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장 17㎞ 금정산성 일주하다(하)

산성은 일부 끊겨 있어도 그 흔적은 오롯이 남아
서문~496봉~고당봉 구간 부드러운 오솔길
금샘 제2금샘 미륵바위 등 볼거리 무궁무진
계곡에 세워진 서문, 예술적 감각 가장 앞서
 
 

금샘(金井).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빛 물고기(梵魚)가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그곳이다.


제2금샘. 부산학생교육원 뒤쪽에 있으며, 주등산로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이번 주 산행의 시점은 서문. 이 문은 금정산성 4대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져 있다. 화명동에서 산성마을을 향해 대천천을 따라 오르면 만난다. 17.337㎞나 되는 금정산성 성곽 중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 서문 바로 옆에는 세 개의 아치를 이룬 수문이 조화를 이뤄 4개의 성문 중 예술적 감각이 가장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행은 서문~부부묘~도원사 사거리~중성 갈림길~도원사~전망대~부산학생교육원(사시골)~철탑~주능선(496봉)~ 석문~제2금샘 사거리~금곡동 갈림길~미륵사 갈림길~미륵사~미륵바위 전망대~북문 갈림길~고당봉(802m)~고당샘~금샘~금정산장~북문~원효봉~의상봉~제4망루~무명안부~부채바위~제3망루~나비암~동문~산성고개 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5시간10분 정도.

서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이어지는 지형은 기존 금정산의 그것보다 험준하다. 기존의 금정산 관련 책자에도 이 지역은 등산로가 없는 것으로 표기돼 있을 정도다.

파류봉서 내려와 얼음골 입구에서 서문까지의 산성길을 개척한 산행팀은 이번엔 서문에서 496봉과 만나는 석문 능선을 향해 오른다.

서문 성곽을 즈려밟고 숲으로 들어간다. 예상대로 산길이 없어 산성을 밟고 오른다. 9분 뒤 농짝만한 바위군 앞에선 좌측으로 우회, 급경사길로 오르다 다시 산성을 넘어 우측 산길로 간다.
   
부부묘를 지나 찔레꽃을 감상하다 보니 순간 산성이 사라졌다. 알고 보니 발밑 흙길이 산성이다. 우측 민가는 죽전마을 82번지. 이내 사거리. 왼쪽은 도원사 방향, 직진한다. 이내 사라졌던 산성 측면이 보여 능선이 휘어짐을 알 수 있다.

한 굽이 올라서면 갈림길. 개발제한구역 표시석이 서 있다. 왼쪽으로 내려선다. 오른쪽은 중성(中城)으로 제4망루와 연결된다.
   
3분 뒤 도원사. 허름한 요사채 뒤로 용왕당과 산신각이 있다. 직진하면 50m 뒤 큰 바위군이 길을 막고 있고, 그 앞 계단은 기도처 가는 곳. 산행팀은 계단을 15m쯤 못가 우측 희미한 길로 간다. 묘지 2기를 잇따라 지나 묵은 산길을 따라가며 지능선을 자연스레 넘으면 전망대에 닿는다. 왼쪽으로 낙동강이, 발밑에는 학생교육수련원과 산성이, 정면으론 철탑 좌측 암봉인 496봉이 보인다. 이 암봉에서 우측으로 소위 석문 능선이라 불리는 마루금을 따라가면 고당봉을 만난다. 또 496봉으로 이어지는 곡선형의 산성 또한 가만히 살펴보면 숲 사이로 확인된다. 산행팀이 향후 오를 경로의 큰 그림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깔끔히 정비된 200m쯤 되는 산성을 밟고 지난다. 사시골 계류가 성 아래로 흐르는 이 구간은 지리나 설악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주변 풍광이 빼어나다.

부산학생교육원에서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의 산성은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잡풀이 웃자라 산길이 아예 없다. 하던대로 산성을 좌우로 넘나들며 상대적으로 걷기 쉬운 길을 찾아 가다 이 마저 여의치 않으면 산성을 밟고 오른다. 이따금 돌이 흔들려 위험하니 주의해야 한다. 재미도 있고 스릴도 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산성길도 지난다.

