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유년의 흔적… "나에겐 말없이 품어 주는 어미 같은 산"

소년 엄홍길 "뛰고 달리고 산 전체가 놀이터"
한때 재활훈련지 "제2의 삶도 이곳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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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선친이 심은 오동나무를 보고 마치 연인을 만난 듯 꼭 껴안고 있는 엄홍길 대장(왼쪽), 우측은 엄 대장이 놀았던 원도봉산 와폭과 소. 엄 대장은 "나도 저렇게 놀았다"고 말했다.


엄홍길과 원도봉산은 데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지난 1960년 경남 고성군 영현면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원도봉산 기슭으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부모님은 등산객들을 상대로 조그만 매점을 운영했다.


덕분에 엄 대장의 놀이터는 선택의 여지없이 원도봉산이었고 나무와 풀 그리고 계곡의 물고기가 친구였다.

그는 이곳에서 유년 소년 청년기를 모두 보냈다. 심지어 장가를 들어 도봉산 아래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기실 삶의 대부분을 본가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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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도중 어렸을 적 살았던 원도봉산의 기를 받고 있는 엄홍길 대장(왼쪽)과 '엄홍길이 살던 곳'이라 적힌 안내판을 보고 있는 엄 대장.

지난 1998년 안나푸르나 원정 중에 발목을 다쳐 쇠못을 네 개나 박는 수술을 받고 나서 의사로부터 더 이상 산에 오를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 재활 훈련을 도와준 곳도 바로 원도봉산이었다.

"당시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같은 이곳 원도봉산에서 목 놓아 울기도 했지만 용기를 준 곳도 바로 원도봉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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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봉계곡의 명물 두꺼비바위(왼쪽). 엄 대장은 이곳에서 암벽등반을 배웠다. 우측은 엄 대장과 얘기를 나누며 걷는 필자.

그는 재활훈련에 처음엔 네 살짜리 어린 딸을 캐리어에 들쳐 업고 조금씩 원도봉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힘에 부치면 딸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올랐다. 보다 못한 아내도 많은 도움을 주며 함께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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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의 재활훈련 기간동안 가족과 사랑도 키우고 희망도 키웠습니다. 제2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원도봉산은 어머니이자 친구이고 스승이었죠."

도봉산은 지난 1983년 북한산과 함께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서울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 및 양주시에 걸쳐 있는 도봉산을 두고 의정부 시민들은 '으뜸 원(元)' 자를 써서 원도봉산이라 구분한다. 원도봉으로 오르는 도봉산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엄연히 도봉산이다. 하지만 엄 대장 역시 원도봉이라 불렀다.

서울지하철 1호선 망월사역 남부출구로 나와 엄홍길 전시관과 신흥대학을 잇따라 지나 만나는 원도봉 1주차장 내 대형 북한산 국립공원 안내도를 살펴본 후 본격 산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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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능선 정상에서의 엄 대장. 뒤로 원도봉의 주봉인 자운봉과 만장봉 신선봉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원도봉계곡을 따라 오르다 천년고찰 망월사를 거쳐 포대능선 정상을 돌아오는 왕복 3시간 정도의 짧은 코스를 택했다. 좀 더 긴 코스를 잡으려 했지만 엄 대장은 그날 저녁 때 약속이 두 건이나 있었다.

코스는 들머리부터 망월사까지 지루할 정도로 계곡을 따라 돌계단이 이어지며, 능선에 올라서야 비로소 주봉인 자운봉과 만장봉 신선대 등 뾰족이 솟은 암봉과 우람한 기암괴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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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과 필자.


첫 돌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엄 대장은 주 등산로 대신 왼쪽 희미한 묵은 길로 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다니던 옛길이란다. 그는 내색은 안 했지만 벌써 옛 추억을 떠올리며 걷고 있는 듯했다. 산행 직전 전시관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회상하며 인터뷰하던 그 얼굴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곧 와폭의 물살을 넙죽 받아먹는 넓고 깊은 소가 나타난다.

  
 
그는 코를 막고 뛰어내려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40년전 제가 저렇게 놀았어요"라며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그러더니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한 굽이 올라선 뒤 갑자기 키 큰 나무를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 듯 꼭 껴안는 것이 아닌가. 너른 터의 계곡 쪽 가장자리에 오롯이 서 있는 이 오동나무는 엄 대장의 선친이 심은 것으로 어릴 땐 키가 비슷한 친구였다고 했다. 이곳이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매점이 있던 곳이며 지금의 돌 벤치는 당시 엄 대장 집의 옛 건축자재였다고 한다.

