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산악계 히말라야 등반사
                           -①도전의 시작

"한계…불가능…,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 8번째로 오른 자랑스런 한국의 '77에베레스트 원정대'.
오색 룽다가 펄럭이고 있는 가운데 에베레스트 등정 후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서 철수하기 전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초체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기에 모두들 표정이 밝다. 뒷줄 왼쪽에서 4~6번째가 각각 부산의 전명찬(작고), 곽수웅,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작고) 대원이며,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영도 원정대장.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선 티베트의 북동릉 쪽과는 달리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04년 3월 대한산악연맹 부산연맹(이하 대산연 부산연맹) 총회에서 회장으로 오른 하해룡 회장은 취임일성으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고봉이라는 상징성 하나밖에 없는 에베레스트 대신 등반성과 후진양성을 위해 8000m급 다른 봉우리를 택하자는 일부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대산연 산하 시도연맹 중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지 못한 곳은 부산 대전 제주뿐이라는 사실을 접하고는 자존심 회복 차원에서 에베레스트로 결정됐다.

부산연맹은 부산시와 국제신문의 특별 후원으로 2006년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를 꾸려 2년 후인 2006년 5월 16일 마침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 부산연맹이 새롭게 거듭나는 토대를 구축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 베이스캠프를 떠나기 전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4~6번째가 각각 부산의 전명찬(작고), 곽수웅,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작고) 대원이며,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영도 원정대장.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선 티베트의 북동릉 쪽과는 달리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감을 얻은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는 이듬해인 2007년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 K2와 브로드피크에 이어 올해엔 마칼루와 로체를 단숨에 올라 부산 산악인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렸다.

세계의 지붕이자 자연의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히말라야는 산악인들에게 궁극적 목표이자 희망이다. 왜 산에 오르느냐는 물음에 조지 말로리는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다소 선문답적인 명언을 남겼다지만 일반 산악인들은 그런 질문을 가급적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결같이 '싫은 일을 왜 하겠어요'라고 말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인간의 한계를 몸소 체험하려 한다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그저 산에 가는 것이 좋고 오르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고 나아가 미래도 없는 법.

부산 산악인들의 지금과 같은 위상은 과거 선배 산악인들의 발자취가 큰 힘이 됐다. 그 발자취가 땀과 눈물이 뒤섞인 시행착오가 됐든 추위와 굶주림이라는 역경을 이겨내고 이뤄낸 불굴의 의지이든 선배들의 영향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와 늘 함께 해온 국제신문은 부산 산악인들의 영욕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네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히말라야의 정의  
넓은 의미 히말라야는 중앙아시아 거봉군 전체
그레이트·카라코람·힌두쿠시로 다시 세분화

 
우선 히말라야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6000만년 전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 세계의 지붕으로 우뚝 선 히말라야.

'만년설의 집'이라는 의미의 히말라야는 넓은 의미로는 인도 네팔 파키스탄 부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거봉군 전체를 의미하지만 현지에선 크게 '그레이트 히말라야', '카라코람 히말라야', '힌두쿠시 산맥'으로 구분해 사용된다.

그레이트 히말라야는 장삼이사들이 흔히 말하는 히말라야를 의미한다. 동쪽으로 부탄과 미얀마의 경계에서부터 서쪽으로 네팔 인도북부를 거쳐 파키스탄 일부까지 이르는 총길이 3000㎞에 이르는 대산군이다.

8000m급 히말라야 14좌 중 동쪽에서부터 캉첸중가(8586m) 마칼루(8463m) 로체(8516m) 에베레스트(8848m) 초오유(8201m) 시샤팡마(8027m) 마나슬루(8163m) 안나푸르나(8091m) 다울라기리(8167m) 낭가파르바트(8125m) 등 10개가 포함돼 있다. 이 8000m급 거봉 10개가 모두 네팔에서, 또는 네팔을 경유해야 등정이 가능해 일명 네말 히말라야로 부르기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샤팡마는 티베트에서, 낭가파르바트는 파카스탄에서 오른다.

