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지원 뚝 붕괴 직전, 전문의도 곳곳 잇단 탈출
환자·가족 고통 생각하길…정부 획기적 결단 필요해
애초 의정 갈등의 핵심은 의과대학 정원의 증원 문제가 아니었다. 의사들은 필수의료 강화, 의료분쟁 부담 완화 방안 등을 마련해 달라는 거였다. 이런 직간접 요구는 의사들 숙원이었지만 미지근한 보건복지부 반응이 확인되자 필수의료 쪽 곳곳에서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명을 다루는 필수의료를 사명감 하나 갖고 공부했으나 기다리는 건 암울한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 틈은 돈 많이 버는 소위 ‘피부·미용’ 쪽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비필수 의료가 돈을 더 많이 버는 건 의료계 잘못이라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현실 앞에선 강제할 수 없었다. 실제 주머니는 두둑해졌고 당직을 안 서서 좋았다. 무엇보다 의료 소송의 위험이 없었다.
한 명 나가니 또 한 명 나갔다. 다른 한 명은 아예 보따리를 싸고 서울로 갔다. 덕분에 남은 교수들에게 기다리는 건 과중한 일 그 자체였다. 과거 40, 50대 선배 의사들이 몸으로 때우며 버텨오던 방식이 MZ세대에겐 더는 통하지 않았다. 돈은 좀 적게 벌더라도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걸 천직으로 알던 중년 교수들도 차츰 지쳐갔다. 개업의 내지 봉직의와의 월급 차가 1.5~2배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요즘 들리는 말로는 3, 4배까지 벌어져 더 버틸 수 없었다.
여기에 ‘응급실 뺑뺑이’로 욕은 왜 이리 많이 하는지. 응급 환자를 못 받는 건 우선 베드가 없어서다. 조금만 아프면 1, 2차 병원 놔두고 대부분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기 때문이다. 술 마시다 배가 아파 수액을 맞겠다고 찾아와도 받아야 했고, 당장 퇴원해도 될 경증 환자들을 내쫓을 수도 없다. 법도 의사들 편이 아니다. 지난해 ‘응급실 뺑뺑이’를 막는다며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발효됐다. 아무리 가망 없는 환자여도 병원 도착 후 사망하면 소송까지 각오해야 했다. 이후 모 대학병원 소아전문응급센터 전문의 5명이 병원을 떠났다. 법과 현장의 괴리가 그만큼 크다는 거다.
필수의료 중 가장 기피 과인 흉부외과를 한번 보자. 붕괴 직전이다. 나이 50이 넘은 교수들이 3일이 멀다 하고 당직을 선다. 밤엔 10시간 동안 수술한 환자 상태를 체크하느라 중환자실 문턱이 닳도록 오간다. 당직 다음 날 오전 진료도 봐야 한다. 전문의는 하루 평균 12.7시간 근무하고 51%가 ‘번 아웃’ 상태라 설문에 답했다. 전국 흉부외과 수련병원 기준, 전공의가 아예 없는 병원이 절반이다. 1년 차 전공의가 와도 2~4년 차가 없어 제대로 된 수련이 어렵다. 중도 이탈률마저 가장 높아 전공의 4명 중 1명이 포기한다. 올해부턴 전문의 은퇴 및 배출 역전 현상도 시작됐다.최근 흉부외과 수술 중 하나인 개심술, 폐엽절제술 진료수요가 인구 고령화로 늘고 있음에도 전공의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게 더 문제다. 교수들조차 지원하는 전공의를 두고 ‘왜 오지’ 하며 의아해할 정도다.
산부인과도 사정은 마찬가지. 지난해 서울대병원에서 고위험 분만을 담당하는 산과 전문의 지원자는 재작년에 이어 제로였다. 낮은 수가, 잦은 응급 상황에 더해 태아 머리가 골반에 걸리면서 불가항력적인 일이 이따금 발생해 소송 위험이 크다. 실제 산과 소송은 배상액이 10억~15억 원에 달한다.
소아청소년과는 지난해 상반기 전공의 지원율이 16.3%로 재작년(23.0%)에 이어 2년 연속 꼴찌다. 신생아집중치료실 소아응급실 소아중환자실 등 세부전공 간 벽이 높고 수가도 현저히 낮다. 벌이는 적어도 마니아층이 있었지만 이젠 이마저도 끊긴 상태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미숙아가 많이 태어나는 만큼 이젠 의료 영역이 아닌 저출생의 큰 카테고리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지난해 ‘필수의료 강화 및 의료체계 개선’을 목표로 ‘의료현안협의체’를 구성, 26차례나 회의했다. 지난 1월 말 27번째 만났다. 필수의료 강화가 현안이었지 의대 증원 문제는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총선을 2개월 앞둔 지난 2월 정부는 의협과 한마디 상의 없이 ‘의대 증원 2000명’을 들고 나왔다. 이후 전공의 사태, 의대생 수업 거부, 교수 사표 등이 이어졌고 최근에는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열렸다. 의사들 없이 진행된 개혁특위가 어떤 결론을 내려도 지금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의사들은 정부가 과연 필수의료 분야를 살릴 생각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한다. 획기적인 조치 없이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의대생 2만 명을 늘려도 지원자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필수의료 회생 여부는 대승적 차원의 정부 결단의 문제이지 의대 증원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애초 의료계 현실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니 처방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고통받는 환자와 가족들이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그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하루빨리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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