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전설의 여성산악인 경력 뒤로한 채
양지바른 하동 화개골서 된장 쑤며 시골생활
쌀 빼고 모든 것 자족, 덜 쓰고 절제애 익숙
아들 기범, "자연과 교감 갖는 삶 영위했으면"

 한때 국내산악계를 호령했던 남난희가 하동 화개골 용강리 시골집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양지바른 툇마루 기둥에 기대서서 상념에 잠겨 있다.

■ 남난희의 보금자리 화개골 시골집
 사실 거처가 하동 화개골이라 내심 우려가 됐다. 지금의 화개골이야 입구의 화개장터를 비롯해 그 유명한 벚꽃길과 쌍계사 그리고 야생차 재배지 및 판매처로 앉은 터만 지리산 자락이지 번잡한 관광지로 변한 지 꽤 됐기 때문이다. 

 하나, 기우였다. 남난희의 집은 화개골에 아직도 이런 집이 남아 있나 할 정도로 마을에서 구불구불한 포장로로 적당히 올라야 만날 수 있었다.

본채 뒤 비탈면에는 차나무가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다.
남난희는 손님이 찾아오면 툇마루에서 직접 재배해서 덖은 차를 대접한다.
고색창연한 돌담 옆에는 얼핏 봐도 20개의 된장항아리가 놓여 있다. 
최근 담근 자식 같은 된장을 살펴보고 있는 남난희. 저 멀리 겹겹이 겹쳐진 지리산 자락과 그 우측 섬진강 너머로 거구 백운산이 아련하다. 
일하던 도중 잠시 고개를 들고 지리산과 백운산을 바라보는 남난희.

시골집 대문 앞 남난희. 머리 위 걸려 있는 것은 청학동에서 운영하던 찻집 '백두대간'의 간판이다.

최근 담근 된장을 살펴보고 있는 남난희.


절친한 산 후배가 남난희의 산서 '하얀 능선에 서면' 출간을 기념한 선물한 판각화 작품이 행랑채 벽면에 걸려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황장산 줄기를 배경으로 남난희가 마당의 가마솥을 살펴보고 있다.


우물과 동굴. 우물엔 산에서 꺾어진 매화 가지를 담궈 놓았고, 동굴은 자연 저장고로 활용한다고 한다.

 양지바른 남향의 집 뒤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황장산 촛대봉 산줄기가 섬진강을 향해 내달리고 있고, 시야가 확 트인 정면으론 지리산 줄기가 겹겹이 겹쳐져 있다. 그 끝자락엔 섬진강 너머 거구 백운산이 손에 잡힌다. 좀 더 둘러보자. 본채 뒤 비탈면에는 차나무가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고 바로 옆 사랑채는 대숲에 둘러싸여 있다. 고색창연한 돌담 앞에는 20여 개의 된장독이 숨을 쉬고 있고, 마당 한쪽에는 우물과 커다란 바위동굴이 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정감이 가는 촌집 그대로이다. 여성으론 약간 큰 덩치의 소유자이지만 얼굴에는 언제나 차분한 미소가 떠날 줄 모르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인 남난희를 쏘옥 빼닮았다.

 남난희는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것도 인연이라면 참 고마운 인연"이라고 말했다. 유난히 그는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수년 전부터 기자들의 취재는 일절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며 이것도 인연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하루 시작은 불일암서 백팔배로
매일 아침 그는 집 건너편에 있는 쌍계사 산내암자인 불일암까지 마실을 다녀온다. 왕복 3시간. 백팔배를 하기 위해서다. 이날만은 기자의 요청으로 2시간쯤 늦췄다. 쌍계사의 또 다른 산내암자인 국사암 주차장을 들머리로 산행은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조우한 불일폭포휴게소 산장지기 홍인수 씨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라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불일산장지기 홍인수 씨와 불일암으로 오르는 남난희(왼쪽)
불일산장을 지나 불일암으로 향하는 남난희. 산길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

 그는 일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 이 길을 오르내린다. 이 길이 초행이라는 기자의 말에 남난희는 뭔가를 알려주기에 바쁘다. "4월 말 이 길은 진달래로 황홀경에 빠집니다. 이 길의 종착역이자 지리 10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 우측 절벽에는 온통 진홍빛으로 불타오르지요. 보기 드문 절경으로 화엄의 세계가 따로 없어요."

