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춧잎에 김 한 장을 올려놓고 실파와 마늘 고추 등 각종 야채와 미역을 곁들인 다음 과메기 한 점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그 맛은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과메기 생산의 1번지 구룡포. 정확히 말하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약간 비릿한 바다내음에 쫄깃하면서도 고소한 살맛이 입안에 착착 달라붙는 과메기. 언제 먹어도 식상하지 않고 되레 반갑기만 하다.

  과메기는 1월이 지나면 사실상 끝이라고 하지만 막상 가보니 2월말까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족보있는 음식 '과메기'
구룡포항을 벗어나 31번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과메기'라고 적힌 커다란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과메기 덕장이 푸른 바다와 하얀 포말과 한데 어울려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과메기를 굳이 범부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꽁치 숙성회' 혹은 '꽁치 말림'. 원래 과메기는 꼬챙이로 청어의 눈을 꿰어 말렸다는 '관목어'(貫目魚)에서 유래한 말. 영일만 부근에선 '목'(目)이란 말을 흔히 '메기'로 불렀기 때문에 '관목'이란 말이 '관메기'로 불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과메기'로 정착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예부터 구룡포 연안은 청어의 주산지. 겨울철 특별한 먹을 거리가 없던 구룡포에서는 이 청어가 더없이 좋은 식량자원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를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들은 부엌 살창(채광을 겸한 통풍구) 입구에 청어를 걸어 찬바람에 얼렸다가 부엌 땔감의 연기에 녹였다를 반복, 얼말린 과메기를 만든 것. 당시엔 술안주보다는 밥 반찬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과메기는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문헌에도 기록이 나와 족보있는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서 청어가 연안에서 자취를 감추자 대체어로 꽁치가 사용됐고, 이어 연안에서 꽁치 조차 어획량이 급격히 줄자 10여년 전부터 러시아 쿠릴열도 부근에서 잡은 원양꽁치가 과메기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원양꽁치로 만든 과메기가 국내 연안의 청어나 꽁치에 비해 불포화지방산 등 영양학적 측면에서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증돼 이제는 과메기 재료로 입지를 완전히 굳혔다는 것.

 이외에도 과메기는 숙취해소를 돕는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애주가의 사랑을 덤뿍 받고 있다.

 과메기는 '통마리'와 '배지기' 두 종류가 있다. 통마리는 말그대로 통째로 숙성시킨 것이고 배지기는 배를 따 뼈와 내장을 걷어내고 말린 것. 현지인들은 피가 나오고 내장이 흘러내리는 통마리를 즐긴다. 배지기는 과메기가 외지에 알려지면서 외지인들을 위해 고안된 것. 외지인들이 통마리를 약간 혐오스러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구룡포 과메기생산자 영어조합법인 김점돌 회장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이곳 사람들은 원래 과메기를 초고추장에 찍어 김에 싸먹었다"며 "지금과 같이 각종 야채를 곁들이는 방법은 외지에서 개발돼 역수입된 것 같다"고 말했다.

 막상 덕장에 가보니 그냥 해풍에 말리면 저절로 숙성되는 줄 알았던 과메기는 온도 습도 바람 등을 고려해야 하는 그야말로 과학과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먹을거리였다.

 "무작정 햇빛에 말리면 딱딱해집니다. 또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밤에 실외에 그대로 놔두면 얼어 하얗게 변합니다. 그러면 상품성은 제로이지요. 제 자식처럼 사랑과 관심을 듬뿍 줘야 먹음직스러운 과메기로 태어납니다." 구룡포 진강수산 최정만 대표의 설명이다.

 과메기는 우선 세척과정을 필수입니다. 바닷물로 한번, 바닷물과 민물을 섞은 기수로 한번, 그냥 민물로 한번 등 세번의 세척이 되야 비린내와 기름 및 불순물이 제거된답니다.

세척과정입니다.

세 차례 세척한 꽁치를 건조대에 옮깁니다.
햇빛에 말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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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대의 선풍기가 천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온도계도 있습니다. 창문도 많습니다.

연탄난로도 준비돼 있습니다.


