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봄의 정취는 유채꽃에서 절정에 이른다. 수중 화산 폭발로 생겨난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조성된 샛노란 유채밭에서 두 명의 아가씨가 봄기운을 만끽하고 있다.

-제주 봄 마중 다녀와서

 꽃을 찾으러 제주에 갔습니다. 아니, 제주로 봄을 마중나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가 지났건만 아무리 목 빠지게 기다려도 우리네 고국산천의 봄 소식은 아직 요원했기 때문입니다. 올겨울은 무척 추웠습니다. 눈도 많이 왔지요. 지구온난화란 말이 무색해질 정도였습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봄은 예년에 비해 열흘 내지 보름 정도 늦다고 합니다. 현장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생화를 찍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들도 지금쯤이면 부산 기장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복수초나 노루귀 바람꽃 등이 고개를 내밀 법도 한데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그래서 배낭을 챙겨 떠났습니다.
제주에는 겨울과 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동장군의 기세는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봄을 완강히 거부하며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고산 지역에는 수시로 눈발이 날려 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일부 도로는 스노체인이 없는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산 아래 마을 구멍 숭숭 뚫린 돌담 밑과 고샅길, 그리고 바닷가의 양지바른 언덕과 밭둑 구석구석에는 봄기운이 겨울을 밀어내며 움트고 있었습니다.

육지에선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찬바람이 휘몰아치며 봄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즈음 남녘의 땅 제주에선 그렇게 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제주에서 봄의 전령은 뭐니 뭐니 해도 꽃이지요. 수선화 매화 유채꽃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동백은 서서히 지고 있더군요.
   
제주로 유배온 추사 김정희가 어여삐 여겼다는 수선화는 도시의 화원이나 여염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관상용이 아니라 애초부터 우리 땅에서 스스로 나고 자란 야생 수선화랍니다. 소박하면서도 꽃향기가 아주 진해 매년 이맘때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요. 옛 선비들이 봄이면 말을 타고 탐매(探梅)에 나섰다는 매화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특히 흰 눈을 이고 있는 한라산을 배경으로 활짝 핀 매화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 뜨고 있는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에선 매화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제주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유채꽃은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산방산 주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봄 햇살 아래 가느다란 몸을 흔들어대며 뿜어내는 고혹한 향기와 자태는 매혹적이었습니다. 아니, 아찔했습니다. 목책 사이로 유채 꽃잎을 물고 낮잠을 청하는 조랑말의 여유로운 모습에서 봄의 정취를 느낍니다.

이참에 제주로 한번 떠나보지 않으시렵니까. 개학을 앞둔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지요. 자고로 비수기 때 찾아야 대접받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으니까요.

산 자체가 천연기념물인 산방산을 배경으로 한 유채밭.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한 유채밭.
섭지코지에서 성상일출봉과 그 우측 뒤 우도를 배경으로 한 유채밭.
구멍 숭숭 뚫린 검은빛의 현무암 돌담 아래 이쁘게 핀 야생 수선화.
산방산 인근 하멜기념비에서 본 야생 수선화와 송악산. 배는 하멜이 타고 온 상선을 재현한 것이다.
 송악산 가는 길에서 본 야생 수선화경.

산방굴사 가는 도중 만난 흰 동백.

동백 뒤 산은 송악산.


산방산 일대에서 봄볕을 쬐고 있는 조랑말.
산방산 일대의 유채밭.
산방산을 배경으로 위치한 하멜기념비. 주변엔 야생 수선화가 만개해 있다.


순백의 한라산과 매화의 조화, 휴애리농원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한라산을 배경으로 매화가 만발한 휴애리 자연생활공원.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능수매화.
한라산이 잘 보이는 지점에 제주 전통초가를 짖고, 안엔 통유리를 만들었다. 아뿔사, 구름이 한라산을 가렸다.

백매.

홍매.


 제주 남쪽 땅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의 해발 250m 지점에 위치한 자연생활공원 '휴애리'는 제주의 '청매실농원'으로 불린다. 경상도 할매 홍쌍리 씨가 운영하는 광양의 청매실농원과 여러모로 닮았기 때문이다.

