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봐도 일본가옥거리임을 알 수 있는 구룡포 적산가옥 거리.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로 과메기뿐 아니라 대게 오징어의 국내 생산량 1위인 포항 구룡포항은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후
이듬해 일본 자국 어민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구룡포읍과 포항시에 따르면 오까야마, 가가와, 아이찌 등 세토나까이 주변 일대 어민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수산업이 포화상태여서 어민들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아주 심해 뭔가 돌파구가 필요할 때였다. 무엇보다 동해 구룡포의 어족자원이 무궁무진했던 것이 집단 이주를 가능케한 요인이었다.

 여기에 일본의 어선들은 동력선이어서 돛단배를 이용하는 우리 어업기술에 비해 무려 100년 정도 앞서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 어민들이 이주해야 될 필요충분조건이 모두 갖춰진 셈이었다.

30여년 전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 찌그러져 가는 여인숙 간판.



 100년이 지난 지금도 구룡포에는 당시의 일본 어민들이 집단 이주해 살았던 그 시절의 일본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적산(敵産)가옥거리, 다시말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장안동 골목을 천천히 걷노라면 영화속 한 장면처럼 아직도 일본풍이 물씬 풍겨난다.

 아무 정보 없이 구룡포항을 찾는다면 이 적산가옥 거리는 찾기 어렵다. 구룡포항 내 도로를 건너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쉽게 만난다. 그렇지 않다면 구룡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원래 지금의 구룡포항내 공유지와 도로는 오래전 매립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 적산가옥거리가 바다와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한눈에 일본풍이 느껴지는 이 거리는 오래전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 거리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시점과 종점의 거리는 대략 470m. 일직선이 아니라 꼬불꼬불하게 약간 굽어 있어 운치가 있다.

 가옥은 대략 50가구. 절반 가까이 빈 집이다. 빈 집에 들어가보면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창문이나 문틀을 자세히 보면 눈길 끄는 문양이 있다. 동그란 구멍이 있는가 하면 선사시대의 알 수 없는 무늬가 아주 세실하게 조각돼 있다.

 동행한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그들도 사람인지라 아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러한 문양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동그란 구멍과 그 옆으로 그으진 선을 두고 서 부소장은 일본의 마음에 항상 있는 최고봉인 후지산의 정상과 천지못이라고 설명했다. 지그재그로 그려진 것은 고향인 일본의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라고 덧붙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일본풍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골목을 걷다 보면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 속에 자리잡은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론 이층 목조가옥 창문이 열리면서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인네가 '곤니치와'하고 인사를 건넬 것 같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이 거리는 1930년대 번성했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며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들러봐야 할 공간"이라고 말했다.

 현재 결정된 계획은 없지만 포항시가 현재 이 적산가옥거리를 일본인 관광객들을 겨냥한 일본인 거리를 조성하려고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 부소장은 "왜색풍이 넘치는 일본인 거리보다는 차라리 이 거리를 적절히 보존하면서 일본의 만행과 당시의 우리 삶을 아우르는 가칭 근대역사 거리로 후대에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잠시 안을 들여다봤다. 빨래가 널려 있지만 흡사 난민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는 빈집.
적산가옥 거리 중간중간에는 우리네 집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풍이다.

적산가옥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이 새겨 놓은 다양한 문양이 눈길을 끈다.

양지바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듯하다.
이 적산가옥 거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깔끔한 집이어서 물어보니 당시 약국집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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