  '검은 암석의 땅'을 의미하는 카라코람은 파키스탄 북부지역의 산군으로, 여기에는 '죽음의 산' K2(8611m) 브로드피크(8047m) 가셔브롬2(8035m) 가셔브롬1(8068m) 등 히말라야 14좌 중 4개가 포진해 있다. 총길이는 약 500㎞.

그레이트 히말라야에 비해 위도가 5도 정도 북쪽에 위치한 까닭에 고온다습한 인도양 기후의 영향을 덜 받아 매우 건조해 동식물이 생존하기 어려운 불모지대다.

또 다른 산군인 힌두쿠시는 파미르 남부에서 파키스탄 북부를 거쳐 아프가니스탄 중앙부로 뻗은 600㎞의 산맥.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따라 길게 도열돼 있다 보면 된다. 힌두쿠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넘어 인도를 침공했다 전해온다. 힌두쿠시의 최고봉은 티리치미르(7700m)로, 이곳에는 7000m급 산들이 많다.


#초창기 한국 히말라야 진출
학술조사·개척등반서 60년대 이후 극한 알피니즘 눈길
곽수웅 전명찬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부산 대표 참가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 벽에 걸린 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대원들은 비행기에서 술을 마셔 대부분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 대원들은 기자회견 후 청와대에 초청받고 지금으로 치면 올림픽 금메달에 해당되는 훈장까지 받는 칙사대접을 받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히말라야로의 진출은 자국내에서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그 등반영역을 확장하는 순으로 나타난다.

해외등반에 관심을 갖게 된 196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의 등산문화는 한국산악회와 대학산악부를 중심으로 국토규명 학술조사로 출발했다. 이후 설악 한라 지리산 등지에서의 적설기 등반과 암장 개척등반이 주를 이루면서 이러한 열기가 부산을 비롯한 지방으로 확산됐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 점차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내 산악계는 고전적 등반에서 탈피, 극한 등반을 추구함과 동시에 새로운 등반 대상지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점차 해외원정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히말라야 원정은 1962년 다울라기리2봉(7751m) 정찰대가 시초이다. 이 원정대는 다울라기리 남쪽 접근로의 발견과 6700m 무명봉을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0년부터 시작된 8000m급 히말라야 14좌는 티베트에 위치한 시샤팡마(8027m)만 미답봉으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이미 초등된 상태였다. 그만큼 출발점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다는 것.

두 번째 원정은 1970년 한국산악회 추렌히말(7371m) 동봉 원정대. 이때 첫 등정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원정사에 처음 이름을 올리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같은 해 로체샤르(8382m)를 시작으로 1971, 1972, 1976년 세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8163m)에 도전장을 던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마침내 1977년, 대산연이 파견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지구의 용마루에 올라섰다. 세계에서 8번째 등정국가로, 고 고상돈 대원은 58번째 등정자로 기록됐다. 서구 산악계가 1950년 8000m급인 안나푸르나를 초등할 때까지 55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반면 한국은 히말라야의 장을 연 지 불과 15년만에 개척기를 마감하고 세계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당시 김영도 대장을 비롯해 18명의 대원이 참가한 원정대에 대륙산악회 곽수웅(33), 청봉산악회 전명찬(25·작고)이 참가, 부산산악계의 역량을 펼쳤다. 안타까운 점은 엑셀시오알파인클럽 송준송(31)이 1976년 설악산에서 훈련 도중 눈사태로 동료대원 2명과 함께 사망해 부산 산악인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77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부산연맹의 대원으로 참여한 곽수웅(33 현 대륙산악회 고문, 왼쪽) 전명찬(25, 작고) 대원이 부산역에 도착한 후 환영식을 갖고 있다. 젊은 시절 곽수웅 씨는 현 롯데 자이언츠 4번 타자 이대호를 아주 닮았다.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한 곽수웅 대륙산악회 고문은 "당시 대원선발 과정이 워낙 까다로워 우스갯소리로 시험쳐서 뽑았다고 할 정도로 엄격했다"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54명이 5차 훈련까지 거친 끝에 18명으로 최종 결정됐다"고 기억했다.