매년 3월 중순이면 육지의 상춘객이 쇄도하는 청매실농원은 발아래 아름다운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반면 '휴애리'에는 만개한 매화 뒤로 흰 눈을 인 한라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풍경만으론 설중매(雪中梅)다. 눈 덮인 히말라야 고봉을 배경으로 발아래 야생화가 만발한 모습과 감흥 면에선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한라산과 매화의 조화가 일품인 '휴애리'는 한라산이 잘 보이는 또 다른 지점에 제주 전통초가를 짖고, 안에는 통유리를 만들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한라산을 감상하라는 배려다.

지난달 10일부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1만2000여 그루의 매화는 이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관광객들은 달콤한 향기가 유혹하는 매화 사이로 열린 산책로를 따라 유유자적 걸으며 추억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한 바퀴 도는 데 50분 정도. 행여 남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면 흩날리는 오편화 꽃잎에 '꽃멀미'가 일 정도다. 휴애리 양지선 대표는 "예년에 비해 열흘 정도 늦게 핀 매화는 이달 말이면 절정을 맞을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지난 2007년 문을 열어 아직 제주사람들도 다 알지 못하는 '휴애리'에는 예전 민초들의 삶을 소재로 한 사진과 그림도 전시돼 있다. 특별히 '휴애리'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토끼 흑돼지 조랑말 염소 송아지 다람쥐 꿩 타조 토종닭 거위 오리 등에게 직접 먹이를 주며 만져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기 때문이다.

놓쳐선 안 될 볼거리가 하나 더 있다. 지난해 1월부터 시작한 미끄럼틀을 타는 흑돼지쇼다. TV에도 소개된 이 흑돼지쇼는 생후 150일 안팎의 20여 마리의 똑똑한(?) 흑돼지가 조련사의 지시에 따라 계단을 올라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낸다. 오전 10시~오후 5시 매 정시에 시작한다. (064)732-2114

흑돼지 미끄럼틀쇼.

쇼를 마친 흑돼지들이 팬들로부터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휴애리 공원의 소라구이. 별미다.

여긴 우리에 들어가 직접 먹이를 줄 수 있다.


추사 선생이 어여삐 여긴 야생 수선화   

제주에서 자생하는 수선화는 한때 천덕꾸러기였다. 제주도 방언으로 수선화는 '말마농'. 말 그대로 '말이 먹는 마늘'이지만 속뜻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마늘'이라는 의미.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야생 수선화는 번식력이 강해 한 번 밭에 뿌리를 내리면 다른 농작물의 생장을 가로막을 정도로 무성하게 퍼졌다. 당연히 농민들 입장에서 수선화는 뽑아 버려야 할 잡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도로 등 관광기반시설이 대거 들어서면서 야생 수선화는 송두리째 잘려 나갔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정남복 이장은 "대문만 나서면 발에 차이던 그 많던 수선화는 일시에 사라져 이제는 귀한 존재가 돼 버렸다"고 말했다.

제주에서 야생 수선화는 1월 중순부터 싹을 틔워 2월 고혹한 자태를 맘껏 뽐내다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3월 중순 꽃잎을 떨군다. 하얀 꽃잎 속의 노란 꽃술이 탐스러운 데다 향기마저 진해 제주 봄의 정취를 느끼기에 이만한 화초도 없는 듯하다. 혹한에 싹을 틔운 것이어서 우리네 민초들의 삶과 대비돼 더욱 정이 간다.

야생 수선화는 제주의 서남쪽인 서귀포시 산방산 일대와 제주에서 해안드라이브길로 아름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안덕면 사계리~송악산 해안도로,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비행기 격납고의 잔해가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알뜨르비행장이 들어섰던 대정읍 상모리 들녘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오랫동안 제주 주민들에게 외면받던 수선화를 유달리 사랑했던 인물은 당대의 명필이자 화가였던 추사 김정희였다. 그가 9년간 유배생활을 한 곳이 수선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던 대정읍 안성리였다.

추사가 유배생활을 한 대정읍 쪽에서 본 바위산인 단산(왼쪽)과 산방산. 
 
