금씩 단발로 산을 소개하는 신문이 있긴 하지만 당시로선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신문 한 면을 할애하는 것은 국제신문이 유일했다.
 여기서 잠시 이창우 산행대장의 입을 빌린다.
 당시 이 코스를 소개한 이창우 산행대장은 천성산 화엄벌이 신문에 보도된 후 지인들과 함께 다시 화엄벌을 찾았다. 하지만 화엄벌은 억새 탐승객들로부터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억새군락지로 안으로 들어가 많은 등산객들이 동그랗게 자리를 잡고 술과 가져온 음식을 곁들이며 화엄벌을 훼손하고 있었던 것. 더욱이 당시엔 지금처럼 쓰레기를 되가져 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대부분 갖고온 음식물 쓰레기를 그대로 방치한 채 하산을 해 화엄벌은 순식간에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천성산 화엄벌을 소개한 산행팀은 이같은 사실을 양산시청 홈페이지에 알리고 화엄벌 보호를 위해 펜스와 같은 안전시설물의 설치가 시급하는 글을 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뒤 얼마 안돼 고맙게도 지금과 같은 반반한 시설물은 아니지만 출입을 제한하는 시설물이 설치됐다.
 지난 1999년 처음으로 화엄벌이 고산습지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그간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던 화엄벌은 펜스 덕분에 그나마 보호돼다 지난 2002년 당시 환경부로부터 '화엄늪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이를 알리는 안내판과 함께 지금과 같은 멋진 울타리가 다시 설치된 것이다. 지금은 화엄늪 감시 초소까지 생겨났다.
 산을 사랑하는 산꾼의 입장에서 본 작은 관심이 억새군락지인 화엄늪을 살리는 단초가 된 하나의 작은 사례인 것이다. 아래는 화엄벌의 또 다른 사진이다. 마음으로 담아가시길.


 얼마 전 '부산 5산 종주'를 세 차례에 걸쳐 끝낸 기자는 두 번째 구간 마지막 봉우리인 부산 기장군 철마산을 어둠이 시작되는 오후 7시께 올랐다.
 조그만 정상석과 커다란 정상석이 나란히 서 있었다. 문득 기자는 3년 전 이들 정상석 때문에 큰 곤혹을 치렀던 생각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산행팀은 3년 전인 2005년 3월 거문산~철마산 코스를 소개했다. 당시 산행팀이 철마산에 올랐을 땐 지금의 커다란 정상석 대신 바로 옆의 조그만 정상석만 하나 달랑 있었다.
 문제는 산행팀이 다녀간 뒤부터 신문에 소개되기까지의 10일 정도 되는 기간 중에 부산의 '철마거문산악회' 회원들이 조그만 정상석 바로 옆에 커다란 정상석을 세웠다는 것. 산행팀은 거문산~철마산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평소에는 전혀 취급하지 않던 정상석 사진을 그날따라 신문에 게재까지 했으니 여러 곳에서 문의전화가 올 수밖에.
 전화내용이 거의 다 이랬다. "산행팀 정말로 철마산에 간 것이 확실합니까" 아니면 "신문에 난 그 사진은 언제적 사진입니까". 기자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한 것은 당연지사.

 신문을 보고 철마산을 찾은 한 지인은 신문에도 없는 커다란 정상석이 새로 생긴 사실을 보고 그날 정상에서 모두들 "국제신문 산행팀이 정말 다녀간 것 맞냐"는 뼈있는 농담을 했다고 전했다.
 아마 문의전화가 한달쯤 계속된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문제가 된, 신문에 보도된 그 사진.


2007년 5월 두 번째 올랐을 때. 그 때는 철마산~백운산 코스였다. 철마산 정상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코스였다.
지난 9월 세 번째 올랐을 때. 정상석 뒤로 안내판도 새로 생겼다.
철마산에서 내려오면서 바라본 부산의 야경. 맞은편으로 백양산(왼쪽)과 금정산(오른쪽)이 보인다.

