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진 히말라야 원정대. 왼쪽부터 서성호, 오영훈, 김창호 대장, 전푸르나, 안치영.>


김창호(44)는 세계 산악계가 인정하는 현역 최고의 산악인이다. 그의 등반 기록 중 압권은 후배인 고 이현조와 함께한 세계 최난도 거벽인 낭가바르파트(8125m) 루팔벽 등정이다. 루팔벽은 벽 구간만 세계 최장인 4500m에 평균 경사도 60도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거대 벽. 엄청난 경사 때문에 눈이 쌓이지 않아 흔히 '벌거벗은 산'으로 불린다.

루팔벽 초등은 1970년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69)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메스너는 함께 등정한 동생 귄터를 하산길에 잃었지만 김창호는 후배 이현조와 무사히 하산했다. 1986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현존하는 등반가의 전설로 불리는 메스너는 2004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에서의 삶과 죽음의 장대한 오디세이를 담은 'The Naked Mountain'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때보다 좋은 기술과 장비가 줄기차게 나왔지만 아직도 루팔벽은 재등되지 않고 있다. (중략) 앞으로도 전 세계 유능한 산악인 1000명 중 선택 받은 이는 아마 한 두 명일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이듬해 김창호 팀은 메스너의 예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35년 만에 루팔벽을 가뿐히 올랐다. 머슥해진 메스너는 2006년 친인척 40여 명과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베이스캠프로 떠나는 트레킹 팀에 특별히 김창호를 초청, 서로가 서로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김창호와 라인홀트 메스너.>

 김창호는 부산과의 인연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5000~7000m대의 미답봉을 주로 오르내리던 그에게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가 2006년 에베레스트를 오른 후 두 번째 대상 산인 K2 등반을 앞두고 카라코람 히말라야 전문가였던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그게 인연이 돼 김창호는 2007년 K2부터 2011년 초오유 등정까지 부산원정대의 히말라야 8000m급 13좌를 함께했다.

<2010년 7월 낭가바르파트 정상에 선 김창호(왼쪽)와 서성호.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2011년 파키스탄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발토리빙하에서 부산다이내믹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김창호(왼쪽 세 번째). 왼쪽 첫 번째 홍보성 대장, 두 번째가 서성호.>

<2011년 초오유 등반 때. 왼쪽부터 김창호, 홍보성 원정대장, 서성호.>


 현재 김창호는 히말라야 14좌 중 에베레스트 등정만 남겨놓고 있다. 사실 김창호는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 기회가 한 번 있었다. '도로공사 장애인 등반대'대원으로 참여해 마지막 캠프에서 김홍빈과 함께 등정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에 나섰던, 루팔벽에서 동고동락했던 후배 이현조와 오희준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등정 도전을 포기하고 시신 수습에 나서 결과적으로 기회를 놓쳤다.

 그가 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함께하는 대원은 그와 지금까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34/부경대OB), 안치영, 오영훈, 전푸르나.


 김창호의 이번 등반은 히말라야 14좌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라 다소 독특하면서도 의미있게 계획을 세웠다.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대원들 힘으로 해발 제로에서 출발한다. 인도 바카할리마을에서 갠지즈강의 지류인 후글리강에서 카약을 타고 강을 거슬러고(5일/50㎞), 갠지즈강을 따라 사이클을 타고 국경을 넘어 네팔로 집인한 후 (15일/1000㎞), 도보로 베이스캠프(15일/150㎞)에 도착해 정상에 오른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통상 등반기간보다 40일 정도 더 걸리고 비용도 배나 든다. 카약과 사이클은 이번 원정의 후원사인 몽벨과 LS네트웍스가 후원했다. 

 이번 등반에서 김창호는 무산소로 도전한다. 만일 등정에 성공한다면 김창호는 아시아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등정 기록을 세우게 된다. 세계 최초 무산소 기록은 메스너이며, 김창호는 14번째가 된다. 또 5월 중순에 정상에 오를 경우 1987년 예지 쿠쿠즈카가 세운 기록(7년 11개월 14일)도 경신, 최단 기간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자가 된다.


 한편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김창호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는 현재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2개, 무산소로는 10개 올랐다. 

김 대장은 "에베레스트 정상은 기압과 산소가 평지의 3분의 1 수준"이라며 무산소·무동력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설명했다. 

원정대의 등반 루트는 에베레스트 남동쪽 능선과 로체 서벽이다.
 원정대는 오는 11일 출국한다. 정상 등극은 5월 중순으로 보고 있으며, 그럴 경우 같은 달 30일 귀국할 예정이다.

지난 1980~90년대 국내 산악계를 호령했던 전설의 국내 여성산악희 남난희는 현재 경남 하동 화개골에서 된장을 쑤고 찻잎을 따는 평범한 아낙으로 변신해 있다.

 20여년 전 산에 미친 한 처자가 있었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이 처자는 고교를 졸업 후 상경, 직장을 다니다 요샛말로 우연히 '필'이 산에 꽂혔다. 외로움에 지친 그녀에게 마치 산이 종교처럼 다가온 것.

산을 향한 짝사랑이 넘치면서 난생 처음 산악회라는 곳에 들어갔고 25세 때인 지난 1981년 한국등산학교에 입학, 암벽등반을 배우며 산악인으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2년 뒤 이 처자는 그녀의 삶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되는 획기적인 계획을 세운다. 금정산에서 진부령을 잇는 '태백산맥 종주등반'이 그것이었다. 기껏해야 지리산 종주가 이뤄지고 있을 무렵 능선을 이어 국토를 종주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선구자적 발상이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것도 처자가, 겨울에, 홀로.

 유난히 폭설이 잦았던 1984년 1월 1일부터 76일간의 혹한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종주등반을 성공하자 국내 산악계는 비로소 그에게 '산악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2년 뒤 그 처자는 산악인에게는 당연한 코스인 히말라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에 올랐다.


 식을 줄 모르는 산에 대한 열정은 빙벽으로 이어졌다. 1989년 겨울에는 그간 '금녀의 벽'으로 불리던 설악산 토왕성 폭포 빙벽마저 올라 '역시'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백두대간 종주도 해냈다.
 
 '산악인의 꿈'인 에베레스트도 넘봤다. 고 지현옥과 곽명옥 등 당대의 최고 여성 산악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대장을 맡은 그는 1991년 현지 적응훈련 및 정찰을 겸해 히말라야로 날아가 임자체(6189m)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1993년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가 꾸려질 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탓에 원정대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러났다. 그가 빠진 원정대는 보란 듯이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뤄냈고 그는 심한 상실감에 빠졌다. 당시 나이 37세. 산은 이제 더 이상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돼 가고 있었다. 운명이었다.

 자괴감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소설처럼 청학동 댕기머리 총각이 나타났다. '태백산맥 종주등반' 후 이를 바탕으로 1990년 펴낸 '하얀 능선에 서면'이라는 산서가 히트를 치면서 간간이 팬이라 자청하며 그녀를 찾아왔기에 그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댕기머리 총각은 세 번째 만남에서 뜻밖에도 청혼했다.