추사는 대정 들녘에 핀 수선화가 잡초처럼 뽑히는 광경을 볼 때마다 자신의 참담한 신세를 떠올리며 어여삐 여겼다 전해온다. '희게 퍼진 구름 같고 새로 내린 봄눈 같다', '호미 끝에 버려진 예사론 너를 오롯이 창가에 놓고 키우네'라고 적은 글귀는 수선화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바위산 자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산방산 일대에는 수선화 외에도 볼거리가 적지않다. 산방산 중턱에 위치한 산방굴사는 예부터 스님들이 불상을 모셔두고 수도를 한 곳으로, 발아래 용머리해안의 풍광이 특히 아름답다. 한 폭의 풍경화다. 용머리해안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추노'를 촬영한 곳으로, 경남 고성 상족암 해안의 서너 배쯤 되는 규모. 수만 년 동안 켜켜이 쌓인 화산쇄설성 퇴적암층이 파도와 바람의 침식으로 변화무쌍한 동굴과 돌문 등의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한 바퀴 도는 데 30분쯤 걸린다.

산방굴사.
봄이 빨리 찾아온다는 제주 남서쪽의 산방산 중턱 산방굴사에서 내려다본 서귀포시 안덕면·대정읍 일대의 봄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산방굴사 내부. 동굴 위에서 떨어지는 석간수를 모은 약수도 보인다.
산방굴사로 올라가는 도중 전망대에서 바라본 용머리해안과 형제섬.
가운데 조그만 형제섬 우측의 산이 송악산이며 그 좌측 뒤 희미한 섬이 마라도다.
용머리해안.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추노'를 촬영한 곳으로, 경남 고성 상족암 해안의 서너 배쯤 되는 규모. 한 바퀴 도는 데 30분쯤 걸린다.


사계리 해안도로를 내달리면 만나는 송악산은 이 일대 최고의 전망대로 꼽힌다. 제주의 남쪽 끄트머리에 불끈 솟아오른 오름인 이곳에 서면 산방산 한라산 용머리해안 형제섬 모슬봉 마라도 가파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올레 10코스의 중간쯤 되는 사계리 해안에는 빠뜨려선 후회할 식당이 한 곳 있다. '남경미락'(064-794-0077)이다. 생선을 소금간만 한 채 무 고추 파만 넣어 푹 끓인 제주 향토음식 '지리'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워낙 유명해 김영삼 노무현 반기문 한승수 등 거물급 인사들이 다녀간 사진도 걸려 있다. 이 집은 특히 전망이 좋아 2층 방에 앉으면 송악산에서 본 환상적인 풍광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남경미락' 2층 방에선 산방산과 용머리해안 그리고 한라산이 한눈에 보인다.
'남경미락' 앞바당에서 본 풍광.

'남경미락' 앞 벤치에 앉아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 그는 제주에 오면 이 집을 찾았다고 한다.

반기문 UN사무총장과 한승수 전 총리도 이 집을 찾았다.


제주 향토음식인 '남경미락'의 '지리'. 제주에선 제사 때 탕국 대신 이 지리를 올린단다.
사계리 해안도로에서 본 풍경. 좌측부터 산방산과 그 우측 조그맣게 보이는 돌산이 용머리해안, 그 우측이 화순항이고, 맨 뒤 저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사계리 해안도로에서 본 형제섬.
제주 올레꾼들이 사계리 해안도로를 걷고 있다.
송악산 가는 도중 바라본 풍경. 한라산과 형제섬 그리고 노란색 배는 관광상품인 잠수함.
송악산으로 올라가는 도중 바라본 풍광. 우측 긴 섬이 청보리로 유명한 가파도이고, 그 왼쪽 뒤가 우리나라 최남단인 마라도.
송악산에서 바라본 풍경. 산방산 한라산 형제섬이 한눈에 펼쳐진다.

바람에 흩날리는 환상의 샛노란 유채밭
   
제주 봄의 정취는 누가 뭐래도 유채꽃에서 완성된다. 시기적으로 약간 이른 이달부터 피기 시작해 4, 5월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예전에는 특용 작물로 재배됐지만 요즘에는 관상용으로 심어 관광객들에게 봄의 기운을 전해준다.