곽 고문은 "국가적 차원의 원정대인 만큼 각 시도 연맹 소속 대원들을 골고루 선발하려 했지만 훈련이 워낙 힘들어 결국 서울 부산 충북 충남 경북연맹의 대원들이 네팔로 떠났다"며 "등정에 성공한 고상돈 대원도 고향은 제주였지만 충북연맹 소속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부산 산악인의 히말라야 최초 도전은 1972년 2차 마나슬루 원정대(대장 김정섭)의 대원으로 참가한 청봉산악회의 송준행(32)이다. 그러나 손준행은 등반 도중 캠프3(6500m)에서 발생한 눈사태로 일본인 1명 등 대원 5명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로 세르파 10명도 숨졌다.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 참사였다.

부산 산악계는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등정에 자극받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부산연맹과 부산학생산악연맹 그리고 전통의 산악회들이 히말라야로 잇단 출사표를 던지게 된다.

에베레스트 남동릉 캠프2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대원과 세르파. 뒤로 보이는 지점이 사우스콜이다.

77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사다리를 이용해 빙하지역을 오르고 있다.

# "히말라야 부산원정대 뭉쳤다" 서미트클럽 결성
   
2000년대 들어 부산 산악계는 지금까지 히말라야로 원정대를 지속적으로 파견하고 있다. 네팔지역 5개 팀, 카라코람 쪽인 파키스탄 2개 팀, 중국 지역 4개 팀 등 모두 11개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향했다.

무엇보다 눈길 끄는 점은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이 주도하는 '다이내믹 원정대'의 등장이다. 부산시와 국제신문의 특별후원으로 결성된 '다이내믹 원정대'는 지자체에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거봉 14좌 완등이란 목표를 세우고 2006년부터 에베레스트 K2 브로드피크 마칼루 로체 등 5개 거봉을 올랐다.

참가 대원들이 점차 늘면서 원정대원으로서의 경험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을 방지하고 대원들의 노하우를 결집시키는 방안이 논의되던 끝에 친목단체인 '서미트 클럽'이 최근 결성돼 지역 산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7월 창립 발기인대회를 가진 '서미트 클럽'은 지난 8월 31일 부산의 진산 금정산에서 창립 기념산행을 가졌다.

클럽은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에서 '다이내믹 부산'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원정대를 구성해 파견한 '2006 에베레스트', '2007 K2 & 브로드피크', '2008 마칼루 & 로체' 그리고 '2001 초오유' 원정대원들을 주축으로 구성됐다.

초대 회장은 2004~2006년 부산연맹 20, 21대 회장을 연임한 하해룡(59·대륙) 부산연맹 명예회장이 맡았다. 회원은 2001년 초오유 원정대장 김복우(55·봐인), 2006~2008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장 홍보성(52·부경대OB)을 비롯, 조창래(49·대륙) 박종일(47·상봉) 김진태(45·상봉) 하영호(44·다솔) 신용우(44·청봉) 김창호(39·부경대OB) 김희수(37·한오름) 권경일(36·대륙) 박정용(32·부산빌라알파인클럽) 정용석(32·한오름) 유향미(30·동주대OB) 서성호(28·부경대OB) 박주원(28·다솔) 이세현(23·해양대) 등. 원정대 취재를 동행한 언론계의 이흥곤(국제신문) 김백수 임혁규(이상 KNN)도 포함됐다.

서미트 클럽은 해외 거봉 등반의 인재풀외에도 고산등반과 도전 정신을 추구하는 청장년층을 위한 각종 등반 자료와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계획이다.
문의 박종일 총무(010-5780-3939)

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사진 제공=곽수웅 대륙산악회 고문

  
   
   
 
 
 



산을 향한 초인의 고뇌 "이번에도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히말라야 8000m급 히말라야 14좌와 얄룽캉 그리고 지난해 5월 31일 로체샤르마저 오른 엄홍길은 지난 5월 28일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 최근에는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마음의 숲, 272쪽)를 펴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면서 느꼈던 삶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란다.


 엄홍길이 세간에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 88년. '서울 올림픽 기념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가, 정상을 밟게 되면서부터다. 물론 그 이전인 85, 86년에도 에베레스트에 두 차례나 도전했지만 경험 미숙으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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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엄홍길 기념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필자.


