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한자가 터줏대감처럼 굳굳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절집이다.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한자로 '아무개 山, 무슨 寺'라고 적힌 일주문을 시작으로 줄곧 대웅전(大雄殿) 비로전(毘盧殿) 명부전(冥府殿) 등이라 적힌 편액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편액은 그래도 그나마 좀 나은 편.
 문제는 기둥에 장식으로 내걸린 현판에 적힌 글귀인 주련(柱聯). 한시(漢詩)의 연구(聯句)나 부처님의 진리, 당대 선지식의 절창이 주를 이루는 이 주련을 두고 호사가들은 인간과 인생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장삼이사의 입장에선 사실 '그림의 떡'. 한문깨나 하는 사람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거의 두 손을 들고 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속된 말로 '쇠귀에 경읽기' 아닌가.

 이러한 모순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있다. 이 암자는 들어서면서부터 편액이나 주련이 모두 한글로 적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웬지 포근하게 다가온다.

 천년고찰 범어사 산내 암자인 금강암(金剛菴)이 바로 그렇다. 범어사에서 금정산 북문으로 가는 초입에 위치해 있는 금강암은 범어사 일주문에서 넉넉잡아 15분이면 닿는다. 한글로 '금강암'이라 적힌 조그만 팻말이 길섶에 보여 찾기도 어렵지 않다.

금강암에서 본 주련을 잠시 인용하면 이렇다.

'즐거움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괴로움도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밉고 고운마음 모두 벗어버리면
 언제나 고요한 참마음이라네'

 '자비로운 그 손길이 참다운 불심이요
  꾸밈없는 큰 미소가 더없는 진리로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자로 된 부처님 말씀보다 이처럼 마음에 쏙쏙 와닿는, 읽기 쉬운 한글로 된 주련이 아마도 일반 신도의 가슴에 오랫동안 각인돼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할 듯싶다. 

 
 - 잠시 금강암의 연혁을 살펴보자.
 금강암은 범어사가 1901년 선찰대본산으로 지정되기 전 당시 주지였던 오성월 스님이 범어사를 참선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1890년 당시 한국 최고의 선승이었던 경허 스님을 모셔 선원을 최초로 개원한 곳이다. 그러니까 금강암 내 금강선사는 범어사 최초의 선원이었던 것이다.
 이후 지금의 계명암과 내원암 등 산내 암자에 선원이 개설돼 20세기 초에는 범어사에는 9개의 선원이 운영됐다 한다.

 - 그렇다면 금강암의 한글 편액과 주련은 누구의 솜씨일까.
 금강암은 이후 평범한 작은 암자로 유지돼다 1980년 후반부터 서벽파 스님이 주석하면서 일신우일신하게 된다. 맏상좌였던 정여 스님이 금강암 감원(절의 살림살이를 하는 스님)을 맡으면서 중창불사 계획을 세워 1984년 8월부터 1991년 4월까지 8년간 불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큰법당을 비롯 종무소 요사채 해우소 등 가람으로서의 골격을 새롭게 갖췄다.

 정여 스님은 1991년 3월 법당 회향을 앞두고 대웅전 등에 걸린 한문으로 된 편액이나 주련이 너무 어려워 일반 신도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암자 내 모든 편액과 주련을 과감하게 한글로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한 지역 불교계 인사는 "당시 금강암 한글 편액과 주련은 우리나라 최초였으며 획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금강암 감원으로서의 역할을 끝낸 정여 스님은 1991년 음력 4월 초파일을 보내고 다음날 저녁 아무에게도 귀띔을 하지 않고 방을 비우고 홀연히 잠적했다. 스님은 쌍계사 금당선원에서 1000일 동안 절문을 나서지 않고 애오라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후 1995년 7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스님은 "감원으로 8년 동안 불사를 하면서 사바세계와 물건값을 흥정하는 등 마음 에 때가 너무 많이 끼어 1000일 동안 용맹정진에 들어가 참선으로 그 때를 깨끗이 지우고 왔다"고 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 정여 스님과 기자와의 작은 인연 하나.
 기자는 지난 2002년부터 약 1년간 문화부에서 음악과 종교를 담당했다. 당연히 범어사는 기자의 출입처 중의 하나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범어사는 재무승 국고보조금 횡령사건 등으로 한동안 바람 잘 날이 없을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담당기자로서 당연히 이와 관련한 내용을 기사로 작성했다. 하지만 일부가 사실과 달라 혈기 왕성한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매일 아침 7시에 그것도 3일 연속 항의 전화를 받았다.
 기억컨데 어느날 범어사에서 대책회의가 열려, 그 내용을 골자로 그날 곧바로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그 대책회의 이후 상황이 돌변해 그만 기사내용의 일부가 오보가 돼 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기자로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책회의 내용을 제보한 그 어떤 분이 상황이 변한 것까지 챙겼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보자 또한 절집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또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수습은 해야 했다.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선은 그 젊은 스님이 매일 아침 전화를 걸 태세였다. 
 종교를 소재로 기사를 쓰는 것은 잘 해야 본전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싶다. 

