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삶이 침체에 빠졌거나 우울할 때 전통시장에 가면 활기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패러디해 '주말&엔'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입맛이 없을 땐 부평시장에 가보라. 맛의 진수를 느끼면서 생기가 돌 것이라고. 부평시장에선 유부전골과 단팥죽 포장마차들만 깡통골목 쪽에 있을 뿐 대부분의 유명 맛집은 옛 사거리시장 쪽에 몰려 있다.
 
 ■ 부평시장에서만 먹을 수 있다

50년 전통의 '원조비빔당면'

고명은 적지만 생각보다 맛있다.


 매콤한 양념과 당면의 즉석 만남, 비빔당면이 먼저 떠오른다. 50년 전통의 '원조비빔당면'(051-254-4240)이 독보적이다. 시어머니에 이어 며느리 서성자(46, 아래 사진) 씨가 9년 전부터 맡고 있다. 먹을거리가 귀했던 한국전쟁 시절 고구마나 감자의 전분으로 국수처럼 먹은 데서 유래한 비빔당면은 지금은 일본 관광객과 타지 사람들이 맛봐야 할 필수 음식으로 손꼽힌다.

 비빔당면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고명이라곤 시금치와 오뎅, 단무지 그리고 양념장이 전부다. 주인 서 씨는 갖은 야채와 고춧가루 간장 12가지가 들어가는 양념장 맛의 비밀이라고 했다. 육수는 야채, 띠포리와 멸치, 무 새우 다시마 등 3가지를 따로 만든다. 오묘한 맛의 비밀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손이 많이 가고 원가 또한 상당하다고. 오래전 모 먹자골목에서 한두 번 경험한 그 맛을 떠올렸던 기자는 깜짝 놀랐다. 매콤하면서 생각보다 너무 맛이 있어서. 4000원.



 '유부전골'(1599-9828) 또한 부평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 이 역시 타지 사람이나 일본인들이 먹어봐야 할 부산만의 필수 먹을거리로 알려져 있다. 깡통골목의 수입1길과 수입2길 사이에 숨어 있다. 간판에는 뜻밖에 '우진도기'로 적혀 있다. 워낙 장사가 잘된다는 자신감의 표출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손님들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 같다.
 당면과 각종 야채를 가득 넣은 유부가 터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미나리로 묶은 덕분에 미나리의 상큼한 향이 일품이다. 1인분(3000원)을 시키면 유부와 어묵이 한가득 섞여 나온다. 개운한 맛이 입안에 감돌 정도로 인상적이다. 국물 맛의 비결을 물어보니 1급 비밀이라며 일체 함구한다. 전화 주문도 받지만 워낙 주문량이 밀려 약 2달쯤 걸린다고 한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다.

'유부전골' 할머니.

유부 위에 오뎅이 가득.


유부들 퍼뜨리면 이렇게.

미나리로 싼 유부.



 유부전골 가게 인근에는 사람들이 쭉 서서 뭔가를 먹고 있다. 단팥죽 포장마차 6개가 나란히 붙어 있기 때문. 이 또한 시장의 명물 중 명물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대부분의 고객이 한 그릇을 달랑 비운다. 36년째 이곳을 지키는 김복순(71·051-244-2657) 씨는 올해부터 며느리와 함께 손님을 맞고 있다. 조각낸 인절미를 넣고 금방 끓인 단팥죽(2500원)은 어머니의 손맛 그대로다. 무한 리필되며 입가심으로 식혜도 서비스로 준다. 포장도 해주고 택배주문도 받는다.

단팥죽 포장마차 6개가 나란히.

36년째 단팥죽을 쑤는 김복순 할머니.


토종호박을 써 깊은 맛이 난다고.

'2대째 소문낙 죽집'의 강춘자 대표.


 옛 사거리시장 쪽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골목도 빠뜨리지 말자. 먹을 것이 변변찮던 피란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준 부평시장의 산 역사가 아니던가. 한때 일곱 집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두 집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대째 소문난 죽집'(051-244-7485)이 원조다. 한국전쟁 때부터 운영하던 윤경순 할머니의 며느리 강춘자(56) 씨가 26년째 죽을 끓이고 있다. 윤 할머니는 2년 전 96세로 작고했다 한다.
 강 씨는 "죽도 시류에 따라 밀려나고 있지만 힘닿는 데까지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호박죽은 토종을 써 색깔만 좋은 단호박보다 향기도 좋고 깊은 맛이 있다"며 "죽의 진수를 맛보려면 이곳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호박 녹두 팥 깨죽(이상 3000원)이 있으며 전복죽(3만 원)은 주문받으면 바로 끓여준다.

'밀양집'의 주방장 할머니.

올해 89세인 박재쇠 할아버지.


'밀양집'의 돼지국밥.


