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산' K2 베이스캠프 입구 둔덕에는 '메모리얼 힐'이라는 추모공간이 있다. K2에서 희생된 전 세계 산악인들을 애도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기자는 해발 5300m쯤 되는 K2 베이스캠프에서 홀로 다녀오느라 애깨나 먹었다. 이곳에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책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당사자인 영국의 아줌마 산악인 알리슨 하그리브스의 동판도 눈에 띈다. 1995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단독 등정한 그는 두 달간의 휴식 후 K2도 역시 무산소로 홀로 올랐지만 하산길에 목숨을 잃었다. 네 살, 여섯 살 난 두 아이를 두고서. 당시 첫째 아이가 공식회견장에서 아빠에게 엄마가 죽은 곳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아이와 아빠와의 K2트레킹이 현실화됐고, 이 트레킹 기록이 바로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내용이다. 당시 파키스탄은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트레킹을 지원했고, 영국의 BBC는 이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다시 한 번 전 세계 산악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인 히말라야에는 고금을 울리는 사연이 널려 있다. 지난 21일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길에 숨진 부산 산악인 서성호(34·부경대OB)의 사연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8000m 히말라야 12좌를 올랐다. 이 중 11좌를 이번에 세계 최단기간·아시아 최초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기록을 세운 김창호와 함께했다. 자일파트너로 친형제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2008년 세계 4위봉인 로체를 3일 만에 무산소로 올라 최단기간 기록 공인도 받았다. 
 

악계에선 김창호의 이번 기록을 깰 유일한 산악인으로 서성호를 꼽고 있지만 정작 서성호는 욕심이 없었다. 그는 평소 사석에서 "그저 산이 좋아 산에 올랐고, 가장 체력이 왕성할 때 고산등반의 기회가 생겨 열심히 하다 보니 운이 따랐다"고 겸손해했다.


 기록에 욕심이 있었다면 김창호보다 먼저 할 수도 있었다. 네팔인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오른 밍마 셰르파가 지난해 초 'K2·브로드피크 상업대'를 모집했다. 밍마는 2010년 7월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 부산원정대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며, 밍마의 동생은 같은 해 10월 시샤팡마 원정 때 역시 부산원정대의 신세를 졌다. 이런 인연으로 밍마는 부산원정대의 서성호가 K2와 브로드피크를 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곤 특별 초청했지만 서성호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남은 두 개를 올라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계에서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힘겹게 걸어온 그의 삶의 여정 때문이다. 어머니는 따로 살았고, 부친은 오랜 세월 중병을 앓았다. 대학 입학 후 그는 극심한 생활고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휴학 땐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과 각종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했다. 동생도 건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중 부친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제대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막노동 후 달밤엔 산악부 활동을 위해 운동장을 뛰고 철봉에 매달렸다. 2006년에는 부산원정대에 뽑혀 에베레스트도 올랐다. 다행히 그해 가을 10년 만에 하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됐다. 먹고사는 일이 더 급했던 그는 이듬해 여름 예정된 K2·브로드피크 등반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때 동행해 두 거봉을 올랐다면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그는 2011년 9월, 32세로 세계 최연소, 최단기간 히말라야 8000m 14좌 기록을 보유하게 됐으리라.


 '운명'이었을까. 재취업해 보통사람처럼 살고 있는 그에게 김창호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앞두고 도움을 요청했다. 생사를 같이 했던, 가장 좋아하던 '창호형'이었기에 기쁘게 함께했다.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채 펴보지도 못한 채.


 30일 오전 9시 부산시립의료원에서 부산산악연맹장으로 영결식이 열린다. 슬프다 안타깝다. 애오라지 산이 좋아 산에 살았던 그래서 산이 돼버린 서성호의 명복을 빈다.

 

2010년 낭가파트바트 때 정상에 선 김창호와 고 서성호.

 

2011년 발토르빙하에서. 왼쪽에서부터 홍보성 부산산악연맹 회장, 고 서성호, 김창호.

