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산' K2 베이스캠프 입구 둔덕에는 '메모리얼 힐'이라는 추모공간이 있다. K2에서 희생된 전 세계 산악인들을 애도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기자는 해발 5300m쯤 되는 K2 베이스캠프에서 홀로 다녀오느라 애깨나 먹었다. 이곳에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책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당사자인 영국의 아줌마 산악인 알리슨 하그리브스의 동판도 눈에 띈다. 1995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단독 등정한 그는 두 달간의 휴식 후 K2도 역시 무산소로 홀로 올랐지만 하산길에 목숨을 잃었다. 네 살, 여섯 살 난 두 아이를 두고서. 당시 첫째 아이가 공식회견장에서 아빠에게 엄마가 죽은 곳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아이와 아빠와의 K2트레킹이 현실화됐고, 이 트레킹 기록이 바로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내용이다. 당시 파키스탄은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트레킹을 지원했고, 영국의 BBC는 이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다시 한 번 전 세계 산악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인 히말라야에는 고금을 울리는 사연이 널려 있다. 지난 21일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길에 숨진 부산 산악인 서성호(34·부경대OB)의 사연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8000m 히말라야 12좌를 올랐다. 이 중 11좌를 이번에 세계 최단기간·아시아 최초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기록을 세운 김창호와 함께했다. 자일파트너로 친형제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2008년 세계 4위봉인 로체를 3일 만에 무산소로 올라 최단기간 기록 공인도 받았다. 
 

악계에선 김창호의 이번 기록을 깰 유일한 산악인으로 서성호를 꼽고 있지만 정작 서성호는 욕심이 없었다. 그는 평소 사석에서 "그저 산이 좋아 산에 올랐고, 가장 체력이 왕성할 때 고산등반의 기회가 생겨 열심히 하다 보니 운이 따랐다"고 겸손해했다.


 기록에 욕심이 있었다면 김창호보다 먼저 할 수도 있었다. 네팔인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오른 밍마 셰르파가 지난해 초 'K2·브로드피크 상업대'를 모집했다. 밍마는 2010년 7월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 부산원정대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며, 밍마의 동생은 같은 해 10월 시샤팡마 원정 때 역시 부산원정대의 신세를 졌다. 이런 인연으로 밍마는 부산원정대의 서성호가 K2와 브로드피크를 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곤 특별 초청했지만 서성호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남은 두 개를 올라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계에서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힘겹게 걸어온 그의 삶의 여정 때문이다. 어머니는 따로 살았고, 부친은 오랜 세월 중병을 앓았다. 대학 입학 후 그는 극심한 생활고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휴학 땐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과 각종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했다. 동생도 건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중 부친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제대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막노동 후 달밤엔 산악부 활동을 위해 운동장을 뛰고 철봉에 매달렸다. 2006년에는 부산원정대에 뽑혀 에베레스트도 올랐다. 다행히 그해 가을 10년 만에 하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됐다. 먹고사는 일이 더 급했던 그는 이듬해 여름 예정된 K2·브로드피크 등반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때 동행해 두 거봉을 올랐다면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그는 2011년 9월, 32세로 세계 최연소, 최단기간 히말라야 8000m 14좌 기록을 보유하게 됐으리라.


 '운명'이었을까. 재취업해 보통사람처럼 살고 있는 그에게 김창호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앞두고 도움을 요청했다. 생사를 같이 했던, 가장 좋아하던 '창호형'이었기에 기쁘게 함께했다.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채 펴보지도 못한 채.


 30일 오전 9시 부산시립의료원에서 부산산악연맹장으로 영결식이 열린다. 슬프다 안타깝다. 애오라지 산이 좋아 산에 살았던 그래서 산이 돼버린 서성호의 명복을 빈다.

 

2010년 낭가파트바트 때 정상에 선 김창호와 고 서성호.

 

2011년 발토르빙하에서. 왼쪽에서부터 홍보성 부산산악연맹 회장, 고 서성호, 김창호.