 우리 사회에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한자가 터줏대감처럼 굳굳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절집이다.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한자로 '아무개 山, 무슨 寺'라고 적힌 일주문을 시작으로 줄곧 대웅전(大雄殿) 비로전(毘盧殿) 명부전(冥府殿) 등이라 적힌 편액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편액은 그래도 그나마 좀 나은 편.
 문제는 기둥에 장식으로 내걸린 현판에 적힌 글귀인 주련(柱聯). 한시(漢詩)의 연구(聯句)나 부처님의 진리, 당대 선지식의 절창이 주를 이루는 이 주련을 두고 호사가들은 인간과 인생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장삼이사의 입장에선 사실 '그림의 떡'. 한문깨나 하는 사람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거의 두 손을 들고 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속된 말로 '쇠귀에 경읽기' 아닌가.

 이러한 모순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있다. 이 암자는 들어서면서부터 편액이나 주련이 모두 한글로 적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웬지 포근하게 다가온다.

 천년고찰 범어사 산내 암자인 금강암(金剛菴)이 바로 그렇다. 범어사에서 금정산 북문으로 가는 초입에 위치해 있는 금강암은 범어사 일주문에서 넉넉잡아 15분이면 닿는다. 한글로 '금강암'이라 적힌 조그만 팻말이 길섶에 보여 찾기도 어렵지 않다.

금강암에서 본 주련을 잠시 인용하면 이렇다.

'즐거움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괴로움도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밉고 고운마음 모두 벗어버리면
 언제나 고요한 참마음이라네'

 '자비로운 그 손길이 참다운 불심이요
  꾸밈없는 큰 미소가 더없는 진리로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자로 된 부처님 말씀보다 이처럼 마음에 쏙쏙 와닿는, 읽기 쉬운 한글로 된 주련이 아마도 일반 신도의 가슴에 오랫동안 각인돼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할 듯싶다. 

 
 - 잠시 금강암의 연혁을 살펴보자.
 금강암은 범어사가 1901년 선찰대본산으로 지정되기 전 당시 주지였던 오성월 스님이 범어사를 참선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1890년 당시 한국 최고의 선승이었던 경허 스님을 모셔 선원을 최초로 개원한 곳이다. 그러니까 금강암 내 금강선사는 범어사 최초의 선원이었던 것이다.
 이후 지금의 계명암과 내원암 등 산내 암자에 선원이 개설돼 20세기 초에는 범어사에는 9개의 선원이 운영됐다 한다.

 - 그렇다면 금강암의 한글 편액과 주련은 누구의 솜씨일까.
 금강암은 이후 평범한 작은 암자로 유지돼다 1980년 후반부터 서벽파 스님이 주석하면서 일신우일신하게 된다. 맏상좌였던 정여 스님이 금강암 감원(절의 살림살이를 하는 스님)을 맡으면서 중창불사 계획을 세워 1984년 8월부터 1991년 4월까지 8년간 불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큰법당을 비롯 종무소 요사채 해우소 등 가람으로서의 골격을 새롭게 갖췄다.

 정여 스님은 1991년 3월 법당 회향을 앞두고 대웅전 등에 걸린 한문으로 된 편액이나 주련이 너무 어려워 일반 신도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암자 내 모든 편액과 주련을 과감하게 한글로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한 지역 불교계 인사는 "당시 금강암 한글 편액과 주련은 우리나라 최초였으며 획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금강암 감원으로서의 역할을 끝낸 정여 스님은 1991년 음력 4월 초파일을 보내고 다음날 저녁 아무에게도 귀띔을 하지 않고 방을 비우고 홀연히 잠적했다. 스님은 쌍계사 금당선원에서 1000일 동안 절문을 나서지 않고 애오라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후 1995년 7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스님은 "감원으로 8년 동안 불사를 하면서 사바세계와 물건값을 흥정하는 등 마음 에 때가 너무 많이 끼어 1000일 동안 용맹정진에 들어가 참선으로 그 때를 깨끗이 지우고 왔다"고 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 정여 스님과 기자와의 작은 인연 하나.
 기자는 지난 2002년부터 약 1년간 문화부에서 음악과 종교를 담당했다. 당연히 범어사는 기자의 출입처 중의 하나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범어사는 재무승 국고보조금 횡령사건 등으로 한동안 바람 잘 날이 없을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담당기자로서 당연히 이와 관련한 내용을 기사로 작성했다. 하지만 일부가 사실과 달라 혈기 왕성한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매일 아침 7시에 그것도 3일 연속 항의 전화를 받았다.
 기억컨데 어느날 범어사에서 대책회의가 열려, 그 내용을 골자로 그날 곧바로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그 대책회의 이후 상황이 돌변해 그만 기사내용의 일부가 오보가 돼 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기자로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책회의 내용을 제보한 그 어떤 분이 상황이 변한 것까지 챙겼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보자 또한 절집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또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수습은 해야 했다.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선은 그 젊은 스님이 매일 아침 전화를 걸 태세였다. 
 종교를 소재로 기사를 쓰는 것은 잘 해야 본전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싶다. 