 

                           살아 생전의 서성호

 

 


 

<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진 히말라야 원정대. 왼쪽부터 서성호, 오영훈, 김창호 대장, 전푸르나, 안치영.>


김창호(44)는 세계 산악계가 인정하는 현역 최고의 산악인이다. 그의 등반 기록 중 압권은 후배인 고 이현조와 함께한 세계 최난도 거벽인 낭가바르파트(8125m) 루팔벽 등정이다. 루팔벽은 벽 구간만 세계 최장인 4500m에 평균 경사도 60도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거대 벽. 엄청난 경사 때문에 눈이 쌓이지 않아 흔히 '벌거벗은 산'으로 불린다.

루팔벽 초등은 1970년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69)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메스너는 함께 등정한 동생 귄터를 하산길에 잃었지만 김창호는 후배 이현조와 무사히 하산했다. 1986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현존하는 등반가의 전설로 불리는 메스너는 2004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에서의 삶과 죽음의 장대한 오디세이를 담은 'The Naked Mountain'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때보다 좋은 기술과 장비가 줄기차게 나왔지만 아직도 루팔벽은 재등되지 않고 있다. (중략) 앞으로도 전 세계 유능한 산악인 1000명 중 선택 받은 이는 아마 한 두 명일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이듬해 김창호 팀은 메스너의 예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35년 만에 루팔벽을 가뿐히 올랐다. 머슥해진 메스너는 2006년 친인척 40여 명과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베이스캠프로 떠나는 트레킹 팀에 특별히 김창호를 초청, 서로가 서로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김창호와 라인홀트 메스너.>

 김창호는 부산과의 인연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5000~7000m대의 미답봉을 주로 오르내리던 그에게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가 2006년 에베레스트를 오른 후 두 번째 대상 산인 K2 등반을 앞두고 카라코람 히말라야 전문가였던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그게 인연이 돼 김창호는 2007년 K2부터 2011년 초오유 등정까지 부산원정대의 히말라야 8000m급 13좌를 함께했다.

<2010년 7월 낭가바르파트 정상에 선 김창호(왼쪽)와 서성호.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2011년 파키스탄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발토리빙하에서 부산다이내믹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김창호(왼쪽 세 번째). 왼쪽 첫 번째 홍보성 대장, 두 번째가 서성호.>

<2011년 초오유 등반 때. 왼쪽부터 김창호, 홍보성 원정대장, 서성호.>


 현재 김창호는 히말라야 14좌 중 에베레스트 등정만 남겨놓고 있다. 사실 김창호는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 기회가 한 번 있었다. '도로공사 장애인 등반대'대원으로 참여해 마지막 캠프에서 김홍빈과 함께 등정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에 나섰던, 루팔벽에서 동고동락했던 후배 이현조와 오희준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등정 도전을 포기하고 시신 수습에 나서 결과적으로 기회를 놓쳤다.

 그가 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함께하는 대원은 그와 지금까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34/부경대OB), 안치영, 오영훈, 전푸르나.


 김창호의 이번 등반은 히말라야 14좌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라 다소 독특하면서도 의미있게 계획을 세웠다.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대원들 힘으로 해발 제로에서 출발한다. 인도 바카할리마을에서 갠지즈강의 지류인 후글리강에서 카약을 타고 강을 거슬러고(5일/50㎞), 갠지즈강을 따라 사이클을 타고 국경을 넘어 네팔로 집인한 후 (15일/1000㎞), 도보로 베이스캠프(15일/150㎞)에 도착해 정상에 오른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통상 등반기간보다 40일 정도 더 걸리고 비용도 배나 든다. 카약과 사이클은 이번 원정의 후원사인 몽벨과 LS네트웍스가 후원했다. 

 이번 등반에서 김창호는 무산소로 도전한다. 만일 등정에 성공한다면 김창호는 아시아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등정 기록을 세우게 된다. 세계 최초 무산소 기록은 메스너이며, 김창호는 14번째가 된다. 또 5월 중순에 정상에 오를 경우 1987년 예지 쿠쿠즈카가 세운 기록(7년 11개월 14일)도 경신, 최단 기간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자가 된다.


 한편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김창호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는 현재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2개, 무산소로는 10개 올랐다. 

김 대장은 "에베레스트 정상은 기압과 산소가 평지의 3분의 1 수준"이라며 무산소·무동력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설명했다. 

원정대의 등반 루트는 에베레스트 남동쪽 능선과 로체 서벽이다.
 원정대는 오는 11일 출국한다. 정상 등극은 5월 중순으로 보고 있으며, 그럴 경우 같은 달 30일 귀국할 예정이다.