숲에 가려 허물어진 성곽은 내버려두고 있어 전시행정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철탑을 지나 정면으로 암봉이 보일 무렵 성벽을 넘어서면 지난 가을 모습 그대로의 수북한 카키색 낙엽길도 걷고 잡풀을 뚫기도 한다.

마침내 주능선. 말끔한 산성에서 40분 소요. 왼쪽은 화명 금곡동 방향, 산행팀은 우측으로 간다. 5분 뒤 등로 우측에 전망대. 서문에서 방금 올라온 등로와 저 멀리 고당봉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금정산 종주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시 한 굽이 돌면 석문(石門) 하나가 황량하게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물리재 끝에 있어 흔히 물리재 석문이라 불린다. 향토 학자들은 이 곳을 장골봉이라 부른다.

물리재 석문(石門). 학자들은 장골봉이라 부른다.


이 석문은 건물이 없는 일종의 망대다. 지금은 석문과 함께 세웠을 건물이나 다른 시설은 오간 데 없다. 바로 옆에는 '고당봉 3.6㎞'라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이때부터 산성과 함께 부드러운 오솔길이 기다린다. 금정산에 이처럼 한적하고 운치있는 산길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냥 걷고 싶은 길이다. 주변엔 송림이 울창하고 낙동강도 조망된다.

이어 성 쪽에 석문을 빼닮은 문이 하나 보인다. 암문(暗門) 또는 야문이다. 적군 몰래 아군이 드나들던 문이다.

암문(暗門) 또는 야문. 적군 몰래 아군이 드나들던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이내 사거리. 왼쪽은 금곡, 오른쪽 학생교육원 또는 정수암 방향이다. 잠시 교육원 가는 길 우측 소나무 사이로 가면 물이 제법 고여 있는 바위가 눈에 띈다. 제2금샘이다. 주변의 크고 작은 형상의 기암괴석들도 눈길을 끈다.

산행팀은 직진한다. 금곡동 갈림길을 지나 8분 뒤 또 갈림길. 이정표는 우측 미륵사 방향으로 접어들면 보인다. 절은 불과 300m 떨어져 있다. 의상 대사가 범어사를 세웠던 신라 문무왕 18년인 678년 바로 그 해에 원효 대사가 창건한 기도 도량인 천년고찰 미륵사 뒤편의 미륵바위는 웅장한 기개에 힘이 넘친다.

의상 대사가 범어사를 세웠던 신라 문무왕 18년인 678년 원효 대사가 창건한 기도 도량인 미륵사. 염화전 뒤 미륵바위는 웅장한 기개에 힘이 넘친다.

 
염화전 좌측 미륵바위 아래 위치한 독성각 한쪽에는 원효가 왜적에 맞서 신라 장군기를 꽂았다는 전설의 구멍이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미륵사에선 절 입구 화장실을 지나 우측으로 열린 산길로 8분쯤 오르면 다시 주능선에 닿는다. 3분 간격으로 잇단 전망대를 지나면 갈림길. 이제 고당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우측은 고당봉을 거치지 않고 북문 가는 길, 산행팀은 직진한다. 눈앞에 보이는 고당봉 좌측 입석을 경유해 올라간다.

8분 뒤 고당봉 직전 갈림길. 곧바로 오르는 것은 무리라서 왼쪽으로 우회해 수 차례 험로를 거쳐 상봉을 향한다.

뾰족봉우리가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이다.


고당봉은 마지막 갈림길에서 12분 걸린다. 북으로 장군봉 천성산, 동으로 계명봉과 계명암, 남으로 원효봉 의상봉, 서쪽으로 신어산 동신어산 오봉산 등 주변의 봉우리는 죄다 확인되는 거칠 것 없는 조망이다.