 그와 결혼을 하고 이듬해 아들을 가지며 18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지리산 청학동에 정착했다. 거기서 '백두대간'이라는 찻집을 운영했다. 하지만 이 년 반 만에 아이 아빠는 불가에 귀의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이 계속되자 그녀는 6년간의 청학동 생활을 청산하고 생면부지의 강원도 정선에서 자연학교를 운영하며 민들레 홀씨처럼 뿌리를 내렸다.

 행복했단다. 아들 기범이도 잘 자랐고, 틈나면 장돌뱅이처럼 장터 주변도 어슬렁거리고, 정선아라리도 배우고, 막국수와 콧등치기 국수도 먹는 호사도 누렸다. 그것도 잠깐. 호사다마라 했던가. 2002년 태풍 '루사'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아들과 낡은 차만 건지고 모든 것을 잃었다. 수천 권의 책과 자료, 사진 그리고 손때 묻은 등산장비 등 개인적으로 아끼던 물건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정선과의 인연은 삼 년을 못 넘기고 끝이 났다. 이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실의에 빠져 있을 무렵 쌍계사 강원에 있던 아이 아빠가 이 소식을 듣고 지리산 화개에 시골집이 하나 있다고 알려왔다. 남향의 흙집을 본 그녀는 첫눈에 맘에 들어 살기로 결정했다. 지난 2003년 2월말 다시 지리산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

 남난희(53). 항상 그의 이름 앞엔 '전설의' '국내 1세대 여성 산악인'이라는 수식어가 떠날 줄 몰랐다. 젊었을 땐 정통 알피니스트로, 지리산 청학동에선 차향기를 나눴고 정선에선 자연학교를 꾸렸다. 이젠 하동 화개골에서 된장을 쑤고 찻잎을 따는 평범한 아낙으로 변신했다.

그의 표현대로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는 남난희를 경남 하동 화개골 용강마을 촌집에서 만났다. 

(2)산악인 남난희 "좀 모자란 듯 해도 지금 무척 행복한걸요" http://hung.kookje.co.kr/362
(3)남난희 "태백산맥 종주땐 육체적 고통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었어요"
http://hung.kookje.co.kr/363

80년대 전설의 여성산악인 경력 뒤로한 채
양지바른 하동 화개골서 된장 쑤며 시골생활
쌀 빼고 모든 것 자족, 덜 쓰고 절제애 익숙
아들 기범, "자연과 교감 갖는 삶 영위했으면"

 한때 국내산악계를 호령했던 남난희가 하동 화개골 용강리 시골집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양지바른 툇마루 기둥에 기대서서 상념에 잠겨 있다.

■ 남난희의 보금자리 화개골 시골집
 사실 거처가 하동 화개골이라 내심 우려가 됐다. 지금의 화개골이야 입구의 화개장터를 비롯해 그 유명한 벚꽃길과 쌍계사 그리고 야생차 재배지 및 판매처로 앉은 터만 지리산 자락이지 번잡한 관광지로 변한 지 꽤 됐기 때문이다. 

 하나, 기우였다. 남난희의 집은 화개골에 아직도 이런 집이 남아 있나 할 정도로 마을에서 구불구불한 포장로로 적당히 올라야 만날 수 있었다.

본채 뒤 비탈면에는 차나무가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다.
남난희는 손님이 찾아오면 툇마루에서 직접 재배해서 덖은 차를 대접한다.
고색창연한 돌담 옆에는 얼핏 봐도 20개의 된장항아리가 놓여 있다. 
최근 담근 자식 같은 된장을 살펴보고 있는 남난희. 저 멀리 겹겹이 겹쳐진 지리산 자락과 그 우측 섬진강 너머로 거구 백운산이 아련하다. 
일하던 도중 잠시 고개를 들고 지리산과 백운산을 바라보는 남난희.

시골집 대문 앞 남난희. 머리 위 걸려 있는 것은 청학동에서 운영하던 찻집 '백두대간'의 간판이다.

최근 담근 된장을 살펴보고 있는 남난희.


절친한 산 후배가 남난희의 산서 '하얀 능선에 서면' 출간을 기념한 선물한 판각화 작품이 행랑채 벽면에 걸려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황장산 줄기를 배경으로 남난희가 마당의 가마솥을 살펴보고 있다.


우물과 동굴. 우물엔 산에서 꺾어진 매화 가지를 담궈 놓았고, 동굴은 자연 저장고로 활용한다고 한다.

 양지바른 남향의 집 뒤로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황장산 촛대봉 산줄기가 섬진강을 향해 내달리고 있고, 시야가 확 트인 정면으론 지리산 줄기가 겹겹이 겹쳐져 있다. 그 끝자락엔 섬진강 너머 거구 백운산이 손에 잡힌다. 좀 더 둘러보자. 본채 뒤 비탈면에는 차나무가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고 바로 옆 사랑채는 대숲에 둘러싸여 있다. 고색창연한 돌담 앞에는 20여 개의 된장독이 숨을 쉬고 있고, 마당 한쪽에는 우물과 커다란 바위동굴이 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정감이 가는 촌집 그대로이다. 여성으론 약간 큰 덩치의 소유자이지만 얼굴에는 언제나 차분한 미소가 떠날 줄 모르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인 남난희를 쏘옥 빼닮았다.

 남난희는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것도 인연이라면 참 고마운 인연"이라고 말했다. 유난히 그는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수년 전부터 기자들의 취재는 일절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며 이것도 인연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하루 시작은 불일암서 백팔배로
매일 아침 그는 집 건너편에 있는 쌍계사 산내암자인 불일암까지 마실을 다녀온다. 왕복 3시간. 백팔배를 하기 위해서다. 이날만은 기자의 요청으로 2시간쯤 늦췄다. 쌍계사의 또 다른 산내암자인 국사암 주차장을 들머리로 산행은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조우한 불일폭포휴게소 산장지기 홍인수 씨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라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불일산장지기 홍인수 씨와 불일암으로 오르는 남난희(왼쪽)
불일산장을 지나 불일암으로 향하는 남난희. 산길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

 그는 일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 이 길을 오르내린다. 이 길이 초행이라는 기자의 말에 남난희는 뭔가를 알려주기에 바쁘다. "4월 말 이 길은 진달래로 황홀경에 빠집니다. 이 길의 종착역이자 지리 10경 중 하나인 불일폭포 우측 절벽에는 온통 진홍빛으로 불타오르지요. 보기 드문 절경으로 화엄의 세계가 따로 없어요."

 옛 벗과 같은 편안한 이 길을 두고 남난희는 "집 가까이에 지리산의 보석 같은 산길과 그 끝자락에 백팔배를 할 수 있는 불일암과 불일폭포까지 있어 그야말로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고백. "사실 젊었을 땐 산을 볼 줄 몰았어요. 제가 목표로 하는 대상만 보았지 주변의 산은 볼 줄 몰랐어요. 아니 보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오르고자 하는 그게 산의 전체인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것도 산의 일부일 뿐이었어요." 한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정통 알피니스트가 뒤늦게 산의 품에 안겨 관조하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법을 익힌 듯하다.

