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1> 프롤로그

- 한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 /  인천상륙작전·장진호 전투 등
- 시간 흘러도 그날의 기억 생생 /  자유민주주의 지켜냈다 자부심

- 실패한 전쟁 평가에 가슴 아파 /  책·영화로 한국전 알리기 열정
- 당시 폐허가 된 서울 최근 방문 /  상전벽해 발전상에 눈물 흘려


미국 플로리다 템파 시에 위치한 '참전용사 추모공원'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6·25 참전용사 포드 머독(왼쪽) 씨와 에디 고 씨. 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 플로리다 주 정부 예산과 한인회의 기부금 등으로 뒤늦게 조성됐다.


 미국 플로리다의 중서부 해안도시 템파. 이곳 템파의 다운타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는 '참전용사 추모공원'이 있다. 아름드리 수목들 사이로 헬기와 전차 등이 곳곳에 전시돼 있고, 조그만 호수 주변엔 벤치가 조성돼 있는 이곳에는 한국의 6·25전쟁을 비롯 베트남전, 1·2차 세계대전 등 미국이 치른 12개 전쟁의 참전용사비가 서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에야 뒤늦게 세워졌다.

 이곳에서 만난 포드 머독(83) 씨. 6·25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그는 중사 계급장이 선명한 검은색 예복을 입고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맞아주었다. 보청기에 돋보기 안경, 주름 사이로 검버섯이 곳곳에 핀 바싹 마른 얼굴이었지만 대화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그는 책을 한 권 꺼내 보여주었다. '더 달라스 타임즈' 기자 출신의 빌 슬론이 2009년 쓴 'The Darkest Summer-Pusan and Inchon 1950'이었다. 탱크 위에 앉아 전우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책 속의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 땅을 밟은 후 한강철교를 건너 4일 만에 서울로 입성한 얘기부터 전봇대 위에 올라 화염병을 탱크에 던지며 저항하던 인민군, 동상에 걸려 발톱이 뽑히고 총탄이 가슴에 박혔지만 기적처럼 살아난 사실 등 당시의 절박하고도 치열했던 상황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설명했다.

 2010년 한국을 방문한 그는 전쟁 당시 폐허가 된 서울이 상전벽해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곤 눈물을 흘렸다. 그는 "목숨 바쳐 참전한 한국전쟁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였지만 그동안 미국 정부는 한국참전용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다행히 최근들어 주 정부와 한인회가 늦었지만 함께 참전용사 추모비를 세우고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어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지속해온 참전용사들의 한국에 대한 짝사랑이 최근 들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초신 퓨'와 '굳세어라 금순아'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에 앉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헤어질 무렵 머독 씨의 차 후미에 'THE CHOSHIN FEW / NOVEMBER-1950-DECEMBER / CHOSHIN RESERVOIR·KOREA'라 적힌 번호판 크기의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초신(CHOSHIN)'은 함경남도 장진(長津)의 일본식 독음. 6·25 당시 미군은 일본이 제작한 지도를 그대로 사용해 그들은 '장진'을 그렇게 불렀다. 장진호(湖)는 장진강에 발전용 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이다.  














포드 머독 씨의 차 후미에 '초신 퓨'라 적힌 스티커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 않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승기를 잡은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이 "성탄절을 고향에서 맞게 해 주겠다"고 속도 경쟁을 부추기자 미군들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원산항으로 상륙한 미 해병 1사단 1만2000명은 서부전선에서 북진 중인 미 8군과 압록강에서 합류해 전쟁을 끝낼 계획으로 장진호 계곡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하지만 개마고원 입구 장진호 주변에서 12만 명의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놓였다. 해발 2000m대의 고봉준령과 협곡, 그리고 영하 30도를 밑도는 한파 속에서 미 해병 1사단은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간 중공군의 겹봉쇄망을 뚫고 흥남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동시에 방어선을 구축, 피란민과 병력의 흥남 탈출을 위한 시간을 벌어준다.

