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 주민들은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예상과 달리 처음에는 환영 일색이 아니었다. 절반 정도는 시큰둥했다. 사생활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 회재 이언적 선생의 17대손이자 양동마을 문화유산해설사 이지휴 씨는 "관람객들이 빈집으로 착각하고 살림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한 발 양보해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헛기침 한 번 없이 방문을 불쑥 여는 경우가 잦아 주민들이 질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람객들이 주민들의 사생활 보호에 각별한 배려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들 두 마을의 관람객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많이 알려진 하회마을의 경우 평소보다 1.5배 늘었지만, 대학생이나 전문가 중심의 답사객들이 주로 찾던 양동마을은 평소보다 주말은 10배, 평일은 5배 정도 급증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가급적 문화유산해설사와 함께 둘러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떠나기 전 아무리 예습을 해도 해당 지역의 '전문가들'만큼 꼼꼼하게 살펴볼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마을 입구에는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실과 부스가 각각 있다.

안동 하회마을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꼭 보고가요"

- 류성룡 등 풍산 류씨, 600여 년 역사의 집성촌
- 추석연휴·24일~10월3일,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
- 매주 수·토·일 오후 2~3시, 탈놀이 공연 꼭 챙겨볼 것
   
하회마을은 서애 류성룡으로 대표되는 풍산 류씨가 600여 년 전 새 정주지를 찾아 정착한 집성촌으로, 개척입향(開拓入鄕)의 대표적 사례. 지금도 125세대 주민 중 67%가 풍산 류씨다.

마을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길지. 주산인 화산과 S자로 마을을 휘휘 돌며 굽이치는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래서 명명된 이름이 글자 그대로 '하회'(河回). 이처럼 앉은 터가 절묘하다 보니 여태 외침 한 번 받지 않아 한옥들이 잘 보존돼 있다. 이를 한눈에 확인하려면 마을과 마주한 강 건너 병풍처럼 우뚝 선 전망대인 부용대에 오르면 된다.   

부용대엔 최근 안내판이 새로 생겼다.

하회마을 항공사진. 문화재청 제공.


 부산서 하회마을을 찾는다면 요일 선택과 시간 배정을 잘해야 한다. 매주 수, 토, 일요일 오후 2~3시 하회마을 탈춤 전수회관에서 열리는 하회별신굿 탈놀이 공연 때문이다.

하회마을을 찾아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보지 않았다면 이는 '팥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하회마을 신영희 문화유산해설사도 "전국의 탈춤 중 가장 재밌는 공연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상민들이 지배계층을 비판하고…" 하는 내용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것도,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보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 좋은 데 못 간다'는 말이 이 지방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탈을 벗으니 부네(가운데 기생 역할)는 남자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아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공연 도중 외국인을 불러내 어깨춤 한번 덩실. 관광공사 제공

이 공연은 시종일관 관람객과 함께 한다.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본래 무동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등 10개 마당으로 구성돼 있으나 상설공연은 5~6개 마당으로 축약해 보여준다. 처음부터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고 웃음보를 자극한다. 공연 도중에는 내외국인을 자연스럽게 불러내 어깨춤을 추게 만들고 하회탈을 선물한다.

그런데 말도 안 통하면서도 입소문을 듣고 찾는 외국인을 위해 공연장 한 쪽에 대형 모니터를 설치해 재담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영어 일어 중국어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하회마을 관람은 크게 ▷부용대와 주변의 서원과 정사(精舍) ▷하회별신굿 탈놀이 공연 ▷병산서원 ▷낙동강변의 송림 만송정을 포함한 하회마을 그 자체로 이뤄진다. 3시간쯤 걸리는 부산서 출발할 경우 하회별신굿 탈놀이 공연이 시작되는 오후 2시까지 부용대와 병산서원 그리고 점심식사까지 마쳐야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마을 입구의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기념관, 세계탈박물관은 공연 관람 후 둘러봐도 늦지 않다. 이런 일정이라면 늦어도 오전 8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이번 추석 연휴와 오는 24일~10월 3일 열리는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 기간에도 예외없이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일정대로 진행된다. 축제 기간에는 수, 토, 일요일 이외 나머지 요일에도 하루 1회씩 하회별신굿 탈놀이 공연이 열린다. 공연 시간과 장소는 축제조직위의 결정에 따른다.

하회마을 충효당.

충효당 내부에서 본 모습. 관광공사 제공.


하회마을 양진당.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류시원의 안동 집 담연재 문틈 사이로 한 일본인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류시원의 문패가 보인다.