진강수산 최진만 대표가 과메기 숙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으로 가른 과메기가 붙으면 안 된다며 작대기로 일일이 분리시키는 최진만 대표.

정말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과메기입니다.



바람은 북서풍이 90% 일때가 제일 좋다고 합니다. 최 대표는 바람에 따라 과메기의 비린내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 모든 조건이 맞지 않으면 건조실로 들어갑니다.

 건조실은 온도 습도 바람 조절을 위해 창문이 아주 많습니다. 온도계와 선풍기 연탄난로 등이 준비돼 있습니다. 급작스런 기후 변화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랍니다.

 일반적으로 과메기의 숙성 조건은 습도는 45~55%이며 30% 이하로 떨어지면 아삭아삭해진답니다. 온도는 10~20도일 경우 2박3일~3박4일, 5~10도 일땐 4박5일 정도가 지나야 숙성된답니다.

 여기에 반 가른 과메기가 붙으면, 그 붙은 부위의 숙성이 달라진다면 일일이 긴 대나무 꼬챙이 분리해야 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된답니다. 

사실 저는 그냥 햇빛에 말리는줄 알았습니다. 한 톨의 쌀알이 농부의
땀방울이듯 과메기 한 점도 덕장의 적지 않은 사람들의 노고가 배어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날 냉동 수입산 꽁치가 들어왔습니다. 제일 아래 사진은 냉동실입니다.


한눈에 봐도 일본가옥거리임을 알 수 있는 구룡포 적산가옥 거리.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로 과메기뿐 아니라 대게 오징어의 국내 생산량 1위인 포항 구룡포항은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후
이듬해 일본 자국 어민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구룡포읍과 포항시에 따르면 오까야마, 가가와, 아이찌 등 세토나까이 주변 일대 어민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수산업이 포화상태여서 어민들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아주 심해 뭔가 돌파구가 필요할 때였다. 무엇보다 동해 구룡포의 어족자원이 무궁무진했던 것이 집단 이주를 가능케한 요인이었다.

 여기에 일본의 어선들은 동력선이어서 돛단배를 이용하는 우리 어업기술에 비해 무려 100년 정도 앞서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 어민들이 이주해야 될 필요충분조건이 모두 갖춰진 셈이었다.

30여년 전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 찌그러져 가는 여인숙 간판.



 100년이 지난 지금도 구룡포에는 당시의 일본 어민들이 집단 이주해 살았던 그 시절의 일본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적산(敵産)가옥거리, 다시말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장안동 골목을 천천히 걷노라면 영화속 한 장면처럼 아직도 일본풍이 물씬 풍겨난다.

 아무 정보 없이 구룡포항을 찾는다면 이 적산가옥 거리는 찾기 어렵다. 구룡포항 내 도로를 건너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쉽게 만난다. 그렇지 않다면 구룡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원래 지금의 구룡포항내 공유지와 도로는 오래전 매립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 적산가옥거리가 바다와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한눈에 일본풍이 느껴지는 이 거리는 오래전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 거리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시점과 종점의 거리는 대략 470m. 일직선이 아니라 꼬불꼬불하게 약간 굽어 있어 운치가 있다.

 가옥은 대략 50가구. 절반 가까이 빈 집이다. 빈 집에 들어가보면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창문이나 문틀을 자세히 보면 눈길 끄는 문양이 있다. 동그란 구멍이 있는가 하면 선사시대의 알 수 없는 무늬가 아주 세실하게 조각돼 있다.

 동행한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그들도 사람인지라 아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러한 문양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동그란 구멍과 그 옆으로 그으진 선을 두고 서 부소장은 일본의 마음에 항상 있는 최고봉인 후지산의 정상과 천지못이라고 설명했다. 지그재그로 그려진 것은 고향인 일본의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라고 덧붙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일본풍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골목을 걷다 보면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 속에 자리잡은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론 이층 목조가옥 창문이 열리면서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인네가 '곤니치와'하고 인사를 건넬 것 같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이 거리는 1930년대 번성했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며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들러봐야 할 공간"이라고 말했다.

