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지원 뚝 붕괴 직전, 전문의도 곳곳 잇단 탈출

환자·가족 고통 생각하길…정부 획기적 결단 필요해

 

 

애초 의정 갈등의 핵심은 의과대학 정원의 증원 문제가 아니었다. 의사들은 필수의료 강화, 의료분쟁 부담 완화 방안 등을 마련해 달라는 거였다. 이런 직간접 요구는 의사들 숙원이었지만 미지근한 보건복지부 반응이 확인되자 필수의료 쪽 곳곳에서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명을 다루는 필수의료를 사명감 하나 갖고 공부했으나 기다리는 건 암울한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 틈은 돈 많이 버는 소위 ‘피부·미용’ 쪽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비필수 의료가 돈을 더 많이 버는 건 의료계 잘못이라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현실 앞에선 강제할 수 없었다. 실제 주머니는 두둑해졌고 당직을 안 서서 좋았다. 무엇보다 의료 소송의 위험이 없었다.

 

한 명 나가니 또 한 명 나갔다. 다른 한 명은 아예 보따리를 싸고 서울로 갔다. 덕분에 남은 교수들에게 기다리는 건 과중한 일 그 자체였다. 과거 40, 50대 선배 의사들이 몸으로 때우며 버텨오던 방식이 MZ세대에겐 더는 통하지 않았다. 돈은 좀 적게 벌더라도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걸 천직으로 알던 중년 교수들도 차츰 지쳐갔다. 개업의 내지 봉직의와의 월급 차가 1.5~2배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요즘 들리는 말로는 3, 4배까지 벌어져 더 버틸 수 없었다.

여기에 ‘응급실 뺑뺑이’로 욕은 왜 이리 많이 하는지. 응급 환자를 못 받는 건 우선 베드가 없어서다. 조금만 아프면 1, 2차 병원 놔두고 대부분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기 때문이다. 술 마시다 배가 아파 수액을 맞겠다고 찾아와도 받아야 했고, 당장 퇴원해도 될 경증 환자들을 내쫓을 수도 없다. 법도 의사들 편이 아니다. 지난해 ‘응급실 뺑뺑이’를 막는다며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발효됐다. 아무리 가망 없는 환자여도 병원 도착 후 사망하면 소송까지 각오해야 했다. 이후 모 대학병원 소아전문응급센터 전문의 5명이 병원을 떠났다. 법과 현장의 괴리가 그만큼 크다는 거다.

필수의료 중 가장 기피 과인 흉부외과를 한번 보자. 붕괴 직전이다. 나이 50이 넘은 교수들이 3일이 멀다 하고 당직을 선다. 밤엔 10시간 동안 수술한 환자 상태를 체크하느라 중환자실 문턱이 닳도록 오간다. 당직 다음 날 오전 진료도 봐야 한다. 전문의는 하루 평균 12.7시간 근무하고 51%가 ‘번 아웃’ 상태라 설문에 답했다. 전국 흉부외과 수련병원 기준, 전공의가 아예 없는 병원이 절반이다. 1년 차 전공의가 와도 2~4년 차가 없어 제대로 된 수련이 어렵다. 중도 이탈률마저 가장 높아 전공의 4명 중 1명이 포기한다. 올해부턴 전문의 은퇴 및 배출 역전 현상도 시작됐다.최근 흉부외과 수술 중 하나인 개심술, 폐엽절제술 진료수요가 인구 고령화로 늘고 있음에도 전공의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게 더 문제다. 교수들조차 지원하는 전공의를 두고 ‘왜 오지’ 하며 의아해할 정도다.

산부인과도 사정은 마찬가지. 지난해 서울대병원에서 고위험 분만을 담당하는 산과 전문의 지원자는 재작년에 이어 제로였다. 낮은 수가, 잦은 응급 상황에 더해 태아 머리가 골반에 걸리면서 불가항력적인 일이 이따금 발생해 소송 위험이 크다. 실제 산과 소송은 배상액이 10억~15억 원에 달한다.

소아청소년과는 지난해 상반기 전공의 지원율이 16.3%로 재작년(23.0%)에 이어 2년 연속 꼴찌다. 신생아집중치료실 소아응급실 소아중환자실 등 세부전공 간 벽이 높고 수가도 현저히 낮다. 벌이는 적어도 마니아층이 있었지만 이젠 이마저도 끊긴 상태다. 의료 기술의 발달로 미숙아가 많이 태어나는 만큼 이젠 의료 영역이 아닌 저출생의 큰 카테고리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지난해 ‘필수의료 강화 및 의료체계 개선’을 목표로 ‘의료현안협의체’를 구성, 26차례나 회의했다. 지난 1월 말 27번째 만났다. 필수의료 강화가 현안이었지 의대 증원 문제는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총선을 2개월 앞둔 지난 2월 정부는 의협과 한마디 상의 없이 ‘의대 증원 2000명’을 들고 나왔다. 이후 전공의 사태, 의대생 수업 거부, 교수 사표 등이 이어졌고 최근에는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가 열렸다. 의사들 없이 진행된 개혁특위가 어떤 결론을 내려도 지금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의사들은 정부가 과연 필수의료 분야를 살릴 생각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한다. 획기적인 조치 없이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의대생 2만 명을 늘려도 지원자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필수의료 회생 여부는 대승적 차원의 정부 결단의 문제이지 의대 증원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애초 의료계 현실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니 처방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고통받는 환자와 가족들이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그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하루빨리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필수의료 #응급실 뺑뺑이 #소아전문 응급센터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의료현안협의체  #대한의사협회  #의료개혁특별위원회

반야용선(般若龍船). ‘진리를 깨닫는 지혜(반야)의 세계로 용이 이끄는 배(용선)’로 풀이된다. 다시 말해 중생을 고통 없는 피안의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상상의 배를 의미한다. 법당은 사부대중이 부처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의 선실과 같은 곳이다. 법당 건물이나 축대 계단 등에 조각된 용머리와 용꼬리, 거북 게 등은 이 법당이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법당에서의 기도 시주 등은 바로 피안의 극락정토에 다다르려는 작은 몸부림인 셈이다. 



국내 사찰에 표현 양식은 좀 다르지만 피안의 세계를 향하는 반야용선 형상을 한 곳이 더러 있다.

 

청도 와인터널 인근 천년고찰 대적사 극락전 화강암 기단부에는 게와 거북 문양 돋을새김이 있다. 거북 한 마리가 온 힘을 다해 기둥 모서리를 붙잡고 법당으로 기어오르는 모습이다. 이는 기단부가 바다, 법당이 중생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반야용선임을 상징한다.

 

국내 최대 비구니 교육도량인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천장에는 용 모양의 나무 배에 인형 하나가 줄에 의지해 매달려 있다. 불가에선 반야용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이 동자를 악착동자라고 부른다. 나 홀로 극락정토로 갈 능력은 안 되고, 하지만 가고는 싶은 동자의 솔직한 외적 표현이라 보는 이의 마음을 새삼 다잡게 해준다.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해남 달마산이 품은 미황사 대웅전은 그 자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반야용선이다. 대웅전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에는 고해를 헤치고 나아가는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다. 불교 성지 인도에서 경전과 부처상을 실은 배 한 척이 달마산 포구 아래 닿았다는 창건 설화를 뒷받침해준다.

 

양산 영축산 통도사 극락전 뒷벽에는 반야용선도가 그려져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로 구도와 내용면에서 보기 드문 수작이다. 극락전의 가치를 더 높여준다.