마을에선 풍산 류씨의 대종택인 양진당과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 화경당이라 불리는 북촌댁 그리고 마을의 중심이자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600년 된 삼신당이라는 불리는 느티나무는 빠뜨리지 말자. 화경당은 얼마 전 '욘사마' 배용준이 하룻밤 묵어간 뒤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류시원의 집인 담연재는 현재 사람이 살지 않아 닫혀 있다. 대신 그의 문패가 형의 것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다. 일본 사람들은 그래도 이곳에 오면 반드시 찾는다고 한다.

600년 된 삼신당이라 불리는 느티나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이곳은 소원을 적은 쪽지가 아주 많이 보인다.


마을과 부용대를 잇는 나룻배. 실은 모터로 움직이며 왕복 2000원을 받는다.

마을 옆 솔숲인 만송정.


주차장 앞 팻말.

주차장 앞 화천서원.


류성룡의 형 류운룡을 배향한 서원인 겸암정사.

옥서애 류성룡이 낙향해 기거하던 연정사.


병산서원 만대루. 기둥 사이로 보이는 풍광이 일품이다. 관광공사 제공.

병산서원 만대루.


부용대는 하회마을 만송정 강변에서 나룻배를 타고 다녀오거나 하회마을 입구에서 차로 '부용대·옥연정사·겸암정사'라 적힌 이정표를 보고 5분 정도를 달려야 한다. 주차장 앞 고건축물은 화천서원.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을 배향한 서원이다. 관람은 화천서원~서애가 낙향해 기거하던 옥연정사~ 부용대~ 서애의 형 겸암이 제자를 가르치던 겸암정사~부용대~주차장 순으로 걸으면 된다. 겸암정사는 부용대에서 7~8분 걸린다. 병산서원에선 초대형 누각인 만대루를 유심히 보자. 7칸이나 되는 만대루 기둥 사이로 보이는 병산과 낙동강 풍광은 마치 7폭의 동양화 병풍을 보는 듯하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로 나와 '풍산' '지보' 방향으로 가다 보면 '하회마을' 이정표를 만난다.


경주 양동마을

서백당의 마지막 현인 언제 태어날까

- 월성 손씨·여강 이씨 750여 년 된 처가입향
- '물(勿)'자형의 독특한 산골마을
- 취화선·혈의 누·음란서생 등 영화 속 숨은 촬영지로 유명
 
  
양동마을은 혼인을 통해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 잡은 처가입향(妻家入鄕)의 대표적 마을로 하회마을보다 150년 정도 앞선다. 조선 초 월성 손씨의 입향조인 손소가 장가왔다 재산을 물려받아 눌러앉고, 그 뒤 여강 이씨 이번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와 가문의 뿌리를 내렸다. 이 때문에 외손(外孫)이 복 받은 마을로 통한다. 이후 월성 손씨는 우재 손중돈이라는 청백리를 낳았고, 여강 이씨는 '동방 5현' 회재 이언적을 배출했다. 지금은 140여 세대 중 80가구가 여강 이씨, 18가구가 월성 손씨이며 나머지는 타성이다.

이곳 또한 하회마을과 함께 풍수에 따른 길지에 터를 잡았다. 실제로 두 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됐고, 일제시대 일본 학자인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에도 '삼남의 4대 길지'에 포함됐다.   
 
하회마을이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 강마을이라면 이곳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 문장봉에서 네 줄기의 골짜기가 뻗어내린 '물(勿)'자형의 산골마을이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특이한 지형인 것이다.

관가정을 찾은 어린이들.

양동마을 항공사진. 경주시 제공.


시 말해 마을 입구에서 보면 비교적 작은 마을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고 높아지는 전협후광(前狹後廣) 전저후고(前低後高) 형태의 지형임을 알 수 있다. 평지의 하회마을의 경우 강 건너 부용대(해발 64m)만 올라서면 훤히 볼 수 있지만 양동마을은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봐야 온전히 볼 수 있다.

임연주 문화유산해설사는 "입구에서 보이는 가옥들은 마을 전체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며, 마을 전체를 샅샅이 둘러보는 데는 골짜기와 산등성이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에 최고 6시간까지 걸린다"고 설명했다. 골짜기 사이 경사진 곳에 가옥들이 보석처럼 띄엄띄엄 박혀 있어 전체 규모는 하회마을의 배쯤 된다고 보면 된다.

 양동마을은 예부터 유난히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마을 동쪽의 안산인 성주봉이 뾰족한 문필봉을 닮은 때문이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월성 손씨, 여강 이씨 두 집안에서 낸 과거급제자가 116명이나 되며, 이 중 문과 급제자가 26명으로 경주 전체 지역 59명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친다.