 고민끝에 기자가 사실을 불교계 한 지인에게 털어놓자 그는 웃으며 "그 스님 정말 참을성이 많구만. 새벽 4시에 예불을 올리고 나서 민간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무려 3시간을 참았네"라고 농을 건넨 후 스님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스님이 바로 정여 스님이었다.

 부산시청 앞 여여선원을 찾아간 기자가 당시 선원장이던 정여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눈을 감고 다소곳이 경청하던 스님은 직접 찾아가자며 즉석에서 범어사에 전화를 걸어 주지 스님과의 약속을 정했다. 그리곤 직접 쓰신 시집 한 권도 주셨다.
 약속일은 다음날 오전 8시. 정여 스님과 기자 그리고 당시 범어사 주지스님 세 사람은 주지실에서 마주 앉았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얼굴을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대화가 오가자 당시 주지 스님은 "바쁘신 기자님께서 아침 일찍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의외로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해줘 오보 건은 그날 매조지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이 있은 지 6년 뒤인 지난 3월 6일 정여 스님은 범어사 주지실의 주인으로 변신했다.
 무식한(?) 신도들을 위해 지난 1991년 법당 편액과 주련을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한글로 바꾼 선각자 정여 스님. 스님은 6년 전 매서운 찬바람이 귓가를 때리던 겨울 아침 기자를 위해 기자와 함께 범어사 산문을 들어선 그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까. 사뭇 궁금해진다.

지난 3월 범어사 주지로 선임된 정여 스님이 경내 탑전에서 취임법회인 진산식을 거행하고 있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에 위치한 관룡사는 신라 천년고찰입니다. 관룡산 기슭에 위치한 관룡사는 원효 대사가 명명했습니다. 원효는 화왕산 정상의 3개의 못인 용지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관룡사(觀龍寺)라 명명했다 전해옵니다. 관룡산 병풍바위를 지나 만나는 구룡산(九龍山)이란 이름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화왕산과 능선으로 이어진 관룡산은 지금이야 산이름이 존재하지만 오래 전에는 크게 봐서 화왕산의 한 봉우리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많은 산꾼들이 창녕읍 화왕산 도립공원에서 환장고개를 거쳐 화왕산성에 오른 후 드라마 허준 세트장을 지나 관룡산, 관룡사로 하산합니다.






산중에 앉아 사바세계를 굽어보는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의 장엄한 모습에 자뭇 고개가 숙여진다.

아담한 규모의 절집 관룡사에는 네 점의 보물이 있습니다. 관룡사 대웅전(보물 212호), 약사전(보물 146호), 약사전 내 석조여래좌상(보물 519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295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 세 보물은 경내 있지만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절에서 산으로 넉넉잡아 30분 정도 올라야 만날 수 있습니다. 산중에 앉아 사바세계를 굽어보는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의 장엄한 모습에 자뭇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관룡사에서도 보입니다. 대웅전 우측 요사채 한 귀퉁이에서 서서 산으로 바라보면 능선 사이로 조그맣게 확인됩니다.  

관룡사 약사전과 약사전 내 석조여래좌상. 둘 다 보물이다.
                    약사전 내 석조여래좌상.
관룡사 대웅전.

관룡사의 명물 석장승.

