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4>미주리 주 리퍼블릭- 덴질 밧슨

- 징집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참전 / 빗발친 포탄·총알 속 치열한 교전
- 고왕산 전투는 아직도 기억 생생 / 전역 후 한국전쟁 관련 책 저술
- 참전용사 필독서·대학수업 교재로 /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TV 방영도

- 함께 싸웠던 대원 하나 둘씩 타계 /  이젠 30명 중 7명 남아 가슴 아파
- 건강 회복하면 꼭 한국 찾아갈 것


한국전 참전용사 덴질 밧슨 씨 부부가 지난달 중순 자신이 사는 미주리 주의 소도시 리퍼블릭의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날은 북극한파의 영향으로 몹시 추웠고 눈도 많이 왔다.

 목숨 걸고 싸운 2300여 전우들이 잠들어 있는 성지, 유엔기념공원이 있는 부산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그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마음씨 좋은 백인 할아버지인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악수 대신 기자를 안아주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달 15일 미국 미주리 주의 소도시 리퍼블릭에서 만난 한국전쟁 참전용사 덴질 밧슨(86) 씨. 유난히 큰 목젖에 움푹 팬 주름이 세월의 더께를 말해주고 있었지만 이날을 위해 그는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6년 전 그는 폐암수술을 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완치됐지만 3, 4년 전부턴 신장염과 관절염이 도져 고생꽤나 했다고 동행한 그의 부인 에바 밧슨이 귀띔했다. 

 고교 동기로 한국전쟁 참전 3개월 전 결혼했다는 그는 3년 전 그토록 그리던 한국 방문의 기회가 있었지만 다리가 아파 포기했다. 하지만 그는 꿈을 접지 않았다. 다시 찾아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도 건강회복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군 제대 후 지역 언론사에서 기자로 17년간 근무했다는 그는 1999년 'Korea, We Called it War'라는 책을 냈다. 1951년 9월부터 1952년 9월까지 참전한 밧슨 씨가 전장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술한 책이다. 초판 이후 제법 팔려 2003년 네 번째 개정판을 냈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전역 후 미국 정부의 한국전쟁 폄하 때문. 귀국할 때 환영은 둘째 치고 4만 명에 가까운 미국 젊은이가 죽고, 10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고, 8000명 이상이 행방불명됐고, 7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지만 정부에선 '치안 활동' 내지 '내전' 정도로 치부하는 것에 실망을 느껴 그것이 '전쟁'이었음을 알리고 싶었다.

 코리아 입장에선 승자도 패자도 없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란이겠지만 한국전쟁은 당시 세계 각지에서 들불처럼 타올랐던 공산주의 팽창을 꺾어버리는 시발점이 된 의미있는 전쟁이었다는 것이 밧슨 씨의 생각이었다. 한국전쟁의 실상과 의미를 미국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미 해병 3사단 15연대 F중대 2소대의 하사로 참전한 그의 책에는 지휘관이나 그들의 전략·전술이 주 내용이 아니라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동료 군인들의 실제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2년 전 리퍼블릭에서 함께한 당시 소대원들.       

                  6·25 전쟁 당시 전우들과 함께한 덴질 밧슨(왼쪽) 하사. 

 "'리틀 지브롤터(경기도 연천군 고왕산)'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이틀간의 악몽 같은 전투는 평생 잊지 못할 최악의 전투였다. 60도나 되는 가파른 경사, 우레 같은 포탄소리, 청천벽력 같은 전우의 죽음, 부상병들의 고통스런 절규, 고지를 향해 오르는 도중엔 죽음의 속삭임까지 들렸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문득 이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일개 참전용사의 20달러 짜리의 단행본은 입소문을 타고 차츰 미국 전역 참전용사들의 필독서가 됐다. 지역 방송에선 수년 전 이 책을 토대로 5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 문화·교육 공영방송인 PBS를 통해 미 전역에 방영됐다. 이 다큐의 감독 존 길버트의 부친 또한 한국전 참전용사였다.

