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회상하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산행이었죠
 후배들 지원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했고
 남북한 통일되면 백두대간 타고 백두산 가고파"

 장삼이사들은 남난희 하면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우선 떠올린다. 25년이 지난 지금 남난희는 "내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한 것이 행운이며, 그로 인해 지금의 내가 완성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태백산맥 종주등반' 종착역인 진부령으로 들어오면서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난희.
                사진제공=수문출판사.


-그토록 힘든 등반을 왜 했나요.
"당시엔 산에 미쳤어요. 암벽에 빙벽에, 시간만 나면 산엘 갔어요. 월급을 주는 직장도 산을 타기 위해 다녔어요. 모든 게 산과 타협이 되지 않으면 포기했을 정도였으니까. 답변이 되나요."

 잠깐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백두대간이란 용어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친숙한 백두대간이란 개념은 남난희가 태백산맥 종주를 시도할 때인 1984년에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고 이우형 씨가 1986년 이 개념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소속 대원들이 종주 후 대간종주기를 연맹회보인 '엑셀시오'에 소개했다. 이는 산꾼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 1990년 월간 '사람과 산'이 연중기획으로 종주기사를 연재함으로써 전국의 산꾼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백두대간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재밌는 점은 당시 인기리에 연재된 백두대간 종주기를 남난희가 썼고, 부산에서 활동하는 권경업 시인이 동행하며 산시를 곁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난희가 76일간 악전고투하며 걸었던 코스는 어디일까.

그는 금정산 고당봉에서 출발, 진부령에서 끝을 맺었다. 도상거리 약 590㎞, 실제 걸은 거리 약 800㎞, 1000m 넘는 봉이 50여 개 그리고 가없는 고개, 령, 봉, 재, 5만도폭 지형도만 27개나 되는 대장정이다. 요즘 산줄기로 보자면 낙동정맥을 타고 오르다 태백산에서 백두대간과 합류해 진부령까지 걸었던 셈이다.

백두대간을 몰랐던 당시로선 이 코스가 국토의 등뼈, 다시 말해 지금으로 치자면 백두대간의 개념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 자체가 당시 인식의 한계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남난희는 "물론 종주는 혼자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10차례 후배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그들이 없었다면 종주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무작정 내달린 게 아니라 철저한 준비 또한 필수였다고 덧붙였다. 떠나기 전 지도상으로 등반하는 인도어 클라이밍으로 전 지점을 머릿속에 넣었고, 지원조와는 1차 만날 지점을 놓치면 2, 3차까지 면밀히 준비했다고 한다.

"배낭이 너무 무거워 1g이라도 줄이려고 칫솔을 반 토막냈고, 길을 잃고 잡목에 갇히고, 가슴까지 쌓인 눈속에 파묻혀 울었어요. 그러면서 차츰 출발 전 자신감은 모두 사라졌어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어요."

 당시를 떠올리던 남난희는 "그 정도로 힘들었으면 약간 망설였을텐데 그땐 동계 종주가 얼마나 무모한지도 몰랐다"며 약간 상기된 채 웃었다.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하던 지난 1984년 그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 무척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0년 남난희는 이 종주를 바탕으로 책을 엮었다. 제목은 '하얀 능선에 서면'. 국내 산서로는 드물게 중판에 중판을 거듭, 당시로선 베스트셀러로 올랐다. 2004년 남난희는 산을 내려온 산악인의 삶을 실감있게 그린 몟낮은 산이 낫다'(학고재)를 출간했다.

2004년 산을 내려와 산을 돌아본 남난희의 두 번째 저서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 제목도 참 의미가 있다.

'태백산맥 종주등반' 뒤 6년만인 1990년 펴낸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


(1)'산을 버려 산을 얻은' 전설의 여성산악인 남난희의 삶 
http://hung.kookje.co.kr/361
(2)산악인 남난희 "좀 모자란 듯 해도 지금 무척 행복한걸요"
http://hung.kookje.co.kr/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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