 옛 벗과 같은 편안한 이 길을 두고 남난희는 "집 가까이에 지리산의 보석 같은 산길과 그 끝자락에 백팔배를 할 수 있는 불일암과 불일폭포까지 있어 그야말로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고백. "사실 젊었을 땐 산을 볼 줄 몰았어요. 제가 목표로 하는 대상만 보았지 주변의 산은 볼 줄 몰랐어요. 아니 보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오르고자 하는 그게 산의 전체인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것도 산의 일부일 뿐이었어요." 한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정통 알피니스트가 뒤늦게 산의 품에 안겨 관조하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법을 익힌 듯하다.

 "그동안의 산이 '등산(登山)'의 산이었다면 지금은 '입산(入山)'의 산이죠. 원래 우리의 산은 등산의 대상이 아니었잖아요. 서구의 알피니즘이 들어오면서 도전의 대상이 돼버렸죠. 더 빨리,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오림짓의 연속. 인간이 자연에 도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하지만 입산은 달라요.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산과 함께 모든 것을 같이한다고 생각하고 올라보세요. 제 아들 기범이와 산에 오르면 그놈은 나무를 껴안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도 해요. 저에겐 도전의 대상으로 제압해야만 했던 산이 아이에겐 정겨운 친구로 다가와요. 한 세대를 건너서야 산의 소중함을 알게 됐으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요."

 사실 기자는 동행하면서 약간 벅찼다. 질문하랴, 간단하나마 메모하랴, 주변 산세 보랴. 해서, 평소 걸음걸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기자를 배려해 속도를 약간 늦추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엄홍길과 도봉산 산행 때 그 양반은 얘기를 나누다 일순간 쏜살같이 내달리더라고 하자 남난희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산을 타다 보면 산과 합일되는 시점이 일순간 찾아와요.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의식하지 않게 되죠."
고 변규화 옹이 30여 년간 머문 일명 '봉명산장'이라 불리는 불일평전 오두막 휴게소.

 산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어언 45분. 일순간 뜻밖에도 너른 평지가 기다린다. 세석평전 돼지평전처럼 지리산에서 몇 안되는 산중 너른 터인 불일평전이다. 재작년 작고한 변규화 옹이 30여 년간 머문 일명 '봉명산방'이라 불리는 불일평전 오두막의 새 산장지기 안주인이 고로쇠 물 한 잔을 건넨다. 남난희와 기자는 한 잔 들이켜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5분이면 불임암에 닿는다. 남난희는 백팔배를 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리니 불일폭포를 다녀오라고 한다.
                 불임암에서 백팔배를 올리는 남난희.

-백팔배를 하면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딱히 꼬집어 바라는 것은 없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줘 고맙다고 빕니다. 언제부터인가 매일 오다 보니 '어제는 무엇을 했고 무슨 일이 있었다몠는 식의 보고를 하면서 어제의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젠 백팔배를 해야 제 마음이 편안해져요."

 하산길 산장지기 부부는 마침 산골에 장어가 생겨 국을 끓였다며 한사코 식사를 하고 가시라고 붙잡는다. 찬은 배추와 된장, 산나물에 총각김치지만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하다는 속담이 기자에게도 적용될 줄이야, 밥도둑이 따로 없다.

산만 타는 선머슴이 기막힌 된장을 담그다
 다시 남난희의 집 툇마루에 마주앉았다. 차와 함께. 아들 기범이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하다 짬이 나면 그는 양지바른 이곳 툇마루에 앉아 산천을 바라보거나,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신다. 그의 보금자리인 셈이다. 눈길은 당연히 마당의 된장 항아리로 옮겨진다. 얼핏 봐도 스무 개는 넘는다. 그는 재래식 방법으로 된장을 만들어 가계를 꾸려 나간다. 생계유지용이다.

 딱히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지만 먹어 본 사람들이 "이렇게 맛있는 된장과 간장은 처음이라고 하니 맛은 있나 봐요"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산만 다니는 선머슴인 줄 알았던 남난희가 언제 이런 재주가 있었느냐고 지인들이 놀리기도 한단다.

"콩은 경험상 강원도산이 맛이 좋아 지인에게 화학비료를 치지 않고 키워달라고 부탁을 하죠. 여기에 지리산의 맑은 공기와 물 햇빛 그리고 5년 이상 묵힌 소금에 자연의 기를 듬뿍 받은 저의 정성이 곁들여지다 보니 맛있다고들 해요. 보람을 느끼죠." 비결은 따로 있었다.

