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맛 - 구포국수

-후루루룩~ 총총 썬 '땡초'의 마력은 덤
- 잔치·서민음식 대명사
- 일제 강점기부터 구포역 곡물하치장 덕 제분·제면업 발달
- 가내공장 30곳 성황…옥상·마당 곳곳 면 말리는 진풍경도
- 현재 구포엔 가내공장 1곳 뿐
- 진한 멸치육수에 말아 단무지채 부추 고명 올려

 국수는 서민의 음식이다. 장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마솥에서 퍼올린 육수에 만 국수 한 그릇이면 시름도 잠시 잊는다. 또 잔치음식을 대변한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에게 "언제 국수 먹여줄래"라고 묻는 것은 국수가 바로 잔치음식의 대명사로 굳어졌음을 의미한다.

불가에서는 국수를 승소(僧笑)라 부른다. 스님들의 미소라는 의미로, 늘 밥만 먹는 스님들의 유일한 별미가 바로 국수였기 때문에 국수 생각만 하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해서 붙여진 애칭이다.

그러고 보니 국수는 오랫동안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먹을거리였다. 해서, 지방마다 향토색 짙은 국수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정선 콧등치기국수, 제주 고기국수, 담양 선지국수 등등. 하나같이 우리네 삶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

부산에는 구포국수가 있다. 타 지역의 여느 국수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지명도는 꽤 높은 편이다. 6·25한국전쟁 기간 푸짐한 양과 쫄깃한 면발로 많은 피란민의 배고픔을 달래줘 깊은 인상을 심어준 때문이다. 구포국수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지난 1980년대까지 부산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했지만 1990년대부터 식문화의 급격한 변화와 대기업의 진출로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부산시 홈페이지의 '부산의 별미' 코너에도 이제 구포국수라는 음식은 찾아볼 수 없다.

관의 지원도 끊겨…명맥만 겨우 유지

 왜 구포국수인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구포역 인근엔 곡물하치장이 있어 제분업과 제면업이 발달했다. 남선곡산과 영남제분이 대표적 공장. 구포 일대는 또 낙동강 하류의 염분 섞인 바다 바람이 연신 불어대 국수를 자연 건조시키기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구포장을 끼고 원료 구입의 용이함과 자연 조건 등을 두루 갖춘 이곳은 국수공장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셈. 자연스럽게 가내 국수공장이 한 두 곳 들어섰고, 이러한 공장이 차츰 잘 되니까 여러 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름은 자연스럽게 지명 이름을 따 구포국수로 명명됐다.

구포에서 국수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40년대 초반. 구포시장에서 '이가네 구포국수'를 운영하는 이원화(49) 대표는 "선친으로부터 구포국수 공장이 처음 만들어진 시점은 대략 1940년대 초반이었으며, 우리 집은 1945년 국수공장을 처음 시작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구포에서 국수공장이 가장 많았을 때가 1960~70년대로 아마 30여 곳은 됐을 것"이라며 "당시에는 대부분 가내공장이어서 옥상이나 마당에서 국수를 말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구포국수 공장은 이후 1980년대 들어 기울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부터 고임금과 대기업의 진출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부산 북구 구포 일대의 구포국수공장은 구포연합식품 단 하나뿐. 하지만 구포국수라는 이름으로 국수를 만드는 공장은 경남 김해 등 부산 외곽에 몇 곳 더 있다. 김해에서 구포국수를 만드는 업자들은 오래 전 구포에서 국수를 만든 사람이라 제품에선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구포국수라는 명칭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지난 1988년 모 국수공장이 상표등록을 해 다른 업자들이 명칭 사용을 못하게 되자 소송을 걸었다. 결국 재판부는 '구포국수는 구포의 명물로 역사성이 있는 명칭이므로 단독 소유할 수 없다'고 판시해 구포국수는 만인의 상표가 돼버렸다.

부산 동래구청이 동래파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애쓰듯 북구청도 구포국수와 관련,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 지금으로선 아쉽게도 없다.

북구청은 1998년 구포국수축제추진위원회를 구성, 제1회 구포국수 축제를 연다고 널리 알렸지만 결국 예산 문제로 무산된 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북구청 관계자는 "구포국수는 이제 지명만 구포가 들어갈 뿐 실제론 북구만의 특화된 상품이 아니라 부산 전역에 널리 분포돼 있는 데다 예산마저 부족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쫀득쫀득 씹히는 면발과 진한 육수의 그맛

부산엔 구포국수집이 제법 있지만 구포국수를 제대로 하는 집은 몇 집 안 된다.

남산동 구포촌국수. 육수는 직접 부어 먹는다.

현재 금정구 남산동 외대운동장 입구 맞은편 '구포촌국수'가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집이다. 그래서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다. 구포촌국수(051-515-1751)의 김향이(47) 대표는 "김해 '대동할매국수'를 하는 그 할매와 비슷한 시기에 인근에서 30년 동안 구포국수를 삶은 할매가 저의 친할머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국수는 김해 주촌의 한 구포국수 공장에서 특별 주문한 것만 사용한다. 좋은 밀가루를 사용해 가격은 일반 제품의 배. 멸치는 보름에만 잡혀 특히 맛있다는 오사리멸치만 쓴다.

