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2>뉴욕-다놀드 휄드먼 

-포병부대 배속 1년 한국 머물며 / 대구·임진강·원산 전투 등 참가
- 수류탄 맞아 부상, 힘겨운 고통 / 전쟁 후 트라우마로 한동안 투병
- 한인교회서 자원봉사 활동하다 / -집 없어 오갈 데 없는 가족 만나 
- 25년간 자기집에서 생활하게 해 / 어려운 한인보면 주저없이 도와


6·25 참전용사 다놀드 휄드먼 씨가 성조기와 태극기, 군부대 마크, 각종 훈장 및 뱃지 등이 담긴 액자를 배경으로 자신의 거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서민아파트에는 80대의 한국전 참전용사와 한국인 모녀 3명 등 총 4명이 함께 살고 있다. 철저한 개인주의 문화인 미국에서 백인 노인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인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사연은 뭘까.   

 거동이 꽤 불편한 다놀드 휄드먼(86) 씨는 '인연'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의 전쟁에 참전한 거나 25년 전 정말 우연히 브루클린의 한 한인교회에서 자원봉사로 영어를 가르치게 된 것을 두고 그는 인연 치고는 묘한 인연이라 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두 딸의 엄마 민현숙(56) 씨도 한인교회 영어교실의 학생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가르쳤는데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런 학생이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지병으로 앓던 남편이 세상을 떠 싼 월셋집을 찾느라 수업에 빠졌다는 것이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휄드먼 씨는 오갈 데 없는 이 가족에게 작은 방 한 칸을 내줄 테니 들어오라고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거저였다.

 민 씨의 사정은 정말 딱했다. 영주권이 없어 비싼 로스쿨 학비를 내야 했던 첫째 아이 때문에 집세와 교육비가 큰 부담이었다. 휄드먼 씨는 "싼 집을 못 구할 경우 노숙자쉼터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듣고는 죽기 전 자신이 정말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로스쿨 학비도 두 번이나 빌려줬다.

 민 씨네의 불행은 계속됐다. 로스쿨을 다니던 첫째 딸에게 만 21세까지 끝내 영주권이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이민법에 따르면 이럴 경우 추방돼 10년간 미국에 들어올 수 없다. 슬픔에 잠긴 민 씨 가족을 위해 휄드먼 씨는 뉴욕의 민주·공화 양당 상원의원과 이민전문변호사를 만나는 등 마치 자신의 문제인 양 최선을 다해 결국 일종의 사면인 '웨이버'를 받아 영주권을 받도록 했다. 덕분에 첫째(현재 32세)는 2년 만에 복학, 로스쿨을 졸업한 후 현재 기업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영주권이 있는 둘째 딸은 올 여름 로스쿨을 졸업한다.

 인터뷰 도중 휄드먼 씨는 편지 한 장을 내놓았다. 민 씨가 기자에게 한글로 쓴 편지였다.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휄드먼 씨가 대가 없이 저희 가족을 도와주신 것처럼 저희 가족도 앞으로 우리 사회와 이웃을 위해 성심성의껏 도우면서 살겠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입니다."

 휄드먼 씨의 한국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아파트 인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 한국인 부부 중 남편이 중병에 걸려 부인이 홀로 생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휄드먼 씨는 그 집의 12세 딸과 4세 아들을 방과 후나 주말이면 놀이공원이나 박물관 등에 함께 다니며 건사했다. 고맙게도 티 없이 잘 자란 딸 아이 박혜림(22) 씨는 어느덧 간호사가 됐다. 그는 아빠의 거동이 불편하니 결혼식 때 휄드먼 할아버지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부탁할 예정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뇐단다.


