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0~90년대 국내 산악계를 호령했던 전설의 국내 여성산악희 남난희는 현재 경남 하동 화개골에서 된장을 쑤고 찻잎을 따는 평범한 아낙으로 변신해 있다.
20여년 전 산에 미친 한 처자가 있었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이 처자는 고교를 졸업 후 상경, 직장을 다니다 요샛말로 우연히 '필'이 산에 꽂혔다. 외로움에 지친 그녀에게 마치 산이 종교처럼 다가온 것.
산을 향한 짝사랑이 넘치면서 난생 처음 산악회라는 곳에 들어갔고 25세 때인 지난 1981년 한국등산학교에 입학, 암벽등반을 배우며 산악인으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2년 뒤 이 처자는 그녀의 삶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되는 획기적인 계획을 세운다. 금정산에서 진부령을 잇는 '태백산맥 종주등반'이 그것이었다. 기껏해야 지리산 종주가 이뤄지고 있을 무렵 능선을 이어 국토를 종주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선구자적 발상이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것도 처자가, 겨울에, 홀로.
유난히 폭설이 잦았던 1984년 1월 1일부터 76일간의 혹한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종주등반을 성공하자 국내 산악계는 비로소 그에게 '산악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2년 뒤 그 처자는 산악인에게는 당연한 코스인 히말라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7455m)에 올랐다.
식을 줄 모르는 산에 대한 열정은 빙벽으로 이어졌다. 1989년 겨울에는 그간 '금녀의 벽'으로 불리던 설악산 토왕성 폭포 빙벽마저 올라 '역시'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백두대간 종주도 해냈다.
'산악인의 꿈'인 에베레스트도 넘봤다. 고 지현옥과 곽명옥 등 당대의 최고 여성 산악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대장을 맡은 그는 1991년 현지 적응훈련 및 정찰을 겸해 히말라야로 날아가 임자체(6189m)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1993년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가 꾸려질 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탓에 원정대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러났다. 그가 빠진 원정대는 보란 듯이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뤄냈고 그는 심한 상실감에 빠졌다. 당시 나이 37세. 산은 이제 더 이상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이 돼 가고 있었다. 운명이었다.
자괴감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소설처럼 청학동 댕기머리 총각이 나타났다. '태백산맥 종주등반' 후 이를 바탕으로 1990년 펴낸 '하얀 능선에 서면'이라는 산서가 히트를 치면서 간간이 팬이라 자청하며 그녀를 찾아왔기에 그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댕기머리 총각은 세 번째 만남에서 뜻밖에도 청혼했다.
그와 결혼을 하고 이듬해 아들을 가지며 18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지리산 청학동에 정착했다. 거기서 '백두대간'이라는 찻집을 운영했다. 하지만 이 년 반 만에 아이 아빠는 불가에 귀의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이 계속되자 그녀는 6년간의 청학동 생활을 청산하고 생면부지의 강원도 정선에서 자연학교를 운영하며 민들레 홀씨처럼 뿌리를 내렸다.
행복했단다. 아들 기범이도 잘 자랐고, 틈나면 장돌뱅이처럼 장터 주변도 어슬렁거리고, 정선아라리도 배우고, 막국수와 콧등치기 국수도 먹는 호사도 누렸다. 그것도 잠깐. 호사다마라 했던가. 2002년 태풍 '루사'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아들과 낡은 차만 건지고 모든 것을 잃었다. 수천 권의 책과 자료, 사진 그리고 손때 묻은 등산장비 등 개인적으로 아끼던 물건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정선과의 인연은 삼 년을 못 넘기고 끝이 났다. 이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실의에 빠져 있을 무렵 쌍계사 강원에 있던 아이 아빠가 이 소식을 듣고 지리산 화개에 시골집이 하나 있다고 알려왔다. 남향의 흙집을 본 그녀는 첫눈에 맘에 들어 살기로 결정했다. 지난 2003년 2월말 다시 지리산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
남난희(53). 항상 그의 이름 앞엔 '전설의' '국내 1세대 여성 산악인'이라는 수식어가 떠날 줄 몰랐다. 젊었을 땐 정통 알피니스트로, 지리산 청학동에선 차향기를 나눴고 정선에선 자연학교를 꾸렸다. 이젠 하동 화개골에서 된장을 쑤고 찻잎을 따는 평범한 아낙으로 변신했다.
그의 표현대로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는 남난희를 경남 하동 화개골 용강마을 촌집에서 만났다.
(2)산악인 남난희 "좀 모자란 듯 해도 지금 무척 행복한걸요" http://hung.kookje.co.kr/362
(3)남난희 "태백산맥 종주땐 육체적 고통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었어요"
http://hung.kookje.co.kr/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