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라고 부르기엔 유난히 덩치가 큰 지리산. 지리산은 경남 하동 함양 산청, 전남 구례, 전북 남원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산괴다. 함양 산청 남원은 동서로 뻗은 지리산 주릉의 북쪽 땅에, 구례와 하동은 남쪽 땅에 위치해 있다.

 피아골은 전남 구례, 불일폭포는 구례와 인접한 화개장터로 유명한 경남 하동에 위치해 있다. 남해고속도로 하동IC로 나와 섬진강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19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이정표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피아골 입구 연곡사와 불일폭포의 들머리인 쌍계사는 차로 10분 거리.


6.25 당시 치열한 격전지 '三紅' 피아골
핏빛 단풍으로 불릴 정도로 아주 고와
피아골 대피소까지 도보로 1시간30분
 
'삼홍' 피아골 단풍

 피아골 단풍을 두고 남명 조식 선생은 '산이 붉게 타니 산홍(山紅)이요, 단풍에 비친 맑은 소(沼)가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골짝에 들어선 사람도 단풍에 취하니 인홍(人紅)이라' 노래했다. 그 유명한 삼홍시(三紅詩)다.

만추 피아골은 환상 그 자체.

피아골 하산길의 만산홍엽.


 피아골 단풍 트레킹은 천년 고찰 연곡사에서 시작된다.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화엄사와 함께 세운 연곡사는 신라 사찰의 지리산 입산 1호 사찰.

 이 절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국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동부도(국보 제53호)와 북부도(〃 제54호)가 있기 때문이다. 선홍빛 단풍과 동부도의 환상적인 조화는 사진 작가들의 단골 출사지로 손꼽힌다.

 연곡사에서 직전마을 피아골 입구까지는 2㎞. 피아골 입구엔 공용주차장이 없어 차는 대개 연곡사 인근 대형 주차장에 세운다. 굳이 차를 고집하겠다면 식당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물론 산행 전후 식사는 필수.

  피아골의 어원이 되는 '직전(稷田)마을'은 오곡 중 하나인 피(기장)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마을이다. 해서 처음에는 피밭곡(稷田谷)으로 불리다 자연스럽게 피아골로 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직전마을 주민들 중 피 농사를 짓는 가구는 없다. 그 유명한 피아골 다랑이논의 위치를 묻는 질문에 한 주민은 경남 남해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했다. 격세지감이다.


 피아골 단풍은 알록달록한 티가 없이 그냥 붉다. 그래서 핏빛 단풍이라 불린다. 피아골이 6·25 전쟁 때 빨치산과 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여서 당시 망자들이 흘린 피 때문이라고 한다. 함태식 선생은 "1984년 피아골 대피소 건립 때 이곳에서 인골 한 트럭분이 나왔다"고 말했다.

 단풍이 목적이라면 피아골 대피소(4㎞)까지만 가면 된다. 1시간30분쯤 걸리지만 선유교 삼홍교 구계포교 선녀교 등 4개의 다리를 왔다갔다하며 계곡의 비경과 선홍빛 단풍을 렌즈에 담다 보면 훨씬 더 걸릴 수도 있다. 고개를 들면 핏빛 단풍이 물들어 있고, 머리를 숙이면 맑은 계곡물이 수줍은 듯 단풍빛을 토해내는 절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흔들다리인 구계포교.

 피아골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삼홍교까지 35분, 흔들다리인 구계포교까지 17분, 대피소 입구 선녀교까지 43분 정도 잡으면 된다. 산꾼들은 노고단~임걸령~피아골의 4시간30분 코스나 반선~뱀사골~화개재~임걸령~피아골의 8시간 코스로 등산할 수도 있다.

