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향토요리 '이시야끼'. 우리말로는 돌구이요리인 이시야끼는 어부들이 고기잡이에서 돌아와 돌판을 달궈 갓잡아온 생선과 야채를 구워먹던 음식이다. 

 지난 겨울 포항 구룡포를 다녀왔습니다.
'과메기 1번지'로만 알려진 구룡포는 알고 보니 대게와 오징어의 생산량도 국내 최고더라고요. 지명도 면에서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에 밀리고 있지만 구룡포항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온종일 시끌벅적해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다웠습니다.

 당시 동행한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포만감을 꿈꾸며 들떠 있던 기자를 구룡포항 뒷골목으로 먼저 안내했습니다. 구룡포에서만 맛볼 수 있는 '모리국수'를 소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테이블이 많아야 네댓 개쯤 되는 허름한 식당에는 60대 노부부가 40년간 애오라지 이 '모리국수'만을 삶고 있었습니다. 대게와 아귀를 곁들인 국물맛이 일품이었습니다.

포항 구룡포의 향토요리인 모리국수. 아귀와 대게가 들어있어 국물이 아주 쉬원하다.

 모리국수는 독한 술과 지독한 바닷바람에 지친 어부들이 배에서 내려 허기를 채우기 위해 갖은 해산물을 넣고 끓인 후 국수를 말아먹던 구룡포만의 음식입니다. 다소 독특한 이 이름은 경상도 말로 생선을 '모디(모아)' 넣고 '모디가(모여서)' 먹는다는 의미로 애초엔 '모디국수'로 불리다 자연스럽게 '모리국수'로 정착됐다고 합니다. 모리국수를 먹으면서 서 부소장은 "모리국수를 알아야 진정 구룡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자, 이제 무대를 바다 건너 대마도로 옮겨 보겠습니다. 일본 본토보다 부산이 더 가까운, 한국 휴대전화도 터지는 '국경의 섬' 대마도 말입니다.

 대마도에도 이 '모리국수'와 유래가 비슷한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시야끼'라는 대마도 향토요리입니다. '이시'는 돌, '야끼'는 구이의 일본어로 우리말로는 돌구이요리가 적당하겠지요. 이시야끼 또한 만선의 깃발을 휘날리며 섬에 닻을 내린 대마도 어부들이 섬에서만 산출되는 돌판을 달궈 갓 잡아온 생선과 야채를 구워 먹던 음식이지요. 

 '모리국수와 이시야끼'.
이 두 음식에는 양국 국민의 민족성이 살짝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성격 자체가 약간 급한 데다 모든 재료를 섞어 얼큰한 국물의 잡탕식을 즐기는 우리와 달리 상대적으로 느긋한 일본인들에게는 돌판을 달구는 여유와 깔끔함이 묻어나는 듯싶습니다. 이 이시야끼란 향토요리가 최근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부들이 수백년 전 먹던 방식과 달리 어패류와 각종 야채 그리고 약간의 육류와 소스까지 곁들여져 푸짐하게 나옵니다.

 고구마를 갈아 만든 우동인 '로쿠베'라는 전통요리도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대마도 원주민도 먹기 힘들 정도로 잊혀져 가던 로쿠베도 최근 한국인들이 찾으면서 향토요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척박한 토양의 대마도에서나 나올 법한 음식입니다.

고구마로 만든 우동인 로쿠베.
대마도의 스시. 

 천혜의 황금어장 아소만을 활용한 해물 바비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문 낚시꾼들이야 갯바위에서 대물을 노리겠지만 낚시와 무관한 필부들은 조그만 낚시배에서 보리멸 우럭 노래미 등 잡어를 잡습니다. 건진다고 해야 될 정도로 줄줄이 올라옵니다. 남태평양 선상낚시가 부럽지 않습니다. 낚시가 끝나면 아소만의 안쪽 깊숙이 파도가 잔잔한 간이 수상가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해물 바비큐가 기다립니다. 숯불에 익혀 먹는 자연산 가리비와 굴 오징어는 가히 환상적입니다.

