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배나무가 많아 배내골이라 명명됐다는 설이 나올 정도로 배내골에는 돌배나무가 많았지만 지금은
       마을길을 넓히기 위해 수변의 돌배나무가 대부분 사라져 산기슭에만 일부 남아 있다. 하얀꽃이 돌배
       나무, 분홍빛은 산벚나무.
      배내산장 김성달 산장지기. 뒤로 보이는 느티나무가 바로 김 씨가 21년 전에 심은 것이다.
    벚꽃이 계곡 주변에 만개한 가운데 원동면 장선리의 송림이 한 폭의 한국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배내골은 어떤 곳

배내골은 울산시 울주군에서 발원, 양산 원동면을 거쳐 밀양호(댐)로 흘러들어가는 계곡을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수려한 경관 덕분에 울산 밀양 양산에선 각각 울산 배내골, 밀양 배내골, 양산 배내골로 부르지만, 흔히 말하는 배내골은 양산지역에 가장 많이 걸쳐 있어 대체로 양산 배내골로 보면 된다. 실제로 배내골은 '양산 8경'에만 포함돼 있을 뿐 '울산 12경'이나 밀양의 주요 관광지에는 언급조차 없다.

 산꾼들의 관점에서 보면 배내골은 천황 재약산으로 대표되는 영남알프스 남서부 능선과 간월 신불 영축산 등 영남알프스 남동부 능선을 잇는 고갯마루인 배내고개에서 밀양 금오산과 양산 안전 축천산을 잇는 배태고개까지의 70리(약 28㎞) 계곡을 의미한다. 

 
 좀 더 피부에 와닿게 설명하면 언양에서 석남사를 거쳐 밀양으로 넘어가는 옛 24번 국도를 타고 오다 만나는 갈림길에서 69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배내고개를 넘어도 되고, 원동역에서 원동휴양림과 신흥사를 잇따라 지나 상수도 보호구역임을 알리는 대형 이정석이 서 있는 배태고개를 지나면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경부고속도로 양산IC로 나와 어곡터널과 신불산 공원묘지나 에덴밸리스키장을 지나면 손쉽게 접근이 가능해 부산 쪽에선 대부분 이 길을 이용한다.

배태고개.

배내고개. 보이는 산은 능동산.



■배내골이라는 이름의 기원
배내산장지기 김성달 씨는 배내골이라는 이름의 기원을 여러 방면으로 나름대로 분석했다.
우선 땅의 생김새로 본 측면.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배내골은 배가 바다에 떠 있는 형상인, 전형적인 행주형(行舟形)의 지세다.

김 씨는 이를 주변 지세를 근거로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배내골을 하나의 배로 가정할 때 골짝의 두 진입로 중 해발고도가 낮은 배태고개를 뱃머리로, 약간 더 높은 배내고개를 배의 뒷부분인 선미로 분석했다. 또 배내골을 감싸고 있는 영남알프스 남서부, 남동부 능선은 각각 밀양 얼음골이나 양산 통도사에서 보면 거의 직벽이라 양쪽 산줄기를 배의 측면으로 간주했다. 덧붙이자면 예부터 행주형 지세에서 배가 떠나면 흉하다 하여 비보(裨補) 차원에서 인근에 지명으로나마 포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배태고개 아래의 원동면 영포리 내포리 등이 그 예에 해당된다고 한다.

배내골의 배내는 또 갓난아이의 저고리인 배냇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산으로 옴폭 둘러싸인 배내골이 어머니의 자궁(뱃속)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땅으로 풀이된다는 것. 배내산장이 위치한 양산 원동면 선리의 태봉(胎峰)이라는 마을 이름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또 하나는 예부터 냇가에 돌배나무가 즐비하다 하여 '배 리(梨)' 자와 '내 천(川)' 자의 뜻만 차용해 배내골로 불리게 됐다는 설이다.  가장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설이다. 이천리(梨川里)라는 지명 또한 실제로 울산 쪽 배내골의 명소인 철구소 인근에 존재한다. 아쉽게도 지금의 배내골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도로를 넓히고 펜션을 지으면서 냇가의 돌배나무는 거의 잘려나가 일부 산기슭에 명맥만 유지돼 매년 5월이면 겨우 하얀 배꽃을 볼 수 있을 정도다. 해서, 그 흔하디 흔한 돌배주 맛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게 됐다.