3 0~31일 피아골 일원에서는 '삼홍(三紅)과 함께하는 오색단풍 여행'이란 주제로 제34회 피아골 단풍축제가 열린다. 지난 23일 피아골 삼홍교와 구계포교 중간쯤까지 내려와 물들고 있을 단풍은 오는 31일쯤 절정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쌍계사에서 불일폭포까지 2.4㎞, 1시간 걸려
60m 높이 불일폭포 주변은 화엄 세계 방불케 해
단풍은 이번 주 보다 다음 주에 더 좋을 듯

 
화엄 세계 따로 없는 불일폭포

 겸재가 그려 더욱 유명해진 불일폭포도 피아골 단풍과 마찬가지로 '지리산 10경' 중 하나. 60m  높이에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 때문에 여름철에 주로 찾는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도 그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에서'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라고 표현했을 정도.

하지만 만추의 불일폭포도 폭포의 장엄함과 함께 폭포 옆 기암절벽을 울긋불긋 뒤덮는 화려함이 어우러져 마치 화엄의 세계를 방불케 한다. 

불일폭포에서 불일평전으로 하산하는 등산객들.

 불일폭포 가는 길의 들머리는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서 가장 관람객이 많은 쌍계사. 최치원이 짓고 친필로 쓴 것으로 알려진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 제47호)를 잠시 둘러보고 9층 석탑 좌측 계단으로 올라선다.


 쌍계사에서 불일폭포(옆 사진)까지는 2.4㎞. 처음 300m는 가파른 돌계단이라 힘들다. 이후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이면 닿는다. 도중 쌍계사의 유일한 산내 암자인 국사암 갈림길도 만난다. 200m 정도 거리여서 잠시 다녀오자. 문 앞을 지키는 1200년 된 느티나무를 놓치지 말자. 가지가 사방 네 갈래로 뻗은 이 거목은 일명 사천왕수(四天王樹)로 불린다.

 최치원이 지리산에 은거하면서 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환학대를 지나면 뜻밖에도 너른 평지가 기다린다. 세석평전 돼지평전처럼 지리산에서 몇 안 되는 평전이다. 불일평전이다. 3년 전 작고한 변규화 선생이 30여 년간 머문 '봉명산방'이라는 작은 휴게소가 있다. 마당에는 변규화 선생이 만든 한반도를 닮은 작은 연못과 소망탑이 보인다.

 불일폭포는 휴게소에서 10분 거리. 가파른 오르막 끝에 불일암이 있고 그 아래로 내려서면 폭포가 보인다. 피아골보다 해발이 낮아서인지 폭포 주변에만 단풍이 약간 물들어 있을 뿐 아직은 초록이 우세하다.

불일암에서 본 풍광. 담을 낮춘 운치가 엿보인다.

화개골에 살며 이곳을 가끔씩 찾는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는 "지리산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다. 피아골은 이번 주말, 불일폭포는 그 다음 주말까지 기다려야 단풍을 볼 수 있을 듯하다.

■ 지리산 능선을 닮은 함태식·남난희

 함태식 선생(아래 사진)은 현재 환경부 촉탁직을 맡아 연곡사 입구 작은 통나무집을 사무실로 쓰고 있다. 소임은 '지리산 지킴이'로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피아골 탐방지원센터 한 쪽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다.


 피아골 산행에 동행할 수 없느냐는 요청에 "난 이제 국가의 녹을 먹고 있어 근무해야 하며, 지금은 젊은이들과 보조를 못 맞춘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대한산악연맹 부산연맹이 주최한 '부산산악문화축제'에서 지리산 보존과 한국 산악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정대상을 받았다. 뒤늦게 소감을 묻자 "산에서 쫓겨난 늙은이 위로할려고 준 거야. 그래도 막상 받고 나니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고. 큰 상도 받았는데 남은 삶을 지리산을 위해 바쳐야지."


 산에서 내려온 그는 요즘 무척 기운이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체중도 3㎏나 쪄 63㎏, 허리도 2인치 늘어 36인치라고 했다. 평지를 걸으면 중심이 약간 흔들린다고도 했다. "여기도 산이잖아요"라는 농담을 던지자 "피아골 대피소가 있는 해발 900m는 돼야 산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뜸 케이블카 얘기를 꺼냈다. "비록 난 환경부 직원이지만 지리산 케이블카는 절대 반대야. 몸이 불편한 사람도 산에 오를 권리가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난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해."