 현재 결정된 계획은 없지만 포항시가 현재 이 적산가옥거리를 일본인 관광객들을 겨냥한 일본인 거리를 조성하려고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 부소장은 "왜색풍이 넘치는 일본인 거리보다는 차라리 이 거리를 적절히 보존하면서 일본의 만행과 당시의 우리 삶을 아우르는 가칭 근대역사 거리로 후대에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잠시 안을 들여다봤다. 빨래가 널려 있지만 흡사 난민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는 빈집.
적산가옥 거리 중간중간에는 우리네 집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풍이다.

적산가옥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이 새겨 놓은 다양한 문양이 눈길을 끈다.

양지바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듯하다.
이 적산가옥 거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깔끔한 집이어서 물어보니 당시 약국집이었단다.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인 구룡포항을 약간만 벗어나면 과메기 덕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이 줄곧 이어진다.

춥다 춥다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던 겨울이 어느새 끝물이다. 작은 바람에도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가는 만추를 아쉬워하던 게 엊그제 같은 데 지나고 보니 정말 눈깜박할 사이다. 시골 여염집 기둥이나 대들보엔 이미 봄을 알리는 입춘첩이 붙어 있고, 대동강 물이 풀리기 시작한다는 우수 또한 턱밑에 다가와 있다.

 봄소식은 화신(花信)이다. 통상 이맘 때면 신문 방송 등 언론매체에선 앞다투어 봄소식의 선두격인 매향(梅香)을 전하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단골 명소는 구례 화엄사, 순천 선암사 금둔사, 산청 단속사지 등. 이곳에는 나라땅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수백년 된 운치있는 매화나무가 탐매객을 유혹한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일 년을 학수고대한 마니아들이야 감탄에 또 감탄을 하겠지만, 뚜렷한 목적없이 그저 신문이나 방송에서 소개된 한 장면을 보기 위해 운전대를 잡은 장삼이사들은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고 발길을 돌리며 혼잣말을 할 게다. "만개한 것도 아니고 겨우 매화 꽃잎 몇 개를 보려고 몇 시간씩 구불구불한 길을 내달려 왔단 말인가."

 2월은 여행 기자들에게 고민의 계절이다. 어정쩡한 봄과 휘청거리는 겨울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동장군은 시나브로 꼬리를 내리려고 하고 있고,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글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그것이다. 겨울과 봄, 무엇보다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섣불리 떠나기도, 소개하기도 조심스럽다. 고심 끝에 주말레저팀은 결정했다. 어정쩡한 봄보다는 떠나려는 겨울을 붙잡아 보기로.

 흔히 2월 하고도 중순이면 스키장은 일반인의 뇌리에서 사라진다. 해발 1000m에 육박하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보니 눈이 늦게까지 내린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도심에 비가 오면 산엔 눈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대자연의 원리를 잊고 있는 것.    
   
 지난 시즌의 경우 양산 에덴밸리는 3월 9일, 무주리조트는 3월 17일까지 영업을 했다. 스키장 측에 따르면 2월 스키장을 찾으면 숙박 리프트 렌털 등을 묶은 패키지 상품이 아주 저렴한 데다 무엇보다 북적이는 1월보다 사람들이 훨씬 적어 맘껏 즐길 수 있다. 여기에 예기치 않은 눈까지 내린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과메기로 유명한 포항 구룡포와 국내 최대 대구 집산지인 거제도 외포항은 겨울 식도락 여행지로 제격이다. 이곳 또한 삭풍이 몰아치는 12월과 1월 두 달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2월 말까지 싱싱한 그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원래 축제가 한창 때는 별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뜸해지는 끝물 즈음에 찾으면 적당히 대접을 받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사실 아니겠는가.

주5일제와 여행문화의 발달로 우리나라 관광지의 경우 사실 알려지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지만 구룡포는 예외인 것 같다. 일본인 집단 거주촌이 남아 있는 데다 원조 어선인 목선을 만드는 장인들이 아직도 뱃공장을 지키고 있다. 자, 선택은 이제 독자들의 몫. 주말이나 아니면 모처럼 주중에 휴가를 내고 가족들과 연인들과 함께 떠나보자.