이 마을에서 눈여겨 봐야 될 가옥은 서백당(書百堂). 서백당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쓴다는 의미. 이 마을 입향조인 손소가 세조 2년에 지은 월성 손씨의 종택이다. 마당의 600년 된 향나무에서 바로 보이는 문필봉인 성주봉의 자태 또한 인상적이다.

이 서백당의 터가 마을 주산인 설창산의 혈맥이 집중된 곳이어서 예부터 3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삼현지지(三賢之地)로 불렸다. 청백리 우재 손중돈과 그의 생질 회재 이언적 선생이 여기서 태어났으며, 나머지 한 명의 현인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손씨 문중에서는 나머지 한 명의 현인은 반드시 손씨여야 한다며 며느리 출산 때는 산실을 내줘도 딸에게는 허락치 않는다고 한다. 그 산실은 마당 내 조그만 담인 내외담 안쪽의 방이지만 아쉽게도 잠겨 있다.

서백당. 조그만 담인 내외담 안쪽의 방이 산실이다.

서백당 마당의 600년 된 향나무.


양동마을 무첨당.

양동마을 향단. 이 마을서 가장 규모가 크다.


누마루에 서면 안강들녘이 보이는, 우재 손중돈이 살던 관가정(觀稼亭), 여강 이씨의 종택인 무첨당(無添堂), 경상도관찰사였던 이언적의 모친 병간호를 위해 중종이 지어 준 향단(香壇)도 놓쳐선 안 될 이 마을의 자랑이다. 마을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향단은 한때 99칸이었지만 보수 때 줄여 지금은 56칸이다. 서백당과 무첨당은 골짜기 안쪽에 위치해 있어 발품을 약간 팔아야 한다.

양동마을은 알고 보니 숨은 영화 촬영지였다. '취화선' '혈의 누' '음란서생' '방자전' '가문의 영광' '내 마음의 풍경' 등이 주요 작품이다.

양동마을을 찾았다면 여기서 차로 10여 분 걸리는 안강읍의 옥산서원과 독락당도 찾아보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선생을 봉향하는 곳이며, 독락당은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말년에 책을 벗 삼아 보낸 곳이다. 옥산서원은 아직 팻말이 없어 초행이라면 찾기에 유의해야 한다.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전편(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발 그리고 하회, 양동마을)을 보시려면 여기(http://hung.kookje.co.kr/500)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강물은 마술사다. 그저 말없이 조용히 흐르는 줄 알았던 강물이 멀쩡한 육지를 서서히 갉아먹으며 종국에는 섬 아닌 섬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보름달을 닮은 둥그스름한 이 섬 아닌 섬은 주변을 거의 한바퀴 휘감아 흐르는 물굽이와 금빛 모래톱에 의해 빼어난 절승으로 거듭났다.
 호사가들은 이 섬 아닌 섬에게 물돌이마을 또는 물돌이동이라는 사전에도 없는 예쁜 이름을 안겼다.
 현재 국내에 널리 알려진 물돌이마을로는 예천 회룡포, 안동 하회마을, 영주 무섬마을, 무주 내도리, 밀양 삼문동이 있다. 신기하게도 밀양 삼문동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이름에서 그곳이 물돌이마을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묻어난다.
 회룡포(回龍浦)는 용이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는 의미인 것 같고, 내 하(河 ), 돌 회(回) 자를 쓰는 하회(河回)는 글자 그대로 물돌이이고, 무섬마을의 무섬은 물섬에서 연유된 듯하며, 내도리(內島理)는 글자 그대로 내륙의 섬으로 풀이된다.

 #예천 회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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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대에서 본 회룡포와 '뽕뽕다리'라 불리는 200m 길이의 철다리. 구멍이 숭숭 뚫린 건축용 철판(일명 아르방)을 두 줄로 깔아놓은 이 다리는 비가 내리면 물속에 잠겨 현대판 외나무 잠수교로 불리기도 한다.