 관룡사의 명물 석장승도 꼭 찾아봐야죠. 절과 대형 주차장의 중간쯤 계곡 옆에 위치해 있습니다. 왕방울 눈, 주먹 코, 튀어나온 송곳니 등의 모습이 우스꽝스럽지만 절의 수호신으로 비보(裨補) 역할을 합니다. 지난 2003년 9월 태풍 '매미' 때 유실됐다가 복구를 위해 위장 보관하던 중 도난당한 후 2005년 2월 대전에서 회수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장면들을 간혹 봅니다.
 독특한 형상의 나무나 날짐승 들이 대부분이죠. 흐뭇할 때도 있지만 속된 말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지리산 산행 때 만난 다람쥐와 한라산에서 본 까마귀가 바로 좋은 예인듯 합니다. 백무동과 장터목을 잇는 소위 하동바위 코스 중간쯤에는 참샘(1197m)이 있습니다. 하산을 기준으로 할 경우 소지봉(1312m) 바로 아래 위치해 있습니다.










 참고로 함양사람들은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선 오도재를 넘어 이곳 백무동에서 지리산 천왕봉으로 올랐다고 합니다.
 지리산은 영남 사림의 정신적 고향으로 숭앙돼 사림파의 시조이자 정신적 지주인 점필재 김종직은 두류산 기행기인 '유두류록(遊頭流錄)'을, 그의 제자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을 썼다고 합니다.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후세에 함양사람들은 점필재와 김일손이 나귀를 타고 머슴과 함께 오른 곳이 백무동, 다시 말해 하동바위 코스로 추정합니다.
 하여튼 함양사람들은 조선시대 때 양반들은 함양땅에서 오도재를 넘어 백무동으로 올랐고, 아랫것들은 함양을 제외한 나머지땅에서 지리산에 올랐다고 농담삼아 자랑합니다.

 다람쥐 소개하는데 무슨 사림이 어떻고 점필재가 어떻고 등등 서두가 길었네요.
 다시 참샘으로 돌아와서, 예부터 물맛이 특히 좋기로 소문난 참샘은 산꾼들의 휴식처였죠. 그러다보니 간식으로 과자와 빵 등을 먹었죠. 이때 부스러기가 조금씩 떨어지자 근처의 다람쥐들이 와서 먹었죠. 그동안 자연식을 하다가 단맛이 적당히 부무려진 과자류에 푹 빠진 다람쥐들은 산꾼들이 오기만을 기다렸고, 이 과정이 차츰 반복되다 보니 다람쥐들은 아예 대놓고 사람들 앞에 와서 과자를 달라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들쥐까지 한몫 거들기도 합니다.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론 이 놈들이 야성을 잃고 순치되지는 않나 하고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저 놈들이 정상적으로 생활을 해야 생태계도 제궤도로 돌아가는 데 말입니다.

 선배 산꾼들이 다람쥐의 버릇을 잘못 들여놓았지만 지금이라도 조금씩 다람쥐가 야성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후배 산꾼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문산 자연휴양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의 다람쥐들은 사람들이 지나가면 갑자기 숲속에서 나와 에스코트하듯 주변을 멤돕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자기 구역이 있는 듯 여기저기서 튀어 나옵니다. 모두 인간이 던져주는 과자 때문이겠죠.


그래서 그런지 입구에는 아예 다람쥐를 본 떠 만든 토피어리 다람쥐가 상징물처럼 있습니다. 휴양림 내 다람쥐가 많다는 것을 자랑이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째 뭐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리산 참샘 인근 다람쥐는 그대로 귀엽기라도 하지, 한라산 윗세오름대피소 인근의 까마귀는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덩치가 제법 큰 이 놈들은 지네들이 무슨 매나 독수리라고 생각하는지 속된 말로 무게를 잡고 근엄하게 앉아 있습니다. 실제로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물을 기다리는 주제에.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본 한라산 서북능. 자세히 보면 사태가 발생해 능선이 허물어진 모습이 그대로
      목격된다.





 이 역시 인간들이 자꾸 음식물을 던져 주면서 생긴 버릇인 듯 합니다. 스스로 먹이활동을 하지 않고 인간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독수리들을 볼 때 행여나 야성을 잃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수리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음식물을 주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자연의 동식물 심지어 미생물들은 원래 있는 그대로 두어야 생태계가 유지되지 않습니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순천 금전산 8부 능선에 있는 금강암 바로 위 암봉인 의상대 끄트머리에 위치한 자연석조여래좌상.