■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 포항 구룡포

과메기 오징어 대게 골라먹는 재미 쏠쏠
겨울 낭만보단 뱃고동 울리는 
고깃배 모습 더 인상적
대게·활오징어·트롤오징어 등 대형 위판장 무려 세 곳 

동해안 최대 어업전지기지인 구룡포항 전경.

장삼이사들은 구룡포 하면 우선 과메기를 떠올린다. 일출 명소로 유명한 호미곶이 위치한 북쪽의 대보면 등과 함께 과메기 특구로 지정된 이곳은 국내 전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구룡포항에는 식당가 말고는 과메기 덕장을 구경할 수 없다. 구룡포항을 벗어나야 된다. 호미곶으로 이어지는 31번 해안국도변에 '과메기'라고 적힌 커다란 입간판을 따라 가면 과메기 덕장을 만날 수 있다.

과메기는 쉽게 풀어쓰면 꽁치 숙성회. 원래 과메기의 재료는 청어였다. 하지만 청어가 구룡포에서 잡히지 않자 연안 꽁치로 대체됐고, 이후 꽁치조차 자취를 감추자 러시아 쿠릴열도 부근의 원양꽁치가 쓰였다. 재밌는 점은 원양 꽁치가 연안 꽁치보다 불포화지방산 등 영양학적 측면에서 앞선다는 점이다.

구룡포가 과메기 최대 집산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 포항은 낙동정맥이 고도를 낮추는 지점이라 북서풍과 염분을 머금은 영일만의 해풍이 뒤섞이며 과메기를 숙성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과메기는 바람뿐 아니라 적당한 햇빛과 습도 온도 등 네박자를 갖춰야 하는 까다로운 먹을거리였다. 기자가 찾은 진강수산 덕장의 건조실에는 습도 조절을 위해 많은 창문이 뚫려 있는 데다 선풍기 연탄난로 등을 비치, 시간대별로 온도와 습도를 체크하면서 ON-OFF를 반복하는 복잡한 작업이 계속됐다. 바람이 잘 통하는 햇빛에 그냥 말리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대나무 꽂이에 걸려 있는 과메기 덕장의 모습은 한폭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한편으로 탐스럽다.

구룡포 과메기 덕장.

구룡포는 동해안 최대 어항답게 대게 및 오징어의 국내 최대 집산지이다. 겨울바다의 낭만 보다는 갈매기의 호위를 받아 뱃고동을 울리며 드나드는 비릿한 고깃배의 모습이 더 살갑게 다가오는 어항이다. 그렇다 보니 경매가 이뤄지는 위판장도 대게, 오징어활어, 트롤 오징어 및 잡어 위판장 등 세 곳이나 된다. 새벽 잠깐 떠들썩한 다른 어항 보다 거의 온종일 시끌벅적하다.
과메기와 함께 구룡포 해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반건조 오징어인 피데기.

구룡포는 전국 대게 위판량의 60%를 차지한다. 이곳 대게의 상당량이 영덕으로 올라가 영덕대게로 옷을 갈아 입는다. 
 
구룡포수협에 따르면 대게는 국내 생산의 60%가 위판되며, 오징어는 국내 생산의 절반 가까이 모여든다. 브랜드에서 밀릴 뿐 이곳 대게가 상당 부분 영덕으로 올라간단다. 오징어도 울릉도 보다 더 많이 잡힌다. 소문만 나지 않았을 뿐 이곳 구룡포에 오면 싱싱하면서도 저렴한 대게와 오징어 과메기를 맘껏 맛볼 수 있다.

구룡포에선 놓쳐선 안 될 알려지지 않은 볼거리가 몇 곳 있다. 우선 일본인 집단 거주촌인 적산가옥. 화려한 구룡포항 도로 바로 뒤편, 장안동 골목이 바로 그곳이다.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일본은 동력선을 앞세워 어자원이 풍부한 구룡포에 어민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믿기 힘들겠지만 100년 전 일본 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에는 지금의 항구와 도로가 모두 바다여서 이 적산가옥이 바다와 인접했다고 한다.

꼬불꼬불한 골목길 사이로 일본식 대문과 이층 가옥을 걷다 보면 불현듯 이층 창문이 열리면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곤니치와'하며 인사를 건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빈 집에 들어가보면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고 문에는 후지산과 천지못 등 고향을 그리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오래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거리 촬영지로 활용됐다.
 
