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가라쿠니다케의 한자 표기 韓國岳에서 '국'자는 원래 약자(口+玉)를 사용하는데 이 놈의 티스토리에서 약자를 카피해서 앉혀보니 엉뚱하게 깨져 어쩔 수 없이 韓國岳을 사용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산 이름은 가라쿠니다케(1700m)지만 한자 표기는 신기하게도 '韓國岳(한국악)'입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국땅 일본 남규슈 미야자키에서였습니다. 정상적이라면 한국을 의미하는 '강고쿠'를 붙여 '강고쿠다케'라 불러야 하지만 이 산은 '가락국'을 의미한다며 '가라(가야)/ 쿠니(국)/ 다케(산)'로 풀이하더군요.
고대 일본과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고려해볼 때 충분히 개연성을 지닌 가설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호기심이 발동해 좀 더 물어봤지만, 현지에서는 아쉽게도 더 나올 게 없었습니다.
신모에다케이고 맨 뒤 높은 봉우리가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다카치호미네이다.
일본 땅, 그중에서 규슈 남단의 미야자키에서 '韓國岳'이 '가라쿠니다케'로 불리게 된 배경이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서기'에 따르면 4세기 한반도에서는 거듭된 전쟁 때문에 새로운 생활 무대로 일본 열도가 대두하자 가야 백제 신라 유민들이 집단 이주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당시 열도에는 통일된 국가라기보다 호족이 지배하는 소국이 산재해 언어 관습 등이 지역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을 '멀리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의 '도래인'(渡來人)으로 불렀답니다. '도래인'은 토목 양잠 등 당시로선 선진기술을 사용했고, 한문으로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등 일본인의 생활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고향을 떠나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야자키에 정착한 '도래인'도 예외가 아니었겠지요. 보름달이 뜨면 그들은 미야자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가라쿠니다케에 올라 고향인 한반도 방향을 바라보며 수구초심의 마음을 느끼며 흐느꼈겠지요.
하지만 일본의 건국 신화를 다룬 '고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과 달리 가라쿠니다케에서 한국은 아예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다는 열망의 우회적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라쿠니다케는 미야자키의 서쪽 끝 가고시마와의 경계에 솟아 있습니다. 행정구역으론 미야자키현 고바야시市에 똬리를 틀고 있는 셈이지요.
앉은 터로 봐선 결코 평범한 산이 아닙니다. 일본 국립공원 1호의 일부인 기리시마 산 군의 시·종점이자 최고봉입니다. 곳곳에 분화구와 칼데라가 산재해 이국적 풍광을 선사하는 기리시마 산군은 일본의 대표적 활화산 지대입니다. 주요 봉우리는 가라쿠니다케(1700m) 시시고다케(1428m) 신모에다케(1421m) 나카다케(1345m) 다카치호미네(1574m) 등 5개. 한국인들은 가라쿠니다케를 주로 찾지만, 일본인들은 일본국을 세운 신들이 내려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다카치호미네를 선호합니다.
에비노고원에서 가라쿠니다케로 오르는 들머리. |
30~40m쯤 올라 내려다본 들머리. |
들어리 입구에는 신모에다케의 출입을 금한다는 문구가 한글로 적혀 있다. |
해발 1200m로 올라오는 에비노고원의 꼬부랑길. 경남 함양 마천으로 가는 지안재길이 연상된다. |
기리시마 산군의 5개 봉우리를 잇는 종주 거리는 13.7㎞로 5시간쯤 걸립니다. 하지만 맨 가운데 신모에다케가 지난 7월 화산 폭발을 일으켜 지금은 종주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산행 들머리에 한글로 적혀 있지만, 한국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하게 종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행한 기리시마 네이처가이드클럽 후루조노(63) 씨는 그래서 "한국인들은 매너가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얼굴이 후큰 달아올라 표정 관리하느라 애간장 좀 탔습니다.