'다이내믹 부산 2009 희망원정대'의 김창호(왼쪽) 서성호 대원이 28일 오전 11시15분(한국시각) 네팔 소재 세계 8위봉인 마나슬루(8163m) 등정에 성공했다. 부산원정대 인공위성 전송사진

부산의 산사나이들이 히말라야 8위봉인 마나슬루(8163m) 등정에 성공했다. 올 봄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에 도전한 세계의 산사나이들 중 초등의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그것도 무산소로.

 '다이내믹 부산 2009 희망원정대'(원정대장 홍보성)의 김창호 서성호 대원은 28일 오전 11시15분께(한국시각) 셰르파 1명과 함께 북동릉 루트를 통해 마나슬루(8163m) 정상에 올라 50분 정도 머물다 현재 하산 중에 있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지난 3월 16일 마나슬루 다울라기리1봉(8167m) 안나푸르나1봉(8091m)을 목표로 출국한 희망원정대는 1차 목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29일 베이스캠프에서 철수, 다음 목표인 다울라기리1봉 베이스캠프로 이동할 예정이다.

 이로써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는 지난 2006년 국제신문의 특별 후원 아래 에베레스트, 2007년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K2와 브로드피크, 2008년 마칼루와 로체에 이어 여섯 번째 8000m급 히말라야 봉우리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홍보성 대장에 따르면 원정대는 지난 3월 22일 네팔 카트만두를 출발, 9일간의 캐러밴으로 마나슬루 베이스캠프(4800m)에 도착, 지난 2일부터 본격 등반을 시작했다.

 하지만 올들어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제트기류의 영향으로 두 차례나 정상 도전에 실패했다. 첫 번째인 지난 14일엔 갑작스런 제트기류로 인해 7500m 지점에서 발길을 돌렸으며, 두 번째인 시도인 지난 22일에도 캠프2(6900m)까지 진출했으나 이후 7500m~정상부에 역시 제트기류의 영향으로 강한 돌풍이 예상된다는 기상예보로 또 다시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올 봄 시즌 히말라야 전역에는 예년과 달리 제트기류가 정체되면서 강풍과 대설로 등반 활동이 상당히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

 원정대는 다행히 지난 27일 오후부터 제트기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바람이 차츰 약해질 것이라는 국내에서 보내온 기상예보에 따라 26일 오전 10시께 김창호 서성호와 셰르파 1명 등 등정조 3명은 베이스캠프를 출발, 5시간만에 캠프1(5800m)을 거쳐 캠프2(6400m)에 진출했다. 다음날인 27일 오전 11시께 캠프2를 출발한 원정대는 3시간만인 오후 2시께 캠프3(6900m)에 도착, 6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밤 10시께 캠프3을 출발했다. 원정대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고도차 약 1200m를 10시간 15분 만에 극복하고 정상에 도달, 올 봄시즌 마나슬루 정상에 처음 오른 등정자로 기록됐다.

 김창호(39/부경대OB)는 4년 전 고 이현조와 함께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을 히말라야 14좌를 세계 최초로 이룩한 라인홀트 메스너 형제의 초등 이후 35년 만에 재등정, 세계 산악계의 찬사를 받은 현역 국내 최고의 산악인이다. 김 대원은 부산원정대의 일원으로 지난 2007년 K2와 브로드피크, 2008년 마칼루와 로체에 이어 마나슬루까지 5연속 무산소 등정의 위업을 달성했다. 지난 2006년 에베레스트에 오른 서성호(30/부경대OB)는 지난해 김창호 대원과 함게 마칼루 로체에 이어 세 번째 무산소 등정을 기록했다.

 특히 서성호 대원은 부산을 넘어 대한민국 산악계를 대표하는 드림팀을 구성해도 김창호 대원과 함께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최상의 기량을 산악계로 인정받고 있다.

 홍보성 대장(53/부경대OB/(주)조은)은 "올 봄 마나슬루에 도전한 10개국 원정대 중 가장 먼저 등정을 달성해 기쁘다"며 "나머지 다울라기리1봉과 안나푸르나1봉 모두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내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진은 지난해 '2008
마칼루-로체 부산원정대'가 등정에 성공한 후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모습. 맨 왼쪽이 김창호 대원, 두 번째가 홍보성 원정대장, 왼쪽에서 네 번째가 서성호 대원이다. 