 화두를 한국전쟁으로 돌렸다. 거실 한 쪽 벽면에는 태극기와 성조기, 군부대 마크, 각종 훈장 및 뱃지, 전쟁 당시 군복 입은 사진이 들은 액자가 걸려 있다. '퍼플 하트'(Purple Heart·전쟁 중 부상 당한 군인에게 주는 훈장)라 적힌 모자와 티셔츠를 입은 그는 빛바랜 앨범과 흑백사진, 그리고 한반도 지도를 꺼내 기자에게 설명했다. 1950년 11월부터 1년간 참전한 그는 미 1기병사단 포병으로 부산에서 대구, 임진강, 원산까지 전진하면서 여기저기서 싸웠다. 수원 지평리전투에선 수류탄 파편에 머리와 손을 다쳐 일본으로 후송됐다. 치료 후 귀국도 가능했지만 그는 전우들이 있는 부대로 복귀했다.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실 그는 대학 및 결혼생활이 평탄치 못했다. 학업은 입학 후 6개월 만에 중단했고, 10년간의 결혼생활도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이후 재결합을 했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61세 때 뒤늦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판정을 받고는 그간 그럭저럭 꾸려오던 사업체를 아들 둘에게 물려주고 정신병원에서 치료에 전념했다. 지금은 회복돼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참전이 그의 삶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코리아나 코리안에 대해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솔직히 전쟁 중 너무나 끔찍한 고통을 많이 받았지만 동시에 군인도 아닌 평범한 코리안들도 이에 못지않게 힘들었다. 5년 전 한국정부가 초청해 코리아를 다녀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발전해 전우들과 함께 많은 눈물을 흘렸다. 고마웠다. 앞으로도 나는 미국 내 한인들과 서로 도우며 친하게 살고 싶다. 이런 인연도 사실 없지 않은가."


                  6.25당시의 다놀드 휄드먼 병장

빛바랜 앨범과 당시 지도와 자료 등을 꺼내 보이며 설명을 하고 있는 다놀드 펠드먼 씨.

 

# "조국 지켜줘 감사합니다" 뉴욕성결교회의 남다른 보은

- 6·25 참전 용사·가족에 회의실 제공 / 성금 모아 한국방문 주선, 식사대접


지난달 14일 뉴욕성결교회에서 '코리안 베테랑스홀' 명명식이 열려 교회 관계자들과 한국전 참전용사 및 그 가족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미국 뉴욕 최남단 스태튼 아일랜드에 위치한 뉴욕성결교회(담임목사 장석진)에서 지난달 14일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교회는 이날 지하 친교실에서 스태튼 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을 초청, 만찬을 베풀고 친교실을 '코리안 베테랑스홀(Korean Veterans Hall)'로 하는 명명식을 가졌다. 이를 위해 홀 정면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그 아래에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 해병대 공군 해군 등 6개 군의 대형 기와 기념사진을 걸어놓았다.

 이 홀은 앞으로 스태튼 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회가 매달 한 번 모여 회의를 열고 업무를 보는 데 사용된다. 참전용사회는 원래 별도의 사무실이 있었지만 문제가 생겨 수 년 전부터 이 교회 친교실을 회의장소로 사용해왔다. 

 교회에선 참전용사들을 위해 매년 식사를 대접했고, 2012년엔 그들을 위해 자선음악회를 열어 모금된 성금으로 참전용사 4명을 한국에 다녀오도록 배려했다.

 이날 한국전참전용사회 조지 파슨스(86)회장은 한국말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후 "한인교회가 참전용사들을 잊지 않고 여러 모로 따뜻하게 도움을 줘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뉴욕성결교회 장석진 목사는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참전용사들이 80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50명 정도"라며 "이역만리 이름도 모르는 조그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이 모두 돌아가시더라도 그들의 가족들과 우의를 다지며 이 모임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스탠튼 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회'의 정식 이름은 'CPL Allan Kivlehan Chapter'. 우리 말로 하자면 '상병 앨런 키블리한 모임'. 앨런 키블리한은 스태튼 아일랜드 출신의 참전용사 중 맨 먼저 전사한 사병이다. 8남매 중 첫째인 그의 여동생은 오빠를 대신해 이 모임에 참석한다. 참전용사회 임명옥 연락간사는 "지난해 10월 부산유엔공원에서 앨런 키블리한의 이름을 확인한 후 사진을 찍어 동생들에게 보여줬더니 몹시 기쁘했다"고 말했다.

 이날 관계당국의 협조로 교회 앞 거리명도 기존 이름 대신 'Korean War Veterans Way'로 바뀌었다.