 영도다리와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경인 '바람 찬 흥남부두'는 이때 퇴각한 병력 10만여 명과 민간인 10만여 명이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193척의 군함을 타고 탈출하는 과정을 묘사한 노래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2500여 명 사망, 2000명 실종, 5000명이 부상당했으며, 중공군은 사망·부상자가 4만 명을 넘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전사(戰史)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으며, 당시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했다. '초신 퓨(CHOSHIN FEW)'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몇 안 되는 전우들이 1983년 만든 모임 이름이다. 이날 포드 머독 씨와 동행한 한국 출신의 또 다른 '초신 퓨' 회원인 에디 고 씨는 "'초신 퓨' 회원들은 한국전쟁 참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우리는 6·25와 장진호 전투 그리고 코리아를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장진호 전투 등 6·25 전쟁을 잠시 잊은 사이 미국은 2000년 워싱턴DC 해군기념광장에서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초신 퓨' 6000여 회원 대부분이 이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포드 머독 씨는 "'초신 퓨' 회원들 대부분이 지금은 80대 이상의 고령이라 차츰 그 수가 줄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초신 퓨' 회원들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 분야에서 애쓰고 있다. 장진호 전투에 소총수로 참전한 마틴 러스 씨는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웬 씨는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라는 책을 썼다. 미 지명위원회는 2012년 알래스카의 한 무명봉을 '초신 퓨 산(Mount Chosin Few)'으로, 미 해군도 순양함 한 척을 '초신 퓨'로 공식 명명했다. 2년 전 개봉된 3D 최초의 전쟁영화 '17 Days of Winter'도 장진호 전투가 배경이다. 시간이 흘러도 미국에선 한국전쟁이 잊히지 않고 역사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 바쳐 참전… 꿈에도 못 잊어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에서 만난 참전용사 덴질 밧슨(86) 씨는 "코리아가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했지만 그곳에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숨걸고 싸웠다"며 "만일 한국전쟁이 또 일어난다 해도 다시 나가 싸우겠다"고 말했다. 당시 미 3사단에서 리틀 지브롤타, 피의 능선 등에서 싸운 그는 귀국 후 한국전쟁을 미국에선 '치안 활동' 내지 '내전' 정도로 폄하하는 것을 보고는 6·25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다큐 형식의 책(Korea, We Called it War)을 펴냈다. 이 책을 토대로 지역방송에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으며, 미주리 주립대에선 전쟁사 관련 교재로도 채택돼 학생들에게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만난 참전용사 다놀드 훼드먼(86) 씨는 한인교회에서 자원봉사로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참전 후 정신적 외상장애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길바닥에 내려앉게 될 딱한 사정의 한인 가족들을 조건없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와 함께 살고 있다. 

 미국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빛바랜 수첩과 앨범, 지도 등 전쟁 당시의 자료들을 신줏단지 모시듯했다. 집착일까.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한국사랑의 외적 표현이지 않을까.

 그들은 이기지 못한 실패한 전쟁이라고 폄하되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전쟁의 참전용사처럼 환영받지 못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들은 전쟁 발발 64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을 잊지 못하고 고향에서나마 6·25와 코리아를 가슴에 묻고 널리 알리고 있었다.

 본지는 '6·25 참전용사의 한국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을 찾아 전쟁 당시의 절박한 상황과 전역 후 코리아에 대한 짝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함께 되돌아봤다.


올란도 디즈니월드/ 휠체어 타고 탑승

장애인 의외로 많아 / 국내선 언제 그럴까

 

 지난해 말 미국 남부 플로리다를 취재차 다녀왔다. 뉴욕 시카고 등 미국 땅 동부와 중서부가 영하 20도 안팎을 기록할 때 플로리다는 긴소매 셔츠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뜻했고 사방은 온통 푸르렀다. 이곳이 왜 미국 부자들의 겨울 휴양지인지 그간의 궁금증이 확 풀렸다. 그야말로 축복의 땅이었다.