지워지지 않는 질곡의 삶 터전, 배내골
세상의 모든 만물이 음양의 조화에서 벗어날 수 없듯 사람 사는 땅도 예외가 아니다. 배내골은 수려한 산세와 빼어난 계곡미가 아름다워 천혜의 자연경관이라고는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거칠고 척박한 오지 중 오지였다는 것이 김성달 씨의 설명이다. 험준한 산줄기로 둘러싸여 외부와 단절돼 있고 사람의 왕래 또한 드문, 풍수적으로 음양의 균형이 깨진 전형적인 음(陰)의 땅이라는 것.

나그네에겐 눈앞의 풍광이 전부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거친 땅에서 억센 삶을 살다 간 민초들의 이야기가 계류에 실려 끊임없이 흘러내린 곳이다.

21년간 배내골을 지킨 김 씨는 "배내골 사람들은 도회지의 많은 무리 속에서 부대끼며 살기에 어딘가 모가 난, 속된 말로 '내 팔 내가 흔들며 자유분방하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크게 보면 그런 부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종가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땀의 대가로 사는 것을 천직으로 여겼다. 하지만 매터도가 판치는 세상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내골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선택의 폭이 적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배내골행을 과감하게 실행한 것이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결정에 말없이 따라준 사랑하는 부인과 두 아들이 없었다면 힘들었겠지만."

배내골에는 비단 김 씨뿐 아니라 가슴 아픈 사연의 민초들이 살다간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우선 떠오르는 분이 인근 죽전마을 당상나무집 욕쟁이 할매란다. 서른도 안 돼 청상과부로 배내골에 들어와 한 많은 삶을 살면서 북받쳐 오르는 한을 속으로 삭이다 못해 뱉어 놓은 것이 욕이었다. 산판일을 하는 일꾼들을 대상으로 주막을 했는데 그래도 오며가며 정 준 사람이 있어 성이 다른 딸을 셋 둔 욕쟁이 할매는 장대비 쏟아지는 7년 전 어느날 이승의 질긴 끈을 싹둑 자르고 팔순의 노구를 배내골에 묻었다.
 백련마을 어귀 최 보살과 마을에 버스가 들어와 잔치를 할 당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던 임 노인도 파란만장한 삶을 끝내고 이제 하늘나라로 되돌아갔다.

시간을 더 거슬러 조선시대에는 사림의 거봉 점필재 김종직을 비롯해 많은 유생들이 세상을 등지고 산수를 벗하며 세월을 보냈고, 조선 후기 천주교 탄압 땐 많은 신도들이 배내골로 들어와 질그릇을 구워 한피기고개를 넘어 통도사 인근 언양 신평장이나 표충사 인근 밀양 단장장에 내다팔아 의식주를 해결했다. 실제로 상북면 이천리 간월재 가는 도중 만나는 죽림굴은 기해박해 당시 잔혹했던 관아의 손길을 피해 모였던 피난처로 여기서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 입구는 좁지만 안쪽이 넓어 150명까지 지낼 수 있는 천연석굴 죽림굴은 현재 천주교 성지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일 줄 모른다.

죽림굴. 입구는 작지만 내부가 넓어 150명도 수용 가능하다.

죽림굴 올라가는 계단길.


죽림굴 안내판.

죽림굴 안내석.


아직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봉마을 산자락 옹기골에도 적지 않은 질그릇 파편과 함께 대작 가마까지 출토돼 이 또한 천주교인들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김 씨는 설명했다.