 "그동안의 산이 '등산(登山)'의 산이었다면 지금은 '입산(入山)'의 산이죠. 원래 우리의 산은 등산의 대상이 아니었잖아요. 서구의 알피니즘이 들어오면서 도전의 대상이 돼버렸죠. 더 빨리,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오림짓의 연속. 인간이 자연에 도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하지만 입산은 달라요.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산과 함께 모든 것을 같이한다고 생각하고 올라보세요. 제 아들 기범이와 산에 오르면 그놈은 나무를 껴안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도 해요. 저에겐 도전의 대상으로 제압해야만 했던 산이 아이에겐 정겨운 친구로 다가와요. 한 세대를 건너서야 산의 소중함을 알게 됐으니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요."

 사실 기자는 동행하면서 약간 벅찼다. 질문하랴, 간단하나마 메모하랴, 주변 산세 보랴. 해서, 평소 걸음걸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기자를 배려해 속도를 약간 늦추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엄홍길과 도봉산 산행 때 그 양반은 얘기를 나누다 일순간 쏜살같이 내달리더라고 하자 남난희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산을 타다 보면 산과 합일되는 시점이 일순간 찾아와요.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의식하지 않게 되죠."
고 변규화 옹이 30여 년간 머문 일명 '봉명산장'이라 불리는 불일평전 오두막 휴게소.

 산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어언 45분. 일순간 뜻밖에도 너른 평지가 기다린다. 세석평전 돼지평전처럼 지리산에서 몇 안되는 산중 너른 터인 불일평전이다. 재작년 작고한 변규화 옹이 30여 년간 머문 일명 '봉명산방'이라 불리는 불일평전 오두막의 새 산장지기 안주인이 고로쇠 물 한 잔을 건넨다. 남난희와 기자는 한 잔 들이켜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5분이면 불임암에 닿는다. 남난희는 백팔배를 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리니 불일폭포를 다녀오라고 한다.
                 불임암에서 백팔배를 올리는 남난희.

-백팔배를 하면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딱히 꼬집어 바라는 것은 없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줘 고맙다고 빕니다. 언제부터인가 매일 오다 보니 '어제는 무엇을 했고 무슨 일이 있었다몠는 식의 보고를 하면서 어제의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젠 백팔배를 해야 제 마음이 편안해져요."

 하산길 산장지기 부부는 마침 산골에 장어가 생겨 국을 끓였다며 한사코 식사를 하고 가시라고 붙잡는다. 찬은 배추와 된장, 산나물에 총각김치지만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하다는 속담이 기자에게도 적용될 줄이야, 밥도둑이 따로 없다.

산만 타는 선머슴이 기막힌 된장을 담그다
 다시 남난희의 집 툇마루에 마주앉았다. 차와 함께. 아들 기범이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하다 짬이 나면 그는 양지바른 이곳 툇마루에 앉아 산천을 바라보거나,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신다. 그의 보금자리인 셈이다. 눈길은 당연히 마당의 된장 항아리로 옮겨진다. 얼핏 봐도 스무 개는 넘는다. 그는 재래식 방법으로 된장을 만들어 가계를 꾸려 나간다. 생계유지용이다.

 딱히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지만 먹어 본 사람들이 "이렇게 맛있는 된장과 간장은 처음이라고 하니 맛은 있나 봐요"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산만 다니는 선머슴인 줄 알았던 남난희가 언제 이런 재주가 있었느냐고 지인들이 놀리기도 한단다.

"콩은 경험상 강원도산이 맛이 좋아 지인에게 화학비료를 치지 않고 키워달라고 부탁을 하죠. 여기에 지리산의 맑은 공기와 물 햇빛 그리고 5년 이상 묵힌 소금에 자연의 기를 듬뿍 받은 저의 정성이 곁들여지다 보니 맛있다고들 해요. 보람을 느끼죠." 비결은 따로 있었다.

 "시골에서 살며 정말 괜찮은 먹을거리를 만들어 나눠주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 저에게 수고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한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하나, 남난희는 이 말은 잊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된장을 구입하겠다고 연락이 이따금씩 오지만 보내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더 많이 된장을 만들면 더 많은 벌이가 되겠지만 콩 10가마가 넘어가면 손맛을 잃는단다. 무엇보다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노동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그게 그의 지론이다.

 대신 그는 지난해부터 차를 재배, 직접 덖은 후 판매도 한다. 아들 기범(남원 실상사 대안학교 3학년)이의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남난희는 쌀 이외의 모든 것을 자족한다. 대문 앞 텃밭에서 거의 모든 것을 직접 키운다. 심지어 우물 옆 음지에선 버섯 재배도 직접 한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남난희. "저는 약간 모자란 듯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요. 덜 쓰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하지 않는 절제에 이젠 익숙해져 있나봐요."

 오랜 기간 화두를 붙잡고 용맹정진하다 깨달음을 얻은 노승이 연상될 정도로 차분하면서 느긋하고 한편으론 사물을 달관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들을 대안학교에 보냈던데.
"요즘은 사춘기여서 저에게 약간의 반항도 해 섭섭하지만 저에겐 고마운 스승 같은 존재예요. 제도권 교육은 못 미더워 보냈어요. 본인이나 저도 만족하고 있어요. 저는 아들에게 무엇이 되라고는 요구하지 않아요. 작은 바람이 있다면 자연과의 교감을 갖는 삶을 영위했으면 좋겠어요."

-산은 이제 완전히 끊은 겁니까.
(잠시 뜸을 들이다)"통일이 되면 백두대간을 밟고 백두산에 꼭 가고 싶어요. 또 역전의 용사들이 좋은 기회를 만들면 따라붙을 겁니다. 괜히 절 은퇴시키려고 하네요. 송충이가 솔잎을 못 먹으면 죽어요."
실제 그의 저서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고 언젠가 통일이 되는 그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북으로) 나설 것이다'.

(1)'산을 버려 산을 얻은' 전설의 여성산악인 남난희의 삶 
http://hung.kookje.co.kr/361
(3)남난희 "태백산맥 종주땐 육체적 고통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었어요"
http://hung.kookje.co.kr/363


 


■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회상하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산행이었죠
 후배들 지원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했고
 남북한 통일되면 백두대간 타고 백두산 가고파"

 장삼이사들은 남난희 하면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우선 떠올린다. 25년이 지난 지금 남난희는 "내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한 것이 행운이며, 그로 인해 지금의 내가 완성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태백산맥 종주등반' 종착역인 진부령으로 들어오면서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난희.
                사진제공=수문출판사.


-그토록 힘든 등반을 왜 했나요.
"당시엔 산에 미쳤어요. 암벽에 빙벽에, 시간만 나면 산엘 갔어요. 월급을 주는 직장도 산을 타기 위해 다녔어요. 모든 게 산과 타협이 되지 않으면 포기했을 정도였으니까. 답변이 되나요."