 

                           살아 생전의 서성호

 

 


 

<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진 히말라야 원정대. 왼쪽부터 서성호, 오영훈, 김창호 대장, 전푸르나, 안치영.>


김창호(44)는 세계 산악계가 인정하는 현역 최고의 산악인이다. 그의 등반 기록 중 압권은 후배인 고 이현조와 함께한 세계 최난도 거벽인 낭가바르파트(8125m) 루팔벽 등정이다. 루팔벽은 벽 구간만 세계 최장인 4500m에 평균 경사도 60도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거대 벽. 엄청난 경사 때문에 눈이 쌓이지 않아 흔히 '벌거벗은 산'으로 불린다.

루팔벽 초등은 1970년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69)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메스너는 함께 등정한 동생 귄터를 하산길에 잃었지만 김창호는 후배 이현조와 무사히 하산했다. 1986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현존하는 등반가의 전설로 불리는 메스너는 2004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에서의 삶과 죽음의 장대한 오디세이를 담은 'The Naked Mountain'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때보다 좋은 기술과 장비가 줄기차게 나왔지만 아직도 루팔벽은 재등되지 않고 있다. (중략) 앞으로도 전 세계 유능한 산악인 1000명 중 선택 받은 이는 아마 한 두 명일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이듬해 김창호 팀은 메스너의 예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35년 만에 루팔벽을 가뿐히 올랐다. 머슥해진 메스너는 2006년 친인척 40여 명과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베이스캠프로 떠나는 트레킹 팀에 특별히 김창호를 초청, 서로가 서로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김창호와 라인홀트 메스너.>

 김창호는 부산과의 인연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5000~7000m대의 미답봉을 주로 오르내리던 그에게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가 2006년 에베레스트를 오른 후 두 번째 대상 산인 K2 등반을 앞두고 카라코람 히말라야 전문가였던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그게 인연이 돼 김창호는 2007년 K2부터 2011년 초오유 등정까지 부산원정대의 히말라야 8000m급 13좌를 함께했다.

<2010년 7월 낭가바르파트 정상에 선 김창호(왼쪽)와 서성호.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2011년 파키스탄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발토리빙하에서 부산다이내믹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김창호(왼쪽 세 번째). 왼쪽 첫 번째 홍보성 대장, 두 번째가 서성호.>

<2011년 초오유 등반 때. 왼쪽부터 김창호, 홍보성 원정대장, 서성호.>


 현재 김창호는 히말라야 14좌 중 에베레스트 등정만 남겨놓고 있다. 사실 김창호는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 기회가 한 번 있었다. '도로공사 장애인 등반대'대원으로 참여해 마지막 캠프에서 김홍빈과 함께 등정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에 나섰던, 루팔벽에서 동고동락했던 후배 이현조와 오희준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등정 도전을 포기하고 시신 수습에 나서 결과적으로 기회를 놓쳤다.

 그가 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함께하는 대원은 그와 지금까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34/부경대OB), 안치영, 오영훈, 전푸르나.


 김창호의 이번 등반은 히말라야 14좌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라 다소 독특하면서도 의미있게 계획을 세웠다.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대원들 힘으로 해발 제로에서 출발한다. 인도 바카할리마을에서 갠지즈강의 지류인 후글리강에서 카약을 타고 강을 거슬러고(5일/50㎞), 갠지즈강을 따라 사이클을 타고 국경을 넘어 네팔로 집인한 후 (15일/1000㎞), 도보로 베이스캠프(15일/150㎞)에 도착해 정상에 오른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통상 등반기간보다 40일 정도 더 걸리고 비용도 배나 든다. 카약과 사이클은 이번 원정의 후원사인 몽벨과 LS네트웍스가 후원했다. 

 이번 등반에서 김창호는 무산소로 도전한다. 만일 등정에 성공한다면 김창호는 아시아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등정 기록을 세우게 된다. 세계 최초 무산소 기록은 메스너이며, 김창호는 14번째가 된다. 또 5월 중순에 정상에 오를 경우 1987년 예지 쿠쿠즈카가 세운 기록(7년 11개월 14일)도 경신, 최단 기간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자가 된다.


