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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도박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엔 14세 한국소년영웅 있었다

곤이 2014. 2. 25. 22:52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2>플로리다 주 템파-에디 고 

- 전선 넘나들며 미군에 정보 제공 / 맥아더 상륙작전 감행 이틀 전엔
- 계획 알아차린 북한군 모두 죽여 / 상부보고 막아 작전 성공 이끌어
- 목숨걸고 등대도 밝혀 진격 도와 / 휴전 후 워싱턴서 보내달라 요청
- 영주권 받고 미군 근무하며 정착  / 요즘은 전쟁관련 명강사로 활동
- 6·25와 한국 알리는데 열정 쏟아  


에디 고 씨는 템파지역 초중고와 시민·봉사단체 등지에서 6·25전쟁과 코리아를 알리는 명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6·25 전쟁을 다룬 책 '잊혀진 전쟁'(남도현 지음)에 따르면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은 세기의 도박이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집념으로 이를 성공시켰다. 그 이면에는 14세의 한국 소년이 있었다. 흔히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소년을 소개하기 위해선 가정이 필요할 듯싶다. 만일 이 소년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었으며, 그럴 경우 전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됐을 수도 있었다. 

 미국 플로리다 템파에 거주하는 에디 고(79·한국명 고준경) 씨. 그는 지난해 템파 교외의 '참전용사 추모공원'에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를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강원도 철원 출신인 그의 부친은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여서 인민군의 요주의 관찰 대상이었다. 해방 이듬해 부친은 그의 형과 함께 임진강을 건너 남으로 탈출했다. 반역자 가족으로 몰린 어머니와 에디 고는 이후 쫓겨 다니다 1948년에야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당시 철원은 이북 땅이었다.   

 6·25전쟁 당시 인천 영흥도에서 상륙작전에 앞서 정찰대원들과 함께한 소년 에디 고.(뒷줄 왼쪽 세 번째) 뒷줄 왼쪽 네, 다섯, 일곱 번째가 각각 계인주 육군 대령, 연정 해군 소령, 클라크 대위.

 평화롭던 시절도 잠시, 1950년 전쟁이 발발했다. 동숭동 서울대 의대 광장에서 국군 30여 명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소년은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에 들렀지만 아무도 없자 인천 영흥도가 고향인 교회 친구가 떠올라 무작정 서쪽으로 걸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될 한 사람을 만났다.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 대위였다.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맥아더가 정보 수집을 위해 영흥도로 미리 보낸 정찰대원이었다. 클라크 대위는 당시 소년들을 모아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만 뭍에서 온 소년을 경계했다. 하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그 됨됨이를 관찰하더니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에게 배운 영어가 큰 도움이 됐다.

 주 임무는 인천항과 월미도 등지에서 인민군 동태를 관찰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소년들은 전시라도 제재를 받지 않고 전선을 드나들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6·25전쟁 당시 인천 영흥도에서 상륙작전에 앞서 정찰대원들과 함께한 소년 에디 고.(뒷줄 왼쪽 세 번째) 

                뒷줄 왼쪽 네, 다섯, 일곱 번째가 각각 계인주 육군 대령, 연정 해군 소령, 클라크 대위.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인 9월 13일 인천을 다녀오라는 클라크 대위의 명에 따라 친구와 함께 나섰다. 친구는 그때 "아무래도 유엔군이 인천으로 오려나 보다"고 말해 그제서야 전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도중 친구는 부모님을 뵈러 영흥도에 들렀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소년들이 미군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듯했다. 어디론가 끌려가더니 2시간쯤 뒤 친구는 부모와 함께 공개 처형을 당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소년은 친구가 고문에 의해 상륙작전 계획을 토설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행히 그날은 물때가 맞지 않아 인민군은 보고를 위해 배를 타지 못했다. 그날 밤 소년은 인민군들이 기생집에서 술판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주민 몇 명과 함께 새벽에 잠입, 상륙작전 계획을 알았을 법한 인민군들을 모두 죽였다. 이 대목에서 에디 고 씨는 처음 이 사실을 공개한다고 했다. 만일 다음날 그 인민군들이 인천으로 떠나 상륙작전 계획을 상부에 보고했다면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에디 고 씨의 설명이었다.

 클라크 대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때문에 앞서 인천의 관문인 팔미도 등대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클라크 대위와 소년 에디 고를 비롯한 정찰대는 전날 밤 작은 보트를 타고 팔미도에 내려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을 물리친 후 D데이 0시12분에 등대를 밝혔다. 동시에 261척의 유엔군 함정이 인천으로 진격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소년은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가겠다고 하자 클라크 대위는 추천장을 써 주었다. 덕분에 소년은 미 해병 1사단의 정식 정보원이 됐다. 이후 소년은 미군과 함께 정보 수집을 위해 원산 흥남 함흥 장진 등지를 오가다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다행히 중공군 장교는 보스턴서 공부한 엘리트로 영어를 잘했다. 소년은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라고 하며 동정심을 유발했다. 그 장교는 12만의 중공군이 장진호 주변에 배치돼 있고, 20만 명은 만주에 대기 중이라 미군의 승리는 어렵다고 설명한 후 소년을 풀어줬다.