정상인 고당봉에서 본 북쪽의 장군봉.


하산은 고모당을 지나 10분이면 고당샘에 닿는다. 북문으로 가도 되지만 왼쪽으로 400m 거리에 금샘(金井)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금빛 물고기(梵魚)가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그곳이다.

2분 뒤 만나는 첫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면 그 이후부턴 '금샘 가는길'이란 이정표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마지막에 밧줄을 잡고 올라서면 바위 위에 제법 깊은 물이 고여 있다. 앞서 본 제2금샘과 차원이 다른 비범함 그 자체다.

고당샘에서 북문까진 10분이면 닿는다. 북문에서 왼쪽은 범어사, 오른쪽은 옛 천주교 목장. 산행팀은 동문(4㎞) 방향으로 직진한다. 백양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길인 이 길은 사실 산행지로서의 기능은 이미 상실했다고 흔히 말한다.

금정산 북문. 직진하면 범어사, 우로 가면 동문 방향이다.


이제 성곽을 따라 걷는다. 북문 쪽에서 바라보는 금정산성의 매끈한 곡선미는 언제봐도 매력적이다. 15분 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에 선다. 원효봉(687m)이다. 최근에는 패러글라이딩의 출발점으로 애용된다. 원효봉에서 내려와 우측 너른 등산로 대신 왼쪽 성벽 능선을 택하면 제4망루에 닿기 전 뾰족한 돌산에 선다. 의상봉(641m)이다. 멀리서 보면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닮아 사자봉으로도 불린다. 그 옆(동쪽)으로 금정산 최대 암장인 무명암이 뻗어있다.

원효봉 쪽에서 본 남쪽의 금정산성. 매끈한 곡선미는 언제봐도 매력적이다. 뾰족봉이 의상봉, 그 왼쪽이 금정산 최대 암장인 무명암이다.


이어 산불초소를 지나면 제4망루. 방금 온 북쪽으로 돌아보면 의상봉 원효봉 고당봉이 한눈에 펼쳐지고 서쪽으로 중성이 이어진다. 다시 남행. 7분 뒤 너른 터에 닿는다. '현 위치번호 808'이라 적힌 팻말이 있는 무명안부로 북문에서 동문까지의 중간 지점이다. 흔히 범어사 입장료를 아끼기 위해 절 바로 아래 상마마을에서 올라오면 만나는 곳이 바로 여기다.

무명안부에서 한 굽이 돌면 부채바위 가는 길. 멀리서 보면 하나의 암장이지만 막상 다가가서 보니 두 개로 갈라져 있다. 앞쪽이 동자바위, 뒤쪽이 부채바위다. 여기서 좀 더 걸으면 제3망루가 기암절벽 위에 절묘하게 얹혀 있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나오면 나비가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을 한 나비암.

나비가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을 한 나비암. 제3망루 인근에 위치해 있다.


이곳을 지나면 갈림길. 왼쪽 구서동, 산행팀은 우측 너른 등산로 쪽으로 간다. '현 위치번호 809'라 적힌 팻말이 서 있다. 나비안부다. 20, 30년 전엔 할머니 파전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이제 산행은 막바지. 이곳에서 동문까진 20분 정도 걸리고, 동문에서 성곽을 따라 다시 8분 뒤면 산성고개에 닿는다.

# 떠나기전에-나비안부, 오래 전 산꾼들의 단골 야영 장소

지난해 작고한 부산대 지리교육학과 오건환 교수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을 일컬어 "산정은 성채와 같고 산릉은 성곽과 같다"고 말했다. 아마도 금정산을 이처럼 명쾌하고 적확하게 표현한 문장은 없으리라.