검은빛 현무암 돌담에 둘러쌓인 채 봄바람에 가냘픈 몸을 맡겨 흔들리는 샛노란 유채꽃의 자태는 멀리서 보면 대형 캔버스에 노랑 물감을 뿌려놓은 듯 매혹적이다. 이쯤되면 아무리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유채밭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정도 찍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제주에는 크고 작은 유채밭이 많이 조성돼 있지만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주변과 산방산 일대가 사진 촬영하기에 가장 아름답다.

10만 년 전 엄청난 규모의 수중 화산폭발로 생겨난 성산일출봉 주변 성산리와 오조리 인근 도로변에는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너른 유채밭이 조성돼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잠시 내려 셔터를 누르는 데 여념이 없다. 해발고도 182m에 불과한 성산일출봉은 고도에 비해 오르기는 만만찮다. 수백 개의 급경사 계단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에 서면 한라산은 물론 우도와 섭지코지 등 주변 일대가 한눈에 보여 육신의 고달픔이 일순간 사라질 정도로 환상적이다. 걸어서 왕복 50분.

바닷가 절벽 위의 아름다운 수녀원과 주상절리 등 해안선이 아름다워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촬영지로 유명한 섭지코지에도 역시 유채꽃이 대지를 뒤덮고 있다. 성산일출봉과 우도 그리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흩날리는 유채밭의 풍광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산방산 일대의 유채밭은 인근의 하얀 수선화와 조화를 이뤄 사뭇 목가적이다. 노란 유채꽃잎을 한입 베물고 봄볕을 쬐며 서성이는 조랑말의 여유로운 모습이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제주 봄꽃이 한자리에, 한림공원 
 
한림공원은 제주의 봄꽃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어 제주 봄 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명소. 이곳에는 6년 전 조성한 매화정원이 있어 이른 봄이면 관람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백매 홍매를 비롯 능수버들처럼 가늘고 길게 늘어진 능수매화라 불리는 수양매화가 눈길을 끈다. 잘 단장된 수선화가 곱고 흰 꽃망울을 터뜨려 매화와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산수유도 꽃망울을 터뜨렸다.

강정환 학예팀장은 "산들바람이 불거나 바람 한 점 없이 햇빛이 내리쬘 때 매화와 수선화의 향기가 동시에 발 아래에서 올라와 관람객들의 애간장을 녹인다"고 말했다. 아열대식물원과 제암민속마을, 천연기념물인 협재굴과 쌍용굴 황금굴 등 천연동굴도 빠뜨리지 말자.

한림공원 인근에는 육지와의 거리에 따라 물빛이 옥빛 비취빛 에메랄드빛 등으로 보이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협재해수욕장과 국내에서 가장 젊은 섬인 비양도가 신기루처럼 떠 있으니 이 또한 둘러보자.

협재해수욕장과 국내에서 가장 젊은 섬인 비양도. 
한림공원의 야생 수선화.
                 한림공원의 매화.
한림공원의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근교산 & 그너머 <360> 한라산

 
  한라산 정상에서 북쪽인 관음사 방 향으로 하산하다 만나는 왕관릉. 암 봉이 이름처럼 왕관을 쏙 빼닮았다.
한라산(漢拏山·1,950m)이란 이름은 ‘은하수를 잡아 끌어당길 수 있다’(雲漢可拏引也)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 그만큼 산이 높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한라산은 그 높이에 비해 오르내리는 일이 의외로 수월하다. 산행 기점이 대부분 해발 620~1,280m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같이 쾌적한 날씨에는 산책하듯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실제로 한라산 등반 길에 나서다 보면 평상복에 운동화를 신은 산꾼 아닌 산꾼들이 자주 눈에 띈다.

사실 산꾼들에게 한라산은 겨울 산행지.

국립공원한라산관리사무소는 그동안 겨울철 적설기간(통상 11월부터 다음해 2월)만 한시적으로 백록담 정상을 개방해왔고 나머지 기간에는 7, 8부 능선까지로 산행을 제한해 산꾼들은 겨울에만 한라산을 찾았다. 이른바 눈꽃산행이란 이름으로.

