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답의 늘푸른 산죽능선, 좀처럼 못보는 볼거리
하산길엔 소설 '토지'의 무대 회남재 옛길도 만나

눈덮인 히말라야 연봉에 비견되는 지리산 천왕봉. 대개 처음 보는 순간 발걸음이 멈춰진다.
 

 민족의 명산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중산리 코스를 힘겹게 오르다보면 우측 건너편의 마루금 전체가 추수를 앞둔 황금들녘을 연상시킨다. 바로 천왕봉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황금능선이다. 써리봉에서 국사봉을 거쳐 구곡산에 이르는 장장 20㎞의 이 능선에는 산죽이 지천이다. 이 산죽이 햇빛을 받아 반사되면 황금빛으로 물든다고 해서 명명됐다. 지금은 비법정 탐방로라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올 첫 산행지 하동 깃대봉에도 황금능선에는 비할 바 못되지만 아주 인상적인 산죽길이 펼쳐진다.

조릿대라 불리는 늘푸른 산죽은 사실 봄 여름 가을엔 있는 듯 없는 듯 철저히 조연에 불과하다가 낙엽이 지고 숲이 앙상해지면 예의 초록빛을 발하며 숲의 주인공으로 단연 부각된다. 특히 눈 온 뒤 그 자태는 옛 선비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깃대봉은 영신봉에서 갈라져 나와 삼신봉 내삼신봉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지리산 남부능선에서 동남쪽으로 한 번 더 뻗은 지리산 호위봉 중의 하나. 베테랑 산꾼들도 금시초문이라 하고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무명의 산이다.
 

좀 더 피부에 와닿게 설명하자면 묵계와 악양을 잇는 회남재 동쪽에 위치해 있다. 참고로 회남재를 정점으로 서쪽으론 시루봉~원강재~성제봉(형제봉)이 이어진다.

익히 알려진 대로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는 천왕봉을 기준으로 북쪽인 함양 마천면 금대산과 남쪽의 하동 삼신봉. 깃대봉은 이들 두 봉우리만큼은 못하지만 산행 도중 히말라야를 연상케하는 눈덮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주능선의 웅장함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산행에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하산길의 회남재. 악양 벌판과 함께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됐던 이곳은 하동서 청학동을 거쳐 지리산으로 곧장 연결된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물자보급로 역할을 했다. 다시말해 악양에서 곡식과 가축 등을 수집한 빨치산이 이곳을 거쳐 아지트인 지리산으로 넘어갔기에 국군 토벌대와 빨치산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것.

회남재는 또 청학동 인근의 묵계사람들이 하동장(場)으로 오는 길이자, 악양에서 청학동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우리 할머니 세대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한동안 문경새재길 등과 함께 추억의 옛길로 분류됐으나 최근 시민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동군이 도로개설을 추진, 논란이 일고 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산행은 악양 중대리 상중대마을회관~임도개설비~계곡수 건너~옛 집터흔적~능선~임도~무명봉~깃대봉 갈림길~산죽능선~회남재~사랑의 집~등촌리 덕기마을(버스정류장) 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5시간10분 안팎이며 들머리에서 능선까지의 일부 구간에서 길찾기가 애매모호할 뿐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일사천리로 내달릴 수 있다. 들머리 상중대마을회관 앞에서 먼저 주변 산세를 살펴보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두 암봉 사이에 걸린 구름다리가 보이는 신선봉과 그 우측으로 성제봉 시루봉이 조망된다. 참고하길.


마을회관에서 포장로를 따라 오르면 이내 갈림길. 왼쪽 상중대교 대신 우측으로 간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지나면 또 갈림길. 이번엔 개울따라 왼쪽으로 간다. 11시 방향으로 저 멀리 보이는 V자 잘록이가 회남재로, 산행팀은 이곳으로 하산한다.

작은 다리를 건너 황토집을 지나 임도개설비 앞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간다. 우편함이 걸린 아름드리 소나무를 지나 포장로를 따라 오르면 우측에 널따란 개울이 흐른다. 이 개울을 건너면서 본격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회관에서 25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주능선을 향해 무작정 오르는 산꾼들.

앙상한 가지의 활엽수림 대신 산기슭에는 푸른 소나무가 지천이다. 등로는 지그재그 오르막길. 잘 빠진 미끈한 청자보다 다소 투박해 보이는 분청을 닮은 고풍스럽고 정감이 가는 옛길이다. 빛바랜 솔가리와 카키색 낙엽의 조화 또한 운치있다. 양지 바른 터에 위치한 두 기의 묘지를 지나면 옛 집터. 푹신푹신한 낙엽융단길이 열려 있는 왼쪽으로 향한다. 일순간 냉기가 느껴진다.

물마른 계곡을 건너면 산죽길. 고개 들면 낙엽송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다. 너덜 오름길이다.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무척 괴롭다. 음지엔 잔설도 남아 점입가경이다. 이렇게 10여 분. 비로소 산허리를 돌아 제대로 된 산길을 조우한다.