 잠깐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백두대간이란 용어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친숙한 백두대간이란 개념은 남난희가 태백산맥 종주를 시도할 때인 1984년에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고 이우형 씨가 1986년 이 개념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고,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소속 대원들이 종주 후 대간종주기를 연맹회보인 '엑셀시오'에 소개했다. 이는 산꾼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 1990년 월간 '사람과 산'이 연중기획으로 종주기사를 연재함으로써 전국의 산꾼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백두대간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재밌는 점은 당시 인기리에 연재된 백두대간 종주기를 남난희가 썼고, 부산에서 활동하는 권경업 시인이 동행하며 산시를 곁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난희가 76일간 악전고투하며 걸었던 코스는 어디일까.

그는 금정산 고당봉에서 출발, 진부령에서 끝을 맺었다. 도상거리 약 590㎞, 실제 걸은 거리 약 800㎞, 1000m 넘는 봉이 50여 개 그리고 가없는 고개, 령, 봉, 재, 5만도폭 지형도만 27개나 되는 대장정이다. 요즘 산줄기로 보자면 낙동정맥을 타고 오르다 태백산에서 백두대간과 합류해 진부령까지 걸었던 셈이다.

백두대간을 몰랐던 당시로선 이 코스가 국토의 등뼈, 다시 말해 지금으로 치자면 백두대간의 개념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 자체가 당시 인식의 한계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남난희는 "물론 종주는 혼자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10차례 후배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그들이 없었다면 종주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무작정 내달린 게 아니라 철저한 준비 또한 필수였다고 덧붙였다. 떠나기 전 지도상으로 등반하는 인도어 클라이밍으로 전 지점을 머릿속에 넣었고, 지원조와는 1차 만날 지점을 놓치면 2, 3차까지 면밀히 준비했다고 한다.

"배낭이 너무 무거워 1g이라도 줄이려고 칫솔을 반 토막냈고, 길을 잃고 잡목에 갇히고, 가슴까지 쌓인 눈속에 파묻혀 울었어요. 그러면서 차츰 출발 전 자신감은 모두 사라졌어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어요."

 당시를 떠올리던 남난희는 "그 정도로 힘들었으면 약간 망설였을텐데 그땐 동계 종주가 얼마나 무모한지도 몰랐다"며 약간 상기된 채 웃었다.

               '태백산맥 종주등반'을 하던 지난 1984년 그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 무척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0년 남난희는 이 종주를 바탕으로 책을 엮었다. 제목은 '하얀 능선에 서면'. 국내 산서로는 드물게 중판에 중판을 거듭, 당시로선 베스트셀러로 올랐다. 2004년 남난희는 산을 내려온 산악인의 삶을 실감있게 그린 몟낮은 산이 낫다'(학고재)를 출간했다.

2004년 산을 내려와 산을 돌아본 남난희의 두 번째 저서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 제목도 참 의미가 있다.

'태백산맥 종주등반' 뒤 6년만인 1990년 펴낸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


(1)'산을 버려 산을 얻은' 전설의 여성산악인 남난희의 삶 
http://hung.kookje.co.kr/361
(2)산악인 남난희 "좀 모자란 듯 해도 지금 무척 행복한걸요"
http://hung.kookje.co.kr/362


한 번쯤 봤을 법한 '준·희' 리본 주인공 최남준 2대 산행대장
부인과 함께 올랐던 산에 리본 달아… 자비로 약수터 10여곳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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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준 대장(왼쪽)과 그가 사용하는 오렌지색 리본.
 

명산이건 근교산이건 산깨나 탄 분이라면 산행 도중 '준·희, 그대와 가고 싶은 산'이라고 적힌 주황색 리본을 한 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한번에 여러 장 걸린 나뭇가지가 아닌 아주 호젓한 산길 제법 높은 가지 위에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이 리본을 단 주인공은 바로 국제신문 제2대 산행대장을 역임한 최남준(66) 씨.

지금은 건건산악회의 고문으로 물러나 있지만 한창 땐 건건산악회를 이끌며 1대간 9정맥을 주파하며 지역 산악계에 종주산행의 붐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다. 개인적으로 그는 1대간 9정맥 중 금남정맥과 금북정맥만 빼고 아마추어 산꾼들을 이끌고 2번씩이나 종주를 한 건각이기도 하다.

그의 산사랑과 가족사랑은 지역 산악계에서도 훈훈한 사례로 회자된다.

리본에 적힌 '준·희'는 최 씨와 10여 년 전 유명을 달리한 그의 부인 이름의 이니셜. 최 씨는 부인이 지병으로 세상을 뜬 후 크게 낙심한 나머지 한동안 산을 끊었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1년 정도 부인의 유품을 치우지 않아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느날 홀연히 산에 다시 나타났다. '준·희'라고 적힌 리본을 들고서. 데이트도 산에서, 신혼여행도 한라산에 갔을 만큼 산을 사랑했던 그는 부인과 함께 했던 산을 찾으면서 리본을 하나씩 달고 또 달았다.

그의 산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그는 후배 산악인인 조병주 김무길 씨 그리고 최근 타계한 김희조 씨와 함께 사비를 들여 지금까지 10여 곳에 약수터를 조성했다. 백두대간길의 깃대봉 약수터와 조령산 조령샘, 금정산 남문 인근 수박샘, 동문 인근 북바위샘, 장군봉 인근 옹달샘 등이 그가 만든 대표적 샘터이다.

최 씨를 잘 아는 한 지인은 "약수터 조성을 위해선 돈은 물론이고 장마철 평상시 갈수기 가뭄 때 등 적어도 네다섯 번 정도를 가야 하는 성의가 있어야 된다"며 "산을 사랑하지 않으면 엄두도 못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최 씨는 "산을 좋아하면서 미장 기술을 가진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계속해서 능선길에 물줄기를 찾아 샘을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최 씨는 최근 오랜 산행으로 인해 다리가 안 좋아져 정상적인 산행을 할 수 없다. 많이 걸어봐야 3, 4시간이 임계치다. 해서 그는 또 다른 과업에 착수했다. 2만5000분의 1 지형도에 이름이 없거나 정상석이 없는 부산근교의 봉우리에 가로 7㎝, 세로 20㎝ 되는 나무팻말을 달기 시작했다. 현재 500여 개 달았으며 다리에 힘을 남아 있을 때까지 이 작업은 계속될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최 씨는 영원한 '국제신문맨'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여의 국제신문 산행팀과의 인연 때문에 타 신문의 산행대장 제의나 타 방송의 산행 관련 프로그램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사실 최 씨는 기자가 근황을 꼼꼼히 묻자 "니 기사 쓸라고 하나. 사람 우습게 만들지 마라"며 중간에 말문을 닫았다. 그때 기자는 절대 기사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도 썼다. 꾸지람 들을 각오를 하면서.


글=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산꾼의 집 초막 이대실 씨.

