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향한 초인의 고뇌 "이번에도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히말라야 8000m급 히말라야 14좌와 얄룽캉 그리고 지난해 5월 31일 로체샤르마저 오른 엄홍길은 지난 5월 28일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 최근에는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마음의 숲, 272쪽)를 펴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면서 느꼈던 삶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란다.


 엄홍길이 세간에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 88년. '서울 올림픽 기념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가, 정상을 밟게 되면서부터다. 물론 그 이전인 85, 86년에도 에베레스트에 두 차례나 도전했지만 경험 미숙으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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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엄홍길 기념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필자.


 첫 등정의 기쁨도 잠시, 엄홍길에겐 이후 좌절과 절망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89년부터 92년까지 안나푸르나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등에 도전했으나 6회 연속 등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93년 초오유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불운의 사나이'라는 오명을 벗고 홀연히 일어섰다. 산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우직함, 겸손함이 좌절을 극복하고 빛을 발하는 버팀목이 된 것이다.
 이후 95년 한 해에 마칼루 브로드피크 로체 등 3개 거봉을 오르는 등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도중 안나푸르나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4전 5기 끝에 힘겹게 넘어섰다. 2000년 '죽음의 산' K2를 올라 세계에서 8번째 히말라야 14좌에 등극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31일 로체샤르마저 올라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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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거봉의 종지부를 찍은 지난해 5월 로체샤르에서의 엄홍길 대장.


 #38전 20승 18패, 성공률 겨우 반타작 넘어

 엄홍길은 작심한 듯 이 말부터 시작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저는 실패가 성공만큼이나 많습니다. 이제까지 언론이 실패는 크게 부각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성공 사례만 대대적으로 보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필부들에게 엄홍길이는 히말라야에 갔다 하면 성공만 하는 탄탄대로의 산악인으로 각인된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히말라야 8000m 거봉과의 전적(?)은 '38전 20승 18패'로 승률 5할이 약간 넘는다.
 "에베레스트는 세 번 오르고 세 번 실패했고, 안나푸르나는 4전5기, 캉첸중가와 낭가파라바트는 각각 세 번만에, 이번에 16좌의 종지부를 찍은 로체샤르는 3전4기만에 성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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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 지역을 통과하는 엄 대장(왼쪽)과 등반에 앞서 제단앞에서 안전한 등반을 기원하고 있는 엄 대장. 모두 로체샤르에서다.


 그리곤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선 성공에서 얻은 지혜보다 실패에서 깨우친 앎이 더 소중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듬던 고통스러운 장면이 떠오른 듯 처음 만날 때의 예의 순박한 눈빛이 일순간 일그러진다.

 #히말라야는 살아있는 신(神)

 흔히 히말라야 8000m급 거봉들은 산신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다고 하던데.
 "공감합니다. 히말라야는 살아 움직이는 위대한 신처럼 느껴져요. 해서 히말라야는 도전해 들어오는 인간의 마음가짐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때문에  한순간의 자만심이나 오만함은 많은 사람의 불행을 가져올 수 있어요. 수도자와 같은 마음으로 산과 하나가 돼야 비로소 등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엔 안 그렇지만 일단 산에 들어가면 젊은 대원들을 틀어잡습니다.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그게 곧 죽음이니까 어쩔 수 없이 독재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대원들을 차분하게 만들어야죠."
 22년 동안 히말라야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 만의 철학인지라 실감나게 다가왔다. 순간 최근의 로체샤르에선 산신이 허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던가 하는 사실이 몹시 궁금했다.
 "예, 느꼈어요. 로체샤르는 4번만에 성공했어요. 지난해 원정 때는 정상 200m를 앞두고 눈사태 우려 때문에 발길을 돌렸고, 2003년에는 150m 앞에서 눈사태를 당해 대원 2명을 잃은 뒤 철수한 아픈 기억이 있지요. 로체샤르는 베이스캠프에서 3500m가 넘는 수직 빙벽이 떡 버티고 있어 보는 순간 정이 확 떨어집니다. 대원들에게 내색은 안했지만 '과연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빙벽을 오르는 순간에도 수시로 낙석이 떨어져 그냥 운명을 하늘에 맡겼었죠."
 하지만 이런 로체샤르가 드디어 길을 열어주고 있구나 하는 영감을 받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등반 도중 세르파 한 명이 500m 아래로 추락을 했는데 약간의 골절상만 입고 살았어요. 통상 이 정도면 100% 사망이거든요. 근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거죠."
 엄 대장은 그때부터 산신이 원정대를 도와주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그를 짓눌렀던 무거운 짐이 눈녹듯 사라졌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등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일이 계속 발생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풀려 점점 자신감이 생겼단다. 하지만 그로 인해 원정 기간이 점차 길어져 계획했던 두 달을 넘어 세 달째 접어 들면서 초조함이 생겼다.
 "그래도 저는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기회는 올 거라고 확신했죠. 그게 적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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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이 맨 앞에서 등반을 하며 대원들을 이끌고 있다. 로체샤르에서.

