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회'맛 길들면 활어회는 심심해서 못 먹지
부산의 맛 - 선어회(鮮魚膾)
감칠맛 척도 이노신산 활어회의 10배
진짜 회맛 아는 수산꾼 등 식도락가들 선호
활어 즉사 후 5~10시간 숙성, 日 '스시' 보다 싱싱회에 해당
숙성시키고 있는 돗돔. 잠시 꺼내 기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보통 직장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회식을 한다. 장소는 대개 고깃집이나 횟집이 애용된다. 그렇다면 고깃집이나 횟집 직원들은 어디서 회식을 할까. 영업장인 자신들의 식당에서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고깃집 직원들은 대개 횟집에서 회식을 하지만 횟집 직원들은 애오라지 생선회만을 고집한다. 회는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것일까.
국내 최대 연근해 수산물 위판장인 부산 공동어시장과 그 주변의 부산시수협, 대형기선저인망수협, 대형선망수협, 중도매인 등 수산 관련 종사자들도 한결같이 회식 때는 생선회를 찾는다고 한다.
흔히들 '생선회'하면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활어회(活魚膾)를 떠올린다. 부산시가 대표 음식으로 내세우는 생선회도 실상은 활어회다. 하지만 공동어시장 주변의 수산 관련 종사자들은 활어회 대신 선어회(鮮魚膾)를 즐긴다. 아니 선어회만 찾는다.
선어회는 원래 그물로 잡은 후 얼음이 가득한 어창에 넣은 고기를 선원들이 회로 떠서 먹던 방식이다. 어민들은 이를 빙장(氷藏)한 고기라고 한다. 활어를 잡아 피를 빼고 일정 온도에서 숙성시킨 것과 같은 원리이다.
수산 관련 종사자들은 한결같이 "선어회의 깊은 맛에 혀가 길들여지면 활어회는 심심해서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 활어회가 평범한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즐겨 먹는 생선회라면, 선어회는 회를 누구 못지 않게 잘 안다고 자부하는 부산의 진정한 '수산꾼'들이 고집하는 회인 것이다.
■선어회·싱싱회·활어회
'생선회 박사'로 유명한 부경대 식품공학과 조영제(59) 교수에게 선어회에 대해 물었다.
"일본인들은 활어회를 먹지 않고 선어회를 먹어요. 참치와 방어 등 붉은살 생선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은 붉은살 생선이 흰살 생선보다 선도 저하가 빨라 보다 맛있게 먹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선어회를 고안했죠. 이미 세계화된 '스시'와 '사시미'는 모두 선어회지요. 그러니까 '선어회'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건너온 셈이지요. 일본의 생선회, 다시 말해 선어회는 활어를 즉사시킨 후 일정한 저온으로 숙성시킨 것이지요. 맛은 우리나라 활어에 비해 좋게 말하면 부드럽고 나쁘게 말하면 약간 퍼석하지요. 일본의 사시미가 두툼하게 썰려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또 스시용이면 연하고 부드러워야 되지 않겠어요. 반면 즉석에서 잡아 칼맛으로 먹는 활어회는 씹는 맛에서 월등하지요.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씹히는 회를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 싱싱회는 활어회와 선어회의 중간쯤으로 보면 됩니다. 결국 선어회는 즉사시킨 후 2~4일 숙성시킨 회, 싱싱회는 쫄깃함이 유지되는 임계치인 10시간 이내 숙성시킨 회, 활어회는 즉석에서 손질한 회인 셈이죠."
이렇다 보니 현재 국내에선 생선회와 관련,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현재 부산에서 선어회를 취급하는 횟집의 경우 경매가 이뤄지는 새벽 시간대나 밤늦게 생선을 사와 손질한 후 점심 또는 저녁시간에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이럴 경우 숙성 시간은 5~10시간쯤 돼 엄밀히 말해 싱싱회에 해당된다. 하지만 선어횟집은 오랜 전부터 사용해온 용어라 바꿀 생각이 거의 없다. 지금으로서는 선어회를 '싱싱회를 포함한 광의의 용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참고로 '한국형 선어회'라 할 수 있는 싱싱회는 7년 전쯤 조 교수가 새롭게 만들었다.
맛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씹히는 맛이 활어회보다 덜할 것이라 알려져 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조영제 교수는 "숙성시간이 4~5시간 정도면 육질의 단단함이 최고조에 이르러 활어회보다 오히려 씹히는 맛이 더 좋다"고 설명했다. 숙성 시간이 10시간쯤 되면 4~5시간대보다 차츰 육질의 단단함이 저하돼 활어회의 그것과 비슷해지지만, 감칠맛의 척도인 이노신산은 10배나 좋아져 혀로 느끼는 맛은 최고가 된다고 덧붙였다. 숙성시간이 일본처럼 2~4일 정도 되면 씹는 맛이 활어회보다 훨씬 떨어진다.
■진정한 회맛은 선어회를 먹어봐야 안다
부산시수협 직원들이 단골인 집 '선어마을'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선어회의 깊은 맛에 중독됐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낮 12시께 서구 충무동교차로 인근 ABC볼링장 뒤 골목에 위치한 선어 전문횟집인'선어마을(051-255-9668)'에는 부산시수협 직원들이 모처럼 한데 모였다.