◆부산 산악계 히말라야 등반사
                           -①도전의 시작

"한계…불가능…,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 8번째로 오른 자랑스런 한국의 '77에베레스트 원정대'.
오색 룽다가 펄럭이고 있는 가운데 에베레스트 등정 후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서 철수하기 전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초체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기에 모두들 표정이 밝다. 뒷줄 왼쪽에서 4~6번째가 각각 부산의 전명찬(작고), 곽수웅,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작고) 대원이며,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영도 원정대장.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선 티베트의 북동릉 쪽과는 달리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04년 3월 대한산악연맹 부산연맹(이하 대산연 부산연맹) 총회에서 회장으로 오른 하해룡 회장은 취임일성으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고봉이라는 상징성 하나밖에 없는 에베레스트 대신 등반성과 후진양성을 위해 8000m급 다른 봉우리를 택하자는 일부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대산연 산하 시도연맹 중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지 못한 곳은 부산 대전 제주뿐이라는 사실을 접하고는 자존심 회복 차원에서 에베레스트로 결정됐다.

부산연맹은 부산시와 국제신문의 특별 후원으로 2006년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를 꾸려 2년 후인 2006년 5월 16일 마침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 부산연맹이 새롭게 거듭나는 토대를 구축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 베이스캠프를 떠나기 전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4~6번째가 각각 부산의 전명찬(작고), 곽수웅,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작고) 대원이며,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영도 원정대장.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선 티베트의 북동릉 쪽과는 달리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감을 얻은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는 이듬해인 2007년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 K2와 브로드피크에 이어 올해엔 마칼루와 로체를 단숨에 올라 부산 산악인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렸다.

세계의 지붕이자 자연의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히말라야는 산악인들에게 궁극적 목표이자 희망이다. 왜 산에 오르느냐는 물음에 조지 말로리는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다소 선문답적인 명언을 남겼다지만 일반 산악인들은 그런 질문을 가급적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결같이 '싫은 일을 왜 하겠어요'라고 말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인간의 한계를 몸소 체험하려 한다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그저 산에 가는 것이 좋고 오르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고 나아가 미래도 없는 법.

부산 산악인들의 지금과 같은 위상은 과거 선배 산악인들의 발자취가 큰 힘이 됐다. 그 발자취가 땀과 눈물이 뒤섞인 시행착오가 됐든 추위와 굶주림이라는 역경을 이겨내고 이뤄낸 불굴의 의지이든 선배들의 영향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와 늘 함께 해온 국제신문은 부산 산악인들의 영욕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네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히말라야의 정의  
넓은 의미 히말라야는 중앙아시아 거봉군 전체
그레이트·카라코람·힌두쿠시로 다시 세분화

 
우선 히말라야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6000만년 전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 세계의 지붕으로 우뚝 선 히말라야.

'만년설의 집'이라는 의미의 히말라야는 넓은 의미로는 인도 네팔 파키스탄 부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거봉군 전체를 의미하지만 현지에선 크게 '그레이트 히말라야', '카라코람 히말라야', '힌두쿠시 산맥'으로 구분해 사용된다.

그레이트 히말라야는 장삼이사들이 흔히 말하는 히말라야를 의미한다. 동쪽으로 부탄과 미얀마의 경계에서부터 서쪽으로 네팔 인도북부를 거쳐 파키스탄 일부까지 이르는 총길이 3000㎞에 이르는 대산군이다.

8000m급 히말라야 14좌 중 동쪽에서부터 캉첸중가(8586m) 마칼루(8463m) 로체(8516m) 에베레스트(8848m) 초오유(8201m) 시샤팡마(8027m) 마나슬루(8163m) 안나푸르나(8091m) 다울라기리(8167m) 낭가파르바트(8125m) 등 10개가 포함돼 있다. 이 8000m급 거봉 10개가 모두 네팔에서, 또는 네팔을 경유해야 등정이 가능해 일명 네말 히말라야로 부르기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샤팡마는 티베트에서, 낭가파르바트는 파카스탄에서 오른다.