 첫 등정의 기쁨도 잠시, 엄홍길에겐 이후 좌절과 절망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89년부터 92년까지 안나푸르나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등에 도전했으나 6회 연속 등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93년 초오유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불운의 사나이'라는 오명을 벗고 홀연히 일어섰다. 산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우직함, 겸손함이 좌절을 극복하고 빛을 발하는 버팀목이 된 것이다.
 이후 95년 한 해에 마칼루 브로드피크 로체 등 3개 거봉을 오르는 등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도중 안나푸르나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4전 5기 끝에 힘겹게 넘어섰다. 2000년 '죽음의 산' K2를 올라 세계에서 8번째 히말라야 14좌에 등극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31일 로체샤르마저 올라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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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거봉의 종지부를 찍은 지난해 5월 로체샤르에서의 엄홍길 대장.


 #38전 20승 18패, 성공률 겨우 반타작 넘어

 엄홍길은 작심한 듯 이 말부터 시작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저는 실패가 성공만큼이나 많습니다. 이제까지 언론이 실패는 크게 부각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성공 사례만 대대적으로 보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필부들에게 엄홍길이는 히말라야에 갔다 하면 성공만 하는 탄탄대로의 산악인으로 각인된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히말라야 8000m 거봉과의 전적(?)은 '38전 20승 18패'로 승률 5할이 약간 넘는다.
 "에베레스트는 세 번 오르고 세 번 실패했고, 안나푸르나는 4전5기, 캉첸중가와 낭가파라바트는 각각 세 번만에, 이번에 16좌의 종지부를 찍은 로체샤르는 3전4기만에 성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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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 지역을 통과하는 엄 대장(왼쪽)과 등반에 앞서 제단앞에서 안전한 등반을 기원하고 있는 엄 대장. 모두 로체샤르에서다.


 그리곤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선 성공에서 얻은 지혜보다 실패에서 깨우친 앎이 더 소중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듬던 고통스러운 장면이 떠오른 듯 처음 만날 때의 예의 순박한 눈빛이 일순간 일그러진다.

 #히말라야는 살아있는 신(神)

 흔히 히말라야 8000m급 거봉들은 산신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다고 하던데.
 "공감합니다. 히말라야는 살아 움직이는 위대한 신처럼 느껴져요. 해서 히말라야는 도전해 들어오는 인간의 마음가짐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때문에  한순간의 자만심이나 오만함은 많은 사람의 불행을 가져올 수 있어요. 수도자와 같은 마음으로 산과 하나가 돼야 비로소 등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엔 안 그렇지만 일단 산에 들어가면 젊은 대원들을 틀어잡습니다.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그게 곧 죽음이니까 어쩔 수 없이 독재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대원들을 차분하게 만들어야죠."
 22년 동안 히말라야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 만의 철학인지라 실감나게 다가왔다. 순간 최근의 로체샤르에선 산신이 허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던가 하는 사실이 몹시 궁금했다.
 "예, 느꼈어요. 로체샤르는 4번만에 성공했어요. 지난해 원정 때는 정상 200m를 앞두고 눈사태 우려 때문에 발길을 돌렸고, 2003년에는 150m 앞에서 눈사태를 당해 대원 2명을 잃은 뒤 철수한 아픈 기억이 있지요. 로체샤르는 베이스캠프에서 3500m가 넘는 수직 빙벽이 떡 버티고 있어 보는 순간 정이 확 떨어집니다. 대원들에게 내색은 안했지만 '과연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빙벽을 오르는 순간에도 수시로 낙석이 떨어져 그냥 운명을 하늘에 맡겼었죠."
 하지만 이런 로체샤르가 드디어 길을 열어주고 있구나 하는 영감을 받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등반 도중 세르파 한 명이 500m 아래로 추락을 했는데 약간의 골절상만 입고 살았어요. 통상 이 정도면 100% 사망이거든요. 근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거죠."
 엄 대장은 그때부터 산신이 원정대를 도와주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그를 짓눌렀던 무거운 짐이 눈녹듯 사라졌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등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일이 계속 발생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풀려 점점 자신감이 생겼단다. 하지만 그로 인해 원정 기간이 점차 길어져 계획했던 두 달을 넘어 세 달째 접어 들면서 초조함이 생겼다.
 "그래도 저는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기회는 올 거라고 확신했죠. 그게 적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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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이 맨 앞에서 등반을 하며 대원들을 이끌고 있다. 로체샤르에서.