창녕 화왕산 관룡사 용선대는 이름에서부터 반야용선임을 암시한다. 용선대는 용의 등줄기 같은 관룡산 화강암 줄기가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다 멈춘 절벽으로, 멀리서 보면 용 모양을 한 뱃머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선대에는 3m 높이의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이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앉아 있다. 이곳을 찾는 불자들이 용선대로 오가는 도중 만나는 관룡사 계곡 전체를 ‘극락정토로 가는 거대한 배’라고 부르는 이유다.

부처님오신날이 코앞이다.  아직 절집을 찾지 않았다면 잠시 세속의 짐을 내려놓고 부처님 말씀을 되새겨보면 어떨까.

 

#반야용선 #대적사 극락전 #운문사  #악착동자 #미황사 대웅전 #호남의 금강산 #달마산 미황사  #통도사 극락전 #관룡사 용선대   #부처님오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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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에 구글 메타(옛 페이스북)가 있다면 시애틀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이 있다. 그래서 시애틀을 흔히 제2의 실리콘밸리라 부른다. 미국의 빅테크(대형 기술기업)들과 이를 꿈꾸는 스타트업들이 몰려 있는 두 도시는 전 세계 엔지니어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화려함 이면에는 고용유연성으로 상징되는 해고가 상존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제 위기가 닥치자 미 정부는  사실상 제로 금리와 무제한 양적완화로 경기를 부양했다. 돈이 풀리자 빅테크에 투자가 넘쳐나 공격적 경영으로 기업 가치를 높였다.
 
이후 팬데믹이 끝나며 시장이 고금리로 돌아서자 대량 해고가 시작됐다. 2022년 중반부터 올해 초까지 구글 등 빅테크들은 수만 명씩을 내보냈다. ‘일주일 후 30% 감원’이라는 이메일 한 통으로. 출입카드 작동 불능이나 재택근무 때 로그인 제한 등 해고 방법도 냉정하다. 빅테크가 대규모 감원 가능한 근거는 어떤 사유 설명 경고 없이도 고용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는, 노동법에 규정된 임의고용제도(At-will Employment)다.

빅테크 중 가장 악명 높은 곳은 PIP(Performance Improvement Plan·성과 개선 계획) 프로그램을 악용하는 아마존이다. 매니저가 하위 10% 인력을 PIP 프로그램에 넣고 실적이 눈에 띄게 향상되지 않으면 해고하는 제도다. 팀원 전원이 모두 잘 해도 그중 하위 10%를 골라야 한다. 동료가 경쟁자여서 협력을 안 하면 그것도 평가에 들어간다. 직원들이 항상 전투적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게 되는 이유다.
 
임의고용제도가 있어도 미국에는 부당해고 소송이 적지 않다. 아마존의 PIP는 혹여 소송이 들어와도 직원 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는 논리를 펼치기 위해 도입된 프로그램이라 거의 승소한다. 해서, 업계에선 아마존에서 3년 이상 근무 경력이 있으면 검증된 지원자라는 암묵적 동의가 이뤄진다.

미국 전기차업체 테슬라가 대규모 해고를 한 달 넘게 진행해 직원들이 매일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한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런 상황을 한국의 TV시리즈 ‘오징어게임’과 흡사하다고 보도했다. 해고는 비단 빅테크뿐만 아니라 제조업체에도 만연돼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에선 고용유연성과 관련, ‘고인물’이 용납되지 않는 직장 문화가 개인과 회사의 성장을 견인하는 발판이라고 여긴다.
 
 한국도 이제 변화를 모색해야 될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한국의 고용유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18위다.(세계경제포럼 2022년 글로벌 경쟁력 보고서)
 
 
#아마존 #고용유연성 #실리콘밸리 #임의고용제도 #빅테크  #PIP  #빅테크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8)는 4대 메이저대회 중 가장 권위 있는 마스터스에 유독 강했다. 통산 109승 중 마스터스에서 5번 우승했다. ‘골프 전설’ 잭 니클라우스(84)의 6회에 이어 두 번째다.

1996년 데뷔 5개월 만에 3승을 하더니 이듬해인 1997년 마스터스를 21세3개월14일 만의 최연소 나이(종전 23세 4일)로 제패, 그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더 놀라운 건 18언더파라는 역대 최저타수(종전 17언더파) 기록이다. 개최지인 조지아주 오거스타GC는 전장이 아주 긴 데다 ‘유리알’ 그린에 까다로운 아멘코스(11~13번홀)로 악명 높기 때문. 대개 10언더파 이하로 그린재킷 주인공이 결정되는 까닭이다. 프로 입문 8개월 만의 최단 기간 우승, 2위와 역대 최대 타수 차(12타) 우승도 당분간 깨지기 힘든 새 기록이었다.

젊은 우즈의 최대 무기는 장타였다. 50야드 더 나가는 평균 323.1야드의 장쾌한 드라이브 샷은 파5 홀에서만 이글 2개, 버디 10개를 견인했다. 동반자들은 자빠졌고, 갤러리들은 환호했다. 실제 첫날 전 대회 챔피언 닉 팔도는 74타, 2R 폴 어이징어는 73타, 3R의 콜린 몽고메리는 75타, 최종일 콘스탄티노 로카 역시 75타로 무너졌다. 메이저대회 첫 흑인 챔피언이란 점도 의미가 아주 컸다.

우즈는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메이저대회를 석권했다. 2000년에는 US오픈, 디 오픈, PGA챔피언십 3개를 내리 차지하더니 이듬해 마스터스마저 우승, 4대 메이저대회 연속 우승 기록도 세웠다.

2008년 이후에는 잇단 수술과 섹스스캔들 여파로 정상적인 경기를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2019년 43세의 나이로 특히 애착이 강한 마스터스에서 역전 우승하며 또 한 번의 기적을 연출했다. 당시 언론에선 22세 첫 우승이 기적이라면 43세 우승은 더 큰 기적이라 보도했다.

2021년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우즈는 불굴의 의지로 고통스러운 재활을 이겨내고 지난 주말 막을 내린 마스터스에 출전했다. 결과는 4R 합계 16오버파 304타로 컷 통과자 60명 중 꼴찌였다. 304타는 프로 데뷔 후 써낸 최악의 스코어다. 기자회견에서 ‘언제쯤 명예 시타를 할 것 같으냐’는 조롱 섞인 질문도 받았지만 우즈는 “나의 꿈은 여전히 마스터스 우승”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실현되면 두 개의 기록이 추가된다. 잭 니클라우스와 함께 최다 우승 공동 1위, 그리고 최고령 우승이 그것이다. 내년 4월 오거스타에서 그의 우승을 기원한다.


아시아드CC의 유일한 아일랜드 홀인 벨리 6번.


 지난 2012년 7월 초 허남식 당시 부산시장은 김헌수 신임 아시아드CC 사장을 따로 불러 변화와 개혁을 주문했다. 시가 최대 주주인 아시아드CC는 그간 시 간부나 정치권 인사가 대표를 맡다 보니 전문성이 결여돼 '고인 물'로 치부됐다.

 그는 제일모직에 입사한 삼성맨이었다. 국내 골프장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삼성 계열의 안양베네스트CC 총무과장으로 발령나면서 골프장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32년간 골프장 밥만 먹었다. 그중 절반은 5곳의 국내외 골프장의 CEO로 보냈다.