 여성산악인 남난희 씨는 얼마 전 17세 아들과 단둘이 백두대간 종주를 끝냈다. 그는 지리산 자락에서 자연을 무대로 뛰놀던 아들이 대간 종주를 통해 어른이 돼 가고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한때 국내 산악계를 호령하던 그가 지금은 비록 산을 내려왔지만 아들만은 산과 소통하며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 산악인 남난희.

뭐랄까, 함태식 선생은 부드러우면서 꼿꼿함이, 남난희는 투박하면서도 섬세한 분위기가 풍겨나왔다. 아마 지리산 덕분일 게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지리산의 능선을 빼닮았다.

■ 가볼 만한 단풍 축제

단풍이 남쪽으로 그 세력을 떨치고 있다. 단풍이 특히 고운 산을 끼고 있는 전국 각 지자체들은 축제를 마련해 산꾼들을 유혹하고 있다.
 
 전남 장성군 백암산 기슭에 위치한 고불총림 백양사에서는 11월 5~6일 백양단풍축제가 열린다. 대한8경 중 하나인 백암산 백양사 단풍은 전국에서 가장 선명하고 빛깔이 고운 애기단풍으로 유명하다. 쌍계루의 단아한 자태와 백암산 중턱의 백학봉의 멋진 조화가 일품이다.
 
 이웃한 내장산에서는 31일 내장산단풍 부부사랑축제가 열린다. 내장산 단풍은 금산사의 벚꽃, 변산반도의 녹음, 백암산 설경과 함께 호남4경으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답다. 걸출한 산세 또한 일품이라 산꾼들이 즐겨 찾는다.

피아골과 쌍벽을 이루는 지리산 뱀사골은 지난 24일 '단풍이 없는 단풍제'를 개최했다. 하지만 단풍은 피아골과 마찬가지로 이번 주말부터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가장 단풍이 늦게 물드는 전남 해남 두륜사 대흥사(아래 사진)에서는 올해부터 축제는 없지만 11월 6~14일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할 수 있다.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부도전.

지리산 핏빛 단풍 소식 (1)편은 여길(http://hung.kookje.co.kr/508)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지리산에도 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겨우내 꽁꽁 얼어 있던 불일폭포가 녹기 시작했습니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하동 화개골 쌍계사에서 오르는 길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쌍계사의 유일한 산내암자인 국사암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쌍계사에선 2.4㎞로 상대적으로 먼 데다 오름길의 연속이어서 꽤 힘이 들지요. 해서 국사암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비교적 쉽고 길이 부드러워 이곳을 들머리로 잡았습니다.

 이 길은 지리산 남부능선 삼신봉으로 이어지지만 가파르기만 하고 조망이 좋지 않아 눈밝은 산꾼들은 들머리로 애용하지 않고 날머리로 이용합니다.

하지만 불일폭포까지의 이 길은 부드럽고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이어서 아주아주 환상적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매년 4월말이면 이 길은 화엄세계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국사암은 신라 흥덕왕 때 진감 선사가 창건했습니다. 진감의 출생은 다소 독특합니다. 원래 어부 출신으로 그의 나이 36세 때 노를 젓는 고꾼으로 우연히 중국으로 갔다가 중국 승 마조 문하에 늦깎이로 출가, 동방 성인 혹은 얼굴이 검다 하여 흑두타, 즉 검은 얼굴의 부처로 존경받는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참고하시길.

               눈에 봐도 겨울은 가고, 산꾼들의 복장도 그렇고 봄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산행
초입부분입니다.

고운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로 환학대라고 합니다.