 #잊지 못할 4전 5기 안나푸르나

 파란만장한 히말라야의 고난과 환희를 엮은 자전적 기록인 '히말라야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에서 엄홍길은 '안나푸르나만큼 처절하고 피눈물 나는 기억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얼만큼 버거웠으면 그랬을까.
 "아다시피 안타푸르나는 5번만에 올랐어요. 한마디로 저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을 부르는 악몽과도 같은 산이었어요. 세르파 나티와 까미, 그리고 한국 최고의 여성 등반가였던 지현옥을 잃는 아픔도 겪었지요. 특히 지난 98년 네 번째 도전 때는 7500m 지점에서 추락하는 2명의 세르파를 구하려다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당했죠.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도 베이스캠프까지 2박 3일 걸리는 고행길을 나홀로 6일 간의 죽음을 넘나드는 오체투지로 기적같이 돌아왔지요. 결국 국내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담당의사는 앞으로 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죠. 산악계에서도 '이제 엄홍길이는 끝났구나'라는 말이 회자됐대요. 하지만 저는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는 재활로 결국 10개월 만인 이듬해 봄 안나푸르나를 등정했어요."
 지금까지 오른 히말라야 16좌 중 개인적으로 어렵기의 순서를 매긴다면.
 "역시 안나푸르나가 가장 어려웠고 다음으로 칸첸중가 로체샤르  K2 얄룽캉 마칼루 에베레스트 가셔브롬1 로체 다올라기리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브로드피크 마나슬루 초오유 가셔브롬2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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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이 로체샤르 등반에서 대원들을 이끌고 있다.(왼쪽) 우측은 지난 2006년 네팔 딩보체에서 조우한 '다이나믹 부산 에베레스트 원정대' 홍보성 대장과 무사등반을 기원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스페인팀과의 독특한 조우는 행운"

 히말라야 완등 기록을 보니 스페인 원정대와 무려 5번나 함께 등정을 했던데.
 "후아니토 오아르사발. 저보다 세 살 많은 그는 세계에서 6번 째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 등반가죠. 지난 90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의 첫 만남 이후 92년 낭가파르바트, 95년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에서 또 다시 조우했죠. 그런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저의 등반 경력이나 등반할 때 저의 모습을 유심이 관찰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듬해 봄 마칼루를 같이 등반하자는 거예요. 그것도 개인장비를 갖추고 네팔까지만 오면 된다는 호조건이었어요."
 화끈한 성격으로 속도 위주의 경량 등반이 체질화 된 그들은 엄홍길과 등반 스타일이 비슷해 찰떡궁합이었다. 마칼루 이후에도 엄 대장은 그들과 함께 저렴한 경비로 브로드피크 로체 가셔브롬1 안나푸르나를 차례로 올랐다. 이렇게 히말라야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자 국내에선 비로소 엄홍길을 위한 히말라야 14좌 추진위가 생겨 숨통이 튀였다.
 "만일 스페인팀을 만나지 못했다면 현재의 이같은 영광은 늦쳐졌거나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죠. 그런 면에서 전 인복이 많은 것 같은데요."

 #거봉 등반은 이제 그만…유족들 도울 터

 "저와 함께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동료는 항상 마음 속의 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민간 문화재단인 '히말라야 휴먼문화재단'(가칭)을 만들어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유족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엄 대장은 지금도 그들이 가끔 꿈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또 청소년들을 위해선 산악 및 탐험 캠프 등을 만들어 산에서 배운 노하우를 전수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이제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더 이상 등반에 나선다는 것은 오만이고 산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의 몫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겠습니다."

글=이흥곤 hung@kookje.co.kr
사진 일부=엄홍길 원정대 제공

# 산악인 엄홍길의 전시관은 전국에 3곳

 산악인 엄홍길(48)의 전시관은 셋.

하나는 46년간 살았던 의정부시에 있고, 또 하나는 지난해 10월 그의 고향인 경남 고성에 문을 열었다. 나머지 하나는 원도봉산 기슭에 위치한 그의 모교인 호암초등학교에 있다.
 
