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생 102주년 '청마 유치환'
               발자취를 더듬다

경남여고 교장 시절의 청마 유치환.

옛 모자상 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한 청마. 함께 사진을 찍은 학생들은 졸업후 모교 교장을 역임했던 백월아(왼쪽) 씨와 동기 김영화 씨다.


 
1963년 7월 4일 오전. 부산의 한 여자고등학교 전체가 술렁거렸다. 수업은 하지 않고 전교생이 교문 앞에서 학교 건물까지 두 줄로 도열한 채 누군가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입은 모두 귀에 걸려 있었다. 그야말로 '오매불망', '학수고대', '희불자승'이었다. 대체 누구기에 이 감수성 예민한 갈래머리 여학생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을까. 청마 유치환(1908~1967)이었다. 그 무대는 경남여고.

 그가 교장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이날 오전 입소문을 타면서 학교 수업은 순식간에 마비됐다. 당시 남용강(65) 학생회장의 회상 한 토막. "'깃발' '바위' 등의 시를 애송하며 마음속으로 연정을 품었던 청마 선생이 부임한다는 소식은 일순간 학교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기에 충분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으로서 뿌듯했고 동시에 대단한 행운이었죠."

 유난히 하늘이 파랬던 다음 날 상견례를 겸한 조회시간. 전교생과 교사들은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 당대 최고 시인이 어떤 화두를 던질지 궁금했다. 모든 시선은 그의 입에 모아졌다.  
  
"여자는 꽃으로도 때릴 수 없습니다. 하물며 여러분 같이 어여쁜 소녀들에게…." 뜨거운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상상도 못했던 파격 그 자체였다. "과연 청마였다." 교무실과 교실의 반응은 그랬다.

경남여고 교장실에서의 청마 유치환.
1963년 경남여고 가을 소풍 때 금정산 산성 앞에서 포즈를 취한 청마. 사진은 경남여고 35기 앨범에서 발채.

 청마의 파격적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교훈도 바꿨다. 당시 교훈은 1958년 제정된 '근검하고 관대하라/봉공정신을 가져라/의뢰심을 갖지 말라'. 여자고등학교 교훈으로는 누가 봐도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그가 내놓은 교훈은. '억세고 슬기로운 겨레는/오직 어엿한 모성에서 이루어지나니/이 커다란 자각과 자랑에서/우리는 스스로를 닦는다'. 독특하게 '겨레의 밭'이라는 제목도 있었다. 짤막한 한 편의 시 형식을 띤 것으로, 청마가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청마다움'이 묻어난다.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교훈은 여성을 한 인격체 대신 '모성'이나 '밭'을 너무 강조했다는 지적이 제기될 수 있다. 이웃 부산고 학생들이 "그럼 우린 '겨레의 씨'다"고 우겨댄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 한 번 더 곱씹어 보면 겨레의 기틀로서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되자는 의미라는 것이 학교 측이나 졸업생들의 설명이다.
   
 이 교훈에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참여정부 때인 지난 2000년 교육부는 남녀차별금지법에 의거해 전국 여자중·고교의 교훈을 조사해 '순결' '몸매' '부덕(婦德)' 등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줄 수 있는 단어가 들어 있는 교훈을 바꾸라는 지시를 일선 시교육청을 통해 하달했다. 경남여고도 그 유탄을 피하지 못했다.

 모교 출신 교사(교장까지 역임)로 당시 학생부장 겸 동창회 업무를 맡았던 백월아(65) 씨의 이에 대한 후일담. "교육부나 시교육청조차 청마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말초적 교훈을 지닌 학교와 함께 일괄적으로 공문을 보낸 사실에 대해 동창회를 비롯한 학교 전체가 분개했지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시교육청을 설득시켜 지금까지 '겨레의 밭'이라는 교훈이 살아남게 됐지요."

지난 23일은 청마 탄생 102주년 기념일. 언론의 문화면조차 그 흔한 기사 한 꼭지 싣지 않았다. 씁쓸했다. 세월의 무상함인가.

 보다 못한 게으른 무지랭이 기자가 청마의 발자취를 뒤늦게 더듬었다.

 자료를 찾던 중 청마 제자 문덕수의 '청마 유치환 평전'에 언급된 글귀가 눈길을 확 끌었다. '1958년 가을 경주고 제자들과 술자리를 함께했다. 한 학생이 교장인 청마에게 당돌한 질문을 하나 했다. "선생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청마가 대답했다. "사랑이란 어처구니없는 것!"

탄생 102주년 청마의 발자취 후속편(탄생 102주년 청마의 발자취, 부산 통영 거제를 둘러보다)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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