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구는 상대가 손도 안대고, 직구 던지면 여지없이 맞아
마무리 실패 기억 훌훌 털고 올 시즌 반드시 내 몫 하겠다
작년 볼 좋았는데 부담컸던 탓, 올해 경기장 안팎 일 많이해야

           사이판 전지 훈련 중 잠시 포즈를 취해할라는 요청에 쑥쓰러운 듯 모자를 만지는 임경완 선수.

전지훈련장인 사이판에서 몸만들기를 하는 임경완 선수. 올해부턴 투수 중 손민한에 이은 두 번째 고참이라 할 일이 많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김동하 기자
 
그와 인터뷰를 갖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지난해 너무 아픈 일들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도 됐다. 누구보다 가장 아팠던 그를 팬들이 위로해야 할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임경완(34)이다.

-지난해 힘들지 않았나.
▶다 알지 않나. 내 인생 전체에서도 가장 힘들었다. 야구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야구가 하기 싫었다. 매일 야구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선수로서 그러면 안되지만 술도 마셨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너무 미안하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점은.
▶마운드에 올라가면 팬들이 나에게 하는 욕들이 다 들린다. 3만 명 만원이 돼도 누가 욕을 하는지 얼굴까지 볼 수 있다. 지난해 홈 팬들이 나에게 야유를 한 것은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야구를 못했으니 감수해야 할 일들이었다. 미니 홈페이지를 폐쇄할 때도 참았다. 그러나 야구장이 아닌 거리에서 만난 팬들이 면전에서 욕을 할 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지난해 마무리 투수로서의 모습은 그전 중간계투로 뛸 때와 달랐다.
▶중간계투와 마무리는 다르더라. 중간계투로 뛸 때는 상대 타자들의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9회에 마무리로 마운드에 오르니 타자들의 눈빛이 다르더라. 어떻게든 점수를 뽑으려는 의지가 눈에 다 보였다.

-중간계투로 뛸 때는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그런데 마무리를 맡고 나선 피해가는 인상이 강했는데.
▶중간계투로 나설 때는 초구부터 부담없이 공격적으로 던졌는데 마무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실투 하나로 경기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볼을 던졌다. 나는 그 전까지 직구, 싱커, 커브, 슬라이더 등을 주로 던졌는데 작년에는 로이스터 감독이 싱커에 비중을 많이 두라고 했다. 땅볼을 유도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래서 직구와 싱커를 대부분 던졌는데 타자들도 분석을 많이 해서 유인하는 싱커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볼카운트가 몰리면 어쩔 수없이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직구를 던졌고 그러면 맞았다.

-지난해에도 볼이 좋았다.
▶그게 더 이상하다. 나도 그렇게 느꼈고 주위에서도 볼은 좋았다고 했다. 결국 심리적인 문제였다. 내가 부담을 너무 많이 느낀 탓이다.

-기억나는 경기는.
▶작년에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가서 뒤집힌 경기가 5경기다. 모두 기억난다. 내가 던진 볼 하나하나 모두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상황에서는 다른 볼을 던졌어야 했다는 생각도 한다. 모두 지난 일이다. 내게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너무 아파서 탈이었지만.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서 빠졌다. 섭섭하지 않았나.
▶후반기에는 거의 엔트리에서 빠져 있었다. 절망하면서 반을 보냈고, 야구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운동을 하면서 반을 보냈다. 준플레이오프 전에 로이스터 감독님이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 대비하라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고 운동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잘 던지면 정규리그 때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팀이 준플레이오프에서 3연패하며 탈락했다. 작년은 무엇을 해도 안되는 그런 해였다.

-이제는 회복했나.
▶아로요 투수코치가 전지훈련 오기 전에 다 잊고 새로 시작하자고 했다. 나도 모두 잊었다. 지난해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훈련했고 경기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팬들도 그렇게 이해해주길 바란다. 열심히 해도 안됐을 때는 당사자가 가장 힘들다. 작년의 내가 그랬다.

-벌써 최고참이 됐는데.
▶1998년에 입단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투수들 중에 손민한 선배 다음으로 고참이 됐다. 올해는 내가 경기장 안팎에서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그동안 해온 대로 열심히 해야겠다.

-언제까지 야구하고 싶은가.
▶몸관리를 잘해서 40살까지는 하고 싶다.

-마무리 투수에 미련은 없는가.
▶작년에 좋은 경험을 했다. 조심스럽다. 그런데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김희국 기자 kukie@kookje.co.kr  

※ 야구 담당 베테랑 '쿠기' 김희국 기자와 김동하 사진기자가 롯데 전지훈량장인 사이판에 가서 보낸 인터뷰 기사입니다. 떠나기전 두 김 기자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습니다. 괜찮은 내용이 있으면 블로그에 인용하겠다고. 