 부임 직후 회원들의 주말 부킹 현황부터 체크했다. 월 2회 주말 부킹 보장 원칙 준수를 위해서였다. 수십 명의 회원이 특혜를 받고 있어 담당 직원 교체와 함께 공평한 원칙 준수를 지시했다.

 보고 체계는 현안을 바깥에서 먼저 알 정도로 심각했다. 조직도 엉망이었다. 전용 운전기사인 60대 후반의 계약직 직원은 타 시·도 출장운행을 거부했고, 특정 부서 장기 근무자는 텃세가 심했다. 전문성이 요구되는 자리에 무자격자들도 있었다. 인사를 단행했지만 언론에선 '인사 잡음'이라 지적했다. 심지어 모 팀장의 인사 문제와 관련, 오전 상황만을 묶어 그 다음 날 바로 '끝없는 잡음'으로 오보가 나오는 촌극이 일기도 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주인공처럼 빅브라더에 의해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또 다른 팀장은 지시 불이행에 잇단 거짓말, 그리고 출근 후 잠적까지 일삼아 징계위 소집을 했지만 이번엔 시의 간부들이 압력을 넣었다. 위에선 개혁을 주문했고, 아래와 주변에선 흔들었다. 

 재임 기간 내내 첫 티오프 최소 30분 전에 출근하고 평소 직원식당에서 식사를 한 그는 일도 참 많이 했다. 골프장의 필수인 장비창고가 없어 고가 장비들이 노천에 방치된 것을 보곤 1년 6개월에 걸쳐 허가를 받아 지난해 5월 5억 원을 들여 지었다. 그간 인근 골프장에서 빌려 쓰던 대형 장비들도 20대(12억 원)나 구입했다. 비만 오면 질퍽거렸던 페어웨이의 배수공사도 90% 정도 해결했다. 파보니 날림공사였다. 페어웨이 옆 굳이 잔디가 필요없는 공간 60여 곳엔 억새와 영산홍을 심어 조경 변화도 주며 관리비를 대폭 줄였다. 카트 도로(12㎞)도 새로 포장했다. 조용히 있다 떠난 전임 낙하산 대표들과는 달랐다. 

 여자 프로골프대회 무산은 부산의 자존심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대회 주최 측은 영업 보상금을 시가보다 무려 수천만 원이나 후려치고 개최일을 하루 더 달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결렬됐고, 주최 측은 인근 B, H 골프장도 찾았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대회 주최 관련 금품 요구 루머는 결단코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구매, 공사 관련 계약은 담당 팀장에게 일임하고, 외부에서 회원들을 절대 만나지 않는 원칙이 그간 백 없는 촌놈의 생존법이라고 했다.

 무단 벌목에 대해선 사과했다. 허가된 체육시설에서의 벌목은 가능한 줄 알았단다. 빽빽하게 웃자란 소나무와 잡목이 햇빛과 통풍을 막아 그린 잔디를 죽게 해 단행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조경업을 하는 회원의 권유가 계기였다. 비록 벌금을 맞았지만 덕분에 그린이 좋아졌다고 웃는다. 하지만 두 번째 무단 벌목은 억울하다고 했다. 군의 허가를 받았으며 단지 착공 5일 전 고지 의무라는 단순 행정절차 미비였는데 언론에선 또다시 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대형 오보를 냈다. 벌목으로 인해 그토록 시달렸으면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을 법한데 그는 이후 조경을 위해 숲 속의 제법 큰 관목을 홀과 홀 사이에 250그루나 옮겨심었다. 이식은 허가 안 받아도 된다며 또 웃는다.

 소회를 물었다. 페어웨이는 이제 정리됐고, 앞으로 숲 속의 관목을 페어웨이 쪽으로 좀 더 이식하면 진정 명문 골프장이 될 거라며 후임자에게 전해야겠다고 했다. 주가가 회사의 자산가치를 반영하듯 골프장 회원권 가격은 곧 경영평가의 척도다. 그가 떠날 때인 지난 연말 가격이 부임할 때보다 30%나 올랐다. 같은 기간 타 골프장의 가격은 보합권이었다. '고인 물'이 2년 6개월 뒤 '청정수'로 인증받은 셈이다.


 지난해 7월 중순 아시아드 회원 중 절반인 350명이 그의 임기를 보장하라고 서명한 탄원서를 서병수 시장에게 직접 전달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그는 갖은 오해와 수모를 받으며 떠났다. 그 자리엔 서 시장 선거 캠프 출신의 골프 문외한이 앉아 있다. 유임된 허 전 시장의 정무특보 출신의 낙하산 이사와 함께.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사퇴 종용 논란에서 봤듯이 부산은 왜 전문가 예우에 인색할까.


아시아드CC에서 까다로운 홀 중 하나인 파인 7번 홀의 세컨 샷 모습.

■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4>미주리 주 리퍼블릭- 덴질 밧슨

- 징집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참전 / 빗발친 포탄·총알 속 치열한 교전
- 고왕산 전투는 아직도 기억 생생 / 전역 후 한국전쟁 관련 책 저술
- 참전용사 필독서·대학수업 교재로 /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TV 방영도

- 함께 싸웠던 대원 하나 둘씩 타계 /  이젠 30명 중 7명 남아 가슴 아파
- 건강 회복하면 꼭 한국 찾아갈 것


한국전 참전용사 덴질 밧슨 씨 부부가 지난달 중순 자신이 사는 미주리 주의 소도시 리퍼블릭의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날은 북극한파의 영향으로 몹시 추웠고 눈도 많이 왔다.

 목숨 걸고 싸운 2300여 전우들이 잠들어 있는 성지, 유엔기념공원이 있는 부산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그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마음씨 좋은 백인 할아버지인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악수 대신 기자를 안아주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달 15일 미국 미주리 주의 소도시 리퍼블릭에서 만난 한국전쟁 참전용사 덴질 밧슨(86) 씨. 유난히 큰 목젖에 움푹 팬 주름이 세월의 더께를 말해주고 있었지만 이날을 위해 그는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6년 전 그는 폐암수술을 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완치됐지만 3, 4년 전부턴 신장염과 관절염이 도져 고생꽤나 했다고 동행한 그의 부인 에바 밧슨이 귀띔했다. 

 고교 동기로 한국전쟁 참전 3개월 전 결혼했다는 그는 3년 전 그토록 그리던 한국 방문의 기회가 있었지만 다리가 아파 포기했다. 하지만 그는 꿈을 접지 않았다. 다시 찾아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도 건강회복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군 제대 후 지역 언론사에서 기자로 17년간 근무했다는 그는 1999년 'Korea, We Called it War'라는 책을 냈다. 1951년 9월부터 1952년 9월까지 참전한 밧슨 씨가 전장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술한 책이다. 초판 이후 제법 팔려 2003년 네 번째 개정판을 냈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전역 후 미국 정부의 한국전쟁 폄하 때문. 귀국할 때 환영은 둘째 치고 4만 명에 가까운 미국 젊은이가 죽고, 10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고, 8000명 이상이 행방불명됐고, 7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지만 정부에선 '치안 활동' 내지 '내전' 정도로 치부하는 것에 실망을 느껴 그것이 '전쟁'이었음을 알리고 싶었다.

