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롯데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한 선수가 강민호 선수일 겁니다. 이런 강민호 선수가 베이징에서 퇴장을 당했으니 국내 팬들이 얼마나 안타까왔겠습니까.

강민호의 젊은 혈기 내지 의협심이 되레 선수들을 똘똘 뭉치게 해 금메달로 이어지는 결과가 나왔지 않나 봅니다.

선수단 귀국 후 국제신문 야구담당 김희국 기자가 재빠르게 전화로 인터뷰해 신문(8월 27일자 20면)에 보도를 했습니다. 김 기자는 오랫동안 프로야구를 맡아 강민호 선수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김희국 기자의 양해를 얻어 기사 전문을 싣습니다. 이렇게 좋은 기사를 쓴 김 기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쿠바와 결승전 9회말 어필하다 퇴장당한 강민호
 
'로볼' 묻자 심판 어이없는 선언…글러브·포수 마스크 내동댕이
 잘잘못 생각할 틈도 없이 흥분 라커룸서 "이겨 달라" 기도만



 "야구하면서 그렇게 열 받은 순간은 처음이었습니다."
 베이징올림픽 스타 롯데 강민호가 쿠바와의 결승전 9회 말에 퇴장당한 사건에 얽힌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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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은 베이징올림픽 야구 경기에서 가장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강민호는 26일 청와대 오찬을 마치고 한화와의 후반기 첫 경기를 위해 대전으로 향하던 중 국제신문 취재진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강민호가 지난 23일 열린 올림픽 야구 결승전에서
                                                                           9회말 퇴장 명령을 받은 뒤 더그아웃으로 포수
                                                                           마스크를 던지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강민호는 평소 '스마일맨'으로 불릴 만큼 웃음이 많고 장난도 잘 친다. 한 번도 그라운드에서 화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를 잘 아는 롯데 팬들에게는 강민호가 글러브를 집어던진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강민호는 "9회 이전부터 스트라이크존이 흔들렸는데 9회에는 확연히 느껴졌다. 한번 어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두 번째 볼넷을 내준 마지막 볼을 그대로 글러브 속에 쥐고 있었다. 심판이 직접 글러브에서 볼을 빼 투수에게 던지려고 하기에 막았다. 그때 볼이 낮았느냐는 뜻으로 '로 볼(Low ball)?'이라고 물었는데 곧바로 퇴장을 선언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글러브와 포수 마스크 등을 집어던졌다. 그 광경을 본 미국의 마크 뉴먼 기자는 메이저리그 홈페이지에 쓴 기사에서 "비공식적으로 99마일(158㎞)에 달했다"고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강민호는 "너무 열 받아서 그랬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야구하면서 글러브를 집어던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민호는 한국이 패했다면 '역적'이 될 뻔했다가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오히려 선수들을 단결시킨 '영웅'이 됐다. 그는 "퇴장당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너무 흥분했기 때문에 내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조차 생각할 틈이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퇴장 후 더그아웃에도 앉지 못한 강민호는 라커룸에서 경기 결과를 기다렸다. 강민호는 "라커룸에 TV가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속으로 '이겨 달라'고 기도만 했다"고 웃으면서 회고했다.

 강민호는 올림픽을 계기로 '롯데의 강민호'에서 '대한민국의 강민호'로 부상했다. 주전 포수 진갑용이 갑작스러운 햄스트링(뒷허벅지 근육통)으로 출장이 힘들어 5차전 대만전부터 얼떨결에 주전 마스크를 썼다. 그는 "갑자기 (진)갑용이 형이 부상을 당해 경기에 나갔다. 큰 대회라 처음에는 엄청 떨렸다"며 엄살을 떨었다. 안방마님으로 활약하면서 그는 국내 리그 최고 투수들의 공을 직접 받았다.
 
 그렇다면 누구 공이 가장 위력적이었을까.
 강민호는 "김광현 류현진의 볼이 가장 좋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볼을 던졌다"고 말했다. "각 팀 에이스들의 공을 받은 경험이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한 하반기 레이스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강민호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며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한편 강민호는 국제야구연맹(IBAF)으로부터 1500달러의 벌금 처분을 받았다. 이 벌금은 IBAF 규정에 따른 것으로 퇴장으로 인해 1000달러, 포수 마스크를 집어던지는 등의 행위로 500달러가 부과됐다.  
 
김희국 기자  kukie@kookje.co.kr 


 장미란의 값진 금메달 이면에는 큰언니와도 같은 스승인 부산 출신의 고 김동희 코치가 있었다. 고 김 코치는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지난 3월 10일 난소암 투병끝에 36세 미혼의 나이로 타계했다.
 국제신문은 지난 8월 18일 이 같은 안타까운 사연을 특종 보도했다. 기사를 작성한 김찬석 부장의 양해하에 전문을 싣는다. 이 기사 아래에는 고 김 코치가 타계한 지난 3월 기사와 사진이다. 편집자주.


장미란, 하늘의 스승님께 金 약속 지켰다
부산출신 김동희 전 코치 올림픽 직전 타계
세계新 메달 걸고 눈시울 "영전에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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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헤라클레스' 장미란(25·고양시청)이 16일 베이징 항공항천대학 체육관에서 열린 베이징올림픽 여자 역도 최중량급(75kg이상급)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뒤 기도로 기쁨을 표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베이징의 제자는 하늘의 스승에게 한 금메달 약속을 지켰다. 제자는 귀국하면 스승의 무덤을 찾아 그토록 원했던 금메달을 바친다. 그 제자는 장미란(25·고양시청)이며, 스승은 고 김동희 전 여자역도 대표팀 코치이다.