 순천에는 '쇠 금(金)' 자에 '돈 전(錢)' 자를 스는 금전산(金錢山)이 있습니다. 이른바 '금으로 된 돈 산'이죠. 낙안읍성에서 바로 보이는 암봉이라 하면 '아! 그 산'하고 누구나 알 것입니다.
 순천사람들은 이 금전산을 일명 '로또산'이라 부릅니다. 순천은 지난 2003년 3월 제14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로또 복권 1위 당첨자를 자주 배출했습니다. 단순히 1위 당첨자 수(數)가 아니라 인구 대비 당첨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순천지역 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입소문과 함께 기사가 보도되자 전국에서 풍수지리학자들이 몰려 들었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금전산이 돈을 부르는 기운이 있는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에서 호기심을 갖고 금전산을 찾는 산꾼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산 모양도 모면 영락없이 '쇠 금(金)' 자를 닮았습니다.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기자도 금전산 정기를 듬뿍 받고 산아래 낙안온천에서 목욕재계를 한 다음 로또복권 1등 당첨자가 나온 판매점의 연락처를 입수해 달려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어두워진데다 초행길로 인해 헤맬 것이 우려돼 바로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래도 금전산 정기의 약발(?)이 남았겠거니 생각돼 집 앞 로또 판매점에서 로또 복권 2개를 샀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는 기자에게 놀랄 만한 사건이 발생했답니다. 하나는 기본인 5등, 또 하나는 숫자 4개가 맞아 4등. 상금은 5만7381원. 세금 22% 떼면 4만4990원.
 기자는 땅을 치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로또복권 1등 당첨자가 나온 순천에서 샀다면 어땠을까.
 위의 내용은 일전에 〈'로또산' 정기받아 돈방석에 올라볼까-순천 금전산〉 편에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혹 못 보신 분은 〈카테고리〉에서 〈근교산〉 〈호남지역〉 순으로 클릭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금전산 8부 능선에는 암자가 하나 있습니다. 금강암입니다. 검단 선사가 창건하고 의상 대사가 중수한 백제 천년고찰 금강암은 고려 땐 송광사 16국사의 마지막 국사인 고봉 화상이 수행하는 등 한때 선풍을 드날렸지만 여순사건 때 소실된 후 다 쓰러져가는 전각 하나만 달랑 남아 현재 스님 한 분만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송광사의 말사입니다.
 이 금강암 바로 위에는 암봉인 의상대와 원효대가 있습니다. 의상대와 원효대 위 바위전망대에서 보면 가운데 금강암(지붕만 보임)을 기준으로 왼쪽에 원효대, 오른쪽에 의상대가 보이고, 그 오른쪽 산기슭에는 매년 이른 봄 홍매화가 일찍 핀다는 금둔사가 있습니다.
 
 등산로는 바위 아래 모셔진 산신각에 이어 자연스레 의상대로 이어집니다. 도중 부처님상 두 분을 볼 수 있습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을 굽어보는 듯한 절벽 한 쪽에 최근 새긴 듯한 반듯한 관음좌상마애불이 있습니다.
 정작 눈길을 끄는 부처님은 바로 아래가 절벽인 의상대 끄뜨머리 바닥에 있습니다. 일명 자연석조여래좌상입니다. 바위 위에 움푹 팬 이곳에 물이 고이면 그 모습이 영락없이 부처님으로 환생합니다. 만일 물이 없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기 십상이지요. 유홍전 전 문화재청장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적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문구가 확실하게 적용되는 순간입니다.
 
 금전산이 '로또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돈을 부르는 기운이 있다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자연석조여래좌상이 천년 동안 말없이 사바세계를 굽어보며 중생들을 위해 기도를 한 것이 이제서야 효험이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순천 금전산 8부 능선에 있는 금강암 바로 위 암봉인 의상대 끄트머리에 위치한 자연석조여래좌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에 새긴 듯한 관음좌상마애불. 자연석조여래좌상 윗쪽에 위치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위전망대에 서면 왼쪽부터 원효대 금강암(지붕만 보임) 의상대와 저멀리 낙안벌판과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본 금전산. '쇠 금(金)' 자에 '돈 전(錢)' 자를 스는 금전산(金錢山)이다. 그 모습이 쇠 금 자를 닮았다.