 코리아 입장에선 승자도 패자도 없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란이겠지만 한국전쟁은 당시 세계 각지에서 들불처럼 타올랐던 공산주의 팽창을 꺾어버리는 시발점이 된 의미있는 전쟁이었다는 것이 밧슨 씨의 생각이었다. 한국전쟁의 실상과 의미를 미국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미 해병 3사단 15연대 F중대 2소대의 하사로 참전한 그의 책에는 지휘관이나 그들의 전략·전술이 주 내용이 아니라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동료 군인들의 실제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2년 전 리퍼블릭에서 함께한 당시 소대원들.       

                  6·25 전쟁 당시 전우들과 함께한 덴질 밧슨(왼쪽) 하사. 

 "'리틀 지브롤터(경기도 연천군 고왕산)'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이틀간의 악몽 같은 전투는 평생 잊지 못할 최악의 전투였다. 60도나 되는 가파른 경사, 우레 같은 포탄소리, 청천벽력 같은 전우의 죽음, 부상병들의 고통스런 절규, 고지를 향해 오르는 도중엔 죽음의 속삭임까지 들렸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문득 이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일개 참전용사의 20달러 짜리의 단행본은 입소문을 타고 차츰 미국 전역 참전용사들의 필독서가 됐다. 지역 방송에선 수년 전 이 책을 토대로 5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 문화·교육 공영방송인 PBS를 통해 미 전역에 방영됐다. 이 다큐의 감독 존 길버트의 부친 또한 한국전 참전용사였다.

 정확한 팩트에 문체마저 깔끔한 이 책은 이후 미주리주립대학의 미국 전쟁사 관련 역사 수업의 교재로도 채택됐다. 교양학부 줄리 존슨 교수는 "전쟁사 수업 교재로 굉장히 값어치있게 생각한다"고 평했다. 존슨 교수는 이후 책 저자 밧슨 씨와 당시 동료 2소대원들을 초청, 포커스그룹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밧슨 씨는 "나의 졸저로 인해 미국인들 나아가 미국사회가 한국전쟁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돼 작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이 책이 번역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단, 한국어로 책이 나왔을 경우 자신에게 한 권만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 트루먼 대통령의 고향이 미주리 주여서 당시 이곳 젊은이들은 '트루먼 보이'(Truman Boy)라 불리며 징집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참전했다. 미주리 출신인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밧슨 씨는 사실 코리아가 어디 있는지, 전쟁이 어느 정도 지속될 지는 몰랐지만 그의 피앙새 에바는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임진강 하구를 비롯 리틀 지브롤터, 피의 능선, 단장 능선 등 서부 및 중부전선에서 싸웠다. 중공군들에 대한 호의적인 언급은 뜻밖이었다. 미군들은 중공군이 더 센줄 알았지만 그들은 악착같이 싸우지 않아 모두들 인민군 대신 중공군과 싸우기를 바랐다. 중공군들은 또 아군이 부상당했을 때 백기를 흔들며 사인을 보내면 데리고 갈 시간은 주었다. 반면 인민군은 한겨울에 발가벗겨 나무에 묶어놓고 30분마다 찬물을 뿌려 동사시키는 야만적인 행태를 보였다. 그 생각만 하면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밧슨 씨는 요즘 전우들을 생각하면 착찹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쟁 때 함께 싸웠던 2소대 30명의 전우 중 지금은 7명밖에 남지 않았다. 19년째 매년 모였지만 이제 그 모임의 종착역은 머지 않았다. 전우들의 건강이 차츰 악화되고 있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슬하에 1남 1녀의 자식과 8명의 손자(3명) 증손자(5명)를 두고 있는 밧슨 씨는 "만일 60여 년 전으로 돌아가 같은 상황에 직면해도 참전해 싸울 것"이라며 "당시 1년간 참전한 그 시기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폐허에서 다시 일어난 코리아와 코리안들을 존경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 美 미주리주 한국전쟁 기념물·기념시설 속속 등장

-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먼 고향 /  참전용사비·평화의 마을 등 조성


 지난해 11월 11일 '미주리 재향군인 묘지'에 세운 한국전참전용사비 제막식 때 이를 주도한 풀라스키 카운티 엄경숙

 한인인 회장(왼쪽). 오른쪽은 한 달 뒤 엄경숙 회장이 취재팀과 함께한 모습.

 지난해 11월 11일 '미주리 재향군인 묘지'에 세운 한국전참전용사비와 이를 주도한 풀라스키 카운티 엄경숙 한인회 회장.

6·25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의 고향인 미주리 주에도 한국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기념물과 시설들이 늦었지만 속속 들어서고 있다. 

 우선 한국전참전용사비. 미국 국경일의 하나인 지난해 11월 11일 재향군인의 날, 미주리 주 풀라스키 카운티 한인회(회장 엄경숙)는 카운티 내 포트 레오나르도 우드시의 '미주리 재향군인묘지'에 한국전참전용사비를 세웠다. 

 한인회는 지난해 초 숙원사업이었던 참전용사비 건립을 확정짓고 교통이 편리한 이곳에 한국전참전용사비를 세웠다. 높이 1.8m, 폭 1.2m의 1.6t의 화강암 참전용사비에는 미주리 주 62개 카운티 출신의 참전용사 35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미주리 주의 동쪽 끝 세인트루이스 인근에는 국제결혼가정선교회(담임목사 김민지·이하 선교회)의 '평화의 마을'이 있다. 미국인과 국제결혼한 한인여성들의 모임인 선교회는 1987년부터 회비와 기부금을 모아 세인트루이스 근교 415만8000㎡(12만6000평) 부지에 '평화의 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국제결혼 후 이혼한 한인여성들을 위한 시설 건립이 당초 목적이었지만 6·25 때 목숨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의 복지시설까지 계획하고 있다. 김민지 목사는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참전용사들이 인생의 황혼기를 외롭게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이들에게 따뜻한 쉼터를 마련해줘 그들의 참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참전용사 복지요양시설을 건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덴질 밧슨 씨가 거주하는 소도시 리퍼블릭에서 20분쯤 떨어진 곳에는 한국전쟁을 알리기 위한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HIGHWAY'라 적힌 표지판도 볼 수 있다. 미주리 주내 60번과 65번 도로 사이에 위치한 이 표지판은 2007년 스프링필드 한인회와 한국전참전용사회가 주 정부에 건의해 건립됐다.



 

■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2>뉴욕-다놀드 휄드먼 

-포병부대 배속 1년 한국 머물며 / 대구·임진강·원산 전투 등 참가
- 수류탄 맞아 부상, 힘겨운 고통 / 전쟁 후 트라우마로 한동안 투병
- 한인교회서 자원봉사 활동하다 / -집 없어 오갈 데 없는 가족 만나 
- 25년간 자기집에서 생활하게 해 / 어려운 한인보면 주저없이 도와


6·25 참전용사 다놀드 휄드먼 씨가 성조기와 태극기, 군부대 마크, 각종 훈장 및 뱃지 등이 담긴 액자를 배경으로 자신의 거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서민아파트에는 80대의 한국전 참전용사와 한국인 모녀 3명 등 총 4명이 함께 살고 있다. 철저한 개인주의 문화인 미국에서 백인 노인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인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사연은 뭘까.   

 거동이 꽤 불편한 다놀드 휄드먼(86) 씨는 '인연'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의 전쟁에 참전한 거나 25년 전 정말 우연히 브루클린의 한 한인교회에서 자원봉사로 영어를 가르치게 된 것을 두고 그는 인연 치고는 묘한 인연이라 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두 딸의 엄마 민현숙(56) 씨도 한인교회 영어교실의 학생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가르쳤는데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런 학생이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지병으로 앓던 남편이 세상을 떠 싼 월셋집을 찾느라 수업에 빠졌다는 것이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휄드먼 씨는 오갈 데 없는 이 가족에게 작은 방 한 칸을 내줄 테니 들어오라고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거저였다.