 회룡포는 봉화에서 서서히 강폭을 넓혀온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비룡산과 맞닥뜨리면서 태극무늬 모양으로 원을 그리며 350도 휘감아 돌아나가면서 만든 마을이다.
 회룡포를 우선 한눈에 보려면 신라 천년고찰 장안사에 주차한 후 전망대인 회룡대(해발 199m)에 올라야 한다. 신라가 삼국통일 후 국태민안을 염원하며 전국 세 곳의 명산에 장안사를 세웠는데, 그 하나가 비룡산이며 나머지 둘은 금강산과 기장 불광산이다.
 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는 규모 면에선 안동 하회마을에 미치지 못하지만 물이 돌아나가는 정도나 풍광만은 한 수 위라는 것이 중론이다.
 회룡포의 원래 이름은 의성포. 의성포에서 회룡포로 개명한 사연은 이렇다.
 구한 말 예천의 아랫고을인 의성에 살던 경주 김씨들이 이곳으로 이주, 논밭을 개간하면서 자연스레 의성포라 불렸다. 하지만 이 의성포가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의성군에 가서 물돌이마을을 찾는 웃지 못할 일이 잦아지자 예천군이 9년 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고즈넉한 강마을인 회룡포는 오래 전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인근의 경북선 철길과 함께 주인공인 은서와 준서의 어린 시절 고향으로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젊은 연인들의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박용성 문화관광해설사는 "지금도 드라마 '가을동화'에 나왔던 주인공의 거주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 회룡대를 찾는 관광객들이 묻는다며, 그 집은 회룡대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오렌지색 지붕의 2층집"이라고 말했다.
 회룡포에는 지금도 경주 김씨 집성촌으로 10가구 25명이 살고 있다. 회룡포의 면적은 대략 6만 평. 이 땅은 억겁의 세월 동안 강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배수 잘 되고 보습력도 뛰어난 충적토라 흉년 한 번 든 적이 없는 천혜의 땅이라 주민 모두 고소득 농민이다.
 회룡대에서 20분 정도 능선을 따라 걸으면 삼한시대부터 격전지로 유명한 원상성에 닿는다. 이곳에선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물이 만나는 그 유명한 삼강(三江) 나룻터도 볼 수 있다.
 회룡포로 직접 들어가려면 이웃 개포면에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차를 이용하든지, 차로 2, 3분 걸리는 강변으로 이동해 '뽕뽕다리'라 불리는 200m 길이의 철다리를 건너야 한다. 구멍이 숭숭 뚫린 건축용 철판(일명 아르방)을 두 줄로 깔아놓은 이 다리는 큰 비가 내리면 물속에 잠겨 현대판 외나무 잠수교로 불리기도 한다.

 #안동 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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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뒷산에서 본 하회마을. 강 건너 보이는 기암절벽이 하회마을의 전망대인 부용대다.


 낙동강이 태극 모양으로 돌아 흐르는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거주해온 풍산 류씨 집성촌.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지리적 여건 덕분에 외침을 한 번도 겪지 않아 상류층 기와에서부터 초가토담집에 이르기까지 잘 보존돼 마을 자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지난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문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또 매년 10월이면 열리는 문화관광부 선정 최우수 축제인 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이 열릴 땐 특히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
 하외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보려면 마을과 마주보고 있는 강 건너편 부용대에 올라야 한다. 병풍처럼 우뚝 선 암벽인 해발 64m의 부용대는 화천서원 주차장에서 250m 정도 송림길을 산책하듯 걸으면 된다.
 이곳에 서면 낙동강 물줄기에 포근하게 감싸인 마을과 하얀 백사장, 그리고 류성룡 선생이 하회마을의 기를 보호하기 위고 북서풍을 타고 날아오는 모래를 막기 위해 1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는 만송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용대를 찾으면 놓쳐선 안 될 두 곳이 있다. 입구 화천서원 뒤 옥연정사와 부용대를 기준으로 반대편에 위치한 겸연정사가 바로 그것. 옥연정사는 류성룡 선생이 만년에 기거하면서 임진왜란 전란사인 징비록(국보 132호)을 저술한 곳이며 겸연정사는 류성룡 선생의 형인 류운룡 선생이 학문을 하던 곳이다. 겸연정사는 화천서원 바로 뒤에 위치해 있고, 옥연정사는 부용대에서 산길로 10여 분 걸으면 만난다.
 하회마을보존회는 지금보다 유량이 늘면 전통 나룻배를 띄워 만송정과 부용대 사이를 오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주 무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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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건너편 야산에서 본 수도리 무섬마을. 무섬마을은 다른 물돌이마을과 달리 마땅히 사진찍을 포인트가 없다.