 고민끝에 기자가 사실을 불교계 한 지인에게 털어놓자 그는 웃으며 "그 스님 정말 참을성이 많구만. 새벽 4시에 예불을 올리고 나서 민간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무려 3시간을 참았네"라고 농을 건넨 후 스님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스님이 바로 정여 스님이었다.

 부산시청 앞 여여선원을 찾아간 기자가 당시 선원장이던 정여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눈을 감고 다소곳이 경청하던 스님은 직접 찾아가자며 즉석에서 범어사에 전화를 걸어 주지 스님과의 약속을 정했다. 그리곤 직접 쓰신 시집 한 권도 주셨다.
 약속일은 다음날 오전 8시. 정여 스님과 기자 그리고 당시 범어사 주지스님 세 사람은 주지실에서 마주 앉았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얼굴을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대화가 오가자 당시 주지 스님은 "바쁘신 기자님께서 아침 일찍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의외로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해줘 오보 건은 그날 매조지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이 있은 지 6년 뒤인 지난 3월 6일 정여 스님은 범어사 주지실의 주인으로 변신했다.
 무식한(?) 신도들을 위해 지난 1991년 법당 편액과 주련을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한글로 바꾼 선각자 정여 스님. 스님은 6년 전 매서운 찬바람이 귓가를 때리던 겨울 아침 기자를 위해 기자와 함께 범어사 산문을 들어선 그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까. 사뭇 궁금해진다.

지난 3월 범어사 주지로 선임된 정여 스님이 경내 탑전에서 취임법회인 진산식을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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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금전산 8부 능선에 있는 금강암 바로 위 암봉인 의상대 끄트머리에 위치한 자연석조여래좌상.


 순천에는 '쇠 금(金)' 자에 '돈 전(錢)' 자를 스는 금전산(金錢山)이 있습니다. 이른바 '금으로 된 돈 산'이죠. 낙안읍성에서 바로 보이는 암봉이라 하면 '아! 그 산'하고 누구나 알 것입니다.
 순천사람들은 이 금전산을 일명 '로또산'이라 부릅니다. 순천은 지난 2003년 3월 제14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로또 복권 1위 당첨자를 자주 배출했습니다. 단순히 1위 당첨자 수(數)가 아니라 인구 대비 당첨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순천지역 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입소문과 함께 기사가 보도되자 전국에서 풍수지리학자들이 몰려 들었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금전산이 돈을 부르는 기운이 있는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때부터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에서 호기심을 갖고 금전산을 찾는 산꾼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산 모양도 모면 영락없이 '쇠 금(金)' 자를 닮았습니다.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기자도 금전산 정기를 듬뿍 받고 산아래 낙안온천에서 목욕재계를 한 다음 로또복권 1등 당첨자가 나온 판매점의 연락처를 입수해 달려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어두워진데다 초행길로 인해 헤맬 것이 우려돼 바로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래도 금전산 정기의 약발(?)이 남았겠거니 생각돼 집 앞 로또 판매점에서 로또 복권 2개를 샀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는 기자에게 놀랄 만한 사건이 발생했답니다. 하나는 기본인 5등, 또 하나는 숫자 4개가 맞아 4등. 상금은 5만7381원. 세금 22% 떼면 4만4990원.
 기자는 땅을 치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로또복권 1등 당첨자가 나온 순천에서 샀다면 어땠을까.
 위의 내용은 일전에 〈'로또산' 정기받아 돈방석에 올라볼까-순천 금전산〉 편에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혹 못 보신 분은 〈카테고리〉에서 〈근교산〉 〈호남지역〉 순으로 클릭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금전산 8부 능선에는 암자가 하나 있습니다. 금강암입니다. 검단 선사가 창건하고 의상 대사가 중수한 백제 천년고찰 금강암은 고려 땐 송광사 16국사의 마지막 국사인 고봉 화상이 수행하는 등 한때 선풍을 드날렸지만 여순사건 때 소실된 후 다 쓰러져가는 전각 하나만 달랑 남아 현재 스님 한 분만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송광사의 말사입니다.
 이 금강암 바로 위에는 암봉인 의상대와 원효대가 있습니다. 의상대와 원효대 위 바위전망대에서 보면 가운데 금강암(지붕만 보임)을 기준으로 왼쪽에 원효대, 오른쪽에 의상대가 보이고, 그 오른쪽 산기슭에는 매년 이른 봄 홍매화가 일찍 핀다는 금둔사가 있습니다.
 