산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어언 45분. 일순간 뜻밖에도 너른 평지가 기다립니다. 세석평전 돼지평전처럼 지리산에서 몇 안되는 산중 너른 터인 불일평전입니다. 이곳에는 재작년 작고한 변규화 옹이 30여 년간 머문 일명 '봉명산방'이라 불리는 불일평전 오두막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불일폭포휴게소'입니다. 해발은 600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이 오두막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노고단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봉명산방에는 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고 변규화 옹은 1967년 성균관대 졸업 후 바로 출가했습니다. 4년 뒤인 1971년 환속해서 1978년 이곳 불일평전에 조그만 초막을 하여 짓고 결혼해서 살았지만 1986년 상처한 후 작고하기 전까지 홀로 외롭게 지내셨지요.

변성배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불일평전 봉명산방의 이 시선 같은 사람은 텁수룩하게 길게 자란 수염으로 지리산에서도 이름난 털보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난해 5월 지리산 종주 200회를 하신 부산 산꾼 이광전 씨는 그의 저서 '지금도 지리산과 연애중'에서 고 변규화 옹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수염으로 보면 70대 노인 같았으나 맑고 해맑은 웃음과 잔잔한 목소리를 들으면 30대로도 보인다'.

봉명산방이란 이름은 절친하게 지내셨던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잠시 짬을 내 봉명산방과 그 주변을 둘러보겠습니다.

커다란 나무는 야생감나무인 고욤나무입니다.

연못 속의 개구리 알인 듯 합니다.

불일평전 한쪽에는 옛 야영장 옆 수돗가 내지 세면장 인듯합니다.

옛 세면장의 외형입니다.


봉명산방 옆 휴게소. 산꾼들의 쉼터인듯 합니다.

고욤나무와 쉼터.


무인판매대.

고로쇠물도 맛볼 수 있답니다.


봉명산방 좌측, 다시말해 불일평전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는 소망탑이 있습니다. 소망탑이란 글은 봉명산방을 지을 때 참여한 젊은 사람들이 바위에 음각해 만든 것이며 그 주변의 돌탑들은 땅을 고르다 나온 돌을 하나 둘씩 쌓아 올린 것입니다.

요즘에는 해빙기라 그런지 소망탑이 간혹 쓰러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곳은 홍인수 씨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요가와 기(氣) 공부를 하는 분들입니다.

소망탑 아래에는 샘터가 있습니다. 물맛 또한 아주 좋습니다.

독일산 롯드와일러입니다. 이제 4개월 정도 됐답니다.

사람이 다가가도 깨지 않고 팔자좋게 자는 이 개는 히틀러의 경비견으로 유명하답니다. 개 역시 환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일평전에서 이제 불일폭포로 가는 길입니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봄 분위기가 나지 않습니까. 봉명산방에서 불일암까지는 6, 7분이면 충분합니다.

고로쇠 파이프도 보입니다.

불일암. 1980년대 초에 화재로 인해 완전 소실돼 사라졌으나 지난 2005년 4월 다시 신축됐습니다.

불일암 대웅전.
불일암에서 바라본 풍광입니다.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산줄기가 섬진강 너머 백운산입니다.

불일암 입구의 돌배나무.

불일폭는 불임암에서 2, 3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폭포수 소리와 함께 나무 사이로 폭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내려옵니다.
            겨우내 얼어 있던 폭포가 드디어 얼음이 녹으면서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봄이 온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폭포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놓았습니다.


불일폭포 최상류의 모습을 당겨서 봤습니다. 얼음이 거의 다 녹아 있습니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도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폭포의 가운데 부분입니다. 역시 얼음이 녹고 있습니다.

불일폭포는 고려시대의 승려인 보조국사 지눌(1158~1210년)이 폭포 입구에 있는 암자에서 수도를 했답니다. 이에 고려 21대 왕인 희종(1181~1237년)이 지눌의 덕망과 불심에 감동하여 불일보조라는 시호를 내렸답니다.
그 시호를 따라 이 폭포를 불일폭포라 하였고 그가 수도하였던 암자를 불임암이라 불렀답니다.

불일폭포는 좌측의 청학봉, 우측의 백학봉 사이의 협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60m에 이르며 주변의 기암괴석이 잘 어울어져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하산은 쌍계사로 했습니다.

쌍계사 일주문입니다. '삼신사 쌍계사'라 적힌 편액은 근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친 해강 김규진이 단정한 예서체로 썼습니다.