 
 회룡포를 휘감아 도는 내성천이 이보다 상류 쪽인 영주 동남쪽 문수면 수도리에 일궈놓은 물돌이동이 무섬마을이다. 수도교를 건너 마을에 들어서면 유유히 흐르는 내성천 강물과 드넓은 금빛 백사장, 고색창연한 고가와 초가들이 조화를 이뤄 마치 어린시절 외갓집에 놀러온 듯한 정겨운 느낌이다. 초가에는 부엌의 연기를 빼내기 위해 까치구멍집이라는 경북 북부 산간벽촌의 가옥형태가 눈길을 끈다.
 하회마을처럼 풍수지리상 연화부수형으로 길지인 이곳에는 17세기 반남 박 씨들이 난을 피해 안동에서 영주로 피신을 오면서 정착했고, 그 뒤 선성 김 씨가 시집을 오면서 지금까지 두 성 씨의 집성촌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무섬마을은 수 년 전 전통마을로 지정돼 지금도 일부 보수 중이라 약간은 어수선하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옛 선비고을의 운치를 흠씬 느낄 수 있다.
 전체 45가구 중 100년 이상 된 고택만 16동인데 경북 중요민속자료인 해우당을 비롯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것만 9채나 된다. 수도교를 건너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해우당은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김낙풍이 기거한 곳으로, 한때 대원군이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해우당(海愚堂)이라 적힌 편액은 대원군의 친필이다.
 문화재 자료인 김뢰진 가옥은 조지훈 시인의 처가로 그의 시 '별리'는 이곳과 무섬마을을 무대로 쓴 것이다.
 놓쳐선 안 될 명물이 하나 있다.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 다리가 그것. 예부터 이 다리가 외지로 나가는 유일한 통행로였지만 지난 1980년 수도교가 놓인 이후부터 거의 방치되다 2년 전 마을주민과 출향인들이 성금을 모아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다리를 복원했다. 이를 계기로 매년 10월이면 외나무 다리 체험행사를 개최한다.

 #무주 내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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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리 전경(왼쪽)과 앞섬 및 뒷섬.

 금강의 대표적 물놀이 장소인 무주 내도리는 말 그대로 사방이 강물이 휘감긴 '내륙속의 섬'. 혹자들은 금강 천리길 수변구역 중 경관이 가장 빼어나다고 한다. 휘어지는 강의 자태도 뛰어난 데다 강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 또한 수려하다. 무엇보다 200여 m에 이르는 하천 폭에 담긴 수만 평의 하상초원은 그야말로 생태계의 보고이다.
 크게 보면 무주읍 대차리를 돌고 나온 금강 물줄기가 앞섬마을에 닿아 크게 휘감아 돈 후, 뒷섬마을을 지나 하류로 흘려가는 형국이다.
 내도리에는 다양한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어 천렵에 그저그만이다. 해서, 무주의 향토음식으로 어죽이 유명하다. 맑은 강물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국물을 내고 된장과 고추장, 수제비와 쌀을 넣어 푹 끓여낸 어죽은 부드러우면서도 구수한 맛으로 전국 미식가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내도리는 또 소설가 박범신의 문학적 토대이다. 스물셋의 젊음을 무주에서 교사로 보낸 박범신은 종종 무주 내도리를 자신의 문학적 자궁이라 말한다. 그만큼 내도리의 자연풍광과 생태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밀양 삼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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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안산 종남산 정상에서 본 삼문동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밀양강에 둘러싸여 있는 삼문동 좌측에는 영남루를 위시한 밀양시가지가, 맨 뒤로는 영남알프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앞선 네 개의 마을과 달리 삼문동은 밀양강에 의해 침식을 많이 받아 진짜 섬이다. 이는 밀양의 안산인 종남산 정상에 오르면 오롯이 확인된다. 규모나 주변 산세와의 조화를 고려한다면 경북 북부의 물돌이마을보다 한 수 위다.
 하지만 현재의 삼문동에는 아파트촌이 들어서 고풍스러운 옛 맛이 남아있지 않다. 되레 삭막하다.
 흔히 장삼이사들이 품속의 보석의 진가를 잘 알지 못하듯 밀양시는 아직도 물돌이마을인 삼문동의 소중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싶다.
 종남산에 서면 밀양강과 그 좌측으로 영남루 등 밀양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펼쳐지고 물돌이마을 뒤로는 저 멀리 가지 운문 천황 재약산 등 영남알프스 주요 산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한 폭의 한국화를 그려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풍광이 소위 밀양 10경에 왜 포함되지 않았는지 의아심이 들 정도이다.
 만일 이 삼문동을 회룡포나 하회마을처럼 개발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남겨두고, 이 풍광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종남산의 한 지점에 접근성이 빼어난 전망대를 조성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도심 속 섬마을로 유명세를 타면서 밀양을 넘어 전국의 볼거리로 자리매김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관광이라는 측면에서 백년대계를 세우지 못한 밀양고을 옛 원님들의 단견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영남알프스라는 천혜의 경관을 지닌 '산의 도시' 밀양시가 한번쯤 곱씹어야 할 대목인 듯 싶다.

글·사진 일부=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사진제공=예천군 안동시 영주시 무주군 밀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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