  '검은 암석의 땅'을 의미하는 카라코람은 파키스탄 북부지역의 산군으로, 여기에는 '죽음의 산' K2(8611m) 브로드피크(8047m) 가셔브롬2(8035m) 가셔브롬1(8068m) 등 히말라야 14좌 중 4개가 포진해 있다. 총길이는 약 500㎞.

그레이트 히말라야에 비해 위도가 5도 정도 북쪽에 위치한 까닭에 고온다습한 인도양 기후의 영향을 덜 받아 매우 건조해 동식물이 생존하기 어려운 불모지대다.

또 다른 산군인 힌두쿠시는 파미르 남부에서 파키스탄 북부를 거쳐 아프가니스탄 중앙부로 뻗은 600㎞의 산맥.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따라 길게 도열돼 있다 보면 된다. 힌두쿠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넘어 인도를 침공했다 전해온다. 힌두쿠시의 최고봉은 티리치미르(7700m)로, 이곳에는 7000m급 산들이 많다.


#초창기 한국 히말라야 진출
학술조사·개척등반서 60년대 이후 극한 알피니즘 눈길
곽수웅 전명찬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부산 대표 참가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 벽에 걸린 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대원들은 비행기에서 술을 마셔 대부분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 대원들은 기자회견 후 청와대에 초청받고 지금으로 치면 올림픽 금메달에 해당되는 훈장까지 받는 칙사대접을 받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히말라야로의 진출은 자국내에서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그 등반영역을 확장하는 순으로 나타난다.

해외등반에 관심을 갖게 된 196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의 등산문화는 한국산악회와 대학산악부를 중심으로 국토규명 학술조사로 출발했다. 이후 설악 한라 지리산 등지에서의 적설기 등반과 암장 개척등반이 주를 이루면서 이러한 열기가 부산을 비롯한 지방으로 확산됐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 점차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내 산악계는 고전적 등반에서 탈피, 극한 등반을 추구함과 동시에 새로운 등반 대상지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점차 해외원정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히말라야 원정은 1962년 다울라기리2봉(7751m) 정찰대가 시초이다. 이 원정대는 다울라기리 남쪽 접근로의 발견과 6700m 무명봉을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0년부터 시작된 8000m급 히말라야 14좌는 티베트에 위치한 시샤팡마(8027m)만 미답봉으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이미 초등된 상태였다. 그만큼 출발점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다는 것.

두 번째 원정은 1970년 한국산악회 추렌히말(7371m) 동봉 원정대. 이때 첫 등정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원정사에 처음 이름을 올리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같은 해 로체샤르(8382m)를 시작으로 1971, 1972, 1976년 세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8163m)에 도전장을 던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마침내 1977년, 대산연이 파견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지구의 용마루에 올라섰다. 세계에서 8번째 등정국가로, 고 고상돈 대원은 58번째 등정자로 기록됐다. 서구 산악계가 1950년 8000m급인 안나푸르나를 초등할 때까지 55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반면 한국은 히말라야의 장을 연 지 불과 15년만에 개척기를 마감하고 세계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당시 김영도 대장을 비롯해 18명의 대원이 참가한 원정대에 대륙산악회 곽수웅(33), 청봉산악회 전명찬(25·작고)이 참가, 부산산악계의 역량을 펼쳤다. 안타까운 점은 엑셀시오알파인클럽 송준송(31)이 1976년 설악산에서 훈련 도중 눈사태로 동료대원 2명과 함께 사망해 부산 산악인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77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부산연맹의 대원으로 참여한 곽수웅(33 현 대륙산악회 고문, 왼쪽) 전명찬(25, 작고) 대원이 부산역에 도착한 후 환영식을 갖고 있다. 젊은 시절 곽수웅 씨는 현 롯데 자이언츠 4번 타자 이대호를 아주 닮았다.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한 곽수웅 대륙산악회 고문은 "당시 대원선발 과정이 워낙 까다로워 우스갯소리로 시험쳐서 뽑았다고 할 정도로 엄격했다"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54명이 5차 훈련까지 거친 끝에 18명으로 최종 결정됐다"고 기억했다.