"약차 한 잔 들고 쉬었다 가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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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봉화 청량산을 좀 안다는 사람이 ‘산꾼의 집'을 모르면 거짓말이고, 청량산을 산행한 사람이 ‘산꾼의 집'에서 약차 한 잔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 날 산행은 헛한 것이다. 바로 청량사 인근 ‘산꾼의 집'에서 2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등산객들에게 약차와 쉼터를 제공한 초막(草幕) 이대실(65) 씨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씨가 등산객들에게 공양을 하는 차는 구정차. 당귀 산수유 진피 오가피 계피 감초 등 9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단풍철의 경우 평일에는 2000잔, 주말에는 4000잔, 최고 절정기에는 1만 잔까지도 대접했단다.

‘산꾼의 집'은 청량사에서 응진전 가는 길에 있다. 걸어서 5분. 바로 옆이 오산당이다. 언제부터인가 청량산 도립공원에서 ‘산꾼의 집'이란 이정표를 달아줄 정도로 유명인사로 대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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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독특한 산꾼의 집 화장실 문(왼쪽)과 청량사에서 바라본 축융봉. 운치있는 소나무 아래 너른 터에선 매년 가을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이 씨가 청량산과 인연을 맺은 건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원효대사와 관련된 책을 읽었어요. 근데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를 원효대사가 창건했대요. 그래서 무작정 이곳을 찾았어요."
당시 청량사는 불당과 요사채만 달랑 있었고, 노비구니가 홀로 지키고 있더란다. 그냥 이유없이 청량사가 맘에 들어 그 비구니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했다가 크게 호통만 듣고 발길을 돌렸다.

“그때 결심했지요. 비록 지금은 이렇게 떠나지만 언젠가는 이곳에서 살거라고."
고교 졸업 후 연극영화과를 다닌 그는 영화한다고 아버지 몰래 과수원을 팔아 영화를 제작했지만 투자비만 날렸다.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한 그는 경북 영양에서 사진관 조수로 취직,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후 돈을 제법 모아 사진관에 이어 예식장도 인수했다.

산에도 열심히 다녀 전국의 산 2000곳을 오르내렸다. 해외원정도 다녀왔다. 이후 봉화 안동 영양 등을 아우르는 대한산악연맹 경북북부지역연맹을 만들었다. 그래도 뭔가 허전했다. 먹고 살만 하니까 다시 청량산이 생각난 것이다. 지난 91년 아내와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아내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아내는 고맙게도 날 이해해줘 붙잡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에게 평생 모아 이룩한 예식장 웨딩숍 미용실 뷔페를 각각 물려주고 맨 몸으로 이곳 청량산으로 들어와 줄곧 혼자 지내고 있다. 항상 머리엔 뚜껑없는 벙거지를 쓰고 개량한복을 입은 그를 두고 혹자들은 ‘이 시대의 기인'이라 부른다.

소리꾼이자 도공 산악인 시인 서예인이며 대금 가야금을 연주하고 장승도 깎는다. ‘산꾼의 집'에서 들려오는 대금 및 가야금 산조는 그가 연주한 곡이며 이곳에 전시된 도자기와 글씨 그림 시는 모두 그의 작품이다. 4년 전 대한민국종합미술대전 선서화 부문에선 대상을 받았으며 각종 소리마당이나 지자체 축제에 단골 게스트로 초청받는다. 청송교도소 정신교육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15년간 청량산에서 무려 100여 명의 목숨을 구해낸 전문 산악인이기도 하다. 6년전엔 200m 절벽에 메달린 초등학생을 119구조대원도 몸을 사리는 가운데 과감히 몸을 던져 구해내기도 했다.
그는 “산은 나를 물속에 달처럼 살다 가라한다"며 모든 것을 초연한 듯 말하면서도 "딴 그리움은 접을 수 있어도 손주에 대한 그리움은 접을 수가 없다"며 인간적인 고뇌도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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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은 전형적인 가을산이다.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사. 부산에서 꽤 멀어도 발품을 팔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산을 향한 초인의 고뇌 "이번에도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히말라야 8000m급 히말라야 14좌와 얄룽캉 그리고 지난해 5월 31일 로체샤르마저 오른 엄홍길은 지난 5월 28일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 최근에는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마음의 숲, 272쪽)를 펴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면서 느꼈던 삶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란다.


 엄홍길이 세간에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 88년. '서울 올림픽 기념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가, 정상을 밟게 되면서부터다. 물론 그 이전인 85, 86년에도 에베레스트에 두 차례나 도전했지만 경험 미숙으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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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엄홍길 기념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필자.


 첫 등정의 기쁨도 잠시, 엄홍길에겐 이후 좌절과 절망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89년부터 92년까지 안나푸르나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등에 도전했으나 6회 연속 등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93년 초오유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불운의 사나이'라는 오명을 벗고 홀연히 일어섰다. 산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우직함, 겸손함이 좌절을 극복하고 빛을 발하는 버팀목이 된 것이다.
 이후 95년 한 해에 마칼루 브로드피크 로체 등 3개 거봉을 오르는 등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도중 안나푸르나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4전 5기 끝에 힘겹게 넘어섰다. 2000년 '죽음의 산' K2를 올라 세계에서 8번째 히말라야 14좌에 등극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31일 로체샤르마저 올라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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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거봉의 종지부를 찍은 지난해 5월 로체샤르에서의 엄홍길 대장.


 #38전 20승 18패, 성공률 겨우 반타작 넘어

 엄홍길은 작심한 듯 이 말부터 시작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저는 실패가 성공만큼이나 많습니다. 이제까지 언론이 실패는 크게 부각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성공 사례만 대대적으로 보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필부들에게 엄홍길이는 히말라야에 갔다 하면 성공만 하는 탄탄대로의 산악인으로 각인된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히말라야 8000m 거봉과의 전적(?)은 '38전 20승 18패'로 승률 5할이 약간 넘는다.
 "에베레스트는 세 번 오르고 세 번 실패했고, 안나푸르나는 4전5기, 캉첸중가와 낭가파라바트는 각각 세 번만에, 이번에 16좌의 종지부를 찍은 로체샤르는 3전4기만에 성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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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 지역을 통과하는 엄 대장(왼쪽)과 등반에 앞서 제단앞에서 안전한 등반을 기원하고 있는 엄 대장. 모두 로체샤르에서다.


 그리곤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선 성공에서 얻은 지혜보다 실패에서 깨우친 앎이 더 소중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듬던 고통스러운 장면이 떠오른 듯 처음 만날 때의 예의 순박한 눈빛이 일순간 일그러진다.