하지만 오랜 기간 실시해온 자연휴식년제와 등산로 복구작업이 최근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면서 올 3월부터 성판악 및 관음사 코스에 한해 정상까지 개방, 이젠 한라산의 사계절을 볼 수 있게 됐다.

동행한 한 산꾼은 “눈덮인 한라산만 두 번 올라 산세를 정확히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 산행으로 그 궁금증이 해소됐다”며 “용진각대피소 주변 산세와 울긋불긋한 단풍, 이끼 낀 탐라계곡의 수려함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행팀은 길이 평탄한 성판악으로 올라 한라산 북면의 멋진 경관을 볼 수 있는 관음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다. 현재로선 두 코스를 연계해 백록담에 오르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산행은 성판악매표소~사라악약수터~사라대피소~진달래밭대피소~한라산 동능 정상~왕관릉~용진각대피소~삼각봉~개미등~탐라계곡대피소~숯가마터~구린굴~관음사주차장 순. 흔히 9시간에서 길게는 12시간까지 잡는데 이는 눈꽃산행 때 아이젠을 찬 경우가 고려된 것 같다. 보통 산꾼이라면 빨리 걷지 않더라도 8시간대면 가능하다.
 

산행은 해발 750m인 성판악휴게소에서 시작된다. 매표소를 지나면 한 눈에 숲이 깊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아 마치 밀림지대를 걷는 기분이다.

처음엔 한라산이라는 상징성과 꽝꽝나무 노가리나무 등 평소 못보던 수종이 눈에 띄어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가지만 길의 단조로움과 같은 수종의 반복, 그리고 꽉 막힌 조망 등으로 이내 지루함을 느낀다.

1시간30분 정도 뒤면 사라악약수터. 물이 나오는 파이프를 쓰러진 고목 안으로 넣어 제법 운치있게 만들어 놨다.

1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앞이 확 트인다. 바로 진달래밭대피소다. 해발 1,500m. 과거 산행통제땐 여기까지가 허용구간이었다. 건물 옆에 매점이 있어 대부분의 산꾼들이 이 곳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컵라면과 음료수, 커피 등이 다른 국립공원보다 엄청 싸다.

이제 정상까지는 2.3㎞. 시간상으로 1시간 안팎. 해발 고도가 높아 키 큰 관목은 점차 줄어들고 구상나무 고사목이 눈길을 끈다. 살아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죽어서는 오히려 신비스런 자태로 산꾼들을 맞는다.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제주도 동쪽의 조망이 훤히 트이면서 동시에 섬 특유의 매서운 바람도 거세진다. 서귀포시가 저 멀리 보이고, 성산 일출봉과 중산간지대 사이의 수많은 오름들이 실루엣으로 펼쳐져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마침내 정상. 정확히 말하면 한라산 동능 정상.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백록담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신령스러움마저 느껴진다. 그래서 영주산(瀛州山)이란 별칭이 붙었던가.

바람이 너무 거세 이내 입이 얼고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간다. 구름걷힌 백록담은 보고 싶은데 도무지 가을바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고 세다. 일순간 ‘와아’소리가 들린다. 백록담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내 구름이 시야를 가로 막는다. 물은 조금 뿐이었고 구름 사이로 까마귀 여러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진 바람 때문에 더이상 지체할 수 없어 북쪽인 관음사 방향으로 하산길을 재촉한다.
 

조금 내려서니 주목과 구상나무 고사목이 많이 서 있다. 장관이다. 30분쯤 뒤엔 왕관릉 이정표가 서 있지만 실제론 볼 수가 없다. 좀 더 내려가야 한다.

곧 용진각대피소. 주변 봉우리 전체가 울긋불긋한데다 기암괴석마저 돌출돼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대피소 뒤편 봉우리는 젊은 산악인들의 설상훈련 장소로도 유명하다.