 "시골에서 살며 정말 괜찮은 먹을거리를 만들어 나눠주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 저에게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한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하나, 남난희는 이 말은 잊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된장을 구입하겠다고 연락이 이따금씩 오지만 보내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더 많이 된장을 만들면 더 많은 벌이가 되겠지만 콩 10가마가 넘어가면 손맛을 잃는단다. 무엇보다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노동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그게 그의 지론이다.

 대신 그는 지난해부터 차를 재배, 직접 덖은 후 판매도 한다. 아들 기범(남원 실상사 대안학교 3학년)이의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남난희는 쌀 이외의 모든 것을 자족한다. 대문 앞 텃밭에서 거의 모든 것을 직접 키운다. 심지어 우물 옆 음지에선 버섯 재배도 직접 한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남난희. "저는 약간 모자란 듯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요. 덜 쓰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는 절제에 이젠 익숙해져 있나봐요."

 오랜 기간 화두를 붙잡고 용맹정진하다 깨달음을 얻은 노승이 연상될 정도로 차분하면서 느긋하고 한편으론 사물을 달관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들을 대안학교에 보냈던데.
"요즘은 사춘기여서 저에게 약간의 반항도 해 섭섭하지만 저에겐 고마운 스승 같은 존재예요. 제도권 교육은 못 미더워 보냈어요. 본인이나 저도 만족하고 있어요. 저는 아들에게 무엇이 되라고는 요구하지 않아요. 작은 바람이 있다면 자연과의 교감을 갖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겠어요."

-산은 이제 완전히 끊은 겁니까.
(잠시 뜸을 들이다)"통일이 되면 백두대간을 밟고 백두산에 꼭 가고 싶어요. 또 역전의 용사들이 좋은 기회를 만들면 따라붙을 겁니다. 괜히 절 은퇴시키려고 하네요. 송충이가 솔잎을 못 먹으면 죽어요."
실제 그의 저서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고 언젠가 통일이 되는 그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북으로) 나설 것이다'.

(1)'산을 버려 산을 얻은' 전설의 여성산악인 남난희의 삶 
http://hung.kookje.co.kr/361
(3)남난희 "태백산맥 종주땐 육체적 고통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었어요"
http://hung.kookje.co.kr/363


 

 

         19번 국도와 마주보고 있는 861번 지방도로변에 섬진강을 배경으로 핀 홍매화의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당겨서 본 홍매화의 자태.


섬진강변으로 떠나자. 같은 하늘 아래 조국산천의 한 봄이지만 왜 이토록 봄만 되면 상춘객들이 섬진강변으로 끊임없이 몰려들까.

 아마 십중팔구는 섬진강가에 섬진강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때문일게다. 이 땅에 피는 꽃치고 이쁘지 않은 꽃이 없으려만 유독 이 곳에 피는 꽃에 특히 정이 가는 것은 눈물나도록 살가운 그 섬진강 때문이리라.

섬진강변은 갖가지 봄꽃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자연섭리를 정확히 따르며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섬진강의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강가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가 요즘 들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산수유꽃도 뒤이어 봉오리를 틔우고 있다. 매화와 산수유꽃이 빛을 잃으면 그 화려함이 두번째라면 서러워할 벚꽃이 만개하고 이에 뒤질세라 배꽃이 섬진강가 봄꽃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섬진강 드라이브는 그래서 봄맞이에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남도대교를 통해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상춘가를 불러보자.

#섬진강 강변길



고려말 왜구가 침입, 하동쪽에서 강을 건너려 하자 수만마리의 두꺼비가 몰려들어 울부짖는 통에 왜구들이 놀라 도망쳤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두꺼비 섬, 나루 진’자를 써 섬진강(蟾津江). 하동에서 광양으로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섬진교에서 구례방면으로 3㎞ 남짓, 지금의 섬진나루터 수월정 근처가 그 전설의 현장이다.

흔히 경남 하동~전남 구례 19번 국도는 벚꽃과 배꽃이 연이어 필 4월이면 국내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선 섬진강을 가운데 두고 19번 국도와 나란히 달리는 광양쪽 861번 지방도를 권하고 싶다.

예전 같으면 광양 매화마을을 구경한 후 섬진교를 다시 건너 하동을 거쳐 구례로 향했지만 지금은 동서화합의 다리인 남도대교 덕분에 861번 도로를 타고 가다 남도대교를 건너도 되기 때문이다.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 홍매화.