동행한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서인만 부소장은 "50호 정도가 일본가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중 20호 정도는 근대문화재로 등록이 가능할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고 설명했다.

적산가옥 거리 중간쯤엔 돌계단이 조성돼 있다. 예전엔 신사가 모셔져 있었지만 지금은 구룡포공원으로 변모, 충혼탑과 용왕당이 들어서 있다. 구룡포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곳 주변에는 여전히 신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구룡포 입구에는 뱃공장이 있다. 목선 조선소였던 이곳 대성조선소는 1980년대 FRP선이 나오면서 침체에 빠지지 시작, 지금은 생계를 위해 철선과 FRP선 수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속으로는 언제나 목선 주문이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이 시대 마지막 목선 장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구룡포를 찾으면 역시 꼭 맛보고 가야 될 먹을거리가 있다. 50년 전통의 '철규분식'(054-276-2298). 구룡포초등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연탄불에 팥을 밤새 삶은 단팥죽(2000원), 감자가루를 적절히 섞어 만든 쫀득쫀득한 찐빵(3개 1000원), 양은냄비에 담아 주는 국수(2000원)는 어딜 내놔도 별미 중의 별미로 꼽힌다.

'철규분식'의 단팥죽과 찐빵. 이렇게 2000원.

'까꾸네'의 모리국수.


 이름이 다소 독특한 모리국수집인 40년 된 '까꾸네'(054-276-2298). 구룡포에서만 맛볼 수 있는 모리국수(5000원)는 원래 어부들이 배에서 내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갖은 생선을 넣고 끓인 뒤 국수를 말아먹던 음식. 경상도 말로 생선을 '모디(모아)' 넣고 '모디가(모여서)' 먹는다는 의미로 처음엔 '모디국수'로 불리다 어느날 자연스럽게 '모리국수'로 정착됐단다. 삶은 육수에 아구와 대게를 넣고 콩나물 파 고춧가루 마늘 등을 넣어 시원하다.

경부고속도로 경주IC~보문단지~감은사지~문무대왕릉~감포~구룡포 순으로 가도 되고,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해운대~대변~임랑~고리~서생~울산~정자해변~감포~구룡포 순으로 해변 드라이브를 하며 내달려도 된다. 구룡포에서 등대박물관과 상생의 손이 반가이 맞이하는 호미곶까지는 대략 30㎞. 도중에는 우리나라 최동단 땅끝(등끝)마을도 만날 수 있다. 안내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 거제도 장목면 외포항

왕처럼 대구찜 한번 먹어볼까, 임금님 진상품 대구 아직도 잡혀
근처 YS생가도 한번 둘러볼만,
카페리 이용하면 훨씬 더 편리

                   대구 요리 25년을 자랑하는 외포식당 곽송주 씨가 대구를 받쳐들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대구찜'.

시원한 대구탕.


겨울철 남해안을 대표하는 대구의 최대 집산지는 YS의 고향인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외포항. 예부터 임금님 진상품으로 올랐다는 거제산 대구는 누구나 한번쯤 먹고 싶어했던 바다의 귀족. 1m에 달하는 쭉 뻗은 몸매와 탱탱한 피부는 수입산 냉동 대구는 명함을 못낼 정도.

한때 대구잡이 어민들도 시련이 있었다.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거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혹 1~2마리 잡히면 최고 위판가가 60만 원에 달할 정도여서 '금대구'로 불리었다. '잃어버린 10년'이었던 셈이다. 다행히 꾸준한 대구알 방류사업으로 2000년대부터 다시 잡히기 시작해 지금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성수기 때와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2월의 외포항은 대구와 물메기 등으로 아침이면 부산하다. 외포위판장 관계자는 "지금이야 대구가 넘쳐나지만 한참 귀할 땐 미식가들 4명이 돈을 나눠 30만~40만 원하던 대구를 직접 사러 왔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외포리 농협 맞은편에서 '외포식당'(055-636-7205) 곽송주 씨는 "이곳의 대구탕은 다른 양념은 필요없고 소금 간만 약간 한다"고 말했다. 곽 씨는 시어머니로부터 대구요리를 전수받아 25년째 고수하고 있다. 전통이 있다 보니 이 집은 거제도의 정관계 및 교육계 인사,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고위층이 단골 고객이다.