한국전쟁 땐 빨치산들이 덕유 지리를 거쳐 이곳 배내골로 내려와 지금의 원동면 장선리에 교육도당을 설치, 골육상잔의 비극의 현장으로 변했다. 이와 관련, 신불산 서릉의 955봉에는 '공비지휘소가 있던 곳'이라 적힌 비석이 서 있다. 비석 뒷면에는 한국전쟁 중 남부군 제5지대장이 이곳에 머물면서 신불산 일대의 부하들을 총지휘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실제로 이곳에 서면 비석 내용 그대로 주변 능선 계곡의 지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김 씨는 "밤엔 인민군이, 낮엔 우리나라 50사단 병력이 점령하는 등 당시 밤낮으로 배내골의 주인이 바뀌면서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며 "이후 다시 돌아온 원주민이나 앞서 언급한 세상을 등진 사람들 그리고 최근 펜션 등 민박이나 식당을 운영하기 위해 이방인이 하나 둘 찾아들면서 지금의 배내골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여전히 몸살 앓는 배내골
1990년대 후반부터 배내골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중장비의 굉음소리와 레미콘차가 쉴새없이 넘나들며 망나니 칼춤 추듯 지축을 흔들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 노래 가사처럼 수변의 돌배나무를 벤 후 마을길도 넓히고 산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휘황찬란한 펜션과 식당 전원주택 연수원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간의 더러운 손길이 미치자 배내골은 서서히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배내산장 식당건물 한 쪽 벽에는 눈길 끄는 글이 하나 붙어 있다. 올해 서울의 일류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산장지기 김 씨의 둘째 아들 종현이가 초등학교 때 쓴 '배내골'이란 생활문이다. 종현이는 5살 때 배내골로 들어왔다. '버스를 탔는데 아저씨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지금이야 깨끗하지. 한 10년 뒤엔 아주 더러워져 '배내똥'이라 불릴걸.(중략) 여름엔 피서객들이 음식을 다 먹지도 않고 반은 버리고 간다. 그것이 비가 오면 강에 흘러들어 오염이 되는 것이다. (중략) 음식물을 되가져 가는 것이 환경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생의 눈에 이렇게 보였으면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김 씨도 이렇게 회상했다. "식수로 길러 먹던 계곡물이 하도 맑아 하늘이 통째로 담긴 모습에 넋을 놓고 온종일 보내기도 했고, 매미 여치는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줬고, 두견새는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창가를 떠나지 않았어요. 어느날 아침 문득 잠에서 깨어나 들꽃 위에 실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이처럼 원시에 가까운 풍요로움이 가득한 배내골은 사바세계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온 한 맺힌 이방인들을 포근히 감싸 안아 주었다. 김 씨는 이를 배내골의 묘한 마력이라고 표현했다. 거친 삶을 살아온 필부들도 이 배내골에 들어오면 아픔조차도 충분히 삭여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보도록 도와주는 그 힘 말이다.

김 씨는 이런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원시에 가까운 풍요로움은 비록 사라진 돌배꽃 전설처럼 서서히 묻혀버리고 있지만 그래도 배내골은 여전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하지만 이 아름다움의 이면에 묻혀 있는 배내골의 정서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진정 바위 틈에 핀 들풀 한 포기도 소중히 다가올 것이라고.

<떠나기 전에>-죽림굴 파래소폭포 철구소 등 볼거리 및 먹을거리 무궁무진

         
배내골 전경.

도심에선 이미 벚꽃이 난분분 꽃비를 뿌린 후 아기 손톱 크기의 새순이 돋고 있지만 산골마을이라 봄이 늦게 찾아오는 배내골은 이제서야 산벚꽃과 몇 안 되는 하얀 돌배꽃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하지만 지금 배내골은 의외로 한산하다. 벚꽃이 한창일 때 사람들은 벚꽃이 유명한 쌍계사나 경주 등지로 떠나 찾는 이가 거의 없다가 벚꽃놀이철이 끝나야 사람들이 찾는단다. 가을에도 마찬가지다. 각 지자체의 축제가 몰린 9월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역시 일순간 발길이 끊긴 후 억새나 단풍이 모습이 보이면 또 다시 몰린다고 한다.