 미 해병에 재합류한 소년은 이 사실을 보고한 후 장진호 전투 등에 참전하며 정보 수집에 매진했다. 그해 12월 흥남부두 철수 땐 피란민들의 안전 승선을 위해 마지막 배가 떠날 때까지 돕고는 걸어서 남하했다. 휴전 때까지 그는 미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휴전 후 가족과 상봉한 그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미군 전우 3명에게 편지를 썼다. 그 중 한 명이 부친에게 6·25 때 에디 고의 활약상을 소개했고, 부친은 이를 친구인 상원의원과 워싱턴DC 정가에 전달했다.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에게 에디 고를 찾아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편지가 전해졌다. 실제로 1955년 미 영사가 여권을 만들어 에디 고를 찾아와 마침내 그는 그해 6월 뉴욕에 도착했다. 이후 미 영주권을 받은 에디 고 씨는 다시 미군으로 입대, 한국에서 CIC(주한미방첩대) 요원으로 1년 8개월간 근무했다. 제대 후 그는 대학에서 항공학을 전공, 항공회사에 근무하다 뉴욕에서 무역회사를 차려 제법 돈을 모았다. 한국 여인과의 결혼도 이즈음 했다.

 1989년 그는 플로리다 템파로 이주해 10년 전까지 골프장 두 개를 운영했다. 2000년부턴 6·25 참전용사들에게 입은 은혜를 조금이나 갚기 위해 매년 이 지역의 참전용사들을 골프장으로 초대, 라운드와 함께 식사를 대접했다. 

 모든 사업을 정리한 그는 현재 6·25전쟁과 코리아를 알리는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지역 초중고와 로타리 등 봉사단체, 그리고 군부대 등에서 전쟁 관련 특강을 하고 있다. "6, 7년째 관련 자료도 찾고 공부를 하다 보니 제가 생각해도 실력이 늘었어요." 명강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올 한 해 강의 일정은 이미 지난해 말 모두 잡혔다. 

 템파지역 한국전 참전용사회 회원으로, 그들을 위해 한국을 대신해 헌신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에디 고 씨는 "현지 한인들도 애쓰고 있지만 한국정부도 이제 외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참전용사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미군 상륙작전 때 맨 먼저 방벽 넘어 싸우다 전사

- 로페즈 중위 기려 인천서 공수한 돌로 美에 기념비    

   인천상륙작전 때 템파 출신의 로페즈 중위가 상륙정에서 방벽을 넘고 있다. 당시 종준기자에 의해 사진이 찍히자마자 그는

    아쉽게도 전사했다.

 플로리다 템파 교외에 위치한 '참전용사 추모공원' 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옆에는 85㎏의 제법 큰 둥근 돌이 기단 위에 소중히 올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인천상륙작전 때 전사했던 로페즈 중위의 기념비이다.

 템파 출신으로 해병 1사단 1대대 소대장이었던 그는 상륙정이 연안에 도착했지만 인민군이 내뿜는 자동화기에 대원들이 망설이자 맨 먼저 방벽을 넘었다. 첫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그는 두 번째 수류탄의 핀을 빼 던지려는 찰라 총탄에 가슴과 오른쪽 어깨를 맞아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순간 로페즈 중위는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부상에도 불구하고 수류탄을 안고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산화했다. 쌍안경을 들고 있는 맥아더와 함께 방벽을 넘는 그의 뒷모습은 인천상륙작전의 기념비적 사진으로 꼽히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 사진이 찍힌 직후 전사했다. 그는 후에 미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추서받았다.

 템파 한국전 참전용사회는 에디 고 씨의 주도로 2007년 재향군인의 날, 인천 앞바다에서 공수해 온 이 돌에 'The Green Beach Point of Incheon Landing Operation'이라는 문구를 적어 템파 인근 키스톤 에드레디스 공원 한국전쟁기념광장에 로페즈 중위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지난해 7월 27일 여기서 차로 10분 거리인 '참전용사 추모공원' 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제막식에 맞춰 로페즈 중위 기념비를 이곳으로 옮겼다. 함께 공수된 작은 돌은 에디 고 씨의 제안으로 로페즈 중위의 모교인 힐스보로고교에 기증돼, 그의 유품과 함께 전시돼 있다.    

개인 기부와 함께 템파 한국전 참전용사회의 모금 등으로 기념비를 세운 에디 고 씨는 "당시 인천에서 직접 공수해 온 돌을 보고 참전용사회도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에디 고 씨 등 템파지역 참전용사회가 세운 로페즈 중위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