 네댓 명이 먹을 수 있는 '대구찜'을 주문하면 대구탕 물메기회 아구수육 등 거제에서 맛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메뉴를 만날 수 있다. 대구찜은 생대구를 대나무 소쿠리에 얹어 묵은지 콩나물 등과 갖은 양념을 곁들여 별미로 손꼽힌다. 9만 원. 반드시 전날 예약 필수.

외포식당이 위치한 외포마을에서 고개를 하나 살짝 넘으면 대계마을. YS 생가가 위치해 있다. 생가에는 눈길을 끄는 것들이 있다. 1960년 5월 공비가 쏜 총탄에 절명한 YS의 모친 박부련 여사의 사진과 그 아래 놓인 장농이다. 그 장농에는 당시 공비가 쏜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진해 안골에서 카페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성우카페리(055-636-5676), 풍양카페리(1688-4808).


■ 스키타기 지금이 오히려 적기 

사람 붐비던 지난해12월, 올 1월보다 한적, 맘껏 즐길 수 있어
지난해 무주스키장 3월9일, 양산 에덴밸리 3월16일까지 영업
가격 또한 성수기의 50% 수준으로 대폭 할인

2월에 스키장을 찾으면 한적하게 맘껏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진은 무주리조트.

지난 14일 무주스키장 만선베이스에서 만난 직장인 김 모 씨는 "지금까지 왜 인파가 넘치는 1월 그것도 주말에 찾아 몇 번 타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렸는지 억울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찾은 김 씨는 2월에 와도 1월 못지 않게 설질이 좋아 스키 타기에는 그저 그만이라고 활짝 웃었다.

황삼원 홍보 담당은 "2월에 오면 저렴한 가격으로 알차게 스키나 보드를 탈 수 있다"고 전했다. 우선 22개 전 슬로프를 개방하는 데다 하프파이프 보드파크 모글코스 등 마니아들의 공간까지 완벽하게 오픈해 1월보다 오히려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무주의 경우 이웃한 진안 장수와 함께 원래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인 데다 국내 5위봉인 덕유산 향적봉에 위치해 있어 슬로프 자체가 1200~1300m에서 시작돼 2월말까지도 쾌적하게 스키를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숙박 리프트 렌털이 묶인 가족호텔 주중 패키지가 1인당 6, 7만 원대로 무려 성수기의 50%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 3인 기준으로 22만6000원, 5인 기준 34만 원에 판매한다. 국민호텔의 경우 주중 패키지는 2인 기준 11만 원, 5인 기준 26만2000원에 내놓아 알뜰족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 가격대는 버스를 이용, 리프트 렌털을 할 수 있는 여행사 패키지 상품이 7만5000원(강습 제외)인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해고속도로에서 대전통영 고속도로 덕유산IC에서 빠지면 된다.

부산서 가까운 양산 에덴밸리스키장도 사정은 마찬가지.

조용호 홍보팀장은 "영남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이곳 에덴밸리는 슬로프가 해발 800m대로 무주에 비해 낮지만 베이스 전면이 정북향이어서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보강 제설한 눈의 보전성이 높아 좋은 설질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2월말까지 눈까지 자주 내려 스키 타기에는 제격이라는 것.

가격 또한 저렴해졌다. 성수기 때 숙박비용만 19만 원(16평), 28만 원(23평)이던 것이 2월부터는 숙박뿐 아니라 조식 사우나&찜질방 리프트(50%) 렌털(50%) 강습(50%)을 포함해 16평형의 경우 2인 기준 22만1000원, 3인 28만4000원, 4인 34만7000원, 23평형은 4인 39만2000원, 5인 45만5000원, 6인 51만8000원이라는 파격가로 내놓았다. 경부고속도로 양산IC~어곡양산지방공단 배내골 방향.

부산과 인접한 양산 에덴밸리스키장.