 죽골목 인근에는 죽집 못지않게 오래된 돼지국밥집이 4개 모여 있다. 원조집은 '밀양집'(051-245-5137). 한국전쟁 때부터 지금까지 박재쇠(89) 할아버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부산서 오래된 돼지국밥일 듯싶다.
 20년 전 작고한 할머니 대신 김순분(60) 주방장이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사골을 끓인 비교적 맑은 국물은 오랜 전통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다. 평범함 속의 위대함이랄까. 수십 년 단골이 멀리서 찾아오는 이유이다. 인근의 남해집 양산집 명산집도 20~40년 된 돼지국밥집이다.

 40년 전통의 '원조 소문난 김밥집'(051-246-0443)도 아주 유명하다. '김밥이 맛있어봤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우엉 유부 시금치(여름엔 부추) 당근 단무지 등 5가지 재료의 오묘한 조합은 기대 이상이다. 1줄 1500원.
 
 ■ 부평시장의 알려지지 않은 맛집

고기가 쫄깃하고 잡내도 없다.

국물까지 맛있는 냉채족발.



 부평시장에는 맛은 천하일미지만 유명세에 밀려 있는 숨은 맛집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13년 된 '장수 왕 족발전문집'(051-247-3100). 냉채족발(대 3만2000, 특 3만7000원)이 아주 맛있다. 부평동에는 한성족발 한양족발 오륙도족발 등으로 대표되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족발골목이 있다. 하지만 맛이 더 좋고 가격이 절반이라면 어딜 가겠는가. 이미 일본인들 사이에선 소문이 나 쇼핑 후 단체로 찾는다고 한다.

 우선 고기 자체가 씹으면 씹을수록 쫄깃하고 고소하다. 돼지 냄새도 없다. 냉채족발 소스의 경우 과일 야채 해파리 겨자 와사비 등 17가지가 골고루 들어가 뒷맛이 깔끔하다. 해서 손님들은 국물을 다 마시거나 밥도 말아먹을 정도. 단점이라면 포장이나 배달만 된다는 점. 대신 단체 모임의 경우 출장도 가능하다.

생닭으로 즉석에서 반죽.

양은 많고, 가격은 싸고.


프라이드 치킨과 생맥주 한 잔.

양념 통닭. 양도 아주 많다.


 30년 전통의 '거인통닭'(051-246-6079)은 튀김 닭이 얼마만큼 맛있는지를 보여주며 20, 30대 젊은층을 시장으로 유인하는 효자 가게. 맛의 비결을 묻는 말에 이원재(62) 대표는 "생닭을 쓰며, 옥수수 전분 등 7가지로 직접 만든 파우더와 양파 마늘 등 8가지가 들어가는 액체양념으로 즉석에서 반죽한 후 2번 튀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닭 따로 튀김 옷 따로 놀지 않고 육즙이 살아 있다. 창원 김해 등지에서 일부러 찾아오며 심지어 그 맛을 못 잊어 서울서 택배로 보내달라는 괴짜손님도 있다고. 양은 기존 프렌차이즈 닭보다 1.4배쯤 많고 가격은 저렴하다. 프라이드 1만4000, 양념 1만5000원.

 부평시장에는 부산서 유일하게 가자미식해를 파는 노점 두 곳이 나란히 있다. '원조 함흥식해 전문점'(010-9338-7705)의 김기연(아래 오른쪽) 할머니와 '전통 함흥식해'(010-5023-6269)의 김정수(아래 왼쪽) 할머니가 바로 그들. 두 분은 이북 출신의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은 며느리와 이북에서 피란온 사람에게 각각 배웠단다. 맛은 실향민들이 인정, 부산을 비롯하여 전국에 각각 있다. 1㎏ 1만5000원. 택배도 한다.

 이밖에 선식과 어묵도 부평시장이 원조다. 대보선식(051-246-6784)은 전국 최초로 선식을 개발해 보급했으며, 어묵공장도 해방 후 부평시장에서 가장 먼저 생산했다. 환공, 부산, 미도어묵 등이 대표 선수다.

어묵 대표선수 환공어묵.

국내 선식의 원조 대보선식.


김종열 부평시장상인회장
  
"독특한 전통 먹을거리 널리 알려야죠" 


부산 최초의 전통시장인 부평시장은 최근 시장 이름 앞에 또 하나의 '최초'라는 기록을 만들었다. 상인회가 최근 전국 1572개의 전통시장 중 최초로 전체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선제를 통해 상인회장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통상 상인회 또는 번영회 회장은 이사들의 호선으로 결정된다.


 상인회 방기원 사무국장은 "상인들의 시장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며 "투표율이 예상보다 높은 76%에 달했다"고 전했다.