사전 정보없이 배내골을 찾으면 밋밋하고 심심하다. 그래도 볼거리는 꽤 있다. 천주교 성지인 죽림굴은 간월재 아래 위치해 있고, 배내산장 맞은편 신불산폭포 자연휴양림에는 파래소폭포가 유명하다. 만추 단풍이 황홀한 주암계곡에는 여름철 최고의 명소 철구소가 있다. 시퍼런 물이 한눈에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어 밀양 호박소, 신불산 파래소폭포와 함께 영남알프스 3대 소(沼)로 손꼽힌다. 또 통도골에는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조폭들이 물속에서 누가 오래 있나 내기를 했던 곳으로 유명한 선녀탕이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5분에서 많게는 30분 정도의 발품을 팔아야 한다.

밀양호(댐)로 가는 멋진 드라이브길도 달려보자. 도중 휴게소에서 바라본 밀양호의 풍광은 일품이다. 정자 앞에는 망향비가 서 있다. 1990년 밀양댐이 조성되면서 수몰된 단장면 고점리의 덕달 사희동 죽촌 고점 등 4개 마을의 안타까운 사연이 적혀 있다. 배내골 하류에 해당되는 이곳에는 농짝같은 암장이 치솟아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농암대다. 사림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이 말년에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밀양호 휴게소. 망향비와 농암정이 보인다.

점필재 김종식이 말년이 머물렀던 농암대. 농암정 정자 안에 사진이 걸려 있다.


배내산장의 특미 '흑염소 숯불구이'.

'흑염소 숯불구이' 상차림.


배내골 맛집을 소개한다. 음식보다 배내골의 정서와 문화를 팔고 싶다는 김성달 씨가 운영하는 배내산장(055-387-3292)은 흑염소 숯불구이와 버섯전골이 유명하다. 영축산 산행의 들머리인 청수골산장(052-254-0875)은 흑돼지구이를 잘 하고, 수림가든(055-387-1016)은 꿩탕과 순두부, 대추나무집(055-387-5312)은 오리불고기와 메기매운탕 전문이다. 경부고속도로 양산IC로 나와 에덴밸리 쪽으로 올 경우 만나는 세검정(055-388-5757)은 생갈비와 돼지갈비로 유명하다. 원동면 장선리에는 50년 전통의 선리양조장(055-363-8933)이 있다. 

(1)편은 여기 클릭해 주세요.
'굴러온 돌' 21년 산장지기에게 듣는 배내골 이야기 http://hung.kookje.co.kr/392

상주해수욕장 바캉스 겸하면 이색 산행 제격

8부 능선 주변 기암·암봉, 수석 전시장 방불
상사바위선 한려수도, 하산길엔 보리암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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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에서 바라본 초승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 산행 들머리인 금산주차장에서 상주해수욕장까지는 정확히 2㎞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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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인 금산주차장에서 올려다본 금산의 주능선. 가운데 가장 높은 암봉이 상사바위이다.