 정확한 팩트에 문체마저 깔끔한 이 책은 이후 미주리주립대학의 미국 전쟁사 관련 역사 수업의 교재로도 채택됐다. 교양학부 줄리 존슨 교수는 "전쟁사 수업 교재로 굉장히 값어치있게 생각한다"고 평했다. 존슨 교수는 이후 책 저자 밧슨 씨와 당시 동료 2소대원들을 초청, 포커스그룹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밧슨 씨는 "나의 졸저로 인해 미국인들 나아가 미국사회가 한국전쟁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돼 작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이 책이 번역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단, 한국어로 책이 나왔을 경우 자신에게 한 권만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 트루먼 대통령의 고향이 미주리 주여서 당시 이곳 젊은이들은 '트루먼 보이'(Truman Boy)라 불리며 징집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참전했다. 미주리 출신인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밧슨 씨는 사실 코리아가 어디 있는지, 전쟁이 어느 정도 지속될 지는 몰랐지만 그의 피앙새 에바는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임진강 하구를 비롯 리틀 지브롤터, 피의 능선, 단장 능선 등 서부 및 중부전선에서 싸웠다. 중공군들에 대한 호의적인 언급은 뜻밖이었다. 미군들은 중공군이 더 센줄 알았지만 그들은 악착같이 싸우지 않아 모두들 인민군 대신 중공군과 싸우기를 바랐다. 중공군들은 또 아군이 부상당했을 때 백기를 흔들며 사인을 보내면 데리고 갈 시간은 주었다. 반면 인민군은 한겨울에 발가벗겨 나무에 묶어놓고 30분마다 찬물을 뿌려 동사시키는 야만적인 행태를 보였다. 그 생각만 하면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밧슨 씨는 요즘 전우들을 생각하면 착찹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쟁 때 함께 싸웠던 2소대 30명의 전우 중 지금은 7명밖에 남지 않았다. 19년째 매년 모였지만 이제 그 모임의 종착역은 머지 않았다. 전우들의 건강이 차츰 악화되고 있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슬하에 1남 1녀의 자식과 8명의 손자(3명) 증손자(5명)를 두고 있는 밧슨 씨는 "만일 60여 년 전으로 돌아가 같은 상황에 직면해도 참전해 싸울 것"이라며 "당시 1년간 참전한 그 시기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폐허에서 다시 일어난 코리아와 코리안들을 존경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 美 미주리주 한국전쟁 기념물·기념시설 속속 등장

-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먼 고향 /  참전용사비·평화의 마을 등 조성


 지난해 11월 11일 '미주리 재향군인 묘지'에 세운 한국전참전용사비 제막식 때 이를 주도한 풀라스키 카운티 엄경숙

 한인인 회장(왼쪽). 오른쪽은 한 달 뒤 엄경숙 회장이 취재팀과 함께한 모습.

 지난해 11월 11일 '미주리 재향군인 묘지'에 세운 한국전참전용사비와 이를 주도한 풀라스키 카운티 엄경숙 한인회 회장.

6·25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의 고향인 미주리 주에도 한국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기념물과 시설들이 늦었지만 속속 들어서고 있다. 

 우선 한국전참전용사비. 미국 국경일의 하나인 지난해 11월 11일 재향군인의 날, 미주리 주 풀라스키 카운티 한인회(회장 엄경숙)는 카운티 내 포트 레오나르도 우드시의 '미주리 재향군인묘지'에 한국전참전용사비를 세웠다. 

 한인회는 지난해 초 숙원사업이었던 참전용사비 건립을 확정짓고 교통이 편리한 이곳에 한국전참전용사비를 세웠다. 높이 1.8m, 폭 1.2m의 1.6t의 화강암 참전용사비에는 미주리 주 62개 카운티 출신의 참전용사 35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미주리 주의 동쪽 끝 세인트루이스 인근에는 국제결혼가정선교회(담임목사 김민지·이하 선교회)의 '평화의 마을'이 있다. 미국인과 국제결혼한 한인여성들의 모임인 선교회는 1987년부터 회비와 기부금을 모아 세인트루이스 근교 415만8000㎡(12만6000평) 부지에 '평화의 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국제결혼 후 이혼한 한인여성들을 위한 시설 건립이 당초 목적이었지만 6·25 때 목숨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의 복지시설까지 계획하고 있다. 김민지 목사는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참전용사들이 인생의 황혼기를 외롭게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이들에게 따뜻한 쉼터를 마련해줘 그들의 참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참전용사 복지요양시설을 건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덴질 밧슨 씨가 거주하는 소도시 리퍼블릭에서 20분쯤 떨어진 곳에는 한국전쟁을 알리기 위한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HIGHWAY'라 적힌 표지판도 볼 수 있다. 미주리 주내 60번과 65번 도로 사이에 위치한 이 표지판은 2007년 스프링필드 한인회와 한국전참전용사회가 주 정부에 건의해 건립됐다.