 #히말라야는 살아있는 신(神)

 흔히 히말라야 8000m급 거봉들은 산신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다고 하던데.
 "공감합니다. 히말라야는 살아 움직이는 위대한 신처럼 느껴져요. 해서 히말라야는 도전해 들어오는 인간의 마음가짐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때문에  한순간의 자만심이나 오만함은 많은 사람의 불행을 가져올 수 있어요. 수도자와 같은 마음으로 산과 하나가 돼야 비로소 등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엔 안 그렇지만 일단 산에 들어가면 젊은 대원들을 틀어잡습니다.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그게 곧 죽음이니까 어쩔 수 없이 독재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대원들을 차분하게 만들어야죠."
 22년 동안 히말라야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 만의 철학인지라 실감나게 다가왔다. 순간 최근의 로체샤르에선 산신이 허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던가 하는 사실이 몹시 궁금했다.
 "예, 느꼈어요. 로체샤르는 4번만에 성공했어요. 지난해 원정 때는 정상 200m를 앞두고 눈사태 우려 때문에 발길을 돌렸고, 2003년에는 150m 앞에서 눈사태를 당해 대원 2명을 잃은 뒤 철수한 아픈 기억이 있지요. 로체샤르는 베이스캠프에서 3500m가 넘는 수직 빙벽이 떡 버티고 있어 보는 순간 정이 확 떨어집니다. 대원들에게 내색은 안했지만 '과연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빙벽을 오르는 순간에도 수시로 낙석이 떨어져 그냥 운명을 하늘에 맡겼었죠."
 하지만 이런 로체샤르가 드디어 길을 열어주고 있구나 하는 영감을 받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등반 도중 세르파 한 명이 500m 아래로 추락을 했는데 약간의 골절상만 입고 살았어요. 통상 이 정도면 100% 사망이거든요. 근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거죠."
 엄 대장은 그때부터 산신이 원정대를 도와주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그를 짓눌렀던 무거운 짐이 눈녹듯 사라졌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등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일이 계속 발생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풀려 점점 자신감이 생겼단다. 하지만 그로 인해 원정 기간이 점차 길어져 계획했던 두 달을 넘어 세 달째 접어 들면서 초조함이 생겼다.
 "그래도 저는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기회는 올 거라고 확신했죠. 그게 적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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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이 맨 앞에서 등반을 하며 대원들을 이끌고 있다. 로체샤르에서.

 #잊지 못할 4전 5기 안나푸르나

 파란만장한 히말라야의 고난과 환희를 엮은 자전적 기록인 '히말라야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에서 엄홍길은 '안나푸르나만큼 처절하고 피눈물 나는 기억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얼만큼 버거웠으면 그랬을까.
 "아다시피 안타푸르나는 5번만에 올랐어요. 한마디로 저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을 부르는 악몽과도 같은 산이었어요. 세르파 나티와 까미, 그리고 한국 최고의 여성 등반가였던 지현옥을 잃는 아픔도 겪었지요. 특히 지난 98년 네 번째 도전 때는 7500m 지점에서 추락하는 2명의 세르파를 구하려다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당했죠.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도 베이스캠프까지 2박 3일 걸리는 고행길을 나홀로 6일 간의 죽음을 넘나드는 오체투지로 기적같이 돌아왔지요. 결국 국내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담당의사는 앞으로 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죠. 산악계에서도 '이제 엄홍길이는 끝났구나'라는 말이 회자됐대요. 하지만 저는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는 재활로 결국 10개월 만인 이듬해 봄 안나푸르나를 등정했어요."
 지금까지 오른 히말라야 16좌 중 개인적으로 어렵기의 순서를 매긴다면.
 "역시 안나푸르나가 가장 어려웠고 다음으로 칸첸중가 로체샤르  K2 얄룽캉 마칼루 에베레스트 가셔브롬1 로체 다올라기리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브로드피크 마나슬루 초오유 가셔브롬2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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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이 로체샤르 등반에서 대원들을 이끌고 있다.(왼쪽) 우측은 지난 2006년 네팔 딩보체에서 조우한 '다이나믹 부산 에베레스트 원정대' 홍보성 대장과 무사등반을 기원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스페인팀과의 독특한 조우는 행운"

 히말라야 완등 기록을 보니 스페인 원정대와 무려 5번나 함께 등정을 했던데.
 "후아니토 오아르사발. 저보다 세 살 많은 그는 세계에서 6번 째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 등반가죠. 지난 90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의 첫 만남 이후 92년 낭가파르바트, 95년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에서 또 다시 조우했죠. 그런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저의 등반 경력이나 등반할 때 저의 모습을 유심이 관찰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듬해 봄 마칼루를 같이 등반하자는 거예요. 그것도 개인장비를 갖추고 네팔까지만 오면 된다는 호조건이었어요."
 화끈한 성격으로 속도 위주의 경량 등반이 체질화 된 그들은 엄홍길과 등반 스타일이 비슷해 찰떡궁합이었다. 마칼루 이후에도 엄 대장은 그들과 함께 저렴한 경비로 브로드피크 로체 가셔브롬1 안나푸르나를 차례로 올랐다. 이렇게 히말라야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자 국내에선 비로소 엄홍길을 위한 히말라야 14좌 추진위가 생겨 숨통이 튀였다.
 "만일 스페인팀을 만나지 못했다면 현재의 이같은 영광은 늦쳐졌거나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죠. 그런 면에서 전 인복이 많은 것 같은데요."

 #거봉 등반은 이제 그만…유족들 도울 터

 "저와 함께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동료는 항상 마음 속의 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민간 문화재단인 '히말라야 휴먼문화재단'(가칭)을 만들어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유족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엄 대장은 지금도 그들이 가끔 꿈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또 청소년들을 위해선 산악 및 탐험 캠프 등을 만들어 산에서 배운 노하우를 전수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이제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더 이상 등반에 나선다는 것은 오만이고 산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의 몫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겠습니다."

글=이흥곤 hung@kookje.co.kr
사진 일부=엄홍길 원정대 제공

# 산악인 엄홍길의 전시관은 전국에 3곳

 산악인 엄홍길(48)의 전시관은 셋.

하나는 46년간 살았던 의정부시에 있고, 또 하나는 지난해 10월 그의 고향인 경남 고성에 문을 열었다. 나머지 하나는 원도봉산 기슭에 위치한 그의 모교인 호암초등학교에 있다.
 
예전에 고을 원님이 치세를 잘하면 송덕비 하나 겨우 세워주는 것이 고작이었던 데 비하면 엄 대장으로선 사실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관광객 유치 등 지자체의 편의에 따라 건립되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바로 엄홍길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척도임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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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의정부시 옛 호원동사무소에 당시 1억7000만 원을 들여 마련한 엄홍길 전시관 외형과 내부.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의정부시. 지난 2003년 3월 엄홍길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기념, 옛 호원동사무소에 당시 1억7000만 원을 들여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히말라야 14좌 완등 당시의 사진과 그간 히말라야에서 사용한 그의 등산용품들이 시대별로 진열돼 있다. 하지만 이곳은 최근 도로 부지에 편입돼 원도봉산 쪽으로 확장, 이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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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의 엄홍길 전시관과 그 내부. 티베트의 불경이 적힌 오색 룽다가 걸려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그가 2세 때까지 살았던 고향인 경남 고성군은 33억 원을 들여 고성의 진산 거류산 기슭 1만7000여 ㎡에 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지난 2004년 착공, 3년여의 공사 끝에 지난해 10월 개관했다. 전시관에는 그가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등정 당시 사용했던 등산텐트와 피켈 산소마스크 등 각종 장비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엄홍길 전시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고성군은 매년 엄홍길을 초청, '엄홍길과 함께 하는 1박2일 등산축제'를 열기로 하고 지난 5월 첫 행사를 상황리에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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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도봉산 기슭에 위치한 엄 대장의 모교인 호암초등에도 지난 2005년 조그만 전시관을 개관해 어린 학생들에게 그의 진취적인 도전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전시관에는 엄 대장이 사용하는 배낭과 등산용품과 등반 당시의 각종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 산악인 엄홍길은 알고 보니 장애인(?)