곽 고문은 "국가적 차원의 원정대인 만큼 각 시도 연맹 소속 대원들을 골고루 선발하려 했지만 훈련이 워낙 힘들어 결국 서울 부산 충북 충남 경북연맹의 대원들이 네팔로 떠났다"며 "등정에 성공한 고상돈 대원도 고향은 제주였지만 충북연맹 소속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부산 산악인의 히말라야 최초 도전은 1972년 2차 마나슬루 원정대(대장 김정섭)의 대원으로 참가한 청봉산악회의 송준행(32)이다. 그러나 손준행은 등반 도중 캠프3(6500m)에서 발생한 눈사태로 일본인 1명 등 대원 5명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로 세르파 10명도 숨졌다.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 참사였다.

부산 산악계는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등정에 자극받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부산연맹과 부산학생산악연맹 그리고 전통의 산악회들이 히말라야로 잇단 출사표를 던지게 된다.

에베레스트 남동릉 캠프2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대원과 세르파. 뒤로 보이는 지점이 사우스콜이다.

77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사다리를 이용해 빙하지역을 오르고 있다.

# "히말라야 부산원정대 뭉쳤다" 서미트클럽 결성
   
2000년대 들어 부산 산악계는 지금까지 히말라야로 원정대를 지속적으로 파견하고 있다. 네팔지역 5개 팀, 카라코람 쪽인 파키스탄 2개 팀, 중국 지역 4개 팀 등 모두 11개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향했다.

무엇보다 눈길 끄는 점은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이 주도하는 '다이내믹 원정대'의 등장이다. 부산시와 국제신문의 특별후원으로 결성된 '다이내믹 원정대'는 지자체에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거봉 14좌 완등이란 목표를 세우고 2006년부터 에베레스트 K2 브로드피크 마칼루 로체 등 5개 거봉을 올랐다.

참가 대원들이 점차 늘면서 원정대원으로서의 경험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을 방지하고 대원들의 노하우를 결집시키는 방안이 논의되던 끝에 친목단체인 '서미트 클럽'이 최근 결성돼 지역 산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7월 창립 발기인대회를 가진 '서미트 클럽'은 지난 8월 31일 부산의 진산 금정산에서 창립 기념산행을 가졌다.

클럽은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에서 '다이내믹 부산'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원정대를 구성해 파견한 '2006 에베레스트', '2007 K2 & 브로드피크', '2008 마칼루 & 로체' 그리고 '2001 초오유' 원정대원들을 주축으로 구성됐다.

초대 회장은 2004~2006년 부산연맹 20, 21대 회장을 연임한 하해룡(59·대륙) 부산연맹 명예회장이 맡았다. 회원은 2001년 초오유 원정대장 김복우(55·봐인), 2006~2008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장 홍보성(52·부경대OB)을 비롯, 조창래(49·대륙) 박종일(47·상봉) 김진태(45·상봉) 하영호(44·다솔) 신용우(44·청봉) 김창호(39·부경대OB) 김희수(37·한오름) 권경일(36·대륙) 박정용(32·부산빌라알파인클럽) 정용석(32·한오름) 유향미(30·동주대OB) 서성호(28·부경대OB) 박주원(28·다솔) 이세현(23·해양대) 등. 원정대 취재를 동행한 언론계의 이흥곤(국제신문) 김백수 임혁규(이상 KNN)도 포함됐다.

서미트 클럽은 해외 거봉 등반의 인재풀외에도 고산등반과 도전 정신을 추구하는 청장년층을 위한 각종 등반 자료와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계획이다.
문의 박종일 총무(010-5780-3939)

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사진 제공=곽수웅 대륙산악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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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산' K2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웅장한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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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 베이스캠프(왼쪽)와 베이스캠프에서 본 수시로 일어나는 작은 사태.


 일반인들에게 세계 최고봉은 에베레스트(8848m)이지만 산악인들에게 세계 최고봉은 K2(8611m)라는 말이 있다. 해발고도는 낮지만 거대한 피라미드 꼴의 날카로운 이 산의 등반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히말라야 8000m급 거봉들 중 K2의 등정률이 가장 낮은 30% 정도에 불과하다. 지난 1985년의 경우 등정을 시도한 26개의 원정대 중 겨우 9팀만이 성공했을 뿐이다.