 16일 베이징올림픽 여자역도 최중량급에서 장미란이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내자 누구보다도 감회에 젖은 사람들이 있다. 고 김동희 코치의 가족들이다. 부산 출신인 고 김 코치의 어머니(60)와 오빠 병수(39·부산~김해 경전철공사 감리단) 씨는 부산에 살고 있다. 고 김 코치는 베이징올림픽을 5개월 앞두고 지난 3월 10일 난소암 투병 끝에 36세 미혼의 나이로 타계했다. 〈국제신문 3월 13일자 보도〉

병수 씨는 "장미란 선수의 금메달 이후 오승우 대표팀 감독이 동생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바람에 동생 생각이 간절했다"며 "장 선수가 동생과의 약속을 지켜줘서 정말 고맙다"고 밝혔다. 오 감독은 장미란의 금메달 획득 직후 "고 김동희 코치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오 감독은 경기장에 고 김 코치의 유골을 담았던 보자기와 유품들을 들고 갔다. 제자 장미란의 금메달을 지켜보라는 배려였다. 장미란에 앞서 53㎏급 은메달을 따냈던 윤진희(22·한국체육대)도 "친엄마같이 보살펴 준 고 김동희 코치님께 감사드린다"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이처럼 고 김 코치는 20대 초반의 여자대표 선수들에게 엄마같고 언니같은 존재였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부터 올해 초 투병으로 입원하기까지 여자대표팀 코치로 일하면서 감수성 예민한 어린 선수들을 다독거렸다. 또한 그가 마련한 개인별 심리 프로그램은 장미란과 윤진희 등이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하게 한 밑거름이었다. 고 김 코치는 현재 여자대표팀 코치를 맡고 있는 김도희 코치와 부산 남성여고 시절 바벨을 함께 들어올리며 땀을 흘렸던 친구 사이. 여자역도 대표팀의 베이징 성과 뒤에는 부산 출신 여자역도 대모들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병수 씨는 "동생이 암 투병으로 입원해 있을 때 장미란 선수가 수시로 병실을 찾았고 쾌유를 기원하며 올림픽 금메달을 꼭 드리겠다는 내용의 카드도 참 많이 보내줬다"고 회상했다.

고 김 코치의 어머니는 몇 년 전 갑상선암 수술로 현재도 계속 약을 복용하고 있다. 게다가 딸의 불상사까지 겹쳐 심신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 병수 씨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동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어머니가 힘들어 하신다"고 말했다.

여자역도 선수단은 베이징에서 돌아오면 조만간 김 코치가 잠들어 있는 김해 신어산 추모공원을 찾을 예정이다. 병수 씨는 "선수단이 메달을 들고 단체로 추모공원을 찾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왔다"며 "병상에서도 그토록 선수들을 걱정하던 동생이 이제는 웃는 얼굴로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찬석 기자
chansk@kookje.co.kr   



<국제신문 3월 13일자 스포츠면 보도 내용>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김동희 태릉선수촌 지도위원 '역도계 영원한 대모'로 잠들다
 
 지난 10일 온 나라가 충격에 휩싸였다. 한때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4번타자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이호성(41)이 '일가족 실종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의 공개 수배를 받은 지 하루도 되지 않아 한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스포츠 스타의 전혀 다른 모습에 야구팬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호성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시간 또 한명의 스포츠 스타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태릉선수촌 김동희(36) 지도위원이다. 그는 인기 종목의 스타가 아니었다. 결혼도, 세속적인 성공도 모두 뒤로한 채 자신이 사랑하던 역도와 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음지에서 한 우물만 팠다. 김 위원은 10일 오전 7시 서울 원자력병원에서 지병인 난소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김 위원은 '여자가 무슨 역도를 하느냐'는 비웃음이 난무하던 풍토에서 한국 여자 역도의 기틀을 다진 주인공이었다. 빈소가 차려진 원자력병원에는 김 위원과 함께 운동을 했던 선후배 여자 선수 수백 명이 찾아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국 여자역도의 간판인 장미란은 누구보다 서럽게 울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한역도연맹 관계자들도 그저 눈물만 흘렸다.

김 위원은 부산 출신이다. 토성초등에서 공던지기로 스포츠와 인연을 맺었고 남성여고 1학년까지 투창 선수로 뛰었다. 그러다 남성여고 2학년때 역도로 전환했다. 워낙 성실했던 김 위원은 '연습벌레'로 불릴 만큼 지독하게 훈련에만 매달려 바벨을 잡은 지 불과 1년 만인 남성여고 3학년때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부산 동구청에서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던 김 위원은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 1 동 2, 1994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은 3개를 획득하며 한국 여자 역도를 궤도에 올려놓았고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서 역도를 포함한 스포츠 전체에 자신의 정열을 쏟아부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여자대표팀의 코치로 활약했던 김 위원은 결혼도 미루고 역도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중 암이라는 병마가 찾아왔지만 김 위원은 굴하지 않았다. 투병 중이던 올 2월 모교인 한국체대 대학원에서 여자 역도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 불꽃을 태우기도 했다.

평생 바벨과 씨름했던 짧은 인생. 이루고 싶었던 많은 과제를 후배들에게 남겨두고 그는 영원히 바벨을 잡을 수 있고 스포츠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12일 오전 그의 땀과 혼이 밴 태릉선수촌을 한바퀴 둘러보고 고향인 부산의 영락공원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 영면에 들어간다.
김희국 기자 kuki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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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2일 부산 영락공원에서 역도인을 포함한 체육인들의 애도속에 태릉선수촌 김동희 지도위
  원의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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