이 집은 공동어시장, 부산시수협, 대형선망수협, 대형기저수협 등 수산업 관련 종사자들의 단골집. 평소 공동어시장 내에서도 잘 보지 못하다가 식사시간 때 이곳 '선어마을'에서 더 자주 본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회에 관한 한 전문가 수준인 그들의 입맛은 몹시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생선회 도사'라는 그들이 즐겨 찾는 집인 점만 봐도 벌써 회맛을 짐작하고 남을 듯했다.
부산시수협 조항흠 총무과장은 "오랫동안 선어회에 입맛이 길들여져 활어회는 별 감흥이 없다"고 말했고, 부산시수협 남포동공판장 김태오 경매사도 "진짜 회맛을 아는 사람은 선어회만 고집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선어횟집이라 수조가 보이지 않는 허름한 이 집에는 테이블이 겨우 8개로 30여 명 남짓 앉을 수 있다. 식사 시간 땐 예약은 필수다.
조그만 나무 도마 위에 회가 나왔다. 보통 네댓 가지가 올라오는데 이날은 돗돔 눈다랑어 병어 가오리였다. 씹히는 맛이 강한 병어와 가오리는 얇게, 돗돔과 눈다랑어는 비교적 두툼하게 썰어져 나왔다.
아주 귀해 전설의 물고기라 불리는 돗돔은 워낙 커 부위별로 맛이 다르단다. 이날은 목 부위였다. 아주 담백해 눈 감고 먹으면 쇠고기 육회라 해도 믿을 정도. 기름기가 많은 눈다랑어 뱃살은 진한 향이 일품이었고, 병어는 구수했다. 가오리는 특유의 쫄깃함이 살아 있었다. 활어회에 비해 육질의 단단함 즉 씹는 맛이 전혀 손색 없었고 향은 정말 살아 있었다.
'선어마을' 강화순 대표는 맛있게 먹는 법을 일러줬다. "병어 등 흰살생선은 된장, 붉은살 생선은 고추냉이, 가오리는 초장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어요. 신김치에 싸서 먹어도 별미죠."
살짝 데친 돗돔 껍질. 손이 떨려.... 이 놈의 수전증이.....
생선뼈를 고와 미나리와 무에 소금간을 한 맑은탕.
살짝 데친 돗돔 껍질은 꼬들꼬들한 느낌이고, 생선뼈를 고와 미나리와 무에 소금간을 한 맑은탕은 속이 확 풀린다. 횟집에 와서 이렇게 감동하며 먹은 기억이 실로 오래간만인 것 같았다. 해운대, 녹산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단골이 있다는 강 대표의 말에 수긍이 간다.
요즘 활어횟집에서도 고기를 썬 후 수분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육질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5~10분 정도 냉장고에 넣었다 손님들에게 내놓는 것도 결국 선어회의 장점을 일부 수용한 것으로 보면 된다. 결국 회맛은 선어회가 으뜸이라는 것이다.
■'선어마을' 강화순 대표 인터뷰
- "좋은 횟감이라면 아무리 비싸도 구입, 제값 받고 단골에 대접"
"손님들에게 맛있는 선어회를 대접하려면 좋은 고기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선어 전문횟집 '선어마을' 강화순(55·사진) 대표는 "이 가게를 하기 전에 '자갈치 아지매'를 한 20년 했다"며 "생선에 관한한 그 어느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말했다.
20여 년 동안 생선과 씨름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긴 강 대표는 5년 전 기존의 '선어마을'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자신이 주체가 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선어마을'은 우선 제철에 나오는 다양한 횟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오랫동안 자갈치와 공동어시장 주변에 쌓아 놓은 인맥 덕분에 좋은 고기를 많이 확보할 수 있다. 선주나 어민들이 간혹 그물에 귀한 횟감이 올라올 경우 선상에서 직접 강 대표에게 연락하거나, 경남 삼천포 통영 심지어 전라도 쪽에서도 특이한 고기가 있으면 탑차에 실어 보낸다는 것.
그렇다고 마냥 갖다 주는 고기만 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강 대표는 매일 새벽 공동어시장 위판장이나 밤 10시부터 여는 부산시수협 남포동공판장을 직접 찾아 횟감으로 쓸 선도 좋은 고기를 직접 고른다. "비싸서 안 사는 경우는 없어요. 좋은 횟감이라면 아무리 비싸도 구입해서 단골들에게 제값을 받고 대접을 하지요."
여기에 피가 살에 묻지 않게 요령있게 생선을 장만하는 기술과 아끼지 않고 손님들에게 퍼주는 통 큰 심성까지 갖춰 문을 연 지 5년 만에 단골들이 급증, 이제는 식사 시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을 정도가 돼 버렸다.
흔히 선어회는 활어회보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강 대표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양식 고기를 절대 쓰지 않고 무엇보다 그날 그날 공수해서 쓰기 때문에 활어회 가격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이 집 선어모둠회는 소(2인용) 3만5000원, 중(3~4인용) 5만 원, 대(4~5인용) 7만 원이다.
"선어회는 물량 자체가 적어 이윤이 많지 않아요. 만일 돈이 되면 이런 집이 많이 생기지 않겠어요." 실제로 선어회를 취급하는 횟집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 충무동 '선어마을' 과 '거제횟집', 중앙동의 '중앙식당' '오뚜기식당', 그리고 자갈치시장의 '명물횟집'이 있다. 명물횟집은 너무 비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