 등산로는 바위 아래 모셔진 산신각에 이어 자연스레 의상대로 이어집니다. 도중 부처님상 두 분을 볼 수 있습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을 굽어보는 듯한 절벽 한 쪽에 최근 새긴 듯한 반듯한 관음좌상마애불이 있습니다.
 정작 눈길을 끄는 부처님은 바로 아래가 절벽인 의상대 끄뜨머리 바닥에 있습니다. 일명 자연석조여래좌상입니다. 바위 위에 움푹 팬 이곳에 물이 고이면 그 모습이 영락없이 부처님으로 환생합니다. 만일 물이 없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기 십상이지요. 유홍전 전 문화재청장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적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문구가 확실하게 적용되는 순간입니다.
 
 금전산이 '로또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돈을 부르는 기운이 있다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자연석조여래좌상이 천년 동안 말없이 사바세계를 굽어보며 중생들을 위해 기도를 한 것이 이제서야 효험이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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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금전산 8부 능선에 있는 금강암 바로 위 암봉인 의상대 끄트머리에 위치한 자연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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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새긴 듯한 관음좌상마애불. 자연석조여래좌상 윗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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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전망대에 서면 왼쪽부터 원효대 금강암(지붕만 보임) 의상대와 저멀리 낙안벌판과 낙안읍성 민속마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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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본 금전산. '쇠 금(金)' 자에 '돈 전(錢)' 자를 스는 금전산(金錢山)이다. 그 모습이 쇠 금 자를 닮았다.

'로또산' 정기받아 돈방석에 올라볼까
낙안읍성에 병풍두른 진산-주민 잇단 대박에 '로또산'
9부 능선은 기암괴석 장관, 정상에선 순천만 여수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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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안읍성에서 본 금전산입니다. 모양이 '쇠 금(金)'를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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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당겨 보면 더 확실하지 않습니까. '쇠 금(金)' 모양이.여기에 '돈 전(錢)' 자를 씁니다. 금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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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금전산에서 내려다 본 낙안읍성 민속마을입니다. 그러니까 낙안땅의 진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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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산 등산안내도와 금전산 정상.




 순천 금전산.
이름에서부터 돈 내음이 물씬 풍기는 금전산은 실제로 '쇠 금(金)' 자에 '돈 전(錢)' 자를 쓴다. 이른바 '금으로 된 돈 산'이다. 낙안읍성에서 바로 보이는 암봉이라 하면 '아! 그 산'하고 누구나 알 성 싶다.

 순천사람들은 이 금전산을 일명 '로또산'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금전산이 속해있는 순천에서 로또복권 1등 당첨자가 2003년 3월 제14회를 시작으로 2006년 1월 163회까지 7명이나 나와 한때 '순천=로또'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선풍적인 관심을 끌었다. 얼핏 7명이라는 숫자는 적은 것 같지만 인구 대비 당첨률로 볼 때 전국 지자체 중 최상위권이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순천에 로또 대박이 잇따라 터지자 풍수지리학자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지사.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금전산이 돈을 부르는 기운이 있는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 사실이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에서 호기심을 갖고 금전산을 찾는 산꾼들이 늘고 있다.

금전산은 낙안(樂安)의 너른 벌판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큰 바위얼굴'로, 낙안의 진산이다. 벌판만 넓게 펼쳐져 있다면 어딘가 휑하니 허전했을 낙안을 낙안답게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다.

해발 668m로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지만 9부 능선을 따라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를 비집고 한 줄기 등로를 따라 조그만 암자인 금강암이 터를 잡고 있다.

산행은 순천시 낙안면 불재~구능수~돌탑봉~궁굴재~정상 아래 삼거리~금전산 정상~헬기장~금강암~극락문(통천문)~857번 지방도(낙안온천) 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2시간20분 안팎이지만 금강암과 하산 후 걸어서 10분 거리인 금둔사를 구경하려면 3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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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머리는 불재. 순천시내에서 58번 지방도를 타고 낙안읍성으로 넘어오는 고개다. 고갯마루에는 불재정류장과 불재농장이라 적힌 노란 입간판이 눈에 띈다. 산 입구에는 '금강암' '약수암' '금전산 안내도'가 서 있다. 길 건너편은 오봉산.