 취재가 잘 돼 하루 반나절 정도 일정이 비었다. 비행만 20시간인 이곳 플로리다를 언제 또 찾겠느냐며 주변에서 올란드행을 권했다. 차로 3시간쯤 걸린다기에 잠시 망설이자 돌아오는 대답이 걸작이다. 이 정도 거리면 한국에서 집 앞 반찬가게에 두부 사러가는 거나 진배 없다나.

 올란도의 '디즈니월드'는 상상을 초월했다. 매직킹덤, 애니멀킹덤, 할리우드 스튜디오, 앱콧 등 4개의 테마파크 각각이 LA나 도쿄, 홍콩의 '디즈니랜드'보다 규모가 크다. 개장 때 서둘러 입장, 두 끼를 대충 떼우고 쉼 없이 좇아다녀도 테마파크 하나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첨단 놀이기구를 가장 과학적으로 잘 구현해낸 신세계였다. 

진짜 상상을 초월한 장면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였다. 온종일 본 휠체어를 탄 사람들만 족히 100명은 넘었다. 휠체어와 테마파크. 얼핏 궁합이 안 맞는 듯 했지만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휠체어를 탄 채 장애인(노약자 포함)들이 놀이기구 탑승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충 본 후 가방 속에 쑤셔놓았던 브로슈어를 열어봤다. 안내지도에는 장애인과 ATM(현금자동입출금기) 표시가 먼저 눈에 띄었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우면서도 약자들의 배려를 잊지 않는 미국의 건강함이 새삼 느껴졌다. 장애인 탑승 가능 놀이기구가 그림과 함께 네 가지 범례로 꼼꼼하게 설명돼 있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이용, 휠체어를 옮겨타야 하는 경우, 전동휠체어 대신 스탠다드 휠체어로 바꿔 타야 하는 경우 등등. 부러우면서 존경심마저 들었다. 어린 장애아들이 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지 이해할 만했다.

 귀국 후 기자는 발목을 접질러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보름 입원 후 깁스를 한 채 퇴원, 목발에 의지해 출퇴근을 했다. 며칠간은 택시로 출퇴근했지만 이후 대중교통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본의 아닌 생계형 장애인 체험이었다. 깁스한 채 보름, 깁스 풀고 보조기를 착용한 채 보름여 간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했다. 지하철엔 노약석이 있어 그럭저럭 앉아갔다. 홈페이지에 엘리베이트 위치 표시가 안 돼 있는 것이 옥에 티였다. 수천억 원을 들여 잘 만들어놓고 화룡점정을 하지 못한 격이다. 공직에 장애인이 부족하니 아마 장애인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시민들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무척 부족했다. 이는 정말 예상 밖이어서 실망스러웠다. 버스가 도착하자 목발을 짚고 있는데도 부딪힐 듯 서둘러 앞질러 가거나, 뻔히 보고도 자리 양보는 거의 없었다. 

 깁스를 푼 후 천천히 운전도 시작했다. 문제는 주차였다. 아파트 지상주차장엔 멀쩡한 차량들이 장애인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애인스티커'에서 '주차불가' 부분을 아파트 스티커로 가린 얌체족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지하 3층에 주차한 후 힘겹게 올라올 땐 씁쓸하기까지 했다. 시대 흐름에 따라 관(官)은 지하철 엘리베이트나 저상버스 도입 등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점차 늘리고 있지만 정작 이를 주도해야 할 시민의식은 되레 낙제에 가까웠다.

 보행이 불편하면 심적으로 무척 위축된다. 기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장애인의 인간승리는 더 한층 우르러 보인다. 10여년 전 만난 미국 오하이오라이트주립대 차인홍 교수가 생각난다.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집안 사정도 어려워 9세 때 재활원에서 맡겨진 후 1990년 24세 때 모 재단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2000년 83대 1의 경쟁을 뚫고 바이올린 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됐다. 당시 그는 "장애인은 강인한 정신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어쩌면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우리사회가 그를 혹독하게 키워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오는 4월이면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동물원 '더 파크'가 문을 연다. 기장에도 동부산관광단지에 테마파크가 들어설 예정이다. 올란도의 '디즈니월드'만큼은 아니더라도 장애인들이 불편하지 않게 지금부터라도 좀 더 배려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닌가.