솥뚜껑처럼 생긴 붕괴위험건물을 지나 탐라계곡 최상부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제서야 왕관릉이 보인다. 이름처럼 암봉이 마치 왕관을 쏙 빼닮았다. 평소 건천인 탐라계곡은 국내 3대 계곡에 들 정도로 경관이 아름답다. 비가 오면 순식간에 폭포수처럼 계류가 쏟아지는 탐라계곡의 이끼 낀 초록의 자태는 과히 인상적이다.

산사면을 비스듬히 트래버스하면 이번엔 개미등. 생긴 모습이 비슷해 붙여진 이름. 길이 좁은데다 길 왼쪽에 바위절벽으로 철조망을 쳐놓았다. 폭설이 내리면 산사태가 가장 빈발하는 곳이다.

조금만 더 가면 이번엔 등뒤로 삼각봉. 봉우리를 인위적으로 깎은 듯 삼각형처럼 생겨 신기할 정도다. 잘록한 개미목을 지나면 발밑 등산로에는 나무를 깔아 놓아 관광탐방로를 걷는 기분이다.

이후 탐라계곡을 두차례 정도 가로지르면 숯가마터와 구린굴 낭떠러지를 차례로 만난다. 여기서 날머리인 관음사주차장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글·사진=이흥곤기자



## 떠나기 전에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이 곧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한라산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제주도에서 차지하는 한라산의 비중이 크다.

금강산 지리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리는 한라산은 제주 사람에게는 동경의 대상이다.

안개가 낀 백록담에 꽃사슴이 내려와 물을 먹고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는 동화같은 산으로 여겨지는 한라산은 신비감이 감도는 산이다.

한라산으로 오르는 산길은 관음사 코스, 성판악 코스, 영실 코스, 어리목 코스 등 네가닥으로 단촐하게 이어진다. 이 중 현재로선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로만 정상 등정이 허용되고 있다.

어리목 코스는 1100번 도로에서 윗세오름 대피소로 올라 서북벽을 구경하고 영실로 하산하는 것이 좋으며 오백나한의 기암과 건폭이 장관을 연출한다.

한라산은 사계절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봄의 한라산은 각종 야생화와 철쭉으로 산상의 화원을 연출하고 여름엔 푸른 신록으로, 속살까지 볼 수 있는 가을엔 붉게 물든 단풍과 억새가, 겨울엔 흰눈을 이고 있는 매력 넘치는 산이다.

당일치기로 한라산만 오르는 것은 너무 아쉽다. 1박2일로 느긋하게 산행후 제주도 구석구석을 둘러보면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기분이다. / 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 교통편


한라산은 산행시간이 길어 출발시간을 계절에 따라 세가지로 나눠 제한한다.

△춘추절기(3~4, 9~10월) 오전 9시30분 △동절기(11~12월, 이듬해 1~2월) 오전 9시 △춘하절기(5~8월) 오전 10시. 이달에는 오전 9시30분까지는 매표소를 통과해야 한다. 국립공원한라산관리사무소 (064)713-9950.

부산서 한라산 등반을 하루만에 하려면 첫 비행기를 이용하면 가능하다. 대한항공(1588-2001) 부산발 제주행 오전 7시10분 비행기를 타면 된다. 월~목 5만9천4백원, 금~일요일 6만3천원(이상 공항세 포함).

돌아올 땐 아시아나(1588-8000) 비행기도 가능하다. 제주발 부산행 마지막 비행기는 오후 8시10분. 그 앞은 오후 7시20분, 6시20분에 있다. 월~수 5만8천8백원, 금~일요일 6만2천9백원(〃). 대한항공의 부산행 마지막 비행기는 목~토 오후 7시30분, 월~수 오후 8시40분, 일요일 오후 8시5분.

공항에서 들머리인 성판악휴게소까지 택시요금은 1만5천원, 날머리인 관음사에서 공항까지는 1만2천원 정도 나온다. 유의할 점 한 가지. 공항에서 등산용 스틱과 맥가이버칼은 위험물로 취급돼 수하물로 맡겨야 한다.


/ 글 사진 = 이흥곤기자 hung@kookje.co.kr
hung@kookje.co.kr  입력: 2003.10.2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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