에덴밸리의 보더.

에덴밸리의 스키어.








과메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1위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에 지명도에 밀리지만 
생산량은 압도적으로 1위랍니다"

구룡포항 전경. 웬만한 어항 하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각도를 달리해서 본 구룡포항.

장삼이사들은 구룡포 하면 십중팔구 과메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구룡포에는 과메기 이외에 국내 최대를 자랑하는 두 가지 수산물이 더 있다. 다름아닌 대게와 오징어이다. 혹자들은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를 떠올리겠지만 이건 와전이고 편견이다.

대게와 오징어의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생산지는 바로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항이다. 결국 구룡포는 대게 오징어 과메기의 전국 최대 생산지이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라 불릴 만큼 구룡포는 어항이라 부르면 미안할 정도로 항구가 자체가 아주 크다. 한눈에 봐도 영덕이나 울진 후포항, 울산 정자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규모가 상당하다.

해서, 구룡포는 겨울바다의 낭만 보다는 갈매기의 호위를 받아 뱃고동을 울리며 쉴새없이 드나드는 비릿한 고깃배의 모습이 더 살갑게 다가오는 거대 어항이다.

우선 과메기를 살펴보자. 일출 명소로 유명한 호미곶이 위치한 북쪽의 대보면 등과 함께 과메기 특구로 지정된 구룡포는 국내 전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구룡포가 과메기 최대 집산지로 자리매김한 데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 포항은 낙동정맥이 고도를 낮추는 지점이라 북서풍과 염분을 머금은 영일만의 해풍이 뒤섞이며 과메기를 숙성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과메기는 구룡포항을 살짝 벗어나면 해안가에 덕장이 이어진다.

대게와 관련해선 땅을 치고 통곡할 정도. 구룡포수협에 따르면 국내 생산량의 60%가 이곳 구룡포항에서 위판된다고 한다. 하지만 브랜드가 영덕에 밀리다 보니 여기서 잡은 대게의 상당 부분이 영덕으로 올라가 영덕대게로 옷을 갈아 입니다. 마치 전남 고흥 녹동항에서 위판된 세발낙지가 목포 세발낙지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구룡포수협 관계자도 "브랜드 인지도에서 차이가 나는 건 현실이지만 분명히 생산량은 구룡포가 훨씬 앞선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강조했다.
구룡포항 대게 위판장.

오징어 또한 국내 최대 생산을 자랑한다. 흔히 오징어 하면 울릉도를 연상시키는데 실제로는 울릉도 보다 오징어를 많이 잡는 곳이 이곳 구룡포다. 구룡포수협에 따르면 오징어 생산의 절반 가량이 구룡포에 모여든다고 한다.

 오징어의 경우 워낙 많이 위판되다 보니 오징어 채낚기배에 잡히는 오징어(활어) 위판장과 그물에 의해 잡히는 (트롤)오징어 위판장 두 군데가 있다. 이렇게 오징어가 많이 생산되는데도 필부들은 오징어 하면 울릉도를 떠올리니 구룡포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밤에 등불을 밝혀 오징어를 불어모은 후 긴 낚시줄로 잡아올리는 오징어채낚이배.
구룡포항을 벗어나면 과메기와 함께 해풍에서 건조되는 오징어를 만날 수 있다. 반건조 오징어인 일명 피데기이다.

한마디로 구룡포는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에게 밀리면서 그야말로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싱싱한 대게와 오징어, 과메기를 가장 싸고 맛있게 맛볼 수 있는 곳이 다름아닌 구룡포항인 것이다.

여기서 국내 유일 등대박물관과 유명 일출 명소로 '상생의 손'이 반기는 호미곶이 불과 30㎞에 불과해 해안드라이브 코스로 일품이다.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인 구룡포항을 벗어나면 과메기 덕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이 줄곧 이어진다. 해안드라이브길로 일품이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동해안 최대 어장인 구룡포가 어업 생산량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은 일차적으로 구룡포 사람들 책임이 크다"며 "앞으로는 브랜드 인지도를 올리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유정란 때 살해된 황보인 손자 노비가 구해
후손들이 서원 세운 후 뒷마당 양지에 비 세워 

바깥에서 본 광남서원. 제법 규모가 크다.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이자 동시에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중종 37년인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북 순흥에서 고려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이라 부른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다. 회재 이언재를 모신 경주 옥산서원, 퇴계 이황을 기리기 위한 안동 도산서원 등이 대표적인 예.