 이날 명명식에 참석한 참전용사 팻 스칼파토(85) 씨는 "이미 반세기가 지난 한국전 참전을 두고 한인들이 계속 감동을 줘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1953년 6월 수류탄 파편에 맞아 2주간 치료 후 복귀, 휴전일인 1953년 7월 27일엔 38선 인근에 있었다는 그는 15년 전부터 지역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잊을 수 없는 한국전쟁'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해엔 상반기 4000명, 하반기 2000명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5년 전까지는 차로 1시간30분 걸리는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에 강의를 나갔지만 이제는 운전이 힘들어 그만뒀다고 했다.

전쟁 당시 동상에 걸려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는 루이스 타이론(85) 씨는 "참전용사들의 한국사랑은 한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며 "목숨 걸고 싸웠던 나라가 기적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면 요즘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1> 프롤로그

- 한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 /  인천상륙작전·장진호 전투 등
- 시간 흘러도 그날의 기억 생생 /  자유민주주의 지켜냈다 자부심

- 실패한 전쟁 평가에 가슴 아파 /  책·영화로 한국전 알리기 열정
- 당시 폐허가 된 서울 최근 방문 /  상전벽해 발전상에 눈물 흘려


미국 플로리다 템파 시에 위치한 '참전용사 추모공원'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6·25 참전용사 포드 머독(왼쪽) 씨와 에디 고 씨. 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 플로리다 주 정부 예산과 한인회의 기부금 등으로 뒤늦게 조성됐다.


 미국 플로리다의 중서부 해안도시 템파. 이곳 템파의 다운타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는 '참전용사 추모공원'이 있다. 아름드리 수목들 사이로 헬기와 전차 등이 곳곳에 전시돼 있고, 조그만 호수 주변엔 벤치가 조성돼 있는 이곳에는 한국의 6·25전쟁을 비롯 베트남전, 1·2차 세계대전 등 미국이 치른 12개 전쟁의 참전용사비가 서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에야 뒤늦게 세워졌다.

 이곳에서 만난 포드 머독(83) 씨. 6·25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그는 중사 계급장이 선명한 검은색 예복을 입고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맞아주었다. 보청기에 돋보기 안경, 주름 사이로 검버섯이 곳곳에 핀 바싹 마른 얼굴이었지만 대화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그는 책을 한 권 꺼내 보여주었다. '더 달라스 타임즈' 기자 출신의 빌 슬론이 2009년 쓴 'The Darkest Summer-Pusan and Inchon 1950'이었다. 탱크 위에 앉아 전우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책 속의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 땅을 밟은 후 한강철교를 건너 4일 만에 서울로 입성한 얘기부터 전봇대 위에 올라 화염병을 탱크에 던지며 저항하던 인민군, 동상에 걸려 발톱이 뽑히고 총탄이 가슴에 박혔지만 기적처럼 살아난 사실 등 당시의 절박하고도 치열했던 상황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설명했다.

 2010년 한국을 방문한 그는 전쟁 당시 폐허가 된 서울이 상전벽해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곤 눈물을 흘렸다. 그는 "목숨 바쳐 참전한 한국전쟁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였지만 그동안 미국 정부는 한국참전용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다행히 최근들어 주 정부와 한인회가 늦었지만 함께 참전용사 추모비를 세우고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어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지속해온 참전용사들의 한국에 대한 짝사랑이 최근 들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초신 퓨'와 '굳세어라 금순아'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에 앉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헤어질 무렵 머독 씨의 차 후미에 'THE CHOSHIN FEW / NOVEMBER-1950-DECEMBER / CHOSHIN RESERVOIR·KOREA'라 적힌 번호판 크기의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초신(CHOSHIN)'은 함경남도 장진(長津)의 일본식 독음. 6·25 당시 미군은 일본이 제작한 지도를 그대로 사용해 그들은 '장진'을 그렇게 불렀다. 장진호(湖)는 장진강에 발전용 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이다.  