부산의 진산 금정산에서 맨발 등반대회 열린다
-호텔농심 주최, 21일 금정산 동문서 출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따금 동행하는 도반들 중 맨발로 산행하는 아주 독특한 산꾼이 있다. 그는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한겨울을 제외하곤 거의 맨발로 산행을 한다. 혹 맨발 산행을 하다가 약간의 상처가 나면 맨발 대신 가벼운 샌들을 신고 나타난다. 물론 만일을 대비해 등산화는 배낭에 넣고 다니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맨발로 산행을 하다 보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바닥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그럴 경우 낙엽 하나 솔잎 하나, 조그만 부석 하나의 촉감까지 몸소 체험하게 되고 심지어 꿈틀거리는 조그만 벌레들의 움직임조차 볼 수 있어 대자연을 더욱 이해하게 되고 결국은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조차 생긴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건강에는 어떨까. 눈에 띄게 좋아지고 특히 나이가 들어서도 부부 생활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라고 귀뜸한다.

얼마전 우연히 만난 또 다른 산꾼의 경험담도 맘에 와 닿는다. 전날 과음했을 경우 보통 점심 먹고 나야 술이 겨우 깼는데 아침에 마을 뒷산을 맨발로 1시간 정도 다녀 오면 출근 전에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

왜 그럴까.
흔히 발은 '인체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발의 각 부분이 각종 장기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발을 자극하고 근육을 마사지하면 각 장기 기능이 활성화되는 것은 물론 뭉친 근육이 이완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맨발로 걸으면 자연스레 발바닥 전체를 지압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어 스트레스로 인한 소화기계 및 내분비계 질병 등의 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된다.
발은 또 '제2의 심장'으로도 불린다. 발은 우리 몸에서 심장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해 혈액을 심장으로 돌려보내는 기능이 떨어진다. 이때 맨발로 걸으면 신체 외부 압력에 의해 심장으로 혈액을 돌려보내는 기능이 증대돼 혈액순환이 좋아진다. 이따금 맨발걷기를 하면 의외로 발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며 피로가 사라지는데 이는 정체되기 쉬운 발의 혈액순환이 좋아지면서 나타나는 효과인 것이다.

산깨나 탄다는 산꾼들은 한번쯤 봤을 것이다. 오렌지색 바탕에 검은색 발바닥이 눈에 먼저 와닿는 '맨발산악회'의 리본을. 맨발산악회는 매년 회원이 조금씩 늘고 있다. 우연이 아니라 그만큼 발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일 게다.

돌멩이 하나 없는 양탄자같은 오솔길은 상관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맨발로 덤볐다가는 큰 코 다친다. 초보자의 경우 20분, 그 다음엔 30분, 이렇게 서서히 페이스를 올려야 한다.

매년 신청자들이 대거 몰려 대기자 리스트를 작성하는 등 큰 호응을 얻었던 '발사랑 맨발 등반대회'가 본격 산행 시즌을 맞는 오는 21일 부산의 진산 금정산에서 열린다. 맨발로 느리게 걸으면서 자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고, 산행 후에는 산상 국악 공연과 온천욕 그리고 시원한 맥주까지 제공되는 행사다.

오전 10시 동문 행사장에 집결해 가벼운 몸풀기를 한 후 10시50분 금정산 동문을 출발, 의상봉 약간 못 미쳐 위치한 제4망루를 돌아 다시 동문으로 되돌아 오는 코스. 재미를 더하기 위해 흙길 중간에 낙엽 도토리 자갈 그리고 대나무 밟기 구간도 마련된다. 도착은 대략 낮 12시30분.