 하지만 양반과 상놈의 서열이 분명했던 조선시대 때 노비의 비(碑)가 존재하는 서원이 있어 눈길을 끈다. 과메기로 유명한 구룡포에 위치한 광남서원(廣南書院)이 바로 그것이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행정구역상으로 포항시 구룡포읍 성동3리.

 문무대왕 수중왕릉인 경주 양북면 용당리 앞바다에서 31번 해안국도를 따라 가다 구포휴게소를 지나자마자 도로 좌측에 '성동 메뚜기마을', '광남서원'이란 팻말이 서 있고 서원 앞 너른 주차장에는 포항 대형 지도가 눈에 띈다.
                 광남서원 입구의 대형 지도. 지도 아래 현위치라 적힌 표기된 글도 보인다. 

 광남서원은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충정공 지봉 황보인과 그 장자인 참판공 황보석, 그 차자인 직장공 황보흠을 기리기 위해 지방유림과 그 후손들이 세웠다.

 황보인(1387~1453)은 조선 태종 14년 1414년에 천시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8년 1436년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후 1440년엔 평안 성길도 관찰사가 돼 약 10년간 김종서와 함께 6진을 개척했고 문종 2년 1451년 영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좌하다 결국 1453년 수양대군에게 살해됐다.

 황보인을 기리기 위한 광남서원에 그렇다면 왜 노비의 비가 세워져 있단 말인가. 사연은 이랬다.

 원래 역적은 3대를 멸하지 않는가. 계유정란 때 역적으로 몰린 황보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들도 살해를 당했지만 손자가 충직한 노비 덕택에 살아났다.
 다름아닌 단량이라는 노비가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일출 명소로 유명한 호미곶이 위치한 포항 대보면의 오지 중 오지인 집신골에 피난을 내려와 거주하다 이보다 남쪽인 지금의 구룡포읍 성동으로 이주하여 대를 이어가게 됐다.

 세월이 흘러흘러 황보인과 그의 아들도 복관되자 정조 15년 1791년에 후손들이 '세덕사'라는 서원을 지었고, 순조 31년 1831년 나라로부터 '광남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

 서원을 들어서면 좌측에 '영의정 충정공 지봉선생 신도비'라 새겨진 신도비가 있으며 강당인 숭의당과 제당인 충종묘와 사우삼간 등이 있다.

       서원 입구에 위치한 황보인의 신도비. '영의정 충정공 지봉선생 신도비'라 새겨져 있다.

광남서원의 본 건물.

'광남서원'이라 적혀 있다.



 충비(忠婢) 단량을 기리는 비(碑)인,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라고 적혀 있는 비가 경내 뒷쪽 한켠에 세워져 있다. 무심코 왔다간 놓치지 쉬운 곳에 있지만 서원에 노비의 비(碑)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계급사회인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는 것이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의 설명이다.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라' 적힌 노비 단량의 진짜 비석.
          단량의 비.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 '진짜' 단량의 비는 담벼락 아래 양지바른 지점에 서 있지만 이후에 만든 '가짜' 단량의 비는 반듯한 전각 안에 소중히 모셔져 있다. 세월의 풍파를 겪고, 앞으로도 겪을 진짜 화강암 비는 여견히 바깥에 놓여 있고, 반들반들한 까만 대리석에 말끔하게 음각된 가짜 비는 전각 내에 서 있으니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어찌된 사연인지 서인만 부소장에게 물어보니 "이게 바로 우리 공무원의 수준이자 현실"이라고 자탄했다.

                
                진짜 단량의 비는 담벼락 아래 비바람 등 대자연에 노출돼 있고(사진 위) 바로 옆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가짜 비(사진 아래)는 보물단지마냥 전각 안에 고히 보관돼 있다. 이 어찌
                운명의 장난인가. 이게 바로 우리 공무원들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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