 민 씨의 사정은 정말 딱했다. 영주권이 없어 비싼 로스쿨 학비를 내야 했던 첫째 아이 때문에 집세와 교육비가 큰 부담이었다. 휄드먼 씨는 "싼 집을 못 구할 경우 노숙자쉼터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듣고는 죽기 전 자신이 정말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로스쿨 학비도 두 번이나 빌려줬다.

 민 씨네의 불행은 계속됐다. 로스쿨을 다니던 첫째 딸에게 만 21세까지 끝내 영주권이 나오지 않았다. 미국 이민법에 따르면 이럴 경우 추방돼 10년간 미국에 들어올 수 없다. 슬픔에 잠긴 민 씨 가족을 위해 휄드먼 씨는 뉴욕의 민주·공화 양당 상원의원과 이민전문변호사를 만나는 등 마치 자신의 문제인 양 최선을 다해 결국 일종의 사면인 '웨이버'를 받아 영주권을 받도록 했다. 덕분에 첫째(현재 32세)는 2년 만에 복학, 로스쿨을 졸업한 후 현재 기업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영주권이 있는 둘째 딸은 올 여름 로스쿨을 졸업한다.

 인터뷰 도중 휄드먼 씨는 편지 한 장을 내놓았다. 민 씨가 기자에게 한글로 쓴 편지였다.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휄드먼 씨가 대가 없이 저희 가족을 도와주신 것처럼 저희 가족도 앞으로 우리 사회와 이웃을 위해 성심성의껏 도우면서 살겠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입니다."

 휄드먼 씨의 한국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아파트 인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 한국인 부부 중 남편이 중병에 걸려 부인이 홀로 생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휄드먼 씨는 그 집의 12세 딸과 4세 아들을 방과 후나 주말이면 놀이공원이나 박물관 등에 함께 다니며 건사했다. 고맙게도 티 없이 잘 자란 딸 아이 박혜림(22) 씨는 어느덧 간호사가 됐다. 그는 아빠의 거동이 불편하니 결혼식 때 휄드먼 할아버지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부탁할 예정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뇐단다.


 화두를 한국전쟁으로 돌렸다. 거실 한 쪽 벽면에는 태극기와 성조기, 군부대 마크, 각종 훈장 및 뱃지, 전쟁 당시 군복 입은 사진이 들은 액자가 걸려 있다. '퍼플 하트'(Purple Heart·전쟁 중 부상 당한 군인에게 주는 훈장)라 적힌 모자와 티셔츠를 입은 그는 빛바랜 앨범과 흑백사진, 그리고 한반도 지도를 꺼내 기자에게 설명했다. 1950년 11월부터 1년간 참전한 그는 미 1기병사단 포병으로 부산에서 대구, 임진강, 원산까지 전진하면서 여기저기서 싸웠다. 수원 지평리전투에선 수류탄 파편에 머리와 손을 다쳐 일본으로 후송됐다. 치료 후 귀국도 가능했지만 그는 전우들이 있는 부대로 복귀했다.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실 그는 대학 및 결혼생활이 평탄치 못했다. 학업은 입학 후 6개월 만에 중단했고, 10년간의 결혼생활도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이후 재결합을 했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61세 때 뒤늦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판정을 받고는 그간 그럭저럭 꾸려오던 사업체를 아들 둘에게 물려주고 정신병원에서 치료에 전념했다. 지금은 회복돼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참전이 그의 삶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코리아나 코리안에 대해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솔직히 전쟁 중 너무나 끔찍한 고통을 많이 받았지만 동시에 군인도 아닌 평범한 코리안들도 이에 못지않게 힘들었다. 5년 전 한국정부가 초청해 코리아를 다녀왔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발전해 전우들과 함께 많은 눈물을 흘렸다. 고마웠다. 앞으로도 나는 미국 내 한인들과 서로 도우며 친하게 살고 싶다. 이런 인연도 사실 없지 않은가."


                  6.25당시의 다놀드 휄드먼 병장

빛바랜 앨범과 당시 지도와 자료 등을 꺼내 보이며 설명을 하고 있는 다놀드 펠드먼 씨.

 

# "조국 지켜줘 감사합니다" 뉴욕성결교회의 남다른 보은

- 6·25 참전 용사·가족에 회의실 제공 / 성금 모아 한국방문 주선, 식사대접


지난달 14일 뉴욕성결교회에서 '코리안 베테랑스홀' 명명식이 열려 교회 관계자들과 한국전 참전용사 및 그 가족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미국 뉴욕 최남단 스태튼 아일랜드에 위치한 뉴욕성결교회(담임목사 장석진)에서 지난달 14일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교회는 이날 지하 친교실에서 스태튼 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을 초청, 만찬을 베풀고 친교실을 '코리안 베테랑스홀(Korean Veterans Hall)'로 하는 명명식을 가졌다. 이를 위해 홀 정면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그 아래에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 해병대 공군 해군 등 6개 군의 대형 기와 기념사진을 걸어놓았다.

 이 홀은 앞으로 스태튼 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회가 매달 한 번 모여 회의를 열고 업무를 보는 데 사용된다. 참전용사회는 원래 별도의 사무실이 있었지만 문제가 생겨 수 년 전부터 이 교회 친교실을 회의장소로 사용해왔다. 

 교회에선 참전용사들을 위해 매년 식사를 대접했고, 2012년엔 그들을 위해 자선음악회를 열어 모금된 성금으로 참전용사 4명을 한국에 다녀오도록 배려했다.

 이날 한국전참전용사회 조지 파슨스(86)회장은 한국말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후 "한인교회가 참전용사들을 잊지 않고 여러 모로 따뜻하게 도움을 줘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뉴욕성결교회 장석진 목사는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참전용사들이 80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50명 정도"라며 "이역만리 이름도 모르는 조그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이 모두 돌아가시더라도 그들의 가족들과 우의를 다지며 이 모임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스탠튼 아일랜드 '한국전참전용사회'의 정식 이름은 'CPL Allan Kivlehan Chapter'. 우리 말로 하자면 '상병 앨런 키블리한 모임'. 앨런 키블리한은 스태튼 아일랜드 출신의 참전용사 중 맨 먼저 전사한 사병이다. 8남매 중 첫째인 그의 여동생은 오빠를 대신해 이 모임에 참석한다. 참전용사회 임명옥 연락간사는 "지난해 10월 부산유엔공원에서 앨런 키블리한의 이름을 확인한 후 사진을 찍어 동생들에게 보여줬더니 몹시 기쁘했다"고 말했다.

 이날 관계당국의 협조로 교회 앞 거리명도 기존 이름 대신 'Korean War Veterans Way'로 바뀌었다.

 이날 명명식에 참석한 참전용사 팻 스칼파토(85) 씨는 "이미 반세기가 지난 한국전 참전을 두고 한인들이 계속 감동을 줘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1953년 6월 수류탄 파편에 맞아 2주간 치료 후 복귀, 휴전일인 1953년 7월 27일엔 38선 인근에 있었다는 그는 15년 전부터 지역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잊을 수 없는 한국전쟁'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해엔 상반기 4000명, 하반기 2000명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5년 전까지는 차로 1시간30분 걸리는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에 강의를 나갔지만 이제는 운전이 힘들어 그만뒀다고 했다.