서문을 지나 부산학생교육원이 보일 무렵의 산성은 북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구간과 마찬가지로 산성이 말끔하게 정비돼 있다. 사시골 계류가 흐르는 이곳은 알고 보니 학생교육원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숲에 가려 허물어진 성곽은 내버려두고 눈에 보이는 부분만 정비해 놓고 있어 전시행정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나비안부를 지나면서 이창우 산행대장은 옛 기억을 더듬으며 25, 26년 전의 상황을 들려줬다. 그에 따르면 나비안부는 인근의 무명안부와 함께 바위를 타는 산꾼들의 단골 야영 장소. 현재의 꽝꽝나무(팻말 걸려 있음) 아래에 샘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20m쯤 떨어진 지점에 호스로 연결돼 있다.

나비안부에는 또 항상 한 할머니가 파전을 부치고 있어 당시 가난한 대학생 산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금정산성 성내의 총 면적은 대략 251만 2000평. 부산대학 부지의 5배쯤 된다.

# 교통편-지하철 화명역 인근에서 마을버스 1번 타야

지하철 2호선 화명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와 40m쯤 걸으면 백양주유소. 이 주유소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곧바로 '와석' 버스정류장이다. 여기서 마을버스 1번을 타고 서문 입구에서 내린다. 1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요금은 1000원.

날머리 산성고개 남문 입구 정류소에선 203번 시내버스를 타고 지하철 1호선 온천장역 맞은편에서 내린다. 1500원.

글·사진=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문의=국제신문 산행팀 (051)500-5168
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우리 사회에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한자가 터줏대감처럼 굳굳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절집이다.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한자로 '아무개 山, 무슨 寺'라고 적힌 일주문을 시작으로 줄곧 대웅전(大雄殿) 비로전(毘盧殿) 명부전(冥府殿) 등이라 적힌 편액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편액은 그래도 그나마 좀 나은 편.
 문제는 기둥에 장식으로 내걸린 현판에 적힌 글귀인 주련(柱聯). 한시(漢詩)의 연구(聯句)나 부처님의 진리, 당대 선지식의 절창이 주를 이루는 이 주련을 두고 호사가들은 인간과 인생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장삼이사의 입장에선 사실 '그림의 떡'. 한문깨나 하는 사람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거의 두 손을 들고 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속된 말로 '쇠귀에 경읽기' 아닌가.

 이러한 모순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있다. 이 암자는 들어서면서부터 편액이나 주련이 모두 한글로 적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웬지 포근하게 다가온다.

 천년고찰 범어사 산내 암자인 금강암(金剛菴)이 바로 그렇다. 범어사에서 금정산 북문으로 가는 초입에 위치해 있는 금강암은 범어사 일주문에서 넉넉잡아 15분이면 닿는다. 한글로 '금강암'이라 적힌 조그만 팻말이 길섶에 보여 찾기도 어렵지 않다.

금강암에서 본 주련을 잠시 인용하면 이렇다.

'즐거움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괴로움도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밉고 고운마음 모두 벗어버리면
 언제나 고요한 참마음이라네'

 '자비로운 그 손길이 참다운 불심이요
  꾸밈없는 큰 미소가 더없는 진리로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자로 된 부처님 말씀보다 이처럼 마음에 쏙쏙 와닿는, 읽기 쉬운 한글로 된 주련이 아마도 일반 신도의 가슴에 오랫동안 각인돼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할 듯싶다. 

 
 - 잠시 금강암의 연혁을 살펴보자.
 금강암은 범어사가 1901년 선찰대본산으로 지정되기 전 당시 주지였던 오성월 스님이 범어사를 참선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1890년 당시 한국 최고의 선승이었던 경허 스님을 모셔 선원을 최초로 개원한 곳이다. 그러니까 금강암 내 금강선사는 범어사 최초의 선원이었던 것이다.
 이후 지금의 계명암과 내원암 등 산내 암자에 선원이 개설돼 20세기 초에는 범어사에는 9개의 선원이 운영됐다 한다.

