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역사문화관광개발원과 경남도가 함께 주관한 이순신 백의종군로 탐방에 참여한 시민들.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한산도 제승당 그리고 남해 이순신 영상관

 
 전란 중인 정유년 1597년 음력 4월 초하룻날 투옥 중 고문을 견디고 의금부 문을 절뚝거리며 나선 한 초로의 늙은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순신. 나이는 53세였다.

 한산대첩을 비롯해 출정하는 전투마다 왜군을 초토화한 전직 삼도수군통제사였지만 그는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명으로 투옥된 지 28일 만에 경남 합천 권율 장군의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할 것을 명받고 풀려난 것이다.

 많은 전공(戰功) 덕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에게는 치욕이었다. 상한 육신과 땅에 떨어진 명예 그리고 좌절감.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옥문을 나서며 다시 쓰기 시작한 난중일기엔 당시 그날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정으로 권하는 여러 지인들의 위로주를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해 밤새 땀이 몸을 적셨다."

 백의종군할 합천으로의 길고 긴 고된 여정 중 이순신은 노모의 부고를 접하고 잠시 고향 땅 아산에 들르지만 전시 중인 데다 죄인이라는 이유로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황망히 길을 재촉해야 했다.

 이순신이 걸은 백의종군로를 당시의 것으로 완벽하게 고증할 수 없지만 난중일기나 고문헌 등을 종합해볼 때 한양~수원~천안~공주~논산~여산~전주~남원~구례~하동~산청을 거쳐 지금의 합천 율곡면인 초계 땅에 다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초계에서 40여 일 백의종군하며 머물던 이순신은 원균의 칠천량해전 대패 소식을 듣고 권율 도원수의 재가를 받아 왔던 길인 산청 하동 사천으로 정세를 살펴보기 위해 연안 답사를 나선다. 도중 그는 진주에 이르러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돼 4개월여에 걸친 백의종군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의 발길이 스쳐 지나갔던 백의종군로는 410여 년의 긴 세월 탓에 속절없이 변했다. 그러나 그가 잠시 머문 초가나 돌담, 나룻배를 타고 건넜던 강, 후일을 도모하며 형세를 살폈던 산성 등이 걷기 열풍에 힘입어 이순신의 자취를 좇는 역사의 길로 거듭나고 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로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10곳 중 역사적인 상징성이 높은 역사의 길에 선정됐기 때문이다.
 경남도 관광진흥과 김종임 역사문화담당은 "백의종군로의 경남 구간인 하동~합천 161㎞ 중 우선 산청 단성면에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진주 손경례 집까지 도보로 탐방 가능한 10㎞ 정도를 올 상반기 마무리했으며, 손경례 집에서 하동읍성까지의 나머지 10㎞ 구간은 올 연말까지 고증을 거쳐 끝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여행은 이순신 장군과 백의종군로를 테마로 잡았다. 백의종군로가 내륙인 데다 지금 휴가철이 절정에 이르고 있는 점을 감안,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 당시의 본영인 통영 한산도와 그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이 펼쳐졌던 남해 관음포 앞바다와 이락사(李落祠)도 함께 찾았다.

경남 통영 한산도 제승당의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도 앞바다는 평온하기 그지 없다. 410여 년전 누가 이곳이 피로 물든 전장이라 생각하겠는가.

이락사는 이제 남해대교를 건너 잠시 스쳐가는 곳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는 거북선 모양의 복합미디어 전시관인 '이순신 영상관'이 새로 생겨  노량해전을 주제로 한 입체영상물을 볼 수 있다. 학익진 전법으로 왜군을 수장한 한산도 앞바다에는 요트와 여객선이 평화롭게 푸른 바다를 가르고 있다.

 통영에는 '이순신 밥상'이란 게 있다. 경남도가 이순신 장군과 우리 수군이 먹었던 77가지 음식을 난중일기와 고문헌 등을 통해 복원한 음식이다. 일본 시마네현에 가면 400년 전 사무라이들이 먹던 '타이메시'보다 훨씬 운치가 있다. 음식 또한 경쟁력 있는 관광상품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충무공의 발자취 좇아 구국의 길을 떠나다(2)편은 여길(http://hung.kookje.co.kr/492)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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