 한편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김창호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는 현재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2개, 무산소로는 10개 올랐다. 

김 대장은 "에베레스트 정상은 기압과 산소가 평지의 3분의 1 수준"이라며 무산소·무동력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설명했다. 

원정대의 등반 루트는 에베레스트 남동쪽 능선과 로체 서벽이다.
 원정대는 오는 11일 출국한다. 정상 등극은 5월 중순으로 보고 있으며, 그럴 경우 같은 달 30일 귀국할 예정이다.

 금아(琴兒) 피천득을 떠올리면 '아사꼬'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잔잔하게 그린 '인연'이 연상된다. 이 수필은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거니와 그 애틋한 서정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같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다시 읽으면서 아마 외국인으로 미국에서 살다보니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아사꼬의 남편에 관한 묘사가 바로 그것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꼬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아사꼬에 대한 식민지 청년의 연모는 청자 연적처럼 투명한 여운을 주지만 그녀의 남편을 향한 못난 질투가 엿보인다. 


  피천득은 진주군 장교였던 아사꼬의 남편이 어떤 비극을 겪었을지 아마 상상도 못하였을 것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지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부터 FBI는 일본계 미국인을 체포하거나 감금하기 시작했고 일본 이민자들을 집단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재산을 거의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은 중국인들이 매입했다고 한다. 일본계 은행은 파산했고 따라서 일본계 이주민들도 파산했으며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들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나 황무지 등에 배치되었으며, 감시하기 편리하도록 목욕탕이나 화장실에도 문을 없앴다. 일본에서 출생한 이민자들은 잠재적 스파이로 분류돼 감금됐고,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들은 충성서약을 강요받았다. 비충성 시민으로 분류되면 감옥에 격리 수용되었고, 충성시민으로 분류될 경우 군수품 공장 노동자로 일할 수 있게 중부내륙 등지로 보내주었다.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터전을 일구었던 12만 일본계 이주민들은 이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진주만 공격 직후부터 일본계 미국인들은 적성시민으로 간주돼 군입대가 거부되었지만 이후 충성서약을 받고 부모들을 감금 혹은 격리시설에 수용시켜 인질로 삼은 뒤,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 청년들을 전투에 투입시켰다. 그들이 바로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442연대다. 그들은 전장에 투입되는 순간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공을 세웠다. 단기간에 전체 미군 가운데 가장 훈장을 많이 받은 부대가 되었다. 사상자 비율은 순수 미군의 3배에 이르렀으며, 부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된 후에도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격전지에서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모두 수용소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와 맞먹는 이 전쟁범죄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현재까지 일본계 이주민과 일본계 미국인이 2차 대전 당시 적성행위를 한 것으로 보고된 사례는 없다. 전시의 파라노이아와 인종적 편견이 일본계 이주민에 대한 범죄를 정당화시켰을 뿐이다.
 아사꼬의 남편도 광기어린 인종차별에 간신히 살아남은 진주군 장교였을지 모른다. 피천득이 상상하는 '일본인' 아니면 '미국인'이라는 이분법적 분류와 달리 아사꼬의 남편은 일본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을 것이다. 더불어 일본 태생의 부모는 수용소에 감금돼 있고, 충성서약을 마치고 442연대에 배속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진주군 장교로 전후 일본에 배치되었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아사꼬와 세 번째 만났을 때 이런 역사적 맥락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종적 프레임은 강박적이고 역사적 이해는 누락되어 있다. 피천득의 '인연'은 그 애틋한 서정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적인 정신이 깃든 글이라고 한다면 금아(琴兒)에게 외람된 것일까. <미국 통신원-hyung0302@hanmail.net>

 

      캐나다 벤쿠버 해양박물관에 전시된 일본의 진주만 기습 및 태평양 전쟁 관련 자료들.