전쟁 당시 동상에 걸려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는 루이스 타이론(85) 씨는 "참전용사들의 한국사랑은 한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며 "목숨 걸고 싸웠던 나라가 기적적으로 발전한 모습을 보면 요즘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2>플로리다 주 템파-에디 고 

- 전선 넘나들며 미군에 정보 제공 / 맥아더 상륙작전 감행 이틀 전엔
- 계획 알아차린 북한군 모두 죽여 / 상부보고 막아 작전 성공 이끌어
- 목숨걸고 등대도 밝혀 진격 도와 / 휴전 후 워싱턴서 보내달라 요청
- 영주권 받고 미군 근무하며 정착  / 요즘은 전쟁관련 명강사로 활동
- 6·25와 한국 알리는데 열정 쏟아  


에디 고 씨는 템파지역 초중고와 시민·봉사단체 등지에서 6·25전쟁과 코리아를 알리는 명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6·25 전쟁을 다룬 책 '잊혀진 전쟁'(남도현 지음)에 따르면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은 세기의 도박이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집념으로 이를 성공시켰다. 그 이면에는 14세의 한국 소년이 있었다. 흔히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소년을 소개하기 위해선 가정이 필요할 듯싶다. 만일 이 소년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었으며, 그럴 경우 전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됐을 수도 있었다. 

 미국 플로리다 템파에 거주하는 에디 고(79·한국명 고준경) 씨. 그는 지난해 템파 교외의 '참전용사 추모공원'에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를 건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강원도 철원 출신인 그의 부친은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여서 인민군의 요주의 관찰 대상이었다. 해방 이듬해 부친은 그의 형과 함께 임진강을 건너 남으로 탈출했다. 반역자 가족으로 몰린 어머니와 에디 고는 이후 쫓겨 다니다 1948년에야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당시 철원은 이북 땅이었다.   

 6·25전쟁 당시 인천 영흥도에서 상륙작전에 앞서 정찰대원들과 함께한 소년 에디 고.(뒷줄 왼쪽 세 번째) 뒷줄 왼쪽 네, 다섯, 일곱 번째가 각각 계인주 육군 대령, 연정 해군 소령, 클라크 대위.

 평화롭던 시절도 잠시, 1950년 전쟁이 발발했다. 동숭동 서울대 의대 광장에서 국군 30여 명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소년은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집에 들렀지만 아무도 없자 인천 영흥도가 고향인 교회 친구가 떠올라 무작정 서쪽으로 걸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될 한 사람을 만났다.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 대위였다.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맥아더가 정보 수집을 위해 영흥도로 미리 보낸 정찰대원이었다. 클라크 대위는 당시 소년들을 모아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만 뭍에서 온 소년을 경계했다. 하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그 됨됨이를 관찰하더니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에게 배운 영어가 큰 도움이 됐다.

 주 임무는 인천항과 월미도 등지에서 인민군 동태를 관찰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소년들은 전시라도 제재를 받지 않고 전선을 드나들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6·25전쟁 당시 인천 영흥도에서 상륙작전에 앞서 정찰대원들과 함께한 소년 에디 고.(뒷줄 왼쪽 세 번째) 

                뒷줄 왼쪽 네, 다섯, 일곱 번째가 각각 계인주 육군 대령, 연정 해군 소령, 클라크 대위.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인 9월 13일 인천을 다녀오라는 클라크 대위의 명에 따라 친구와 함께 나섰다. 친구는 그때 "아무래도 유엔군이 인천으로 오려나 보다"고 말해 그제서야 전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도중 친구는 부모님을 뵈러 영흥도에 들렀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소년들이 미군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듯했다. 어디론가 끌려가더니 2시간쯤 뒤 친구는 부모와 함께 공개 처형을 당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소년은 친구가 고문에 의해 상륙작전 계획을 토설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행히 그날은 물때가 맞지 않아 인민군은 보고를 위해 배를 타지 못했다. 그날 밤 소년은 인민군들이 기생집에서 술판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주민 몇 명과 함께 새벽에 잠입, 상륙작전 계획을 알았을 법한 인민군들을 모두 죽였다. 이 대목에서 에디 고 씨는 처음 이 사실을 공개한다고 했다. 만일 다음날 그 인민군들이 인천으로 떠나 상륙작전 계획을 상부에 보고했다면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에디 고 씨의 설명이었다.

 클라크 대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그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때문에 앞서 인천의 관문인 팔미도 등대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클라크 대위와 소년 에디 고를 비롯한 정찰대는 전날 밤 작은 보트를 타고 팔미도에 내려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을 물리친 후 D데이 0시12분에 등대를 밝혔다. 동시에 261척의 유엔군 함정이 인천으로 진격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소년은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가겠다고 하자 클라크 대위는 추천장을 써 주었다. 덕분에 소년은 미 해병 1사단의 정식 정보원이 됐다. 이후 소년은 미군과 함께 정보 수집을 위해 원산 흥남 함흥 장진 등지를 오가다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다행히 중공군 장교는 보스턴서 공부한 엘리트로 영어를 잘했다. 소년은 전쟁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라고 하며 동정심을 유발했다. 그 장교는 12만의 중공군이 장진호 주변에 배치돼 있고, 20만 명은 만주에 대기 중이라 미군의 승리는 어렵다고 설명한 후 소년을 풀어줬다.

 미 해병에 재합류한 소년은 이 사실을 보고한 후 장진호 전투 등에 참전하며 정보 수집에 매진했다. 그해 12월 흥남부두 철수 땐 피란민들의 안전 승선을 위해 마지막 배가 떠날 때까지 돕고는 걸어서 남하했다. 휴전 때까지 그는 미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휴전 후 가족과 상봉한 그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미군 전우 3명에게 편지를 썼다. 그 중 한 명이 부친에게 6·25 때 에디 고의 활약상을 소개했고, 부친은 이를 친구인 상원의원과 워싱턴DC 정가에 전달했다.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에게 에디 고를 찾아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편지가 전해졌다. 실제로 1955년 미 영사가 여권을 만들어 에디 고를 찾아와 마침내 그는 그해 6월 뉴욕에 도착했다. 이후 미 영주권을 받은 에디 고 씨는 다시 미군으로 입대, 한국에서 CIC(주한미방첩대) 요원으로 1년 8개월간 근무했다. 제대 후 그는 대학에서 항공학을 전공, 항공회사에 근무하다 뉴욕에서 무역회사를 차려 제법 돈을 모았다. 한국 여인과의 결혼도 이즈음 했다.

 1989년 그는 플로리다 템파로 이주해 10년 전까지 골프장 두 개를 운영했다. 2000년부턴 6·25 참전용사들에게 입은 은혜를 조금이나 갚기 위해 매년 이 지역의 참전용사들을 골프장으로 초대, 라운드와 함께 식사를 대접했다. 

 모든 사업을 정리한 그는 현재 6·25전쟁과 코리아를 알리는 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지역 초중고와 로타리 등 봉사단체, 그리고 군부대 등에서 전쟁 관련 특강을 하고 있다. "6, 7년째 관련 자료도 찾고 공부를 하다 보니 제가 생각해도 실력이 늘었어요." 명강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올 한 해 강의 일정은 이미 지난해 말 모두 잡혔다. 