한쪽편에는 산꾼들을 위한 이정표가 보입니다. 불일폭포까지는 2.4㎞.
대웅전입니다.
                        쌍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물인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 대공탑비입니다.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이 진감선사 대공탑비는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라 정강왕 2년(887년)에 세워진 것입니다. 고운 최치원이 쓴 사산비 중 하나입니다. 진감선사의 치열했던 생애가 최치원의 문장을 만나서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쌍계사 마애여래좌상.

쌍계사 마애여래좌상으로 일명 마애불로 불립니다. 대중전에서 명부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바위에 조각된 이 마애불은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선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쌍계사 구층석탑.

쌍계사 구층석탑으로 고산스님이 인도성지 순례 후 스리랑카에서 직접 갖고온 석가여해 진신사리 삼과와 산내암자인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 진신사리 이과 그리고 전단나무 부처님 일위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80년대 전설의 여성산악인 경력 뒤로한 채
양지바른 하동 화개골서 된장 쑤며 시골생활
쌀 빼고 모든 것 자족, 덜 쓰고 절제애 익숙
아들 기범, "자연과 교감 갖는 삶 영위했으면"

 한때 국내산악계를 호령했던 남난희가 하동 화개골 용강리 시골집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양지바른 툇마루 기둥에 기대서서 상념에 잠겨 있다.

■ 남난희의 보금자리 화개골 시골집
 사실 거처가 하동 화개골이라 내심 우려가 됐다. 지금의 화개골이야 입구의 화개장터를 비롯해 그 유명한 벚꽃길과 쌍계사 그리고 야생차 재배지 및 판매처로 앉은 터만 지리산 자락이지 번잡한 관광지로 변한 지 꽤 됐기 때문이다. 

 하나, 기우였다. 남난희의 집은 화개골에 아직도 이런 집이 남아 있나 할 정도로 마을에서 구불구불한 포장로로 적당히 올라야 만날 수 있었다.

본채 뒤 비탈면에는 차나무가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다.
남난희는 손님이 찾아오면 툇마루에서 직접 재배해서 덖은 차를 대접한다.
고색창연한 돌담 옆에는 얼핏 봐도 20개의 된장항아리가 놓여 있다. 
최근 담근 자식 같은 된장을 살펴보고 있는 남난희. 저 멀리 겹겹이 겹쳐진 지리산 자락과 그 우측 섬진강 너머로 거구 백운산이 아련하다. 
일하던 도중 잠시 고개를 들고 지리산과 백운산을 바라보는 남난희.

시골집 대문 앞 남난희. 머리 위 걸려 있는 것은 청학동에서 운영하던 찻집 '백두대간'의 간판이다.

최근 담근 된장을 살펴보고 있는 남난희.


절친한 산 후배가 남난희의 산서 '하얀 능선에 서면' 출간을 기념한 선물한 판각화 작품이 행랑채 벽면에 걸려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황장산 줄기를 배경으로 남난희가 마당의 가마솥을 살펴보고 있다.


우물과 동굴. 우물엔 산에서 꺾어진 매화 가지를 담궈 놓았고, 동굴은 자연 저장고로 활용한다고 한다.

 양지바른 남향의 집 뒤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황장산 촛대봉 산줄기가 섬진강을 향해 내달리고 있고, 시야가 확 트인 정면으론 지리산 줄기가 겹겹이 겹쳐져 있다. 그 끝자락엔 섬진강 너머 거구 백운산이 손에 잡힌다. 좀 더 둘러보자. 본채 뒤 비탈면에는 차나무가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고 바로 옆 사랑채는 대숲에 둘러싸여 있다. 고색창연한 돌담 앞에는 20여 개의 된장독이 숨을 쉬고 있고, 마당 한쪽에는 우물과 커다란 바위동굴이 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정감이 가는 촌집 그대로이다. 여성으론 약간 큰 덩치의 소유자이지만 얼굴에는 언제나 차분한 미소가 떠날 줄 모르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인 남난희를 쏘옥 빼닮았다.

