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물

함양 거주 두 외국인 이주여성의 따뜻한 가족사랑 이야기(3)

곤이 2009. 5. 7. 23:26

2남2녀 둔 '또순이' 야마모토 미요코 "아이들은 요리사, 남편은 장금이래요"

통일교 신도...종교적 신념 때문에 한국과 인연
끊임없는 노력파...정이 많고 차분, 예의도 발라
취업 생각 없고 시부모 남편 아이 위해 요리할 터
"이 세상에서 뭐니뭐니해도 가정이 가장 소중"

'요리사' 엄마 미요코가 만든 스파게티를 먹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정겹다.
2층 난간 앞에서 포즈를 취한 미요코네 가족들.
함양군 요리강좌에 참여, 포즈를 취한 미요코와 동료.
셋째 동현(6)과 막내 동현(3). 표정이 영판 개구장이다.

야마모토 미요코(40)는 일본 지바현 출신이다. "도쿄와 가까우며 이승엽이 한때 맹활약했던 롯데 마린스의 본거지이자 나리타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에요."
 지바현을 모를 것 같은 기자에게 친절하게 막힘없이 설명하는 미요코. 마치 한국인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언어 구사력이나 정서 등 모든 면에서 그랬다.
 미요코는 독실한 통일교 신도이다. 그러니까 그의 한국행은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다.
 사회복지를 전공,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조그만 무역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미요코는 어느날 거리에서 통일교를 알리는 소식지를 우연히 접하면서 인생의 항로가 달라졌다.
 "지난 1995년 서울 잠실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렸어요. 당시 36만 쌍의 부부가 탄생했지요. 저희 부부도 그 중의 하나였어요. 부모님의 반대가 완강했어요. 통일교 자체를 반대했고, 무엇보다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심지어 저더러 미쳤다고도 했어요. 부모님이 저의 행복을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았지만 저 또한 종교적 신념 때문에 굽힐 수 없었어요. 제가 행복한 삶을 산다면 언젠가 저희 부모님도 저희들을 용서할 것이라 확신했어요."
 한국에서의 신접 살림은 남편의 직장 때문에 1997년 서울에서 시작했다. 2년간의 공백은 결혼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일본에서 몸조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편이 한국과 일본을 자주 오갔다. 5년 후 대구로 옮겨 1년 정도 살다 지난 2003년 남편의 고향인 함양에 정착했다. 남편은 현재 조경 사업을 하고 있다.
 슬하에 자녀는 2남2녀. 최은진(11) 은성(9) 동현(6) 효성(3). 우선 남편이 가급적 많은 아이를 원했고, 남동생만 하나 있어 약간 외로웠던 미요코 자신도 이에 동의했다. 다산을 할 수 있게 건강한 신체를 주신 부모님께 고맙다고도 했다.
 함양에 정착한 미요코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1층에선 시부모님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미요코 가족은 2층에 산다. 하지만 시부모님이 바쁘신 데다 아기가 4명이나 돼 사실상 독립된 삶을 살고 있다.
 함양에선 함양문화원의 도움을 받았다. 외국인 이주여성들의 적응을 도와주는 데다 한국어 교육도 새롭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식조리기능사 시험도 문화원이 권했다.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어 방문교사도 "미요코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심어줘 비로소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요코 역시 중도에 포기하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이현지 이론 강사가 "이왕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죠"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미요코에 대한 이현지 강사의 코멘트. "미요코는 모르는 부분은 포스트잇을 붙여 수업시간마다 일일이 물었고 일본어로 주석을 달아 외우고 또 외우더군요. 응용문제도 풀 수 있을 정도였어요. 베티는 반신반의했지만 미요코는 사실 합격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또 집에 가면 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며 수업을 마치고도 1시간씩 공부를 하고 귀가했어요."
 실기 강사 박경숙(뉴영남 요리직업전문학교) 원장의 미요코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말도 능수능란한 미요코는 물론 나이가 있어 그런 면도 있지만 차분하고 한마디를 해도 굉장히 예의가 발라요. 워낙 차분하고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시간 내 완성해야 되는 요리도 제한 시간을 넘기더군요. 좀 빨리 하라고 채근해도 잘 고쳐지지가 않았어요."
 미요코가 다시 받아 한마디 거든다. "저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빨리 해보려고 집에서도 한번 해봤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어요."
 가족들의 격려 또한 큰 힘이 됐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면 미요코는 지친 나머지 요리할 힘이 없어 양이 적더라도 그날 실습한 음식을 모두 가져갔다. 다행히 아이들은 "우리 엄마는 요리사"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자랑했고, 남편 최성태(40) 씨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음식이 있었냐"고 반문하며 "알고 보니 우리집에 몟장금몠이가 있었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늘도 미요코의 노력에 감복했는지 미요코는 일사천리로 이론과 실기를 가볍게 통과했다.
 최종 합격 후 미요코는 가장 먼저 실기 강사인 박 원장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 합격했어요. 그리고 선생님께 칭찬을 듣고 싶어요."
 발표날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박 원장은 "많은 합격생을 배출했지만 미요코처럼 정이 많고 예의 바른 학생은 사실 드물다"며 아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다.
 "미요코는 3번 정도 막내를 업고 실기 수업에 참가했어요. 아기 때문에 직접 요리 연습은 못하더라도 눈으로만 봐도 공부가 된다며 아기를 업고 꼼꼼히 눈여겨보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미요코는 이번 어버이날 시부모님께 식사를 대접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기 핑계를 대고 만날 얻어 먹기만 해서 사실 마음의 빚이 많았는데 앞으로는 지금까지 배운 한식을 응용, 제대로 된 효도를 하고 싶다고 활짝 웃었다.
 "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으로 취업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우리 가족과 시부보님을 위해 보다 다양하고 맛있는 한국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뭐니뭐니해도 가정이 제일 소중하잖아요."

미요코가 만든 쇠고기 불고기

미요코가 만든 쇠고기 불고기(왼쪽)와 베티가 만든 잡채.

"쇠고기의 경우 일본에선 특별한 날일 경우 쇠고기 불고기를 해먹고 보통 때는 주로 샤브샤브를 많이 해먹어요."
  미요코는 마치 TV 요리프로그램에 출연한 요리사처럼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쇠고기는 등심이나 안심으로 골라 얇게 저며 잔칼질을 한다거나, 고기는 한 점씩 떼어 양념장에 주물러 간이 고루 배게 한다는 등등. 완성한 쇠고기 불고기는 맛도 좋고 모양도 좋다. 시금치 당근 버섯 등의 색감은 미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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