제법 너른 길 좌우에는 조림된 나무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다. 7분 뒤 갈림길. 쌍돌탑으로 일주문을 대신한 왼쪽의 약수암 가는 길은 무시하고 직진한다. 5분 뒤 다시 갈림길. 왼쪽은 기도처, 오른쪽으로 오른다.   
 
이때부터 당분간 오르막 외길. 5분 뒤 집채만한 큰 바위 앞에 닿는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지만 막상 들어가면 서너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굴이 하나 있다. 구능수다. 입구에는 가지산 쌀바위의 전설과 비슷한 내용의 유래가 적혀있지만 이곳 사람들에겐 결혼한 지 14년간 아기가 없다가 이곳 물을 먹고 최근 득남한 일본인 순천문화유산해설사의 일화가 더 유명하다. 그만큼 효험이 있다는 것.

산길은 오른쪽으로 산허리를 돌아간다. 구능수 바위가 주능선길이지만 험한 데다 접근이 불가능해 지능선을 타고 우회해 주능선으로 향하는 셈이다.

바위 사이 급경사길로 오른다. 꽤나 힘들다. 10여분이면 구능수 아래에서 본 입석대 모양의 암봉에 닿는다. 이때부터 다시 주능선. 여전히 험로가 이어진다. 조그만 돌탑봉에 닿는다. 들머리에서 35분정도. 사실 여기까지가 힘들고 이후부턴 그리 어렵지 않다.

여기서 궁굴재까지는 15분. 도중 길 왼쪽으로 낙안읍성과 낙안민속자연휴양림이 시야에 들어온다. 궁굴재에서 왼쪽으론 휴양림 가는 길, 직진한다. 정상까지는 1.2㎞ 남았다.


다시 오름길. 25분이면 정상 밑 삼거리. 오른쪽은 종주길 종점인 오공재(2.4㎞) 가는 길, 왼쪽 금강암 낙안온천 방향으로 향한다. 정상은 30m 뒤. 3m 높이의 대형 돌탑이 힘이 넘친다. 조망은 나무 때문에 예상보다 좋지 못하다. 북동쪽 월등히 높은 산이 조계산, 그 왼쪽 고동산, 그 뒤로 무등산. 동쪽으론 저 멀리 광양 백운산 억불봉, 하동 금오산. 남동쪽으로 순천만과 그 뒤 여수땅이 시야에 들어온다.

돌탑을 지나 하산한다. 70m쯤 내려서면 헬기장. 비로소 낙안읍성이 한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10여분 뒤 쩍 갈라진 바위전망대에 서면 금강암을 기준으로 암봉인 의상대(오른쪽) 원효대(왼쪽)가 발아래 놓여있고, 그 오른쪽 산기슭엔 금둔사도 보인다. 암자에선 의상대를 서대(바위), 원효대를 동대(바위)라 한다. 백제 천년고찰 금강암은 송광사의 말사. 송광사 16국사의 마지막 국사인 고봉 화상이 수행하는 등 한때 선풍을 드날렸지만 여순사건 때 소실된 후 다 쓰러져가는 전각 하나만 달랑 남아 현재 스님 한 분만 수행하고 있다.

집채만한 바위 아래 모셔진 산신각을 잠시 둘러보면 길은 자연스레 의상대로 이어진다. 석가여래좌상이 사바세계를 굽어보는 창녕 관룡사 용선대가 연상되는 의상대에는 최근 새긴 듯한 관음좌상마애불보다는 자연석조여래좌상이 눈길을 끈다. 바위 위에 움푹 팬 이곳에 물이 고이면 그 모습이 영락없이 부처님의 모습을 빼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건너편 원효대는 접근 불가능. 하지만 겉모습은 더 힘차고 위용이 있다. 암자를 나서면 험한 돌계단. 몇 걸음 못가 집채만한 바위들이 뒤엉켜 굴이 만들어져 있다. 통천문인 듯 했지만 통과한 후 뒤돌아보면 極樂門(극락문)이라 음각돼 있다.

이제 본격 하산. 857번 지방도까지는 30분쯤 걸린다. 도로 건너편엔 낙안온천. 온천을 하기 전에 오공재(오른쪽)쪽으로 10여분 도로를 따라 걸으면 홍매화로 유명한 태고종 금둔사가 있다. 보물 제945, 946호인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은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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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전망대에서 서면 원효대(왼쪽)와 의상대(오른쪽) 그리고 낙안벌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위 사진 중 기와지붕이 보이는 암자가 금강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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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암의 극락문.



