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의 집 초막 이대실 씨.

"약차 한 잔 들고 쉬었다 가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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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봉화 청량산을 좀 안다는 사람이 ‘산꾼의 집'을 모르면 거짓말이고, 청량산을 산행한 사람이 ‘산꾼의 집'에서 약차 한 잔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 날 산행은 헛한 것이다. 바로 청량사 인근 ‘산꾼의 집'에서 2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등산객들에게 약차와 쉼터를 제공한 초막(草幕) 이대실(65) 씨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씨가 등산객들에게 공양을 하는 차는 구정차. 당귀 산수유 진피 오가피 계피 감초 등 9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단풍철의 경우 평일에는 2000잔, 주말에는 4000잔, 최고 절정기에는 1만 잔까지도 대접했단다.

‘산꾼의 집'은 청량사에서 응진전 가는 길에 있다. 걸어서 5분. 바로 옆이 오산당이다. 언제부터인가 청량산 도립공원에서 ‘산꾼의 집'이란 이정표를 달아줄 정도로 유명인사로 대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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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독특한 산꾼의 집 화장실 문(왼쪽)과 청량사에서 바라본 축융봉. 운치있는 소나무 아래 너른 터에선 매년 가을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이 씨가 청량산과 인연을 맺은 건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원효대사와 관련된 책을 읽었어요. 근데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를 원효대사가 창건했대요. 그래서 무작정 이곳을 찾았어요."
당시 청량사는 불당과 요사채만 달랑 있었고, 노비구니가 홀로 지키고 있더란다. 그냥 이유없이 청량사가 맘에 들어 그 비구니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했다가 크게 호통만 듣고 발길을 돌렸다.

“그때 결심했지요. 비록 지금은 이렇게 떠나지만 언젠가는 이곳에서 살거라고."
고교 졸업 후 연극영화과를 다닌 그는 영화한다고 아버지 몰래 과수원을 팔아 영화를 제작했지만 투자비만 날렸다.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한 그는 경북 영양에서 사진관 조수로 취직,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후 돈을 제법 모아 사진관에 이어 예식장도 인수했다.

산에도 열심히 다녀 전국의 산 2000곳을 오르내렸다. 해외원정도 다녀왔다. 이후 봉화 안동 영양 등을 아우르는 대한산악연맹 경북북부지역연맹을 만들었다. 그래도 뭔가 허전했다. 먹고 살만 하니까 다시 청량산이 생각난 것이다. 지난 91년 아내와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아내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아내는 고맙게도 날 이해해줘 붙잡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에게 평생 모아 이룩한 예식장 웨딩숍 미용실 뷔페를 각각 물려주고 맨 몸으로 이곳 청량산으로 들어와 줄곧 혼자 지내고 있다. 항상 머리엔 뚜껑없는 벙거지를 쓰고 개량한복을 입은 그를 두고 혹자들은 ‘이 시대의 기인'이라 부른다.

소리꾼이자 도공 산악인 시인 서예인이며 대금 가야금을 연주하고 장승도 깎는다. ‘산꾼의 집'에서 들려오는 대금 및 가야금 산조는 그가 연주한 곡이며 이곳에 전시된 도자기와 글씨 그림 시는 모두 그의 작품이다. 4년 전 대한민국종합미술대전 선서화 부문에선 대상을 받았으며 각종 소리마당이나 지자체 축제에 단골 게스트로 초청받는다. 청송교도소 정신교육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15년간 청량산에서 무려 100여 명의 목숨을 구해낸 전문 산악인이기도 하다. 6년전엔 200m 절벽에 메달린 초등학생을 119구조대원도 몸을 사리는 가운데 과감히 몸을 던져 구해내기도 했다.
그는 “산은 나를 물속에 달처럼 살다 가라한다"며 모든 것을 초연한 듯 말하면서도 "딴 그리움은 접을 수 있어도 손주에 대한 그리움은 접을 수가 없다"며 인간적인 고뇌도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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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은 전형적인 가을산이다.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사. 부산에서 꽤 멀어도 발품을 팔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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