'죽음의 산' K2 베이스캠프 입구 둔덕에는 '메모리얼 힐'이라는 추모공간이 있다. K2에서 희생된 전 세계 산악인들을 애도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기자는 해발 5300m쯤 되는 K2 베이스캠프에서 홀로 다녀오느라 애깨나 먹었다. 이곳에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책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당사자인 영국의 아줌마 산악인 알리슨 하그리브스의 동판도 눈에 띈다. 1995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단독 등정한 그는 두 달간의 휴식 후 K2도 역시 무산소로 홀로 올랐지만 하산길에 목숨을 잃었다. 네 살, 여섯 살 난 두 아이를 두고서. 당시 첫째 아이가 공식회견장에서 아빠에게 엄마가 죽은 곳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아이와 아빠와의 K2트레킹이 현실화됐고, 이 트레킹 기록이 바로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내용이다. 당시 파키스탄은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트레킹을 지원했고, 영국의 BBC는 이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다시 한 번 전 세계 산악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인 히말라야에는 고금을 울리는 사연이 널려 있다. 지난 21일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길에 숨진 부산 산악인 서성호(34·부경대OB)의 사연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8000m 히말라야 12좌를 올랐다. 이 중 11좌를 이번에 세계 최단기간·아시아 최초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기록을 세운 김창호와 함께했다. 자일파트너로 친형제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2008년 세계 4위봉인 로체를 3일 만에 무산소로 올라 최단기간 기록 공인도 받았다. 
 

악계에선 김창호의 이번 기록을 깰 유일한 산악인으로 서성호를 꼽고 있지만 정작 서성호는 욕심이 없었다. 그는 평소 사석에서 "그저 산이 좋아 산에 올랐고, 가장 체력이 왕성할 때 고산등반의 기회가 생겨 열심히 하다 보니 운이 따랐다"고 겸손해했다.


 기록에 욕심이 있었다면 김창호보다 먼저 할 수도 있었다. 네팔인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오른 밍마 셰르파가 지난해 초 'K2·브로드피크 상업대'를 모집했다. 밍마는 2010년 7월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 부산원정대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며, 밍마의 동생은 같은 해 10월 시샤팡마 원정 때 역시 부산원정대의 신세를 졌다. 이런 인연으로 밍마는 부산원정대의 서성호가 K2와 브로드피크를 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곤 특별 초청했지만 서성호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남은 두 개를 올라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계에서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힘겹게 걸어온 그의 삶의 여정 때문이다. 어머니는 따로 살았고, 부친은 오랜 세월 중병을 앓았다. 대학 입학 후 그는 극심한 생활고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휴학 땐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과 각종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했다. 동생도 건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중 부친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제대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막노동 후 달밤엔 산악부 활동을 위해 운동장을 뛰고 철봉에 매달렸다. 2006년에는 부산원정대에 뽑혀 에베레스트도 올랐다. 다행히 그해 가을 10년 만에 하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됐다. 먹고사는 일이 더 급했던 그는 이듬해 여름 예정된 K2·브로드피크 등반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때 동행해 두 거봉을 올랐다면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그는 2011년 9월, 32세로 세계 최연소, 최단기간 히말라야 8000m 14좌 기록을 보유하게 됐으리라.


 '운명'이었을까. 재취업해 보통사람처럼 살고 있는 그에게 김창호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앞두고 도움을 요청했다. 생사를 같이 했던, 가장 좋아하던 '창호형'이었기에 기쁘게 함께했다.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채 펴보지도 못한 채.


 30일 오전 9시 부산시립의료원에서 부산산악연맹장으로 영결식이 열린다. 슬프다 안타깝다. 애오라지 산이 좋아 산에 살았던 그래서 산이 돼버린 서성호의 명복을 빈다.

 

2010년 낭가파트바트 때 정상에 선 김창호와 고 서성호.