20분 뒤 마침내 능선에 닿는다. 정면으로 보이는 마을은 해발 500m쯤의 논골.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출몰할 때 한 명의 주민도 다치지 않은 오지 마을이다. 정면 깃대봉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내달린다. 약간의 오름길과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다. 17분 뒤 임도. 왼쪽 5m 지점 대각선 방향으로 산길이 열려 있다. 이때부터 된비알의 연속. 무명봉을 넘어 5분 뒤 산죽길. 정글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깃대봉을 내려서면 만나는 산죽능선. 산죽은 회남재까지 이어진다. 여성들은 특히 피부 손상에 유의해야 할 정도로 빽빽하다.
           산죽능선은 한동안 계속된다.

산세로 봐서 능선을 갈아타는 지점이다. 깃대봉 정상은 2만5000분의 1 지형도상 우측으로 얼마 안되는 거리이다. 하지만 빽빽이 들어선 키 큰 산죽길을 도저히 뚫을 수 없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왼쪽으로 간다. 산죽능선의 연속이다. 헤집고 150m쯤 가면 첫 전망대. 눈덮인 천왕봉을 비롯 써리봉 중봉 제석봉 장터목 촛대봉 영신봉과 그 앞 내삼신봉 삼신봉 외삼신봉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그 유명한 청학동도 보인다.

깃대봉 산죽능선을 내려서면 만나는 전망대 뒤로 저 멀리 형제봉(성제봉)이 보인다.

7분 뒤 두 번째 전망대. 주변 조망은 더 넓다. 삼신봉 왼쪽으로 시루봉 원강재 성제봉 신선봉, 악양 벌판 뒤 섬진강 건너 둥그스런 또아리봉 도솔봉 백운산 억불봉이, 다시 왼쪽으로 칠성봉 구제봉 금오산과 저 멀리 광양제철소도 확인된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 토벌대와 빨치산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회남재.

전망대 바위를 내려서면 또다시 산죽. 미로같은 죽림의 길이라 오랜 추억거리로 남을 듯하다. 회남재는 여기서 15분. 청학동(6.4㎞) 묵계(4.3㎞) 악양(10.6㎞)으로 각각 열려 있는 세 개의 임도와 시루봉, 그 왼쪽으로 열린 하산길, 방금 산행팀이 내려온 길 등 모두 여섯 개의 길이 만나는 고개이다. 회남재의 역사를 알리는 안내 그림판이 두 개 서 있고, 또 다른 두 개는 하산길 옆에 쓰러져 있다.

하산길은 무지 심한 급경사 내리막길. 태풍으로 계곡 골짜기가 망가져 있다. 급비탈에선 큰 돌이 굴러 조심해야 한다. 50분이면 도로를 만나고, 여기서 요양시설 ‘사랑의 집'을 지나 버스정류장이 위치한 등촌리 덕기마을까지는 15분 걸린다.

# 떠나기전에 -
키 훌쩍 넘는 산죽이 이중삼중… 정상 난공불락

고백컨대 정상을 밟지 못한 산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흔히 남 탓 하지말라고 하지만 이번만은 산죽 탓 좀 해야겠다. 어른보다 키가 큰데다 이중 삼중으로 너무 촘촘하게 자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산행대장과 함께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산행팀 말고도 다른 산꾼들이 수차례 길을 뚫으려고 시도한 흔적이 입구에 역력하다. 여하튼 난공불락의 요새다. 설령 뚫고 들어가더라도 산죽의 연속이라 정상 확인은 힘들 성싶다. 지도와 현장은 또 다른 법이란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회남(回南)재'란 이름은 남명 조식 선생이 명명했다. 그는 이 터를 보고 골이 좁고 물이 섬진강으로 곧장 빠져 길지(吉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발길을 남으로 돌렸다고 전해온다. 청학동이 위치한 청암면의 '묵계(默溪)' 또한 그 이름이 흥미롭다. 이곳은 해마다 큰 폭우가 쏟아져 다 휩쓸려 내려가 냇물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해서 붙여졌다 한다.

 재밌는 얘기 하나. 악양주민들은 악양면 시루봉 아래 청학이골을 '진짜'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믿고 있으며 지금의 청암면 삼신봉 밑의 청학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새해, 아무도 밟지 않은 처녀지 깃대봉을 적극 추천한다.

# 교통편 -
하동터미널서 악양행 버스나 택시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하동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 첫 차를 시작으로 1시간 간격으로 출발한다. 2시간30분 걸린다. 하동터미널에서 들머리인 악양면 중대리 상중대마을회관(노전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한 연계버스는 시간이 맞지 않아 악양면소재지로 가서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하동터미널에서 악양행 버스는 오전 8시 첫 차를 시작으로 40~5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이곳에서 악양개인택시(055-883-3009)를 이용한다.

날머리 덕기마을에서 하동터미널행 버스는 오후 3시10분, 5시20분(막차)에 출발한다. 혹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 악양면소재지로 택시(5000원)를 이용, 악양우체국 옆 악양마트 앞에서 터미널행 버스를 타야 한다. 오후 3시35분, 4시25분, 5시15분, 5시45분, 6시35분(막차). 1100원. 하동터미널에서 부산행 시외버스는 오후 4시30분, 5시30분, 6시30분, 7시30분(막차)에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 하동IC~하동 구례 쌍계사 방면 19번 국도 우회전~남원 구례 직진~구례 쌍계사 직진~악양 1003번 지방도~악양우체국 지나~상(하)중대마을 이정표 우회전~중대교 지나~상중대마을회관 순. 날머리 덕기마을에서 들머리 상중대마을회관 앞까지 택시를 이용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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