예전에 고을 원님이 치세를 잘하면 송덕비 하나 겨우 세워주는 것이 고작이었던 데 비하면 엄 대장으로선 사실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관광객 유치 등 지자체의 편의에 따라 건립되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바로 엄홍길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척도임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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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의정부시 옛 호원동사무소에 당시 1억7000만 원을 들여 마련한 엄홍길 전시관 외형과 내부.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의정부시. 지난 2003년 3월 엄홍길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기념, 옛 호원동사무소에 당시 1억7000만 원을 들여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당시의 사진과 그간 히말라야에서 사용한 그의 등산용품들이 시대별로 진열돼 있다. 하지만 이곳은 최근 도로 부지에 편입돼 원도봉산 쪽으로 확장, 이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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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의 엄홍길 전시관과 그 내부. 티베트의 불경이 적힌 오색 룽다가 걸려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그가 2세 때까지 살았던 고향인 경남 고성군은 33억 원을 들여 고성의 진산 거류산 기슭 1만7000여 ㎡에 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지난 2004년 착공, 3년여의 공사 끝에 지난해 10월 개관했다. 전시관에는 그가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등정 당시 사용했던 등산텐트와 피켈 산소마스크 등 각종 장비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엄홍길 전시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고성군은 매년 엄홍길을 초청, '엄홍길과 함께 하는 1박2일 등산축제'를 열기로 하고 지난 5월 첫 행사를 상황리에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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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도봉산 기슭에 위치한 엄 대장의 모교인 호암초등에도 지난 2005년 조그만 전시관을 개관해 어린 학생들에게 그의 진취적인 도전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전시관에는 엄 대장이 사용하는 배낭과 등산용품과 등반 당시의 각종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 산악인 엄홍길은 알고 보니 장애인(?)

뒤틀린 다리, 잘려나간 발가락
정상을 탐한 산악인의 혹독한 대가


'엄홍길 대장은 장애인(?)'.
인터뷰 도중 엄홍길은 "고백컨대 저는 장애인 등급 판정을 받지 않았을 뿐 장애인"이라고 말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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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의 다친 오른쪽 다리는 왼쪽보다 한눈에 봐도 가늘다.  

그는 지난 1998년 안나푸르나 등반 때 추락하는 셰르파 두 명을 구하려다 떨어져 오른쪽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당했다. 발목뼈는 물론 종아리뼈와 쇄골이 부러지고 인대 또한 끊어졌다. 이후 수술을 받고 끊임없는 훈련으로 등반이 가능해졌지만 그래도 후유증이 만만찮다는 것이다.

그는 즉석에서 일어나 바지를 걷어 두 다리를 보여줬다. 히말라야 8000m 거봉을 제 집 드나들 듯해 두 다리는 커다란 알통으로 단단했지만 다친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보다 한눈에 봐도 가늘었다.

기능 또한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오른쪽 다리는 산사면을 오를 때 그 후유증으로 발바닥 전체를 바닥에 대지 못해 사실상 앞꿈치로 걷는다고 했다. 이렇다 보니 오른쪽 엉덩이와 허리살도 왼쪽과 비교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런 불편한, 아니 등반을 하기에는 치명적인 다리로 이후 낭가파르바트 칸첸중가 K2 얄룽캉 로체샤르를 등정했다니 그저 존경심이 우러날 뿐이다.

엄 대장은 당시 목숨을 걸고 네팔 셰르파를 구한 자신의 이야기가 네팔의 유력 일간지에 사진과 함께 실렸다고 말했다.

"당시 네팔에선 외국인 근로자 자격으로 한국에 갔다가 임금체불, 사기 등을 당해 본국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제 미담 기사가 실리면서 여론의 흐름이 단번에 바뀌었다더군요. 한마디로 이 한 몸 바쳐 애국했죠."

엄 대장은 앞서 1992년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 동상에 걸려 오른쪽 엄지발가락 한 마디와 두 번째 발가락 일부를 잘랐지만 산행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글 사진=이흥곤 hung@kookje.co.kr
일부 사진=해당 지자체 및 호암초등학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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