"홍성흔이 와서…" 자주 들어도 그만큼 인정받는 것 같아 기뻐
"포수로서의 능력 이젠 한계, 공격적인 타격으로 타점 기여"

  전지훈량지인 사이판에서 인터뷰 포즈를 취하고 있는 홍성흔 선수. 사진=김동하 기자


 
'오버맨'. 홍성흔(32)을 부를 때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별명이다. 야구장에서는 언제나 유쾌하고 주위를 즐겁게 하는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홍성흔의 '오버'는 철저하게 계산된 '오버'다. 자기 자신과 팀을 살리기 위한 오버다. 이제는 그가 두산이 아니라 롯데를 위해서 오버하고 있다. 국제신문 스포츠부 김희국 기자가 만난 두 번째 선수, 홍성흔. 자 만나보겠습니다. 

-롯데 선수나 프런트, 감독의 입에서 홍성흔이 와서 기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부담스럽지 않나.
▶부담없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롯데에 왔다는 부담은 일주일 만에 없어졌다. 나는 못했을 때 팬들에게 욕먹을 각오까지 이미 해뒀다. 대신 열심히 한다는 전제를 미리 세웠고 실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선수들이 내 얘기를 하는 게 기쁘다. 그만큼 나와 같이 생활한 뒤 내 훈련 모습을 보고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롯데로 오는 게 힘들지 않았나.
▶일종의 흐름이었다. 두산 팬들에게 홍성흔이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줬다. 나도 처음에는 롯데로 오면서 앞으로 보장된 두산의 코치나 감독 자리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롯데에서 잘하면 나는 전국구 스타다. 그것은 두산이란 특정팀이 아니라 어느 팀에도 갈 수 있는 선수나 코칭스태프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로이스터 감독에게 많은 것을 배우려고 왔다.

-그동안 포수로만 뛰었다. 1루수 변신이 힘들지 않나.
▶많은 팬들이 내가 당장 1루 주전으로 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나는 주로 지명타자로 활약할 것이다. 이대호 선수가 한 번씩 지명타자로 들어오면 1루를 맡을 것 같다. 나에게는 또다른 역할이 있다. 벤치에서 선수들의 파이팅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내 임무다.

사이판 전지훈련장에서 강민호 선수와 훈련하는 홍성흔 선수. 파트너인 강민호는 '강민호의 굴욕'이라 해도 될 만큼 어벙하게 나왔다.

-지명타자는 반쪽 선수라는 인식이 강한데.
▶한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반항도 해봤는데 그것 역시 흐름이었다. 나는 포수로 국가대표 주전으로 활약했고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도 참가했다. 그때까지는 내 마음대로 다 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대로 다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산 김경문 감독이 나에게 포수가 아닌 다른 포지션을 권유했을 때 이미 포수로서의 나의 능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김경문 감독은 정확하게 봤지만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지난 시즌 포수 훈련을 정말 열심히 했지만 실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때 확실히 느꼈다.

-지난해 타율 0.331로 2위를 차지했지만 홈런(8개)과 타점(63개)이 의외로 적었다.
▶타율이 올라가면서 타격왕 욕심을 냈기 때문이다. 장타를 버리고 똑딱이 타자로 타율에만 신경쓴 결과다. 그러나 롯데에서는 다르다. 로이스터 감독이 앞으로 번트는 생각하지도 말고 무조건 강공만 하라고 주문했다. 또 공격적인 타격으로 90타점 이상 올리라고도 했다.

-롯데와 궁합이 잘 맞는 편인가.
▶주위에서 로이스터 감독과 잘 맞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야구를 직접 하는 당사자는 나 자신이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무조건 노력할 것이다.

-'오버맨'으로 알려질 만큼 끼가 많은데도 3000배를 했다고 들었다. 맞나.
▶그렇다. 종교가 불교다. 경희대 2학년 때 스님의 권유로 108배를 시작해 프로에 입단한 뒤에도 매일 했다. 3000배도 세 번 했다. 나는 춤추고 노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장에서도 많이 까분다. 그래서 별명이 오버맨이 됐다. 일부 팬들은 그런 내 모습만 보고 야구장 밖에서도 잘 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다. 집에서는 오히려 심심한 남편이어서 아내에게 미안할 정도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나는 야구장에서 내 모든 끼와 에너지를 발산하고 집에 가서는 그냥 쉰다. 또 운동장 밖에서 발산되는 끼를 제어하기 위해 절을 한다. 절을 하면서 자제 능력이 길러졌고 긍정적인 생각도 갖게 됐으며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지금은 무리하지 않으려고 절 대신 명상을 하루에 20분씩 반드시 한다. 사이판=김희국 기자 kukie@kookje.co.kr

※ 야구 담당 베테랑 '쿠기' 김희국 기자와 김동하 사진기자가 롯데 전지훈량장인 사이판에 가서 보낸 두 번째 인터뷰 기사입니다. 떠나기전 두 김 기자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습니다. 괜찮은 내용이 있으면 블로그에 인용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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