뒤틀린 다리, 잘려나간 발가락
정상을 탐한 산악인의 혹독한 대가


'엄홍길 대장은 장애인(?)'.
인터뷰 도중 엄홍길은 "고백컨대 저는 장애인 등급 판정을 받지 않았을 뿐 장애인"이라고 말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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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의 다친 오른쪽 다리는 왼쪽보다 한눈에 봐도 가늘다.  

그는 지난 1998년 안나푸르나 등반 때 추락하는 셰르파 두 명을 구하려다 떨어져 오른쪽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당했다. 발목뼈는 물론 종아리뼈와 쇄골이 부러지고 인대 또한 끊어졌다. 이후 수술을 받고 끊임없는 훈련으로 등반이 가능해졌지만 그래도 후유증이 만만찮다는 것이다.

그는 즉석에서 일어나 바지를 걷어 두 다리를 보여줬다. 히말라야 8000m 거봉을 제 집 드나들 듯해 두 다리는 커다란 알통으로 단단했지만 다친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보다 한눈에 봐도 가늘었다.

기능 또한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오른쪽 다리는 산사면을 오를 때 그 후유증으로 발바닥 전체를 바닥에 대지 못해 사실상 앞꿈치로 걷는다고 했다. 이렇다 보니 오른쪽 엉덩이와 허리살도 왼쪽과 비교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런 불편한, 아니 등반을 하기에는 치명적인 다리로 이후 낭가파르바트 칸첸중가 K2 얄룽캉 로체샤르를 등정했다니 그저 존경심이 우러날 뿐이다.

엄 대장은 당시 목숨을 걸고 네팔 셰르파를 구한 자신의 이야기가 네팔의 유력 일간지에 사진과 함께 실렸다고 말했다.

"당시 네팔에선 외국인 근로자 자격으로 한국에 갔다가 임금체불, 사기 등을 당해 본국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제 미담 기사가 실리면서 여론의 흐름이 단번에 바뀌었다더군요. 한마디로 이 한 몸 바쳐 애국했죠."

엄 대장은 앞서 1992년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 동상에 걸려 오른쪽 엄지발가락 한 마디와 두 번째 발가락 일부를 잘랐지만 산행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글 사진=이흥곤 hung@kookje.co.kr
일부 사진=해당 지자체 및 호암초등학교 제공
 


곳곳에 유년의 흔적… "나에겐 말없이 품어 주는 어미 같은 산"

소년 엄홍길 "뛰고 달리고 산 전체가 놀이터"
한때 재활훈련지 "제2의 삶도 이곳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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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선친이 심은 오동나무를 보고 마치 연인을 만난 듯 꼭 껴안고 있는 엄홍길 대장(왼쪽), 우측은 엄 대장이 놀았던 원도봉산 와폭과 소. 엄 대장은 "나도 저렇게 놀았다"고 말했다.


엄홍길과 원도봉산은 데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지난 1960년 경남 고성군 영현면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원도봉산 기슭으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부모님은 등산객들을 상대로 조그만 매점을 운영했다.


덕분에 엄 대장의 놀이터는 선택의 여지없이 원도봉산이었고 나무와 풀 그리고 계곡의 물고기가 친구였다.

그는 이곳에서 유년 소년 청년기를 모두 보냈다. 심지어 장가를 들어 도봉산 아래 조그만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기실 삶의 대부분을 본가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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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도중 어렸을 적 살았던 원도봉산의 기를 받고 있는 엄홍길 대장(왼쪽)과 '엄홍길이 살던 곳'이라 적힌 안내판을 보고 있는 엄 대장.

지난 1998년 안나푸르나 원정 중에 발목을 다쳐 쇠못을 네 개나 박는 수술을 받고 나서 의사로부터 더 이상 산에 오를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 재활 훈련을 도와준 곳도 바로 원도봉산이었다.

"당시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같은 이곳 원도봉산에서 목 놓아 울기도 했지만 용기를 준 곳도 바로 원도봉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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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봉계곡의 명물 두꺼비바위(왼쪽). 엄 대장은 이곳에서 암벽등반을 배웠다. 우측은 엄 대장과 얘기를 나누며 걷는 필자.

그는 재활훈련에 처음엔 네 살짜리 어린 딸을 캐리어에 들쳐 업고 조금씩 원도봉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힘에 부치면 딸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올랐다. 보다 못한 아내도 많은 도움을 주며 함께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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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월의 재활훈련 기간동안 가족과 사랑도 키우고 희망도 키웠습니다. 제2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원도봉산은 어머니이자 친구이고 스승이었죠."

도봉산은 지난 1983년 북한산과 함께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서울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 및 양주시에 걸쳐 있는 도봉산을 두고 의정부 시민들은 '으뜸 원(元)' 자를 써서 원도봉산이라 구분한다. 원도봉으로 오르는 도봉산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엄연히 도봉산이다. 하지만 엄 대장 역시 원도봉이라 불렀다.

서울지하철 1호선 망월사역 남부출구로 나와 엄홍길 전시관과 신흥대학을 잇따라 지나 만나는 원도봉 1주차장 내 대형 북한산 국립공원 안내도를 살펴본 후 본격 산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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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능선 정상에서의 엄 대장. 뒤로 원도봉의 주봉인 자운봉과 만장봉 신선봉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원도봉계곡을 따라 오르다 천년고찰 망월사를 거쳐 포대능선 정상을 돌아오는 왕복 3시간 정도의 짧은 코스를 택했다. 좀 더 긴 코스를 잡으려 했지만 엄 대장은 그날 저녁 때 약속이 두 건이나 있었다.

코스는 들머리부터 망월사까지 지루할 정도로 계곡을 따라 돌계단이 이어지며, 능선에 올라서야 비로소 주봉인 자운봉과 만장봉 신선대 등 뾰족이 솟은 암봉과 우람한 기암괴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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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과 필자.


첫 돌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엄 대장은 주 등산로 대신 왼쪽 희미한 묵은 길로 향했다. 어린 시절부터 다니던 옛길이란다. 그는 내색은 안 했지만 벌써 옛 추억을 떠올리며 걷고 있는 듯했다. 산행 직전 전시관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회상하며 인터뷰하던 그 얼굴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곧 와폭의 물살을 넙죽 받아먹는 넓고 깊은 소가 나타난다.