 템파지역 한국전 참전용사회 회원으로, 그들을 위해 한국을 대신해 헌신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에디 고 씨는 "현지 한인들도 애쓰고 있지만 한국정부도 이제 외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참전용사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미군 상륙작전 때 맨 먼저 방벽 넘어 싸우다 전사

- 로페즈 중위 기려 인천서 공수한 돌로 美에 기념비    

   인천상륙작전 때 템파 출신의 로페즈 중위가 상륙정에서 방벽을 넘고 있다. 당시 종준기자에 의해 사진이 찍히자마자 그는

    아쉽게도 전사했다.

 플로리다 템파 교외에 위치한 '참전용사 추모공원' 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옆에는 85㎏의 제법 큰 둥근 돌이 기단 위에 소중히 올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인천상륙작전 때 전사했던 로페즈 중위의 기념비이다.

 템파 출신으로 해병 1사단 1대대 소대장이었던 그는 상륙정이 연안에 도착했지만 인민군이 내뿜는 자동화기에 대원들이 망설이자 맨 먼저 방벽을 넘었다. 첫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그는 두 번째 수류탄의 핀을 빼 던지려는 찰라 총탄에 가슴과 오른쪽 어깨를 맞아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순간 로페즈 중위는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부상에도 불구하고 수류탄을 안고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산화했다. 쌍안경을 들고 있는 맥아더와 함께 방벽을 넘는 그의 뒷모습은 인천상륙작전의 기념비적 사진으로 꼽히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 사진이 찍힌 직후 전사했다. 그는 후에 미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추서받았다.

 템파 한국전 참전용사회는 에디 고 씨의 주도로 2007년 재향군인의 날, 인천 앞바다에서 공수해 온 이 돌에 'The Green Beach Point of Incheon Landing Operation'이라는 문구를 적어 템파 인근 키스톤 에드레디스 공원 한국전쟁기념광장에 로페즈 중위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지난해 7월 27일 여기서 차로 10분 거리인 '참전용사 추모공원' 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제막식에 맞춰 로페즈 중위 기념비를 이곳으로 옮겼다. 함께 공수된 작은 돌은 에디 고 씨의 제안으로 로페즈 중위의 모교인 힐스보로고교에 기증돼, 그의 유품과 함께 전시돼 있다.    

개인 기부와 함께 템파 한국전 참전용사회의 모금 등으로 기념비를 세운 에디 고 씨는 "당시 인천에서 직접 공수해 온 돌을 보고 참전용사회도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에디 고 씨 등 템파지역 참전용사회가 세운 로페즈 중위 기념비.

■ 6·25 참전용사의 한국 사랑 

<1> 프롤로그

- 한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 /  인천상륙작전·장진호 전투 등
- 시간 흘러도 그날의 기억 생생 /  자유민주주의 지켜냈다 자부심

- 실패한 전쟁 평가에 가슴 아파 /  책·영화로 한국전 알리기 열정
- 당시 폐허가 된 서울 최근 방문 /  상전벽해 발전상에 눈물 흘려


미국 플로리다 템파 시에 위치한 '참전용사 추모공원'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6·25 참전용사 포드 머독(왼쪽) 씨와 에디 고 씨. 이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 플로리다 주 정부 예산과 한인회의 기부금 등으로 뒤늦게 조성됐다.


 미국 플로리다의 중서부 해안도시 템파. 이곳 템파의 다운타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는 '참전용사 추모공원'이 있다. 아름드리 수목들 사이로 헬기와 전차 등이 곳곳에 전시돼 있고, 조그만 호수 주변엔 벤치가 조성돼 있는 이곳에는 한국의 6·25전쟁을 비롯 베트남전, 1·2차 세계대전 등 미국이 치른 12개 전쟁의 참전용사비가 서 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비'는 정전 60년 만인 지난해 7월 27일에야 뒤늦게 세워졌다.

 이곳에서 만난 포드 머독(83) 씨. 6·25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그는 중사 계급장이 선명한 검은색 예복을 입고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맞아주었다. 보청기에 돋보기 안경, 주름 사이로 검버섯이 곳곳에 핀 바싹 마른 얼굴이었지만 대화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그는 책을 한 권 꺼내 보여주었다. '더 달라스 타임즈' 기자 출신의 빌 슬론이 2009년 쓴 'The Darkest Summer-Pusan and Inchon 1950'이었다. 탱크 위에 앉아 전우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책 속의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 땅을 밟은 후 한강철교를 건너 4일 만에 서울로 입성한 얘기부터 전봇대 위에 올라 화염병을 탱크에 던지며 저항하던 인민군, 동상에 걸려 발톱이 뽑히고 총탄이 가슴에 박혔지만 기적처럼 살아난 사실 등 당시의 절박하고도 치열했던 상황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설명했다.

 2010년 한국을 방문한 그는 전쟁 당시 폐허가 된 서울이 상전벽해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곤 눈물을 흘렸다. 그는 "목숨 바쳐 참전한 한국전쟁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였지만 그동안 미국 정부는 한국참전용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다행히 최근들어 주 정부와 한인회가 늦었지만 함께 참전용사 추모비를 세우고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어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지속해온 참전용사들의 한국에 대한 짝사랑이 최근 들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초신 퓨'와 '굳세어라 금순아'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에 앉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헤어질 무렵 머독 씨의 차 후미에 'THE CHOSHIN FEW / NOVEMBER-1950-DECEMBER / CHOSHIN RESERVOIR·KOREA'라 적힌 번호판 크기의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초신(CHOSHIN)'은 함경남도 장진(長津)의 일본식 독음. 6·25 당시 미군은 일본이 제작한 지도를 그대로 사용해 그들은 '장진'을 그렇게 불렀다. 장진호(湖)는 장진강에 발전용 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이다.  














포드 머독 씨의 차 후미에 '초신 퓨'라 적힌 스티커가 눈에 띈다.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 1사단 1대대 탱크운전병이었던 포드 머독(뒤쪽 않아 있는 이) 씨가 전우들과 잠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승기를 잡은 유엔군은 맥아더 사령관이 "성탄절을 고향에서 맞게 해 주겠다"고 속도 경쟁을 부추기자 미군들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원산항으로 상륙한 미 해병 1사단 1만2000명은 서부전선에서 북진 중인 미 8군과 압록강에서 합류해 전쟁을 끝낼 계획으로 장진호 계곡을 따라 북으로 향했다. 하지만 개마고원 입구 장진호 주변에서 12만 명의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돼 전멸 위기에 놓였다. 해발 2000m대의 고봉준령과 협곡, 그리고 영하 30도를 밑도는 한파 속에서 미 해병 1사단은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간 중공군의 겹봉쇄망을 뚫고 흥남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동시에 방어선을 구축, 피란민과 병력의 흥남 탈출을 위한 시간을 벌어준다.