여기서 한굽이 더 오르면 약간 더 너른 터. '산악인 엄홍길이 살던 곳'이라 적힌 안내판이 서 있다. "당시 집이 두 채였어요. 이 집은 매점이자 살림집이었죠. 아마 2000년 4월께 철거됐을 거예요."

물 만난 고기마냥 엄 대장은 또 "여기서 밤이며 버찌 머루 다래 등을 참 많이 따 먹었다"며 "그래서 제가 이렇게 건강한가 봐요"라고 말한 후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긴다.

우연히 만난 국립공원공단 직원은 "지금은 훼손지 복원공사가 끝나 숲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예상외로 숲이 빨리 살아나고 있다"고 귀띔했다.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원도봉산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찾는다는 그는 올해의 경우 두 번의 원정 때문에 3월 이후 5개월 만에 처음 찾은 것이다. 해서 감회가 더 새롭다고 했다.

10분 뒤 엄 대장은 계곡 건너 저 멀리 커다란 바위를 가리킨다. 원도봉계곡의 명물 두꺼비바위다. 한눈에 봐도 영판 두꺼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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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스케줄이 빽빽하게 적힌 수첩. 하루 평균 2, 3건의 약속이 잡혀 있다. 우측은 김밥을 먹고 있는 엄홍길 대장. 원도봉 입구 김밥집이 그의 단골집이다.


   
"중2 때였지요. 클라이머들이 저 바위를 오르는 거예요. 너무나 신기해 한참 동안 지켜보다 그분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막상 해보니 재미도 있었고, 습득하는 속도 또한 아주 빨라 칭찬 꽤나 들었지요. 엄홍길의 암벽등반의 세계가 열린 곳이기도 하지요. 이 바위는 오버행, 크랙, 수직벽 등 코스가 다양해 클라이밍을 하는 데 최적의 장소지요. 근데 최근 공단에서 안전과 관리의 어려움으로 등반을 금지하고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두꺼비바위에서 25분쯤 지났을까. 덕제샘이 기다린다. 동시에 갈림길이다. 애초엔 왼쪽 포대능선으로 올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망월사로 하산하려 했지만 시간 관계상 곧바로 망월사로 향했다. 포대능선은 오래 전 능선 중간에 대공포진지인 포대가 있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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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사와 포대능선 정상에서의 엄 대장과 필자.


천년고찰 망월사는 도봉산에서 가장 큰 사찰. 절 구경은 하산길로 미루고 계속 오른다. 절에서 포대능선까지는 7~8분이면 닿는다. 산불초소 앞에서 바라보는 주봉인 자운봉과 만장봉 신선대의 자태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며 맞은편인 동쪽의 수락산 불암산도 그림같이 다가온다.

이곳에서 늦은 점심으로 김밥을 먹었다. 엄 대장은 첫 김밥 하나를 발 아래 숲으로 내려놓는다. 생수 또한 몇 방울 먼저 땅에 덜어내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도 늘 자연과 산신에게 감사의 예를 표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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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인 고 박병태 추모비에 선 엄홍길(좌측). 후보 박병태는 지난 1993년 가을 시야팡마에서 실종됐다. 우측은 망월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엄홍길. 엄 대장은 신심이 두터운 불자이다.

 
엄 대장은 "산은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들어가면 그 정성을 외면하지 않고 기적으로 화답하는 것을 몸소 체험하면서 생긴 자신만의 일종의 예법"이라고 설명했다.

불교신자인 그는 망월사 부처님께 다소곳이 예를 올리고 본격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갈 곳이 있다고 했다. 등산로를 약간 비켜난 양지바른 곳에 이르자 추모비가 하나 서 있었다. 두꺼비 바위 아래쯤이다. 지난 1993년 시샤팡마 원정 때 실종된 후배 고 박병태의 추모비였다. 그는 추모비에 머리를 대고 한참 동안 흐느낀 후 "정말 아끼던 동생 같은 후배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상 산행 막바지.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TV가 있는 산 밑의 친구집에서 놀다 땅거미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린 왜 TV도 없이 이렇게 산속에서 가난하게 살아야만 하냐고 불평도 참 많이 했어요. 참 철이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 원도봉산 속에서 살았기에 저의 삶에 큰 보탬이 됐다고 백 번 천 번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엄홍길의 원도봉산 사랑은 이처럼 끝이 없었다.

글=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사진=이창우 산행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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