 ※산행 순서를 시간대별로 편집. 기사는 그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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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주능선까지의 등로는 끊임없는 오르막의 연속이다. 왼쪽은 오르막의 끝. 쌍홍문이 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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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홍문에 오르기 전 왼쪽의 사선대(四仙臺).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던 네 신선이 모여 놀았다는 뾰족 암봉이다. 자세히 보면 네 조각의 기암이 하나의 암봉을 이루고 있다. 우측은 늘 푸른 덩굴식물인 이끼 낀 송악의 자태가 장관인 장군암. 금산의 첫 관문인 쌍홍문을 지키는 장군이라 하여 일명 수문장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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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거대한 자연조각품인 쌍굴. 흡사 해골 형상이지만 그래도 이름은 고상하게 지어야 하는 법. 무지개 형상의 홍예문이 두 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내외에서도 보기 드문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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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홍문 안쪽에서 본 한려해상 국립공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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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홍문 안쪽에서 본 다른 풍광(왼쪽). 우측은 쌍홍문 입구의 작은 구멍에 돈이나 동전을 던지고 즐겨워하는 관광객들. 돈이나 동전이 구멍에 들어가면 소원성취한다는 설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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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의상대사 등 고승대덕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하트 모양의 흔적이 남아있는 좌선대. 실제로 확인 가능하다. 그 뒤로 펼쳐지는 한려해상 국립공원 내의 섬들의 풍광이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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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각도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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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봉에서 바라본 초승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과 상사바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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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서 본 남해안 최대 규모인 상주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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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도중 바라본 금산 보리암(왼쪽). 앉은 터가 절묘하다. 우측은 금산 내 위치한 금산산장과 산장 우측 뒤 돼지바위(일명 저두암). 멀리서 보면 짝짓기를 하는 형상이다. 그 우측엔 코의 윤곽이 뚜렷한 코끼리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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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부터 봉수대였던 정상. 봉수대가 복원돼 있다. 조망이 넓고 아름다워 망대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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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대를 내려오면 정면에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란 글이 음각된 버선모양의 바위가 보인다. 문장암이다. 조선시대 대학자 주세붕의 솜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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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최고의 전망대인 상사바위에서 내려다본 상주해수욕장. 상사바위는 주인마님과 머슴의 애틋한 사연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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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보문암, 양양 낙산사, 여수 향일암과 함께 국내 4대 관음성지로 알려진 금산 보리암 내 해수관음상. 뒤로 보이는 암봉은 대장봉이다.



"여름철이라 계곡에만 집착하지 말고 산행 후 아주 손쉽게 해수욕도 겸할 수 있는 산은 어디 없나요. 뒤풀이로 백사장에서 젊음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그런 산행지 말이에요. 가끔씩은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젊은 독자의 애정어린 전화였다. 물론 듣는 순간 적당한 산이 떠올랐다. 바로 남해 금산이다. 기실 금산은 평소대로라면 '근교산 시리즈'에 싣기에는 약간은 머뭇거려지는 산이다. '금산 38경'이라 불리는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8부 능선부터 절경을 이루고 있고 한려수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조망을 지닌 훌륭한 산이긴 하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오름길과 그 길을 다시 내려와야 하는 지형적 취약성 때문에 산행이라는 측면에서 정통 산꾼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2% 부족하다. 올 여름엔 상황이 좀 달라졌다. 튀는 독자의 전화로 이른바 '바다와 함께 하는 산'이라는 테마로 당당하게 거듭난 것이다.


사실 금산은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지대로 산 자체가 도 기념물로 지정된 귀하신 몸이다.

해발은 701m. 위압감을 느낄 수 없는 고만고만한 높이지만 해발 제로에서 시작되는 섬의 산이 그렇듯 외형은 훨씬 웅장해 보인다.

원래 이름은 보타산. 그 뒤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찾았을 때 갑자기 서광이 비쳐 보광산이라 불렀다. 금산으로 바꿔 부른 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장군이다. 고려말 창업의 뜻을 품고 전국 명산을 찾아 다니며 백일기도를 드리던 그는 금산에서 산신의 영험을 받았다. 그때 이성계는 자신이 왕이 되면 온 산을 비단으로 감싸주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왕이 된 그는 현실적으로 비단으로 온 산을 덮을 수 없음을 알고는 고민 끝에 산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錦山)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전설이지만 적어도 오래전부터 금산 일대가 기도 효험이 있는 기도처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금산은 강화 보문암, 양양 낙산사, 여수 향일암과 함께 국내 4대 관음성지로 알려진 보리암을 품고 있다.

산행은 상주면 금산 매표소~샘터~쌍홍문~일월봉~금산산장~좌선대~상사바위~헬기장~단군성전~문장암~정상(망대·봉수대·701m)~보리암 보광전~해수관음상~쌍홍문~금산 매표소 순. 3시간 정도 걸리지만 '금산 38경'을 찬찬히 둘러보려면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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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은 아주 간단하다. 매표소부터 쌍홍문까지는 줄곧 외길 오르막 돌길 내지 돌계단길이다. 쌍홍문은 대략 8부 능선. 55분 남짓 걸린다. 다행히 숲이 울창해 땡볕은 피할 수 있다. 여기서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산재한 기암괴석과 한려수도의 그림 같은 조망을 감상한 후 보리암을 지나 다시 쌍홍문을 거쳐 왔던 길로 하산한다.