 영도다리와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경인 '바람 찬 흥남부두'는 이때 퇴각한 병력 10만여 명과 민간인 10만여 명이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193척의 군함을 타고 탈출하는 과정을 묘사한 노래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2500여 명 사망, 2000명 실종, 5000명이 부상당했으며, 중공군은 사망·부상자가 4만 명을 넘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전사(戰史)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으며, 당시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했다. '초신 퓨(CHOSHIN FEW)'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몇 안 되는 전우들이 1983년 만든 모임 이름이다. 이날 포드 머독 씨와 동행한 한국 출신의 또 다른 '초신 퓨' 회원인 에디 고 씨는 "'초신 퓨' 회원들은 한국전쟁 참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우리는 6·25와 장진호 전투 그리고 코리아를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장진호 전투 등 6·25 전쟁을 잠시 잊은 사이 미국은 2000년 워싱턴DC 해군기념광장에서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초신 퓨' 6000여 회원 대부분이 이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포드 머독 씨는 "'초신 퓨' 회원들 대부분이 지금은 80대 이상의 고령이라 차츰 그 수가 줄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초신 퓨' 회원들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 분야에서 애쓰고 있다. 장진호 전투에 소총수로 참전한 마틴 러스 씨는 '포위망 탈출(Breakout)', 장교였던 조지프 오웬 씨는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라는 책을 썼다. 미 지명위원회는 2012년 알래스카의 한 무명봉을 '초신 퓨 산(Mount Chosin Few)'으로, 미 해군도 순양함 한 척을 '초신 퓨'로 공식 명명했다. 2년 전 개봉된 3D 최초의 전쟁영화 '17 Days of Winter'도 장진호 전투가 배경이다. 시간이 흘러도 미국에선 한국전쟁이 잊히지 않고 역사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 바쳐 참전… 꿈에도 못 잊어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에서 만난 참전용사 덴질 밧슨(86) 씨는 "코리아가 어딘지도 모르고 참전했지만 그곳에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숨걸고 싸웠다"며 "만일 한국전쟁이 또 일어난다 해도 다시 나가 싸우겠다"고 말했다. 당시 미 3사단에서 리틀 지브롤타, 피의 능선 등에서 싸운 그는 귀국 후 한국전쟁을 미국에선 '치안 활동' 내지 '내전' 정도로 폄하하는 것을 보고는 6·25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다큐 형식의 책(Korea, We Called it War)을 펴냈다. 이 책을 토대로 지역방송에서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으며, 미주리 주립대에선 전쟁사 관련 교재로도 채택돼 학생들에게 한국전쟁을 널리 알리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만난 참전용사 다놀드 훼드먼(86) 씨는 한인교회에서 자원봉사로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참전 후 정신적 외상장애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길바닥에 내려앉게 될 딱한 사정의 한인 가족들을 조건없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와 함께 살고 있다. 

 미국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빛바랜 수첩과 앨범, 지도 등 전쟁 당시의 자료들을 신줏단지 모시듯했다. 집착일까.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한국사랑의 외적 표현이지 않을까.

 그들은 이기지 못한 실패한 전쟁이라고 폄하되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전쟁의 참전용사처럼 환영받지 못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들은 전쟁 발발 64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을 잊지 못하고 고향에서나마 6·25와 코리아를 가슴에 묻고 널리 알리고 있었다.

 본지는 '6·25 참전용사의 한국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그들을 찾아 전쟁 당시의 절박한 상황과 전역 후 코리아에 대한 짝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함께 되돌아봤다.


올란도 디즈니월드/ 휠체어 타고 탑승

장애인 의외로 많아 / 국내선 언제 그럴까

 

 지난해 말 미국 남부 플로리다를 취재차 다녀왔다. 뉴욕 시카고 등 미국 땅 동부와 중서부가 영하 20도 안팎을 기록할 때 플로리다는 긴소매 셔츠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뜻했고 사방은 온통 푸르렀다. 이곳이 왜 미국 부자들의 겨울 휴양지인지 그간의 궁금증이 확 풀렸다. 그야말로 축복의 땅이었다.

 취재가 잘 돼 하루 반나절 정도 일정이 비었다. 비행만 20시간인 이곳 플로리다를 언제 또 찾겠느냐며 주변에서 올란드행을 권했다. 차로 3시간쯤 걸린다기에 잠시 망설이자 돌아오는 대답이 걸작이다. 이 정도 거리면 한국에서 집 앞 반찬가게에 두부 사러가는 거나 진배 없다나.

 올란도의 '디즈니월드'는 상상을 초월했다. 매직킹덤, 애니멀킹덤, 할리우드 스튜디오, 앱콧 등 4개의 테마파크 각각이 LA나 도쿄, 홍콩의 '디즈니랜드'보다 규모가 크다. 개장 때 서둘러 입장, 두 끼를 대충 떼우고 쉼 없이 좇아다녀도 테마파크 하나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첨단 놀이기구를 가장 과학적으로 잘 구현해낸 신세계였다. 

진짜 상상을 초월한 장면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였다. 온종일 본 휠체어를 탄 사람들만 족히 100명은 넘었다. 휠체어와 테마파크. 얼핏 궁합이 안 맞는 듯 했지만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휠체어를 탄 채 장애인(노약자 포함)들이 놀이기구 탑승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충 본 후 가방 속에 쑤셔놓았던 브로슈어를 열어봤다. 안내지도에는 장애인과 ATM(현금자동입출금기) 표시가 먼저 눈에 띄었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우면서도 약자들의 배려를 잊지 않는 미국의 건강함이 새삼 느껴졌다. 장애인 탑승 가능 놀이기구가 그림과 함께 네 가지 범례로 꼼꼼하게 설명돼 있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이용, 휠체어를 옮겨타야 하는 경우, 전동휠체어 대신 스탠다드 휠체어로 바꿔 타야 하는 경우 등등. 부러우면서 존경심마저 들었다. 어린 장애아들이 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지 이해할 만했다.

 귀국 후 기자는 발목을 접질러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보름 입원 후 깁스를 한 채 퇴원, 목발에 의지해 출퇴근을 했다. 며칠간은 택시로 출퇴근했지만 이후 대중교통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본의 아닌 생계형 장애인 체험이었다. 깁스한 채 보름, 깁스 풀고 보조기를 착용한 채 보름여 간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했다. 지하철엔 노약석이 있어 그럭저럭 앉아갔다. 홈페이지에 엘리베이트 위치 표시가 안 돼 있는 것이 옥에 티였다. 수천억 원을 들여 잘 만들어놓고 화룡점정을 하지 못한 격이다. 공직에 장애인이 부족하니 아마 장애인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시민들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무척 부족했다. 이는 정말 예상 밖이어서 실망스러웠다. 버스가 도착하자 목발을 짚고 있는데도 부딪힐 듯 서둘러 앞질러 가거나, 뻔히 보고도 자리 양보는 거의 없었다. 

 깁스를 푼 후 천천히 운전도 시작했다. 문제는 주차였다. 아파트 지상주차장엔 멀쩡한 차량들이 장애인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애인스티커'에서 '주차불가' 부분을 아파트 스티커로 가린 얌체족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지하 3층에 주차한 후 힘겹게 올라올 땐 씁쓸하기까지 했다. 시대 흐름에 따라 관(官)은 지하철 엘리베이트나 저상버스 도입 등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점차 늘리고 있지만 정작 이를 주도해야 할 시민의식은 되레 낙제에 가까웠다.

 보행이 불편하면 심적으로 무척 위축된다. 기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장애인의 인간승리는 더 한층 우르러 보인다. 10여년 전 만난 미국 오하이오라이트주립대 차인홍 교수가 생각난다.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집안 사정도 어려워 9세 때 재활원에서 맡겨진 후 1990년 24세 때 모 재단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 2000년 83대 1의 경쟁을 뚫고 바이올린 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됐다. 당시 그는 "장애인은 강인한 정신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어쩌면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우리사회가 그를 혹독하게 키워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오는 4월이면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동물원 '더 파크'가 문을 연다. 기장에도 동부산관광단지에 테마파크가 들어설 예정이다. 올란도의 '디즈니월드'만큼은 아니더라도 장애인들이 불편하지 않게 지금부터라도 좀 더 배려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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