육수에는 비법이 있었다. 그냥 멸치를 넣는 게 아니라 건강이 안 좋은 할머니가 집에서 버섯 다시마 양파 대파 등을 말려 손수 빻아 만든 가루를 섞는다. 그것도 비율이 정해져 있단다. 30년 노하우가 숨은 최고급 육수에 최고급 구포국수가 만났으니 맛이 좋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정도다.

자연히 단골이 늘 수밖에. 한달이면 25번쯤 찾는다는 박경득(52·현대자동차 금정지점) 씨는 "면도 쫄깃해 좋지만 이 집 육수는 해장용으로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전날 과음했을 경우 그는 출근 후 기본적인 업무를 마치면 반드시 이 집을 찾는다. "문을 여는 오전 10시 전에 와서 기다리다 주인이 출근하면 대신 셔트문을 올리고 들어가 땡초를 넣은 구포국수 한 그릇을 해치워야 하루 일이 손에 잡히죠."   

몸속에 육수의 피가 흐르는 현대자동차 박경득(왼쪽) 씨와 부산대 황진연 교수.
 
역시 한달이면 20일쯤 이 집 국수를 먹는다는 부산대 지구환경과학부 황진연(58) 교수는 이 집의 국수 감별사. 다른 국수업체에서 맛보라며 샘플로 갖다준 국수의 경우 김 대표는 가장 먼저 황 교수에게 삶아 대접한다. 황 교수는 "제법 이름 있는 국수를 맛봤지만 구포국수만큼 탱탱하면서도 쫄깃한 국수는 없다"고 말했다.

육수의 피가 흐르는 이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속이 풀리는 진한 육수에 고명으로 단무지채 부추 김가루 깨소금이 들어가는 구포국수야말로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음식"이라고 말했다.

맨 오른쪽이 보통 그릇이며, 가운데가 2배인 곱배기, 맨 왼쪽이 4배에 해당되는 왕곱배기 그릇이다. 이 집은 왕곱배기를 4그릇이나 먹은, 그러니까 보통 국수 28그릇을 먹은 사람이 최고로 많이 먹은 사람이다. 새 기록이 나올 때까지 신기록 보유자는 공짜다.

줄 서 기다릴 때의 번호표.

구포국수.


'이가네 구포국수' 이원화 대표

- "국수공장집 아들이어서 반죽 절단 등 면 만들기가 어린 시절의 일상이었죠"

 "구포국수를 직접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구포국수 식당을 하는 경우는 부산에 아마 저밖에 없을 겁니다." 부산 북구 구포1동 구포시장에서 '이가네 구포국수'를 운영하는 이원화(49) 대표는 '구포국수의 적자'라 할 수 있다.

이가네 구포국수 대표 이원화 씨.


이 대표의 선친은 지금의 가게에서 여섯 블록 떨어진 현 신용협동조합 맞은편 지점에서 1945~79년 34년간 구포국수 공장을 운영했다. 그 모습은 가게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고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저희 집을 포함해 7개의 국수공장이 함께 있었지요. 살림집과 함께 있는 가내공장 수준이었지요. 조금 큰 곳은 옥상에 건조대를, 저희 집은 마당 한쪽에 나무로 만든 건조대를 둬 국수를 말렸어요."

이가네구포국수.

육수. 땡초를 넣어야 맛있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이 대표가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건조대 앞에서 활짝 웃는 모습이 확인된다. 자전거를 탄 사진 앞에서 이 대표는 한마디 툭 던진다. "저 자전거를 타고 추운 겨울 서남다리까지 구포국수 배달을 다녀왔어요. 어찌나 춥던지."

옛날 구포 일대 사진들.

이원화 씨의 옛날 사진.


이 대표는 초등학교 땐 건조대에서 떨어진 한 두 가닥의 국수 줍는 일을 했고, 중학교 땐 포장과 배달을, 고등학교 땐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와 반죽과 절단 작업을 했다고 한다.

당시 국수는 여러 단계를 거쳐 만들어졌다. 밀가루에 굵은 소금 녹인 물을 섞어 반죽통에 넣은 후 수 차례의 롤러작업을 해 자르면 국수가 되고 이를 햇빛에 3~4일 완전히 말려야 상품으로 완성됐다.

"흔히 낙동강의 염분 섞인 바람이 맛을 낸다고 하죠. 하지만 이곳은 엄마산(이 대표는 어릴 때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백양산 줄기를 의미)이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줘 오랫동안 그 바람을 머물게 했기 때문에 더욱더 짭조름한 맛이 났죠."

이곳의 면발은 뜨거운 육수 속에서 살아 있었다. 남해산 멸치 등 15가지를 넣어 만든 육수는 약간 순하고 시원했다. 다른 집처럼 오래 끓이지 않는다. 그게 노하우라고 했다. 이 대표는 "이 맛이 오래 전 구포장터에서 먹던 그 맛"이라 강조했다. 국수는 이 대표가 일러준 당시의 레시피로 김해 주촌의 한 공장에서 주문생산 방식으로 뽑은 면이다.

그는 "무형의 자산과 가업을 잇는 자부심을 갖고 구포국수를 널리 알리는데 여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051)333-9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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