매표소에서 8, 9분 뒤 수정같이 맑고 시원한 지계곡을 한 번 건너고, 정상까지 딱 절반인 1.15㎞ 지점에 샘터와 화장실이 있다. 샘터를 지나면서 쌍홍문까지 산길은 점차 가팔라진다.

15분 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거대한 자연조각품인 쌍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쌍홍문이다. 흡사 해골 형상이지만 그래도 이름은 고상하게 지어야 하는 법. 무지개 형상의 홍예문이 두 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내외에서도 보기 드문 절경이다.

이때부터 '금산 38경'의 기암괴석을 찾아다니는 이른바 기암 기행이 시작된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사무소는 접근 가능하거나 등로에서 손쉽게 조망되는 대부분의 기암이나 암봉 앞에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쌍홍문에 오르기 전 왼쪽의 사선대(四仙臺).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던 네 신선이 모여 놀았다는 뾰족 암봉이다. 자세히 보면 네 조각의 기암이 하나의 암봉을 이루고 있다. 이는 약간 위 난간이 세워진 계단 입구에서 보면 더 확실하다. 쌍홍문 입구 왼쪽에는 늘 푸른 덩굴식물인 이끼 낀 송악의 자태가 장관인 장군암이 있다. 금산의 첫 관문인 쌍홍문을 지키는 장군이라 하여 일명 수문장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서면 비로소 한려수도의 올망조망 모여있는 다도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이제 사바세계를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일명 해탈문이라 불리는 쌍홍문을 통과한다. 굴 안에서 보는 비단결과 같은 숲과 바다와 하늘이 한 편의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곧 갈림길. 왼쪽 단군성전, 오른쪽은 보리암. 어느 곳으로 가도 상관 없으나 산행팀은 단군성전 방향으로 가 보리암을 마지막으로 보고 다시 이곳으로 원점회귀한다.

두 개의 바위가 층암 절벽을 이뤄 가까이서 보면 '날 일(日)' 자, 멀리서 보면 '달 월(月)' 자로 보인다는 일월봉을 지나 왼쪽 제석봉에 들렀다 나온다. 제석봉에 서면 방금 지나온 기암과 주변 형상을 크게 가늠할 수 있다. 왼쪽 보리암과 일월봉, 정면 초승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 우측 뒤로 금산산장이 보인다.

이번엔 좌선대를 찾아 금산산장을 지난다. 산장 뒤로 짝짓기를 하는 형상인 돼지바위(일명 저두암)와 코의 윤곽이 뚜렷한 코끼리바위를 놓치지 말자. 좌선대는 등로 왼쪽에 있다. 원효, 의상대사 등 고승대덕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하트 모양의 흔적이 남아있다. 실제로 확인 가능하다.

다시 갈림길. 왼쪽 상사바위로 간다. 침목계단 직전 '추락주의'라 적힌 팻말 앞에 서면 서포 김만중의 유허지인 노도와 앵강만 건너 설흘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상사바위는 금산 최대의 전망대이자 규모나 면적에서도 최고를 자랑한다. 주인마님과 머슴의 애틋한 사연이 깃들어 있는 이곳에 서면 방금 지나온 좌선대 돼지바위 코끼리바위 제석봉 일월봉 사선대 보리암 금산 정상과 초승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군성전으로 향한다. 헬기장을 지나면 사거리. 단군 할아버지를 모신 왼쪽의 단군성전을 잠시 둘러본 후 정상으로 오른다. 산죽길을 잠시 지나면 고려때부터 봉수대였던 정상. 봉수대가 복원돼 있다. 조망이 넓고 아름다워 망대라고도 부른다. 오를 땐 못봤지만 망대를 내려오면 정면에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란 글이 음각된 버선모양의 바위가 보인다. 문장암이다. 조선시대 대학자 주세붕의 솜씨라고 한다. 주변에는 연보라 산수국이 지천이다.