 신임 김종열(사진) 상인회장은 올해 46세로 역대 최연소 상인회장. 이를 의식한 듯 김 회장은 "앞으로의 시장 정책은 상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투명하게 운영할 것이며, 이에 따르는 외풍은 회장이 책임지고 막아내겠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김 회장은 "부평시장에는 우리 시장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먹을거리, 예를 들면 비빔당면이나 유부전골 어묵 가자미식해 선식 등이 특히 많다"며 "재임 동안 이를 널리 알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부평시장에서 카펫점을 운영하는 김 회장은 외할머니에 이어 지금도 어머니가 이불점을 운영하고 있는 전형적인 부평시장 가족이다.


- 부평시장 맛집 관련 글
부평시장 (1)편 입맛 살려주는 '맛집 천국' 부평시장 http://hung.kookje.co.kr/539

 내 친구 현수의 옛날 집 주소는 부산 중구 부평동 1가 1번지 1통1반.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는 이유는 숫자의 마력 때문이리라. 주소가 재밌어 위치를 물었더니 그는 부평동시장 입구라고 했다. 감이 안 잡힌 친구들이 재차 묻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국제시장 근처라고 했다. 그제야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생 시절 기자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부평시장엘 이따금 갔다. 당시 어머니는 이곳을 사거리시장이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버스 타는 재미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전통시장이 겉으론 오십보백보지만 이곳을 떠올리면 그래도 오롯이 기억에 남는 곳이 한 곳 있다. 바로 깡통골목이다. 정말 신기했다. 지금과 달리 점포는 좁았지만 진열된 물건들이 죄다 영어나 일어로 적혀 있었다. 지금은 지천으로 널린 캔 콜라나 바나나도 이곳 아니면 살 수 없는 시기였다. 운이 좋아 그날 미제 단추초콜릿이라도 하나 얻었을 땐 얼마나 기뻤던지.

깡통시장.

온통 외제물건이다.

 
 부평시장은 1910년 부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전통시장이다. 전국에선 두 번째라 당시 제2호 시장이라 불렸다. 한일병합 직후 일본은 그들의 생활근거지 주변이었던 중구 부평동에 생필품 시장을 한일합작으로 열었다. 그게 부평시장의 시초였다. 5년 뒤엔 부평정(町)시장으로 개명해 시설도 확충했다. 참고로 부산진시장은 1914년, 부전시장은 1941년에야 생겼다. 국제시장은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비축 전시물자를 한꺼번에 내놓으며 형성된 일종의 '도떼기시장'이다.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부평시장을 부평동시장이나  깡통시장 혹은 사거리시장이라 부른다. 이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편. 일부는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위치한 국제시장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알고 보니 그렇게 된 연유가 있었다. 부평시장은 비록 부산 최초의 전통시장이나 등록일을 기준으로 보면 막내다. 2005년 10월에야 부평동 1가의 깡통시장과 먹을거리 위주의 2가의 사거리시장을 합쳐 부평시장으로 중구청에 정식 등록했기 때문이다. '부평동시장'이 아닌 '부평시장'이라고 '동(洞)' 자를 뺀 것은 동네시장 이미지를 없애기 위함이란다.


 부평시장 상인회 김종열 회장은 "역설적이게도 상인들이 번영회나 상인회를 만들어 이름을 널리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오랫동안 장사가 잘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전만 못하지만 지금도 목 좋은 점포의 권리금은 억대를 호가한다.
 "부평시장은 제수용 과일이나 생선도 최상품만 팔았어요. 콩나물도 다듬어 팔았으니까요. 주 고객이 옛 법원 주변의 수준 높은 손님이었거든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장을 찾는 고객의 객단가도 백화점의 그것과 맞먹었어요."
 
 부평시장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먹을거리, 맛집이다.

 주요 품목이 어묵 해산물 육고기류 청과물 등 생필품 위주다 보니 이곳 아니면 먹을 수 없는, 부산만의 독특한 먹을거리가 적지 않다. 비빔당면 유부전골 냉채족발이 그렇고 돼지국밥과 죽집은 부산서 가장 오래됐다. 어묵과 선식은 이곳이 전국 원조이고 치킨집은 떠오르는 신흥 강호이다. '길거리아' 단팥죽은 사시사철 맛볼 수 있다. 고객의 상당수가 사실은 이런 먹을거리 때문에 찾는다고 고백할 정도다. 통상 다른 전통시장에서 유명 맛집은 많아야 두세 곳에 불과하지만 부평시장은 열 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란다. 이쯤 되면 가히 '맛집 천국'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부평시장으로 달려가 숨은 맛집을 둘러봤다.

           부산 부평시장이 원조인 비빔당면. 보는 거와 달리 아주 맛있다.
           당면과 갖은 야채를 넣고 미나리로 싼 유부전골. 역시 부평시장이 원조다.

          인근 부평동 족발골목의 냉채족발보다 훨씬 맛있고 가격은 절반인 부평시장의 냉채족발.


- 부평시장 맛집 관련 글
부평시장 (2)편 "뜨끈뜨끈한 부평시장통 인심 한 그릇 하시구려" http://hung.kookje.co.kr/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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