 

2011년 발토르빙하에서. 왼쪽에서부터 홍보성 부산산악연맹 회장, 고 서성호, 김창호.

 

                           살아 생전의 서성호

 

 


 

<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진 히말라야 원정대. 왼쪽부터 서성호, 오영훈, 김창호 대장, 전푸르나, 안치영.>


김창호(44)는 세계 산악계가 인정하는 현역 최고의 산악인이다. 그의 등반 기록 중 압권은 후배인 고 이현조와 함께한 세계 최난도 거벽인 낭가바르파트(8125m) 루팔벽 등정이다. 루팔벽은 벽 구간만 세계 최장인 4500m에 평균 경사도 60도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거대 벽. 엄청난 경사 때문에 눈이 쌓이지 않아 흔히 '벌거벗은 산'으로 불린다.

루팔벽 초등은 1970년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69)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메스너는 함께 등정한 동생 귄터를 하산길에 잃었지만 김창호는 후배 이현조와 무사히 하산했다. 1986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현존하는 등반가의 전설로 불리는 메스너는 2004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에서의 삶과 죽음의 장대한 오디세이를 담은 'The Naked Mountain'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때보다 좋은 기술과 장비가 줄기차게 나왔지만 아직도 루팔벽은 재등되지 않고 있다. (중략) 앞으로도 전 세계 유능한 산악인 1000명 중 선택 받은 이는 아마 한 두 명일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이듬해 김창호 팀은 메스너의 예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35년 만에 루팔벽을 가뿐히 올랐다. 머슥해진 메스너는 2006년 친인척 40여 명과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베이스캠프로 떠나는 트레킹 팀에 특별히 김창호를 초청, 서로가 서로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김창호와 라인홀트 메스너.>

 김창호는 부산과의 인연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5000~7000m대의 미답봉을 주로 오르내리던 그에게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가 2006년 에베레스트를 오른 후 두 번째 대상 산인 K2 등반을 앞두고 카라코람 히말라야 전문가였던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그게 인연이 돼 김창호는 2007년 K2부터 2011년 초오유 등정까지 부산원정대의 히말라야 8000m급 13좌를 함께했다.

<2010년 7월 낭가바르파트 정상에 선 김창호(왼쪽)와 서성호.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2011년 파키스탄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발토리빙하에서 부산다이내믹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김창호(왼쪽 세 번째). 왼쪽 첫 번째 홍보성 대장, 두 번째가 서성호.>

<2011년 초오유 등반 때. 왼쪽부터 김창호, 홍보성 원정대장, 서성호.>


 현재 김창호는 히말라야 14좌 중 에베레스트 등정만 남겨놓고 있다. 사실 김창호는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 기회가 한 번 있었다. '도로공사 장애인 등반대'대원으로 참여해 마지막 캠프에서 김홍빈과 함께 등정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에 나섰던, 루팔벽에서 동고동락했던 후배 이현조와 오희준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등정 도전을 포기하고 시신 수습에 나서 결과적으로 기회를 놓쳤다.

 그가 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함께하는 대원은 그와 지금까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34/부경대OB), 안치영, 오영훈, 전푸르나.


 김창호의 이번 등반은 히말라야 14좌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라 다소 독특하면서도 의미있게 계획을 세웠다.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대원들 힘으로 해발 제로에서 출발한다. 인도 바카할리마을에서 갠지즈강의 지류인 후글리강에서 카약을 타고 강을 거슬러고(5일/50㎞), 갠지즈강을 따라 사이클을 타고 국경을 넘어 네팔로 집인한 후 (15일/1000㎞), 도보로 베이스캠프(15일/150㎞)에 도착해 정상에 오른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통상 등반기간보다 40일 정도 더 걸리고 비용도 배나 든다. 카약과 사이클은 이번 원정의 후원사인 몽벨과 LS네트웍스가 후원했다. 