이번 행사의 주최측인 호텔농심 전복선 홍보 담당은 "초보자들의 참가가 매년 늘고 있다"며 "하이힐을 많이 신는 직장 여성들에게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행 후에는 식사가 바로 제공되며 식사 후에는 동문 옆 너른 터에서 한국국악협회 부산지회 단원들의 국악 및 전통 무용 공연이 펼쳐진다. 참가비는 2만2000원. 점심식사, 허심청 온천이용권, 허심청 브로이 맥주권 등이 제공되며 참가자 모두 보험에 가입된다. 참가 신청은 호텔농심 홈페이지(www.hotelnongshim.com)에서만 받는다. 문의 (051)550-2508

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한땅 최고봉 한라산 산행은 현재 선택의 여지가 없이 크게 두 개의 코스만 열려 있습니다.
 분화구인 백록담을 볼 수 있는 정상으로 오르려면 성판악(동쪽)~관음사(북쪽) 코스를 타야 하고, 빼어난 경관과 산세 구경에 주안점을 뒀다면 어리목(북서쪽)~영실(남서쪽) 코스를 택해야 합니다.
 전자는 처음 한라산을 접하는 초보 산꾼들에게 남한 최고봉을 오른다는 의미가 있겠지만 기실 산길이 단조로워 지루합니다. 해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감상하려면 산세와 조망이 빼어난 어리목~영실 코스가 제격입니다.

 산꾼들에게 원래 한라산은 겨울 산행지로 인식돼 왔습니다.
 국립공원 한라산관리사무소는 그동안 겨울철 적설기간(통상 11월~이듬해 2월)만 한시적으로 백록담 정상을 개방해왔고, 나머지 기간에는 7, 8부 능선까지로 산행을 제한해 산꾼들은 겨울에만 한라산을 찾았습니다. 이른바 눈꽃산행이란 이름으로.
 하지만 오랜 기간 실시해온 자연휴식년제와 등산로 복구작업이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면서 지난 2003년 3월부터 성판악 및 관음사 코스에 한해 정상까지 개방, 지금까지 한라산의 사계절을 볼 수 있게 됐지요.

 초보자들은 한라산과 관련, 이런 질문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성판악~관음사, 어리목~영실 코스로 구분해서 등산로를 개방하는지 모르겠다고. 다시말해 성판악에서 어리목이나 영실로 내려가면 안되느냐고.

 이유가 있습니다. 백록담을 품은 화구벽이 오랜 기간 대규모 침식과 더불어 사태까지 발생해 남벽과 서북벽 부근이 출입제한 구역으로 통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까이서 보면 이러한 통제 조치는 아마도 영원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어리목에서 올라 사실상 산행의 종착점인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보면 사태나 발생해 주능선이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 그대로 목격됩니다. 아쉽게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본 한라산 서북벽. 자세히 살펴보면 사태가 나서 주능선이 허물어진 모습이 그대로 목격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발 1700m의 윗세오름 이정석. 더이상 한라산으로 접근하지 못한다.

한라산에 대한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오늘 제가 보여 드리고자 하는 것은 독특한 형상의 바위입니다. 앞서 개괄적으로 설명을 한, 한라산 최고의 비경이라 손꼽히는 영실 코스로 하산길에 길에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병풍바위의 절경이 기가 막히다.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몇 배 더 실감난다.

 가파른 하산길인 이 코스에는 신들의 거처라고 불리는 수직의 바위가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것처럼 늠름하게 서 있는 병풍바위와 오랜 세월 비바람에 풍화된 수백의 기암들이 마치 나한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명명된 오백나한, 한여름 비온 후 기암절벽 사이로 폭포가 형성돼 장관을 이루는 비폭포 그리고 서귀포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이 모든 풍광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영실휴게소에 닿을 정도로 비경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이는 만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풍광이지요.
 기자는 하산하다가 우연히 특이한 바위를 발견했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자가 보기에는 혀를 내민 모습이 영판 아기공룡 둘리이다.

 산사면에서 약간 벗어나 홀로 서 있는 바위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마음씨 순한 초식공룡을 닮았다고 하고, 또 한편으론 혀를 쏘옥 내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기공룡 둘리의 행님(?)쯤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 산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재주 부리는 물개가 연상되기도 하답니다. 개인적으로 혀을 내밀고 있는 개구장이 아기공룡 둘리 정도로 봐주면 될 것 같네요. 또 다른 모습이 연상되면 댓글로 남겨 주세요.
 이쯤 되면 사진 특종쯤 되지 않나요.
 
 또 다른 바위도 하나 발견했는데 이는 알을 품은 어미새의 형상입니다. 툭 튀어나온 부리가 이를 입증합니다.
 이 역시 다른 모습으로 보이면 좋은 의견 댓글로 남기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운데 상단의 바위가 새의 부리를 빼닮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