 - 그렇다면 금강암의 한글 편액과 주련은 누구의 솜씨일까.
 금강암은 이후 평범한 작은 암자로 유지돼다 1980년 후반부터 서벽파 스님이 주석하면서 일신우일신하게 된다. 맏상좌였던 정여 스님이 금강암 감원(절의 살림살이를 하는 스님)을 맡으면서 중창불사 계획을 세워 1984년 8월부터 1991년 4월까지 8년간 불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큰법당을 비롯 종무소 요사채 해우소 등 가람으로서의 골격을 새롭게 갖췄다.

 정여 스님은 1991년 3월 법당 회향을 앞두고 대웅전 등에 걸린 한문으로 된 편액이나 주련이 너무 어려워 일반 신도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암자 내 모든 편액과 주련을 과감하게 한글로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한 지역 불교계 인사는 "당시 금강암 한글 편액과 주련은 우리나라 최초였으며 획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금강암 감원으로서의 역할을 끝낸 정여 스님은 1991년 음력 4월 초파일을 보내고 다음날 저녁 아무에게도 귀띔을 하지 않고 방을 비우고 홀연히 잠적했다. 스님은 쌍계사 금당선원에서 1000일 동안 절문을 나서지 않고 애오라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후 1995년 7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스님은 "감원으로 8년 동안 불사를 하면서 사바세계와 물건값을 흥정하는 등 마음 에 때가 너무 많이 끼어 1000일 동안 용맹정진에 들어가 참선으로 그 때를 깨끗이 지우고 왔다"고 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 정여 스님과 기자와의 작은 인연 하나.
 기자는 지난 2002년부터 약 1년간 문화부에서 음악과 종교를 담당했다. 당연히 범어사는 기자의 출입처 중의 하나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범어사는 재무승 국고보조금 횡령사건 등으로 한동안 바람 잘 날이 없을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담당기자로서 당연히 이와 관련한 내용을 기사로 작성했다. 하지만 일부가 사실과 달라 혈기 왕성한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매일 아침 7시에 그것도 3일 연속 항의 전화를 받았다.
 기억컨데 어느날 범어사에서 대책회의가 열려, 그 내용을 골자로 그날 곧바로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그 대책회의 이후 상황이 돌변해 그만 기사내용의 일부가 오보가 돼 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기자로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책회의 내용을 제보한 그 어떤 분이 상황이 변한 것까지 챙겼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보자 또한 절집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또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수습은 해야 했다.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선은 그 젊은 스님이 매일 아침 전화를 걸 태세였다. 
 종교를 소재로 기사를 쓰는 것은 잘 해야 본전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싶다. 

 고민끝에 기자가 사실을 불교계 한 지인에게 털어놓자 그는 웃으며 "그 스님 정말 참을성이 많구만. 새벽 4시에 예불을 올리고 나서 민간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무려 3시간을 참았네"라고 농을 건넨 후 스님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스님이 바로 정여 스님이었다.

 부산시청 앞 여여선원을 찾아간 기자가 당시 선원장이던 정여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눈을 감고 다소곳이 경청하던 스님은 직접 찾아가자며 즉석에서 범어사에 전화를 걸어 주지 스님과의 약속을 정했다. 그리곤 직접 쓰신 시집 한 권도 주셨다.
 약속일은 다음날 오전 8시. 정여 스님과 기자 그리고 당시 범어사 주지스님 세 사람은 주지실에서 마주 앉았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얼굴을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대화가 오가자 당시 주지 스님은 "바쁘신 기자님께서 아침 일찍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의외로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해줘 오보 건은 그날 매조지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이 있은 지 6년 뒤인 지난 3월 6일 정여 스님은 범어사 주지실의 주인으로 변신했다.
 무식한(?) 신도들을 위해 지난 1991년 법당 편액과 주련을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한글로 바꾼 선각자 정여 스님. 스님은 6년 전 매서운 찬바람이 귓가를 때리던 겨울 아침 기자를 위해 기자와 함께 범어사 산문을 들어선 그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까. 사뭇 궁금해진다.

지난 3월 범어사 주지로 선임된 정여 스님이 경내 탑전에서 취임법회인 진산식을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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