 

■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2>뉴욕-다놀드 휄드먼 

-포병부대 배속 1년 한국 머물며 / 대구·임진강·원산 전투 등 참가
- 수류탄 맞아 부상, 힘겨운 고통 / 전쟁 후 트라우마로 한동안 투병
- 한인교회서 자원봉사 활동하다 / -집 없어 오갈 데 없는 가족 만나 
- 25년간 자기집에서 생활하게 해 / 어려운 한인보면 주저없이 도와


6·25 참전용사 다놀드 휄드먼 씨가 성조기와 태극기, 군부대 마크, 각종 훈장 및 뱃지 등이 담긴 액자를 배경으로 자신의 거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서민아파트에는 80대의 한국전 참전용사와 한국인 모녀 3명 등 총 4명이 함께 살고 있다. 철저한 개인주의 문화인 미국에서 백인 노인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인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사연은 뭘까.   

 거동이 꽤 불편한 다놀드 휄드먼(86) 씨는 '인연'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의 전쟁에 참전한 거나 25년 전 정말 우연히 브루클린의 한 한인교회에서 자원봉사로 영어를 가르치게 된 것을 두고 그는 인연 치고는 묘한 인연이라 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두 딸의 엄마 민현숙(56) 씨도 한인교회 영어교실의 학생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가르쳤는데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런 학생이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지병으로 앓던 남편이 세상을 떠 싼 월셋집을 찾느라 수업에 빠졌다는 것이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휄드먼 씨는 오갈 데 없는 이 가족에게 작은 방 한 칸을 내줄 테니 들어오라고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거저였다.

 민 씨의 사정은 정말 딱했다. 영주권이 없어 비싼 로스쿨 학비를 내야 했던 첫째 아이 때문에 집세와 교육비가 큰 부담이었다. 휄드먼 씨는 "싼 집을 못 구할 경우 노숙자쉼터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듣고는 죽기 전 자신이 정말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로스쿨 학비도 두 번이나 빌려줬다.

 민 씨네의 불행은 계속됐다. 로스쿨을 다니던 첫째 딸에게 만 21세까지 끝내 영주권이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이민법에 따르면 이럴 경우 추방돼 10년간 미국에 들어올 수 없다. 슬픔에 잠긴 민 씨 가족을 위해 휄드먼 씨는 뉴욕의 민주·공화 양당 상원의원과 이민전문변호사를 만나는 등 마치 자신의 문제인 양 최선을 다해 결국 일종의 사면인 '웨이버'를 받아 영주권을 받도록 했다. 덕분에 첫째(현재 32세)는 2년 만에 복학, 로스쿨을 졸업한 후 현재 기업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영주권이 있는 둘째 딸은 올 여름 로스쿨을 졸업한다.

 인터뷰 도중 휄드먼 씨는 편지 한 장을 내놓았다. 민 씨가 기자에게 한글로 쓴 편지였다.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휄드먼 씨가 대가 없이 저희 가족을 도와주신 것처럼 저희 가족도 앞으로 우리 사회와 이웃을 위해 성심성의껏 도우면서 살겠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입니다."

 휄드먼 씨의 한국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아파트 인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 한국인 부부 중 남편이 중병에 걸려 부인이 홀로 생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휄드먼 씨는 그 집의 12세 딸과 4세 아들을 방과 후나 주말이면 놀이공원이나 박물관 등에 함께 다니며 건사했다. 고맙게도 티 없이 잘 자란 딸 아이 박혜림(22) 씨는 어느덧 간호사가 됐다. 그는 아빠의 거동이 불편하니 결혼식 때 휄드먼 할아버지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부탁할 예정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뇐단다.


 화두를 한국전쟁으로 돌렸다. 거실 한 쪽 벽면에는 태극기와 성조기, 군부대 마크, 각종 훈장 및 뱃지, 전쟁 당시 군복 입은 사진이 들은 액자가 걸려 있다. '퍼플 하트'(Purple Heart·전쟁 중 부상 당한 군인에게 주는 훈장)라 적힌 모자와 티셔츠를 입은 그는 빛바랜 앨범과 흑백사진, 그리고 한반도 지도를 꺼내 기자에게 설명했다. 1950년 11월부터 1년간 참전한 그는 미 1기병사단 포병으로 부산에서 대구, 임진강, 원산까지 전진하면서 여기저기서 싸웠다. 수원 지평리전투에선 수류탄 파편에 머리와 손을 다쳐 일본으로 후송됐다. 치료 후 귀국도 가능했지만 그는 전우들이 있는 부대로 복귀했다.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실 그는 대학 및 결혼생활이 평탄치 못했다. 학업은 입학 후 6개월 만에 중단했고, 10년간의 결혼생활도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이후 재결합을 했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61세 때 뒤늦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판정을 받고는 그간 그럭저럭 꾸려오던 사업체를 아들 둘에게 물려주고 정신병원에서 치료에 전념했다. 지금은 회복돼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참전이 그의 삶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코리아나 코리안에 대해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솔직히 전쟁 중 너무나 끔찍한 고통을 많이 받았지만 동시에 군인도 아닌 평범한 코리안들도 이에 못지않게 힘들었다. 5년 전 한국정부가 초청해 코리아를 다녀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발전해 전우들과 함께 많은 눈물을 흘렸다. 고마웠다. 앞으로도 나는 미국 내 한인들과 서로 도우며 친하게 살고 싶다. 이런 인연도 사실 없지 않은가."