 남난희는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것도 인연이라면 참 고마운 인연"이라고 말했다. 유난히 그는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수년 전부터 기자들의 취재는 일절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며 이것도 인연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하루 시작은 불일암서 백팔배로
매일 아침 그는 집 건너편에 있는 쌍계사 산내암자인 불일암까지 마실을 다녀온다. 왕복 3시간. 백팔배를 하기 위해서다. 이날만은 기자의 요청으로 2시간쯤 늦췄다. 쌍계사의 또 다른 산내암자인 국사암 주차장을 들머리로 산행은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조우한 불일폭포휴게소 산장지기 홍인수 씨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라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불일산장지기 홍인수 씨와 불일암으로 오르는 남난희(왼쪽)
불일산장을 지나 불일암으로 향하는 남난희. 산길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

 그는 일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 이 길을 오르내린다. 이 길이 초행이라는 기자의 말에 남난희는 뭔가를 알려주기에 바쁘다. "4월 말 이 길은 진달래로 황홀경에 빠집니다. 이 길의 종착역이자 지리 10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 우측 절벽에는 온통 진홍빛으로 불타오르지요. 보기 드문 절경으로 화엄의 세계가 따로 없어요."

 옛 벗과 같은 편안한 이 길을 두고 남난희는 "집 가까이에 지리산의 보석 같은 산길과 그 끝자락에 백팔배를 할 수 있는 불일암과 불일폭포까지 있어 그야말로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고백. "사실 젊었을 땐 산을 볼 줄 몰았어요. 제가 목표로 하는 대상만 보았지 주변의 산은 볼 줄 몰랐어요. 아니 보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오르고자 하는 그게 산의 전체인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것도 산의 일부일 뿐이었어요." 한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정통 알피니스트가 뒤늦게 산의 품에 안겨 관조하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법을 익힌 듯하다.

 "그동안의 산이 '등산(登山)'의 산이었다면 지금은 '입산(入山)'의 산이죠. 원래 우리의 산은 등산의 대상이 아니었잖아요. 서구의 알피니즘이 들어오면서 도전의 대상이 돼버렸죠. 더 빨리,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오림짓의 연속. 인간이 자연에 도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하지만 입산은 달라요.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산과 함께 모든 것을 같이한다고 생각하고 올라보세요. 제 아들 기범이와 산에 오르면 그놈은 나무를 껴안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도 해요. 저에겐 도전의 대상으로 제압해야만 했던 산이 아이에겐 정겨운 친구로 다가와요. 한 세대를 건너서야 산의 소중함을 알게 됐으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요."

 사실 기자는 동행하면서 약간 벅찼다. 질문하랴, 간단하나마 메모하랴, 주변 산세 보랴. 해서, 평소 걸음걸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기자를 배려해 속도를 약간 늦추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엄홍길과 도봉산 산행 때 그 양반은 얘기를 나누다 일순간 쏜살같이 내달리더라고 하자 남난희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산을 타다 보면 산과 합일되는 시점이 일순간 찾아와요.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의식하지 않게 되죠."
고 변규화 옹이 30여 년간 머문 일명 '봉명산장'이라 불리는 불일평전 오두막 휴게소.

 산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어언 45분. 일순간 뜻밖에도 너른 평지가 기다린다. 세석평전 돼지평전처럼 지리산에서 몇 안되는 산중 너른 터인 불일평전이다. 재작년 작고한 변규화 옹이 30여 년간 머문 일명 '봉명산방'이라 불리는 불일평전 오두막의 새 산장지기 안주인이 고로쇠 물 한 잔을 건넨다. 남난희와 기자는 한 잔 들이켜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5분이면 불임암에 닿는다. 남난희는 백팔배를 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리니 불일폭포를 다녀오라고 한다.
                 불임암에서 백팔배를 올리는 남난희.