보리암은 정상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7, 8분이면 닿는다. 보광전과 해수관음상, 가락국 허 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비보(裨補) 성격의 삼층석탑, 그리고 법당 뒤 층암절벽을 이룬 거대한 암봉인 대장봉을 감상한 후 쌍홍문을 거쳐 매표소로 향한다. 45분이면 주차장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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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면이나 풍광면에서 남해안 최고를 자랑하는 남해 상주해수욕장.

# 떠나기전에

들머리금산주차장서 백사장까지 불과 2㎞
도보로 20분…인근 미조항 갈치무침회 별미

금산매표소에서 상주해수욕장까지는 정확히 2㎞. 차로 달리면 불과 5분이면 닿고 걸어서도 내리막길이라 20분 정도면 충분하다.
동해안에 경포대, 부산에 해운대가 있다면 남해안에는 상주해수욕장을 대표 해수욕장으로 꼽는다. 활처럼 굽어진 2㎞ 정도의 해안선과 한없이 보드라운 모래, 그리고 울창한 송림이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호수같이 잔잔한 물결과 한참을 나가도 어른 허리춤도 안되는 얕은 수심은 자녀를 동반한 가족들이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수영복 대여점과 샤워실도 갖추고 있다. 해수욕장에서 출발하는 유람선도 있다.

금산 8, 9부 능선쯤 되는 지점에 금산산장이 있다. 좌선대 인근이다. 신라시대 비구니 절터였던 이곳에 7년 전 작고한 고 김월신 할머니가 50여 년 전부터 등산객을 맞았다. 지금은 친손자가 운영하고 있다. 금산은 남해에선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어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 보리암 기도객들도 자주 묵는다. 새벽 산행으로 배가 출출해진 사람들을 위해 산채 정식도 준비한다. 시래기 된장국이 일품이다. 6000원. 전통 쌀막걸리와 파전도 있다. 1박 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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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항에 위치한 30년 전통의 공주식당의 별미 멸치회. 많은 식당 중 원조집이다.

상주해수욕장까지 왔다면 이웃한 남해의 어업 전진기지이자 아름다운 어항인 미조항을 찾아 갈치무침회를 맛보자. 30년 전통의 공주식당(055-867-4489)이 유명하다. 갈치회의 원조집이다. 남해수협 뒤편에 위치한 조그만 집이지만 남해를 찾는 전국의 관광객들이 유독 이 집만을 고집하는 것은 독특한 맛 때문이다. 2만 원(2인 기준). 갈치구이 갈치조림도 맛있다. 각각 2만 원(〃).

초행길에 '금산 38경'을 모두 찾아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요 등로에만 이정표와 안내판이 있을 뿐 모두를 알려주는 친절한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가급적 사전에 인터넷 등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떠나면 도움이 될 듯하다.


# 교통편

터미널서 금산 주차장행 버스
승용차 이용땐 진교IC서 빠져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남해공용터미널행 시외버스는 오전 6시20분, 7시10분, 8시, 8시40분, 9시15분, 9시40분에 출발한다. 2시간20분 걸리고 1만100원. 터미널에서 금산 산행 들머리인 금산주차장행 버스는 오전 8시55분부터 50분~1시간 간격으로 있다. 1800원. 요즘과 같은 피서철에는 배차시간이 20~30분으로 준다고 한다.

금산주차장에서 터미널행 버스는 오후 3시45분, 4시55분, 5시45분, 6시15분에 있다. 남해터미널에서 부산행 시외버스는 오후 4시15분, 5시5분, 5시30분, 6시15분, 7시5분(막차)에 출발한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 진교IC~남해 서포 좌회전~남해 금남~남해 노량 좌회전~남해 19번 국도 좌회전~남해대교~상주 남해~미조 상주~(중간에 만나는 '금산 보리암' 이정표는 복곡저수지 매표소이므로 통과)~상주면~금산 주차장 순.

※대중교통편은 현지 사정상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글·사진 = 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문의 = 국제신문 산행팀 (051)500-5168
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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