 #잊지 못할 4전 5기 안나푸르나

 파란만장한 히말라야의 고난과 환희를 엮은 자전적 기록인 '히말라야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에서 엄홍길은 '안나푸르나만큼 처절하고 피눈물 나는 기억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얼만큼 버거웠으면 그랬을까.
 "아다시피 안타푸르나는 5번만에 올랐어요. 한마디로 저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을 부르는 악몽과도 같은 산이었어요. 세르파 나티와 까미, 그리고 한국 최고의 여성 등반가였던 지현옥을 잃는 아픔도 겪었지요. 특히 지난 98년 네 번째 도전 때는 7500m 지점에서 추락하는 2명의 세르파를 구하려다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당했죠.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도 베이스캠프까지 2박 3일 걸리는 고행길을 나홀로 6일 간의 죽음을 넘나드는 오체투지로 기적같이 돌아왔지요. 결국 국내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담당의사는 앞으로 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죠. 산악계에서도 '이제 엄홍길이는 끝났구나'라는 말이 회자됐대요. 하지만 저는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는 재활로 결국 10개월 만인 이듬해 봄 안나푸르나를 등정했어요."
 지금까지 오른 히말라야 16좌 중 개인적으로 어렵기의 순서를 매긴다면.
 "역시 안나푸르나가 가장 어려웠고 다음으로 칸첸중가 로체샤르  K2 얄룽캉 마칼루 에베레스트 가셔브롬1 로체 다올라기리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브로드피크 마나슬루 초오유 가셔브롬2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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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이 로체샤르 등반에서 대원들을 이끌고 있다.(왼쪽) 우측은 지난 2006년 네팔 딩보체에서 조우한 '다이나믹 부산 에베레스트 원정대' 홍보성 대장과 무사등반을 기원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스페인팀과의 독특한 조우는 행운"

 히말라야 완등 기록을 보니 스페인 원정대와 무려 5번나 함께 등정을 했던데.
 "후아니토 오아르사발. 저보다 세 살 많은 그는 세계에서 6번 째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 등반가죠. 지난 90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의 첫 만남 이후 92년 낭가파르바트, 95년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에서 또 다시 조우했죠. 그런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저의 등반 경력이나 등반할 때 저의 모습을 유심이 관찰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듬해 봄 마칼루를 같이 등반하자는 거예요. 그것도 개인장비를 갖추고 네팔까지만 오면 된다는 호조건이었어요."
 화끈한 성격으로 속도 위주의 경량 등반이 체질화 된 그들은 엄홍길과 등반 스타일이 비슷해 찰떡궁합이었다. 마칼루 이후에도 엄 대장은 그들과 함께 저렴한 경비로 브로드피크 로체 가셔브롬1 안나푸르나를 차례로 올랐다. 이렇게 히말라야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자 국내에선 비로소 엄홍길을 위한 히말라야 14좌 추진위가 생겨 숨통이 튀였다.
 "만일 스페인팀을 만나지 못했다면 현재의 이같은 영광은 늦쳐졌거나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죠. 그런 면에서 전 인복이 많은 것 같은데요."

 #거봉 등반은 이제 그만…유족들 도울 터

 "저와 함께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동료는 항상 마음 속의 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민간 문화재단인 '히말라야 휴먼문화재단'(가칭)을 만들어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유족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엄 대장은 지금도 그들이 가끔 꿈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또 청소년들을 위해선 산악 및 탐험 캠프 등을 만들어 산에서 배운 노하우를 전수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이제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더 이상 등반에 나선다는 것은 오만이고 산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의 몫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겠습니다."

글=이흥곤 hung@kookje.co.kr
사진 일부=엄홍길 원정대 제공

# 산악인 엄홍길의 전시관은 전국에 3곳

 산악인 엄홍길(48)의 전시관은 셋.