-백팔배를 하면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딱히 꼬집어 바라는 것은 없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줘 고맙다고 빕니다. 언제부터인가 매일 오다 보니 '어제는 무엇을 했고 무슨 일이 있었다몠는 식의 보고를 하면서 어제의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젠 백팔배를 해야 제 마음이 편안해져요."

 하산길 산장지기 부부는 마침 산골에 장어가 생겨 국을 끓였다며 한사코 식사를 하고 가시라고 붙잡는다. 찬은 배추와 된장, 산나물에 총각김치지만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하다는 속담이 기자에게도 적용될 줄이야, 밥도둑이 따로 없다.

산만 타는 선머슴이 기막힌 된장을 담그다
 다시 남난희의 집 툇마루에 마주앉았다. 차와 함께. 아들 기범이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하다 짬이 나면 그는 양지바른 이곳 툇마루에 앉아 산천을 바라보거나,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신다. 그의 보금자리인 셈이다. 눈길은 당연히 마당의 된장 항아리로 옮겨진다. 얼핏 봐도 스무 개는 넘는다. 그는 재래식 방법으로 된장을 만들어 가계를 꾸려 나간다. 생계유지용이다.

 딱히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지만 먹어 본 사람들이 "이렇게 맛있는 된장과 간장은 처음이라고 하니 맛은 있나 봐요"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산만 다니는 선머슴인 줄 알았던 남난희가 언제 이런 재주가 있었느냐고 지인들이 놀리기도 한단다.

"콩은 경험상 강원도산이 맛이 좋아 지인에게 화학비료를 치지 않고 키워달라고 부탁을 하죠. 여기에 지리산의 맑은 공기와 물 햇빛 그리고 5년 이상 묵힌 소금에 자연의 기를 듬뿍 받은 저의 정성이 곁들여지다 보니 맛있다고들 해요. 보람을 느끼죠." 비결은 따로 있었다.

 "시골에서 살며 정말 괜찮은 먹을거리를 만들어 나눠주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 저에게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한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하나, 남난희는 이 말은 잊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된장을 구입하겠다고 연락이 이따금씩 오지만 보내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더 많이 된장을 만들면 더 많은 벌이가 되겠지만 콩 10가마가 넘어가면 손맛을 잃는단다. 무엇보다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노동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그게 그의 지론이다.

 대신 그는 지난해부터 차를 재배, 직접 덖은 후 판매도 한다. 아들 기범(남원 실상사 대안학교 3학년)이의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남난희는 쌀 이외의 모든 것을 자족한다. 대문 앞 텃밭에서 거의 모든 것을 직접 키운다. 심지어 우물 옆 음지에선 버섯 재배도 직접 한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남난희. "저는 약간 모자란 듯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요. 덜 쓰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는 절제에 이젠 익숙해져 있나봐요."

 오랜 기간 화두를 붙잡고 용맹정진하다 깨달음을 얻은 노승이 연상될 정도로 차분하면서 느긋하고 한편으론 사물을 달관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들을 대안학교에 보냈던데.
"요즘은 사춘기여서 저에게 약간의 반항도 해 섭섭하지만 저에겐 고마운 스승 같은 존재예요. 제도권 교육은 못 미더워 보냈어요. 본인이나 저도 만족하고 있어요. 저는 아들에게 무엇이 되라고는 요구하지 않아요. 작은 바람이 있다면 자연과의 교감을 갖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겠어요."

-산은 이제 완전히 끊은 겁니까.
(잠시 뜸을 들이다)"통일이 되면 백두대간을 밟고 백두산에 꼭 가고 싶어요. 또 역전의 용사들이 좋은 기회를 만들면 따라붙을 겁니다. 괜히 절 은퇴시키려고 하네요. 송충이가 솔잎을 못 먹으면 죽어요."
실제 그의 저서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고 언젠가 통일이 되는 그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북으로) 나설 것이다'.

(1)'산을 버려 산을 얻은' 전설의 여성산악인 남난희의 삶 
http://hung.kookje.co.kr/361
(3)남난희 "태백산맥 종주땐 육체적 고통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었어요"
http://hung.kookje.co.kr/36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