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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할아버지 이문권(72) 씨.

그는 1997년 2월 부산 동명공고 교감직을 마지막으로 43년간의 교직생활을 접은, ‘마음씨 좋은’ 영어교사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즘 부산의 진산 금정산에 푹 빠져있다. 많게는 일주일에 다섯번, 보통 서너번은 금정산을 쉼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40대 후반부터 직장 동료들의 권유로 산행을 시작한 그는 1년6개월 전부터 20여년 동안 꾸준히 다녀온 산행을 최종 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을 하고 있다.

산행에 문외한인 초보자가 보더라도 금정산을 홀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70여개의 산행로를 산행일지와 함께 그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1, 2호선 지하철역 주변을 산행기점으로 하는, 정말 돈 안드는 코스로 말이다.

“아마도 금정산처럼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산은 전국적으로 드물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부산시민들은 금정산의 진가를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실제로 이씨가 지금까지 작업해온 금정산 등산로와 산행일지를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하다. 일흔을 넘긴 노인 혼자 도전하기에는 너무도 방대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큼이나 금정산을 많이 오르내리고, 금정산의 산행로를 머리 속에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감히 자신한다. 그가 내놓은 등산로와 등산일지를 참고하면서 차분히 그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수긍이 간다.

지하철 1호선 범어사역에 내려 금정산에 오르는 길을 예로 들어보자.

그가 정리한 등산로에는 경동아파트, 범어사 매표소, 상마마을에서 각각 오르는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경동아파트의 경우 계명봉~농장~임도~고당봉 코스와 계명암~장군봉 평원~마애불 입구~고당봉 길로 세분화 했다.

범어사 매표소에서 출발하는 길도 북문~고당봉, 금강암 입구~금샘~고당봉, 내원~미륵불 입구~고당봉으로 각각 분류했다.

이같은 코스 소개는 남산동 두실 구서동 장전동 부산대 온천장 명륜동 동래역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2호선의 호포 금곡 동원 율리 화명 수정 덕천역 등도 마찬가지다.

산행일지에는 산행시 가장 중요한 들머리 부분에 많은 양을 할애해 꼼꼼하게 기입해 놓았으며 구간별 소요시간도 세밀하게 기록했다.

뭐니뭐니해도 압권은 등산로 지도. 아마추어가 작성한 지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현재 시판되는 웬만한 전문서적의 등산로보다 더욱 꼼꼼하게 돼 있다.

“산행일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잠을 자지 않고 작성하면 그만이었지만 지도는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씨는 지난해말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퇴임했던 학교를 찾아가 컴퓨터 담당교사로부터 이른바 과외를 받았다. 덕분에 표물을 포함한 A4 용지 2~3장 분량의 산행일지와 등산로 지도는 가볍게 소화해낸다.

“은퇴후 처음엔 산이 좋아 무작정 산을 찾았어요. 그랬더니 가끔씩 산행에 동행하는 친구들이 이왕이면 기록으로 남기면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했어요. 산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격려 또한 큰 힘이 됐지요.”

그는 요즘도 변함없이 산에 오른다. 눈길을 내려오면서 쟀던 일부 구간들의 산행 시간을 눈이 없는 정상적인 길에서 다시 한번 재기 위해서다. 그가 얼마나 정성을 쏟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1998년 친구 둘과 경남 진해 수리봉을 오르다 정상 부근에서 떨어졌다. 통영의 구조헬기가 다행히 구조했지만 오른쪽 이마가 함몰되고 왼손 골절, 엉치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었다. 수술후 의식을 되찾은 그의 첫 일성. “선생님 다시 산에 갈 수 있나요.”

/ 이흥곤기자


hung@kookje.co.kr  입력: 2003.03.20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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