# 떠나기전에-금전산 정기 덕택, 순천시민 로또 1등 당첨자 많아

 금전산 등로는 동쪽 불재에서 서쪽 오공재로 이어지는 주능선길과 정상에서 낙안온천으로 내리뻗은 금강암 계곡길이 전부. 밋밋한 주능선길은 주로 송림길이라 조망이 좋지 못해 산행팀은 불재에서 시작, 금강암을 구경한 후 낙안온천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택했다.

'로또산' 금전산의 겉모습 또한 '쇠 金(금)' 자. 이를 확인하기 위한 포인트는 낙안읍성 내 동헌 앞. 낙안읍성 관리사무소에서 정년퇴직했고, 지금은 낙안읍성에서 순천문화유산해설사로 봉사하면서 낙안향토지를 집필하고 있는 송갑득(62)씨는 "동헌 기와지붕의 가녀린 선과 금전산을 조합해보면 영락없는 '金' 자 모습"이라며 "이는 낙안주민들의 염원이 아니겠느냐"고 꿈보다 좋은 해몽을 내놓았다.

이번 산행의 날머리 낙안온천은 국내에서 알려지지 않은, 물좋은 온천. 강알칼리성 온천으로 거창 가조온천과 마찬가지로 비누가 필요없을 정도로 아주 매끄럽다.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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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한 곳 소개한다. 낙안읍성 입구 동문 고향식당(061-754-2550)의 팔진미(八珍味). 이순신 장군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대접했다는 별미. 석이버섯 고사리 도라지 더덕 미나리 무 녹두 물고기(매운탕) 등 8가지로 손이 많이 가 미리 전화로 주문을 해야 한다. 1만원. 보리밥(사진)도 맛있다. 고사리 버섯 게장 꼬막 등 한 상 가득 나온다. 5000원. 낙안민속주인 사삼주도 맛보자. 더덕 찹쌀 한약재가 주 재료다.

취재 후일담 하나. 기자도 금전산 정기를 듬뿍 받고 낙안온천에서 목욕재계를 한 다음 로또복권 1등 당첨자가 나온 판매점의 연락처를 입수해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어두워진데다 초행길로 인해 헤맬 것이 우려돼 바로 부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침내 부산. 그래도 금전산 정기의 약발(?)이 남았겠거니 생각돼 집 앞 로또 판매점에서 2개를 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는 기자에게 놀랄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기본인 5등, 또 하나는 숫자 4개가 맞아 4등. 상금은 5만7381원. 세금 22% 떼면 4만4990원. 순천에서 샀다면 어땠을까.


# 교통편-서부·노포동 터미널 모두 이용, 버스로 2시간 40분 소요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승주IC~승주 22번~낙안민속마을 선암사 857번 지방도~벌교 낙안민속마을~상사호 지나~고흥 벌교 857번~순천 58번 지방도 좌회전~낙안민속자연휴양림 지나~불재(정류장) 순.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순천행 시외버스는 오전 6시30분, 7시10분, 8시10분, 8시30분, 8시50분, 9시10분에 출발한다. 1만1100원. 2시간40분 소요.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낙안 공용정류장(농협하나로마트 앞)행 시내버스를 타고 불재에서 내린다. 오전 8시50분(63번), 10시40분(〃). 890원. 9시30분 출발하는 16번 버스는 불재를 거치지 않고 낙안으로 바로 오기에 이곳에서 불재로 가는 63, 68번 버스를 다시 타야 한다. 9시15분, 9시20분, 11시10분에 있다. 낙안에서 순천행 버스는 오후 4시40분, 5시40분, 7시20분, 7시30분, 7시40분, 밤 9시20분, 10시10분에 있다. 890원. 순천서 부산 서부터미널행 버스는 오후 5시10분, 5시20분, 6시25분, 7시, 8시30분(막차)에 있다.

노포동종합터미널에선 순천행 시외버스(동래에서 한 번 정차)와 고속버스가 모두 있다. 시외버스는 오전 7시4분, 9시15분(1만2500원), 고속버스는 오전 6시30분, 8시10분, 9시35분(9800원, 우등은 1만4400원)에 출발한다. 순천서 노포동행 시외버스는 오후 4시55분, 6시25분(막차), 고속버스는 오후 5시40분, 7시, 8시30분(막차), 밤 11시(심야·1만5800원)에 있다. 승용차편으로 갔을 경우 날머리 낙안온천에서 들머리 불재까지 낙안민속택시(061-754-2848)를 이용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5000원.

※대중교통편은 현지 사정상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글·사진 = 이흥곤기자 hung@kookje.co.kr
문의 = 국제신문 산행팀 (051)500-5168
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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