 이번 등반에서 김창호는 무산소로 도전한다. 만일 등정에 성공한다면 김창호는 아시아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등정 기록을 세우게 된다. 세계 최초 무산소 기록은 메스너이며, 김창호는 14번째가 된다. 또 5월 중순에 정상에 오를 경우 1987년 예지 쿠쿠즈카가 세운 기록(7년 11개월 14일)도 경신, 최단 기간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자가 된다.


 한편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김창호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는 현재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2개, 무산소로는 10개 올랐다. 

김 대장은 "에베레스트 정상은 기압과 산소가 평지의 3분의 1 수준"이라며 무산소·무동력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설명했다. 

원정대의 등반 루트는 에베레스트 남동쪽 능선과 로체 서벽이다.
 원정대는 오는 11일 출국한다. 정상 등극은 5월 중순으로 보고 있으며, 그럴 경우 같은 달 30일 귀국할 예정이다.

 금아(琴兒) 피천득을 떠올리면 '아사꼬'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잔잔하게 그린 '인연'이 연상된다. 이 수필은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거니와 그 애틋한 서정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같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다시 읽으면서 아마 외국인으로 미국에서 살다보니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아사꼬의 남편에 관한 묘사가 바로 그것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꼬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아사꼬에 대한 식민지 청년의 연모는 청자 연적처럼 투명한 여운을 주지만 그녀의 남편을 향한 못난 질투가 엿보인다. 


  피천득은 진주군 장교였던 아사꼬의 남편이 어떤 비극을 겪었을지 아마 상상도 못하였을 것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지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부터 FBI는 일본계 미국인을 체포하거나 감금하기 시작했고 일본 이민자들을 집단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재산을 거의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은 중국인들이 매입했다고 한다. 일본계 은행은 파산했고 따라서 일본계 이주민들도 파산했으며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들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나 황무지 등에 배치되었으며, 감시하기 편리하도록 목욕탕이나 화장실에도 문을 없앴다. 일본에서 출생한 이민자들은 잠재적 스파이로 분류돼 감금됐고,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들은 충성서약을 강요받았다. 비충성 시민으로 분류되면 감옥에 격리 수용되었고, 충성시민으로 분류될 경우 군수품 공장 노동자로 일할 수 있게 중부내륙 등지로 보내주었다.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터전을 일구었던 12만 일본계 이주민들은 이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진주만 공격 직후부터 일본계 미국인들은 적성시민으로 간주돼 군입대가 거부되었지만 이후 충성서약을 받고 부모들을 감금 혹은 격리시설에 수용시켜 인질로 삼은 뒤,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 청년들을 전투에 투입시켰다. 그들이 바로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442연대다. 그들은 전장에 투입되는 순간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공을 세웠다. 단기간에 전체 미군 가운데 가장 훈장을 많이 받은 부대가 되었다. 사상자 비율은 순수 미군의 3배에 이르렀으며, 부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된 후에도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격전지에서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모두 수용소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와 맞먹는 이 전쟁범죄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현재까지 일본계 이주민과 일본계 미국인이 2차 대전 당시 적성행위를 한 것으로 보고된 사례는 없다. 전시의 파라노이아와 인종적 편견이 일본계 이주민에 대한 범죄를 정당화시켰을 뿐이다.
 아사꼬의 남편도 광기어린 인종차별에 간신히 살아남은 진주군 장교였을지 모른다. 피천득이 상상하는 '일본인' 아니면 '미국인'이라는 이분법적 분류와 달리 아사꼬의 남편은 일본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을 것이다. 더불어 일본 태생의 부모는 수용소에 감금돼 있고, 충성서약을 마치고 442연대에 배속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진주군 장교로 전후 일본에 배치되었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아사꼬와 세 번째 만났을 때 이런 역사적 맥락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종적 프레임은 강박적이고 역사적 이해는 누락되어 있다. 피천득의 '인연'은 그 애틋한 서정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적인 정신이 깃든 글이라고 한다면 금아(琴兒)에게 외람된 것일까. <미국 통신원-hyung0302@hanmail.net>

 

      캐나다 벤쿠버 해양박물관에 전시된 일본의 진주만 기습 및 태평양 전쟁 관련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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