하나는 46년간 살았던 의정부시에 있고, 또 하나는 지난해 10월 그의 고향인 경남 고성에 문을 열었다. 나머지 하나는 원도봉산 기슭에 위치한 그의 모교인 호암초등학교에 있다.
 
예전에 고을 원님이 치세를 잘하면 송덕비 하나 겨우 세워주는 것이 고작이었던 데 비하면 엄 대장으로선 사실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관광객 유치 등 지자체의 편의에 따라 건립되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바로 엄홍길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척도임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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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의정부시 옛 호원동사무소에 당시 1억7000만 원을 들여 마련한 엄홍길 전시관 외형과 내부.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의정부시. 지난 2003년 3월 엄홍길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기념, 옛 호원동사무소에 당시 1억7000만 원을 들여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당시의 사진과 그간 히말라야에서 사용한 그의 등산용품들이 시대별로 진열돼 있다. 하지만 이곳은 최근 도로 부지에 편입돼 원도봉산 쪽으로 확장, 이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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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의 엄홍길 전시관과 그 내부. 티베트의 불경이 적힌 오색 룽다가 걸려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그가 2세 때까지 살았던 고향인 경남 고성군은 33억 원을 들여 고성의 진산 거류산 기슭 1만7000여 ㎡에 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지난 2004년 착공, 3년여의 공사 끝에 지난해 10월 개관했다. 전시관에는 그가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등정 당시 사용했던 등산텐트와 피켈 산소마스크 등 각종 장비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엄홍길 전시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고성군은 매년 엄홍길을 초청, '엄홍길과 함께 하는 1박2일 등산축제'를 열기로 하고 지난 5월 첫 행사를 상황리에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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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도봉산 기슭에 위치한 엄 대장의 모교인 호암초등에도 지난 2005년 조그만 전시관을 개관해 어린 학생들에게 그의 진취적인 도전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전시관에는 엄 대장이 사용하는 배낭과 등산용품과 등반 당시의 각종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 산악인 엄홍길은 알고 보니 장애인(?)

뒤틀린 다리, 잘려나간 발가락
정상을 탐한 산악인의 혹독한 대가


'엄홍길 대장은 장애인(?)'.
인터뷰 도중 엄홍길은 "고백컨대 저는 장애인 등급 판정을 받지 않았을 뿐 장애인"이라고 말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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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의 다친 오른쪽 다리는 왼쪽보다 한눈에 봐도 가늘다.  

그는 지난 1998년 안나푸르나 등반 때 추락하는 셰르파 두 명을 구하려다 떨어져 오른쪽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당했다. 발목뼈는 물론 종아리뼈와 쇄골이 부러지고 인대 또한 끊어졌다. 이후 수술을 받고 끊임없는 훈련으로 등반이 가능해졌지만 그래도 후유증이 만만찮다는 것이다.

그는 즉석에서 일어나 바지를 걷어 두 다리를 보여줬다. 히말라야 8000m 거봉을 제 집 드나들 듯해 두 다리는 커다란 알통으로 단단했지만 다친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보다 한눈에 봐도 가늘었다.

기능 또한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오른쪽 다리는 산사면을 오를 때 그 후유증으로 발바닥 전체를 바닥에 대지 못해 사실상 앞꿈치로 걷는다고 했다. 이렇다 보니 오른쪽 엉덩이와 허리살도 왼쪽과 비교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런 불편한, 아니 등반을 하기에는 치명적인 다리로 이후 낭가파르바트 칸첸중가 K2 얄룽캉 로체샤르를 등정했다니 그저 존경심이 우러날 뿐이다.

엄 대장은 당시 목숨을 걸고 네팔 셰르파를 구한 자신의 이야기가 네팔의 유력 일간지에 사진과 함께 실렸다고 말했다.

"당시 네팔에선 외국인 근로자 자격으로 한국에 갔다가 임금체불, 사기 등을 당해 본국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제 미담 기사가 실리면서 여론의 흐름이 단번에 바뀌었다더군요. 한마디로 이 한 몸 바쳐 애국했죠."

엄 대장은 앞서 1992년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 동상에 걸려 오른쪽 엄지발가락 한 마디와 두 번째 발가락 일부를 잘랐지만 산행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글 사진=이흥곤 hung@kookje.co.kr
일부 사진=해당 지자체 및 호암초등학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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