광양 청매실농원에서 남도대교까지는 16㎞, 지금은 매화천국이다. 그 이름하여 매화꽃 드라이브. 벚꽃 드라이브에 익숙한 경상도 쪽에선 약간 생소하기까지 하다.

흔히 19번 국도의 벚꽃길이 화려함의 극치라면 강건너 861번 지방도의 매화꽃길은 오히려 소박한 시골아낙의 포근함이 느껴진다.

오른쪽 강가의 대나무가 섬진강을 가리면 매화가 만발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강변이 온통 백사장이면 저 멀리 지리산자락을 올려다 보자. 19번 국도와는 달리 오가는 차가 적어 길가에 정차한 채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 

 만일 구례에서 다시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IC쪽으로 이동한다면 섬진강변으로 접근할 수 있는 송림백사장공원과 하동포구로 가보자. 따스한 강바람이 부는 가운데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숲과 굽이 너른 백사장을 끼고 맑게 흐르는 섬진강을 몸으로 느껴보자.

#흩날리는 매화꽃잎-광양 매화마을

청매실농원에서 바라본 섬진강변.
청매실농원 보호수.
청매실농원 뒤 산책로.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 청매실농원의 장독.
청매실농원의 산책로. 황홀하다.

행정구역상으로 전남 광양시 다압면. 고로쇠약수로 유명한 백운산 자락에 몸을 맡긴 채 지리산과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 이름은 섬진마을이지만 이 마을 70여가구 대부분이 매실농사를 짓고 있어 매화마을로 불린다.

남해고속도로 하동IC를 나와 19번 국도를 따라 섬진교를 건너 우회전해 들어간다. 워낙 유명하다보니 이정표가 친절하게 안내한다. 마을 입구 여염집 담벼락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강가나 산등성이에도 매화가 지천으로 꽃을 피워 놓았다.

섬진강을 내다보고 들어앉은 수월정을 지나면 매화마을 관광의 절정인 청매실농원이다. 국가 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후 모 방송국 인기프로 ‘성공시대’에도 소개된 홍쌍리(67)씨가 회장으로 있는 곳. 섬진강변 매화골의 원조격.

이웃 농원이나 하동서 매화로 유명한 먹점마을이나 흥룡마을의 멋스런 매화도 알고보면 이미 오래전 이 곳 청매실농원에서 이식됐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

‘천지간에 꽃입니다/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꽃이 피고…’. 

청매실농원에 오면 김용택 시인이 읊은 것처럼 5만여평의 산자락이 백매화 홍매화 청매화의 꽃잎으로 넘쳐난다. 혹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이 스쳐지나갈 때면 흩날리는 오편화 꽃잎에 꽃멀미가 날 정도다.

농원 전시홍보관 옆으로 난 산책로를 걸어보자. 올해부터는 상춘객을 위해 입구에 안내도를 만들어 놓았다. 영화 ‘흑수선’ ‘취화선’ ‘북경반점’과 드라마 ‘다모’ 촬영지도 일일이 표시했다.

매화도 매화지만 초록비단을 펼친 듯 매화나무 사이로 풋보리와 클로버가 잘 자라 초록과 흰색의 조화가 일품이다. 올해부턴 구절초 씀바귀 도라지 취나물 야생철쭉 등을 심어 보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은은한 소리를 내는 대나무숲이나 매실장아찌와 매실액이 익어가는 2000여개의 장독대도 시공을 초월한 공감각적 미의 극치.

매화꽃 사이로 내려다보는 섬진강 풍경은 꽃과 산, 그리고 강이 한데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에 버금간다. 재첩캐는 아낙과 그 주변을 맴도는 백로나 왜가리가 같은 화폭에 들어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노란 꽃물결 산수유 속으로

전남 구례군 산동면에 활짝 핀 산수유꽃.

 매화가 질 무렵이면 구례쪽에선 산수유꽃이 만발한다. 흔히 산동면 상위마을이 산수유마을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지리산온천단지에서 산동군 꼭대기인 상위마을에 이르는 10리길이 온통 샛노란 꽃길로 변한다.

 산수유도 기온이 올라가는 이번 주말부터 서서히 꽃부리를 펼쳐낼 태세다. 현재 20% 개화된 상태.

 
논두렁 밭두렁 산기슭의 산수유꽃도 멋지지만 지리산 특유의 검은돌이 널부러져 있는 계곡을 따라 피는 산수유는 압권이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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