 K2는 산세가 험한 것 이외에 상습적인 돌풍을 위시한 기상이변이 잦다. 히말라야의 대부분 8000m급 거봉들은 서로가 서로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지만 K2는 파키스탄 북부지역의 카라코람 산군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비교적 떨어져 있어 사실상 독립봉우리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K2와 직접 부딪히면서 일종의 소용돌이가 자주 발생해 산악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산 자체가 험한 데다 기상이변까지 상습적으로 일어나기에 산악인들로서는 난공불락인 셈이다.

 지난 1986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등정한 오스트리아의 살아 있는 전설 라인홀트 매스너가 "K2의 어느 루트라도 다른 산의 어려운 루트보다 힘들다"고 말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국내 산악인들의 경우 지난 1986년 장봉완 등 3명이 올랐지만 같은 해 함께 등반한 9개 원정대 대원 중 18명이 목숨을 잃어 '죽음의 산'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14년만인 2000년에 와서야 영호남 합동대(박정헌 등 8명)를 시작으로 한국산악회 황기용, 엄홍길 14좌 추진위(엄홍길 한왕용 등 5명) 등에서 14명의 대원이 잇따라 등정, 한 시즌 등정국가 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했다. 이듬해인 2001년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위해 박영석이 동국대 산악부를 이끌고 올랐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이야 사실 '히말라야 14좌 등정'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 위해 K2에 도전장을 던졌겠지만, 큰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여타 산악인들은 K2에 도전하는 것이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죽음으로의 여정에 다름 아니다. 해서, 박영석의 K2 등정 이후 6년간 국내 어느 원정대도 감히 넘보지 못했다. 워낙 등반 자체가 힘들다 보니 도전조차 두려운 것이 K2의 현실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 지난해 '2007 다이나믹 K2-브로드피크 부산 원정대'의 김진태 김창호 대원과 여성원정대의 오은선 대원이 잇따라 등정에 성공했다. 국내 원정대로서는 각각 6, 7번째였고, 개인으로선 21, 22, 23번째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지난 1일 K2 등반에 나섰던 경남 울산지역 산악인인 황동진(45) 등반대장, 김효경(33) 박경효(29) 대원 등 3명이 등정 후 하산하다 실종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원정대는 곧바로 시신 수습에 나섰지만 불가항력적임을 깨닫곤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곤 지난 14~16일 경남 김해 조은금강병원에서 경남산악연맹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안타깝게도 시신없는 상태로 진행되는 장례여서 빈소가 아닌 분향소 형태로 치러졌다.

 지난해 K2 부산원정대의 지원조와 함께 K2 트래킹을 떠나 K2 베이스캠프에서 원정대원들과 이틀밤을 함께 하며 취재를 다녀온 기자는 이번 원정대의 비보를 듣고는 한동안 잊었던 '죽음'이라는 단어가 새삼 떠올랐다.

 곧바로 기자는 지난해 K2 부산원정대의 홍보성 대장과 통화를 했다. 그는 착찹한 심정으로 "조금 전 조형규 경남산악연맹 회장과 통화를 하며 현지 소식을 듣고 위로의 말을 건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 대장은 산악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히말라야 8000m 거봉은 산신의 허락의 없으면 절대로 등정할 수 없다'는 경구가 이토록 가슴에 와닿은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K2로 가는 길은 사실 죽음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나 사상자를 많이 냈으면 유럽의 산악인들은 K2를 두고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고 불렀을까.

 K2 등반이나 K2 트래킹을 위해선 스카르두라는 곳에서 일정상 1박을 한다. 대개 전통의 K2모텔에 묵는다. 파키스탄 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인더스강을 굽어보는 전망좋은 이곳은 K2 브로드피크 가셔브롬 등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발토르 빙하 일대를 등반하는 산악인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대변하듯 기나 긴 복도에는 지난 수십년간 각국 원정대들의 등반을 알리는 사진이나 그림엽서, 지역 신문기사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인으로 세 번째 히말라야 14좌에 오른 한왕용의 마지막 남은 가셔브롬 2와 브로드피크 등반 계획을 알리는 커다란 포스터도 걸려 있다.
 하지만 한 켠에는 지난 1996년 3명의 한국인이 브로드피크를 등정한 후 하산길에 불귀의 객이 됐다는 현지 파키스탄의 신문이 눈에 띈다. K2와 브로드피크 베이스캠프는 도보로 1시간30분밖에 걸리지 않아 통상 원정길에 오르면 두 봉우리를 함께 등반한다.