  
 
그는 코를 막고 뛰어내려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40년전 제가 저렇게 놀았어요"라며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그러더니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한 굽이 올라선 뒤 갑자기 키 큰 나무를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 듯 꼭 껴안는 것이 아닌가. 너른 터의 계곡 쪽 가장자리에 오롯이 서 있는 이 오동나무는 엄 대장의 선친이 심은 것으로 어릴 땐 키가 비슷한 친구였다고 했다. 이곳이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매점이 있던 곳이며 지금의 돌 벤치는 당시 엄 대장 집의 옛 건축자재였다고 한다.

여기서 한굽이 더 오르면 약간 더 너른 터. '산악인 엄홍길이 살던 곳'이라 적힌 안내판이 서 있다. "당시 집이 두 채였어요. 이 집은 매점이자 살림집이었죠. 아마 2000년 4월께 철거됐을 거예요."

물 만난 고기마냥 엄 대장은 또 "여기서 밤이며 버찌 머루 다래 등을 참 많이 따 먹었다"며 "그래서 제가 이렇게 건강한가 봐요"라고 말한 후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긴다.

우연히 만난 국립공원공단 직원은 "지금은 훼손지 복원공사가 끝나 숲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예상외로 숲이 빨리 살아나고 있다"고 귀띔했다.

특별한 스케줄이 없으면 원도봉산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찾는다는 그는 올해의 경우 두 번의 원정 때문에 3월 이후 5개월 만에 처음 찾은 것이다. 해서 감회가 더 새롭다고 했다.

10분 뒤 엄 대장은 계곡 건너 저 멀리 커다란 바위를 가리킨다. 원도봉계곡의 명물 두꺼비바위다. 한눈에 봐도 영판 두꺼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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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스케줄이 빽빽하게 적힌 수첩. 하루 평균 2, 3건의 약속이 잡혀 있다. 우측은 김밥을 먹고 있는 엄홍길 대장. 원도봉 입구 김밥집이 그의 단골집이다.


   
"중2 때였지요. 클라이머들이 저 바위를 오르는 거예요. 너무나 신기해 한참 동안 지켜보다 그분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막상 해보니 재미도 있었고, 습득하는 속도 또한 아주 빨라 칭찬 꽤나 들었지요. 엄홍길의 암벽등반의 세계가 열린 곳이기도 하지요. 이 바위는 오버행, 크랙, 수직벽 등 코스가 다양해 클라이밍을 하는 데 최적의 장소지요. 근데 최근 공단에서 안전과 관리의 어려움으로 등반을 금지하고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두꺼비바위에서 25분쯤 지났을까. 덕제샘이 기다린다. 동시에 갈림길이다. 애초엔 왼쪽 포대능선으로 올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망월사로 하산하려 했지만 시간 관계상 곧바로 망월사로 향했다. 포대능선은 오래 전 능선 중간에 대공포진지인 포대가 있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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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사와 포대능선 정상에서의 엄 대장과 필자.


천년고찰 망월사는 도봉산에서 가장 큰 사찰. 절 구경은 하산길로 미루고 계속 오른다. 절에서 포대능선까지는 7~8분이면 닿는다. 산불초소 앞에서 바라보는 주봉인 자운봉과 만장봉 신선대의 자태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며 맞은편인 동쪽의 수락산 불암산도 그림같이 다가온다.

이곳에서 늦은 점심으로 김밥을 먹었다. 엄 대장은 첫 김밥 하나를 발 아래 숲으로 내려놓는다. 생수 또한 몇 방울 먼저 땅에 덜어내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도 늘 자연과 산신에게 감사의 예를 표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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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인 고 박병태 추모비에 선 엄홍길(좌측). 후보 박병태는 지난 1993년 가을 시야팡마에서 실종됐다. 우측은 망월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엄홍길. 엄 대장은 신심이 두터운 불자이다.

 
엄 대장은 "산은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들어가면 그 정성을 외면하지 않고 기적으로 화답하는 것을 몸소 체험하면서 생긴 자신만의 일종의 예법"이라고 설명했다.

불교신자인 그는 망월사 부처님께 다소곳이 예를 올리고 본격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마지막으로 갈 곳이 있다고 했다. 등산로를 약간 비켜난 양지바른 곳에 이르자 추모비가 하나 서 있었다. 두꺼비 바위 아래쯤이다. 지난 1993년 시샤팡마 원정 때 실종된 후배 고 박병태의 추모비였다. 그는 추모비에 머리를 대고 한참 동안 흐느낀 후 "정말 아끼던 동생 같은 후배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상 산행 막바지.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TV가 있는 산 밑의 친구집에서 놀다 땅거미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린 왜 TV도 없이 이렇게 산속에서 가난하게 살아야만 하냐고 불평도 참 많이 했어요. 참 철이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 원도봉산 속에서 살았기에 저의 삶에 큰 보탬이 됐다고 백 번 천 번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엄홍길의 원도봉산 사랑은 이처럼 끝이 없었다.

글=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사진=이창우 산행대장
 

국제신문 근교산 홈페이지 열렬 마니아 이재수씨

-촌철살인 산행기로 홈페이지 산행기란 주도


 
 
 
주말 늦은 밤이면 기자는 반드시 국제신문 근교산 홈페이지에 들어간다. 산행기 기사에 대한 냉엄한 평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다. 근교산 홈페이지 산행기 코너에는 그 주 소개된 산을 다녀온 후 반드시 산행기를 올리는 '열렬' 마니아가 있기 때문이다.

KT 동래지사에 근무하는 이재수(49)씨가 그 주인공.

그는 기자의 산행기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촌철살인과 같은 지적으로 기자의 간담을 서늘케 해 어느새 기자를 비롯한 많은 산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산행기에는 국제신문에 소개된 기사를 본 후 주말에 어느 정도의 산꾼들이 찾아왔는지, 산꾼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기자의 산행기가 제대로 됐는지 등이 냉정하게 적혀있다. 검색 건수는 날로 늘어 200여건에 달하며 지금은 그의 고정 팬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때 부인의 병간호로 한달간 산행기를 올리지 못하다가 그간의 사정을 적으면서 다시 글을 올리자 그 밑에는 많은 댓글이 올라와 인기를 실감케 했다.

'한동안 글이 안올라와 궁금했는데 부인께서 큰 수술을 하셨다니…. 앞으로 좋은 산행기를 기대합니다' '늘 존경하는 맘으로 글을 보고 있습니다' 등이 댓글의 주 내용.

지난 6월 388회 '오룡산~시살등' 코스를 다녀온 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난해 1월 319회 도덕산~천장산 코스를 시작으로 이번에 100번째 산행기를 올리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신문에 소개된 388편 중 250회 이상을 다녀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략) 최근 신문에 소개된 코스에는 많은 산꾼들이 찾아 마치 금정산 산행에 나선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시살등에서 50대팀을 만났는데 그분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국제신문 기사 스크랩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신동대굴에서 곧장 하산하면 통도골이며 선리마을과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신문기사를 암기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씨는 "산꾼의 한 사람으로 국제신문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멋진 기사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사진=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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