포드 머독 씨의 차 후미에 '초신 퓨'라 적힌 스티커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 않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승기를 잡은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이 "성탄절을 고향에서 맞게 해 주겠다"고 속도 경쟁을 부추기자 미군들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원산항으로 상륙한 미 해병 1사단 1만2000명은 서부전선에서 북진 중인 미 8군과 압록강에서 합류해 전쟁을 끝낼 계획으로 장진호 계곡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하지만 개마고원 입구 장진호 주변에서 12만 명의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놓였다. 해발 2000m대의 고봉준령과 협곡, 그리고 영하 30도를 밑도는 한파 속에서 미 해병 1사단은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간 중공군의 겹봉쇄망을 뚫고 흥남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동시에 방어선을 구축, 피란민과 병력의 흥남 탈출을 위한 시간을 벌어준다.

 영도다리와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경인 '바람 찬 흥남부두'는 이때 퇴각한 병력 10만여 명과 민간인 10만여 명이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193척의 군함을 타고 탈출하는 과정을 묘사한 노래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2500여 명 사망, 2000명 실종, 5000명이 부상당했으며, 중공군은 사망·부상자가 4만 명을 넘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전사(戰史)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으며, 당시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했다. '초신 퓨(CHOSHIN FEW)'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몇 안 되는 전우들이 1983년 만든 모임 이름이다. 이날 포드 머독 씨와 동행한 한국 출신의 또 다른 '초신 퓨' 회원인 에디 고 씨는 "'초신 퓨' 회원들은 한국전쟁 참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우리는 6·25와 장진호 전투 그리고 코리아를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장진호 전투 등 6·25 전쟁을 잠시 잊은 사이 미국은 2000년 워싱턴DC 해군기념광장에서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초신 퓨' 6000여 회원 대부분이 이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포드 머독 씨는 "'초신 퓨' 회원들 대부분이 지금은 80대 이상의 고령이라 차츰 그 수가 줄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초신 퓨' 회원들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 분야에서 애쓰고 있다. 장진호 전투에 소총수로 참전한 마틴 러스 씨는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웬 씨는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라는 책을 썼다. 미 지명위원회는 2012년 알래스카의 한 무명봉을 '초신 퓨 산(Mount Chosin Few)'으로, 미 해군도 순양함 한 척을 '초신 퓨'로 공식 명명했다. 2년 전 개봉된 3D 최초의 전쟁영화 '17 Days of Winter'도 장진호 전투가 배경이다. 시간이 흘러도 미국에선 한국전쟁이 잊히지 않고 역사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 바쳐 참전… 꿈에도 못 잊어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에서 만난 참전용사 덴질 밧슨(86) 씨는 "코리아가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했지만 그곳에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숨걸고 싸웠다"며 "만일 한국전쟁이 또 일어난다 해도 다시 나가 싸우겠다"고 말했다. 당시 미 3사단에서 리틀 지브롤타, 피의 능선 등에서 싸운 그는 귀국 후 한국전쟁을 미국에선 '치안 활동' 내지 '내전' 정도로 폄하하는 것을 보고는 6·25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다큐 형식의 책(Korea, We Called it War)을 펴냈다. 이 책을 토대로 지역방송에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으며, 미주리 주립대에선 전쟁사 관련 교재로도 채택돼 학생들에게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만난 참전용사 다놀드 훼드먼(86) 씨는 한인교회에서 자원봉사로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참전 후 정신적 외상장애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길바닥에 내려앉게 될 딱한 사정의 한인 가족들을 조건없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와 함께 살고 있다. 

 미국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빛바랜 수첩과 앨범, 지도 등 전쟁 당시의 자료들을 신줏단지 모시듯했다. 집착일까.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한국사랑의 외적 표현이지 않을까.

 그들은 이기지 못한 실패한 전쟁이라고 폄하되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전쟁의 참전용사처럼 환영받지 못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들은 전쟁 발발 64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을 잊지 못하고 고향에서나마 6·25와 코리아를 가슴에 묻고 널리 알리고 있었다.

 본지는 '6·25 참전용사의 한국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을 찾아 전쟁 당시의 절박한 상황과 전역 후 코리아에 대한 짝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함께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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