갓 잡아온 자연산 가리비가 숯불에 익어가고 있다. 

 혹자들은 대마도 하면 지금까지 우리 문화유산의 발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어 역사탐방지로, 일본의 100대 명산인 시라다케 등반을 위한 산행지로 그리고 대물 포인트가 즐비한 낚시터를 우선 떠올릴겁니다. 

 기자는 이참에 또 하나 추가하려 합니다.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을 품은 아소만과 울창한 원시림 등 대자연에서 나오는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지는 향토요리를 찾아 떠나는 맛기행 명소로. - (2)편이 이어집니다. http://hung.kookje.co.kr/373


한눈에 봐도 일본가옥거리임을 알 수 있는 구룡포 적산가옥 거리.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로 과메기뿐 아니라 대게 오징어의 국내 생산량 1위인 포항 구룡포항은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후
이듬해 일본 자국 어민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구룡포읍과 포항시에 따르면 오까야마, 가가와, 아이찌 등 세토나까이 주변 일대 어민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수산업이 포화상태여서 어민들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아주 심해 뭔가 돌파구가 필요할 때였다. 무엇보다 동해 구룡포의 어족자원이 무궁무진했던 것이 집단 이주를 가능케한 요인이었다.

 여기에 일본의 어선들은 동력선이어서 돛단배를 이용하는 우리 어업기술에 비해 무려 100년 정도 앞서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 어민들이 이주해야 될 필요충분조건이 모두 갖춰진 셈이었다.

30여년 전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 찌그러져 가는 여인숙 간판.



 100년이 지난 지금도 구룡포에는 당시의 일본 어민들이 집단 이주해 살았던 그 시절의 일본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적산(敵産)가옥거리, 다시말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장안동 골목을 천천히 걷노라면 영화속 한 장면처럼 아직도 일본풍이 물씬 풍겨난다.

 아무 정보 없이 구룡포항을 찾는다면 이 적산가옥 거리는 찾기 어렵다. 구룡포항 내 도로를 건너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쉽게 만난다. 그렇지 않다면 구룡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원래 지금의 구룡포항내 공유지와 도로는 오래전 매립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 적산가옥거리가 바다와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한눈에 일본풍이 느껴지는 이 거리는 오래전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 거리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시점과 종점의 거리는 대략 470m. 일직선이 아니라 꼬불꼬불하게 약간 굽어 있어 운치가 있다.

 가옥은 대략 50가구. 절반 가까이 빈 집이다. 빈 집에 들어가보면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창문이나 문틀을 자세히 보면 눈길 끄는 문양이 있다. 동그란 구멍이 있는가 하면 선사시대의 알 수 없는 무늬가 아주 세실하게 조각돼 있다.

 동행한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그들도 사람인지라 아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러한 문양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동그란 구멍과 그 옆으로 그으진 선을 두고 서 부소장은 일본의 마음에 항상 있는 최고봉인 후지산의 정상과 천지못이라고 설명했다. 지그재그로 그려진 것은 고향인 일본의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라고 덧붙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일본풍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골목을 걷다 보면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 속에 자리잡은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론 이층 목조가옥 창문이 열리면서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인네가 '곤니치와'하고 인사를 건넬 것 같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이 거리는 1930년대 번성했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며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들러봐야 할 공간"이라고 말했다.

 현재 결정된 계획은 없지만 포항시가 현재 이 적산가옥거리를 일본인 관광객들을 겨냥한 일본인 거리를 조성하려고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 부소장은 "왜색풍이 넘치는 일본인 거리보다는 차라리 이 거리를 적절히 보존하면서 일본의 만행과 당시의 우리 삶을 아우르는 가칭 근대역사 거리로 후대에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잠시 안을 들여다봤다. 빨래가 널려 있지만 흡사 난민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는 빈집.
적산가옥 거리 중간중간에는 우리네 집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풍이다.

적산가옥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이 새겨 놓은 다양한 문양이 눈길을 끈다.

양지바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듯하다.
이 적산가옥 거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깔끔한 집이어서 물어보니 당시 약국집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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