                  6.25당시의 다놀드 휄드먼 병장

빛바랜 앨범과 당시 지도와 자료 등을 꺼내 보이며 설명을 하고 있는 다놀드 펠드먼 씨.

 

# "조국 지켜줘 감사합니다" 뉴욕성결교회의 남다른 보은

- 6·25 참전 용사·가족에 회의실 제공 / 성금 모아 한국방문 주선, 식사대접


지난달 14일 뉴욕성결교회에서 '코리안 베테랑스홀' 명명식이 열려 교회 관계자들과 한국전 참전용사 및 그 가족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미국 뉴욕 최남단 스태튼 아일랜드에 위치한 뉴욕성결교회(담임목사 장석진)에서 지난달 14일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교회는 이날 지하 친교실에서 스태튼 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을 초청, 만찬을 베풀고 친교실을 '코리안 베테랑스홀(Korean Veterans Hall)'로 하는 명명식을 가졌다. 이를 위해 홀 정면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그 아래에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 해병대 공군 해군 등 6개 군의 대형 기와 기념사진을 걸어놓았다.

 이 홀은 앞으로 스태튼 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회가 매달 한 번 모여 회의를 열고 업무를 보는 데 사용된다. 참전용사회는 원래 별도의 사무실이 있었지만 문제가 생겨 수 년 전부터 이 교회 친교실을 회의장소로 사용해왔다. 

 교회에선 참전용사들을 위해 매년 식사를 대접했고, 2012년엔 그들을 위해 자선음악회를 열어 모금된 성금으로 참전용사 4명을 한국에 다녀오도록 배려했다.

 이날 한국전참전용사회 조지 파슨스(86)회장은 한국말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후 "한인교회가 참전용사들을 잊지 않고 여러 모로 따뜻하게 도움을 줘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뉴욕성결교회 장석진 목사는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참전용사들이 80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50명 정도"라며 "이역만리 이름도 모르는 조그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이 모두 돌아가시더라도 그들의 가족들과 우의를 다지며 이 모임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스탠튼 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회'의 정식 이름은 'CPL Allan Kivlehan Chapter'. 우리 말로 하자면 '상병 앨런 키블리한 모임'. 앨런 키블리한은 스태튼 아일랜드 출신의 참전용사 중 맨 먼저 전사한 사병이다. 8남매 중 첫째인 그의 여동생은 오빠를 대신해 이 모임에 참석한다. 참전용사회 임명옥 연락간사는 "지난해 10월 부산유엔공원에서 앨런 키블리한의 이름을 확인한 후 사진을 찍어 동생들에게 보여줬더니 몹시 기쁘했다"고 말했다.

 이날 관계당국의 협조로 교회 앞 거리명도 기존 이름 대신 'Korean War Veterans Way'로 바뀌었다.

 이날 명명식에 참석한 참전용사 팻 스칼파토(85) 씨는 "이미 반세기가 지난 한국전 참전을 두고 한인들이 계속 감동을 줘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1953년 6월 수류탄 파편에 맞아 2주간 치료 후 복귀, 휴전일인 1953년 7월 27일엔 38선 인근에 있었다는 그는 15년 전부터 지역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잊을 수 없는 한국전쟁'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해엔 상반기 4000명, 하반기 2000명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5년 전까지는 차로 1시간30분 걸리는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에 강의를 나갔지만 이제는 운전이 힘들어 그만뒀다고 했다.

전쟁 당시 동상에 걸려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는 루이스 타이론(85) 씨는 "참전용사들의 한국사랑은 한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며 "목숨 걸고 싸웠던 나라가 기적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면 요즘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