 발토르 빙하에서 풀이 있는 마지막 야영지인 우르드까스에선 박영석이 동료 산악인 2명을 추모하는 동판이 암벽에 걸려 있다. 그리고 야영지 끝자락에는 작은 비석들이 서 있는 묘지군이 눈에 띈다. 원정대나 트래커들의 짐을 나르는 현지 포터들의 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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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영지 우르드까스에서 본 현지 포터들의 묘지(왼쪽). 우측은 박영석 씨가 동료 산악인 두 명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추모동판. 역시 우르드까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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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까스에서 본 오스트리아인들의 추모동판(왼쪽)과 우르드까스 전경.

 K2 베이스캠프 입구 쪽 둔덕에는 '메모리얼 힐'이라는 추모공간이 있다. 작은 돌탑 주변에는 여러 개의 동판이 눈에 띈다. K2에서 희생된 전 세계 산악인들을 애도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이곳에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책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당사자인 알리슨 하그리브스의 동판도 눈에 띈다. 여성 산악인으로 지난 1995년 에베레스트를 무반소로 단독 등정한 그는 두 달간의 휴식 후 K2도 역시 무산소로 단독 등정에 성공했지만 하산길에 생을 마감했다. 네살, 여섯살 두 아이를 두고서.
 당시 여섯 살난 아이가 공식회견장에서 아빠에게 엄마가 죽은 곳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아이와 아빠의 K2 트래킹은 현실화됐고, 이 트래킹 기록이 바로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내용이다. 당시 파키스탄은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트래킹을 지원했고, BBC는 이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K2가 죽음의 산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전 세계인들에게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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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2 베이스캠프 입구 쪽 둔덕에 위치한 '메모리얼 힐' 작은 돌탑에는 여러 개의 동판이 걸려
           있다. 돌탑 가운데 밤색 동판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당사자인
           알리슨 하그리브스의 것이다.

 K2에서의 죽음의 흔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K2 베이스캠프에서 이틀밤을 보낸 기자는 시도때도 없이 들려오는 산사태의 굉음에 괜시리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리속에 맴돌았다. 고소 캠프 구축을 위해 베이스캠프를 오가던 한 대원은 작은 산사태가 일어나 국적 불명의 시신 한 구가 떠내려오는 걸 봤다고도 했다.

 그리곤 귀국 후 부산원정대와 함께 K2 등반을 하던 세르파 니마 누루부가 캠프4에서 출발한 지 3시간만인 해발 8200m 지점에서 일순간 미끄러져 3000m 추락해 실종됐다는 사고 소식을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고 지점은 이번 경남 울산 원정대원들이 실종된 바로 그 지점이다. 세르파 니마 누루부는 1년 전인 2006년 부산원정대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함께 등정한 친구이자 동생같은 존재였다.

 부산원정대에 따르면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 후 카트만두에 집이 있는 세르파 니마 누루부가 대원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 후 디저트를 먹으며 대원들은 "앞으로 부산원정대가 도전할 나머지 8000m급 거봉들도 함께 하자"고 제의하자 옆에 있던 부인이 "K2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는데 운명의 신이 결국 그의 남편인 니마를 K2에서 앗아갔다는 것.

 이 처럼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오가고 그 흔적이 곳곳에 베어 있는 K2로의 여정.
 그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K2는 세계 등반사에 자신의 이름을 확고히 새긴 기라성 같은 산악인들의 목숨을 가뭇없이 삼켜버린 '죽음의 산' 답게 인간의 의지만으론 결코 등정할 수 없는, 산신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위엄이 넘쳐 흘렀다.

 K2 트래킹으로 인해 거의 7월 한달을 그곳에서 보낸 2007년 여름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경남산악연맹 악우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오버랩되면서 다시 머리속을 맴돈다.

 그 험한 곳을 왜 갔어요. 갔다면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지.
 
 슬프다. 안타깝다.
 애오라지 산이 좋아 산에 살았던 그래서 산에 묻힌 산사나이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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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2 등정 후 하산하다 불의의 사고로 희생된 황동진 원정대장과 박경효 김효경 대원의 분향소가
       지난 14~16일 김해 조은금강병원에 차려졌다. K2 원정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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