지난 7월 화산 폭발 당시의 신모에다케. 이 사진은 후루노조 씨의 친구가 위험을 무릅쓰고 찍었다.
들머리에서 약간 오르면 건너편에 구릉이 하나 보인다. 이오야마라는 휴화산으로 242년 전에
화산 폭발로 인해 만들어진 산이란다. 30년 전 연기는 났지만 폭발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라쿠니다케만 올라 허전하다면 기리시마 산군에서 가장 큰 칼데라호인 오나미이케(大浪池)를 다녀오는 코스를 택한다면 좋을 듯 합니다. 에비노고원에서 오르는 데 1시간20분, 오나미이케까지 1시간, 지름 1㎞인 오나미이케를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30분, 다시 가라쿠니다케까지 1시간, 하산하는 데 1시간 등 모두 5시50분쯤 걸립니다.
가라쿠니다케에서 기리시마 산군에서 가장 큰 칼데라호(지름 1 ㎞)인 오나미이케(大浪池)로 가는 길이 무척 아름답다.
한자 표기로 봐선 큰 파도가 일렁이는 못이라는 의미의, 지름이 1 ㎞인 오나미이케(大浪池).
미야자키 고바야시 출신으로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지켜온 토박이인 후루조노(오른쪽 사진) 씨는 "가라쿠니다케는 아마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눈을 감고도 오를 수 있을 정도랍니다.
그는 이번 주도 5일을 올랐다고 합니다. 하산 후 헤어지기 전 우연히 본 그의 차 트렁크에는 텐트부터 코펠 등 온갖 등산용품이 가득했습니다. 전형적인 산꾼이었습니다.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보이자 그는 웃으면서 마누라에게 오늘 밤 당장 쫒겨나도 견디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예의 사람 좋은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더군요.
가라쿠니다케만 오르려면 차가 올라가는 에비노고원(1200m)에서 왕복 4.2㎞만 걸으면 가볍게 다녀올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보통 걸음으로 통상 오를 땐 1시간20분, 정상에서 20분, 하산 때 1시간 정도 잡으면 됩니다. 화산 폭발에 의해 생성된 이 산 정상부에는 온통 붉은빛의 화산암과 흙이 눈길을 끕니다.
가라쿠니다케 정상에선 기리시마 연봉이 한눈에 보이는 데다 날이 맑을 땐 이웃한 가고시마현의 대표적 활화산인 사쿠라지마가 뿜어내는 하얀 연기까지 보입니다. '韓國岳'이라 적힌 정상 이정표 너머에는 300m쯤 되는 낭떠러지 아래 한라산 백록담의 5배쯤 되는 거대한 분화구가 등산객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먼발치에는 기리시마 산군에서 가장 큰 칼데라호인 지름 1㎞가 넘는 오나미노이케(大浪池)도 시야에 들어온다.
후루조노 씨는 "5~6월이면 키 작은 산철쭉인 미야마 기리시마가 온 산을 불태워 한국에서도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고 말했다.
참 한 가지 더 소개할 것이 있습니다. 후루노조 씨는 가라쿠니다케에만 있는 한국 나무가 있답니다. '탐라나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일본어로는 사외후다기(받아 적긴 적었는데 바로 적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합디다. 다른 산에는 보이지 않고 유독 가라쿠니다케에만 발견된다고 합니다. 매년 8월이면 하얀 꽃을 피운답니다. 탐라나무. 당겨서 찍어봤다. 처음엔 가파른 길이 계속된다. 무엇일까요. 무인 사람 수 측정기.
전체적으로 생각해볼 때 후루노조 씨의 설명은 앞뒤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10년쯤 된 강의노트 한 권 달랑 들고 강의하는, 공부 안 하는 학자보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사람들이 더 정확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내용은 발로 뛰며 제대로 공부하는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행여나 이 글을 읽는 분 중 자세한 내용을 아시는 분은 댓글로 설명을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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