 

 

 

- 불교미술 대중화 나선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은경 교수

-전문성·대중성 갖춘 연구로
- 전국서 초청1순위 스타학자
- '불화 연구'로 국내외서 명성
- 한일문화교류에 물꼬 트기도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은경(53) 교수를 소개할 땐 별도의 수식어가 붙는다. '부산지역 1호 불교미술 전공자', '지역의 숨은 스타급 인문학자' 등이 바로 그것. 후자를 두고 그는 과찬이라 손사래를 치지만 그를 아는 지인들은 예외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빛바랜 강의노트 하나로 버티는 공부와 담싼 교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교수 평가의 잣대가 되는 논문이나 저서, 강의에 있어 단연 돋보인다.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적당한 재미를 겸비한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특강을 한 번이라도 들은 사람들은 단번에 감흥을 받아 그의 팬이 되고 만다. 강연 후 주최 측의 선호도 앙케트에 최상위에 랭크됨은 물론이다. 

 

이렇다 보니 그는 실력이 신통찮으면 좀처럼 초청되지 않는 삼성리움미술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전국의 불교미술 관련 특강에는 초청 대상 1호로 분류돼 있다. 올 상반기에 특강만 20건. 강의하랴, 연구하랴, 저술하랴, 한 학기가 보통 15~16주임을 감안할 때 분명 강행군임에 틀림없다.

 인문학자가 왜 이토록 바깥나들이를 자주 할까. 박 교수는 불교미술학자답게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대승불교의 교육이념을 빗대 설명했다.

 "인문학 전공 교수들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한다'는 '상구보리'는 잘해요. 하지만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하화중생'을 소홀히 해요. 인문학이 뇌사상태에 빠진 것은 학자들의 책임이 아주 큰 것 같아요."

 그는 외부 특강을 다니면서 '왜 이전에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고 했다. 뭐든 하나를 잡으면 끝을 봐야 하는 독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그간 준비한 특강 원고를 중심으로 '쉬운' 인문한 교양서적을 내겠다고 했다.

 지난 2월 펴낸 '범어사의 불교미술'(선인)이란 책도 같은 맥락으로 봐달라고 했다. 동아대 석당학술총서 제19호인 이 책은 범어사의 역사와 건축, 조각, 불화, 자료 편으로 구성돼 있다. 같은 학과 정은우 교수 등 4명의 전문가가 주제별로 공동 집필했지만 기획부터 출간까지 박 교수가 주도했다.

 "범어사와 관련된 책은 지금까지 사찰의 역사에 관한 자료집 몇 권 정도가 전부였지만 이 책은 전문성과 함께 대중성도 갖춘 책이지요. 특히 범어사처럼 역사의 굴곡에 따라 중건과 중수를 반복한 사찰은 기초사료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지역 불교미술 연구에도 상당히 의미있는 책이지요."

 박 교수의 세부 전공은 불교회화, 그중에서도 조선전기 불화이다. 2008년 펴낸 '조선전기불화연구'와 '서일본 지역 한국의 불상과 불화'는 그가 학자로서의 존재감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역작.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전기 불화는 140여 점. 이 중 일본에만 100여 점이 있다. 당시 국내에는 조선후기 불화 연구자는 많았지만 조선전기 불화 연구는 전무한 상태였다.

 일본 규슈대에서 한국불화로 박사학위를 받고 1994년 모교로 부임한 이래 방학 때마다 조선전기 불화가 산재한 일본 미국과 국내 곳곳을 발로 뛰며 현존하는 불화를 모두 체계적으로 집대성해 펴낸 것이 '조선전기불화연구'이다.

 이 책은 고려불화에서 조선후기 불화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높이 평가 받아 박 교수는 이듬해 미술사학자로서 최대 영예인 우현 고유섭 선생을 기리는 우현학술상을 수상했다.

 2002년 학술진흥재단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2억 원의 연구비를 받아 펴낸 '서일본 지역 한국의 불상과 불화'는 한국의 고·중세 불상과 불화를 집대성한 자료집. 이 책 출판을 계기로 그는 한일 국제학술심포지엄을 열어 한일 문화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특히 이 책 저술을 위한 조사과정에서 교토 모 사찰의 노승이 박 교수의 열의에 감동, 조선전기 불화인 '영산회상도'를 기증해 박 교수는 이를 우리나라 보물(1522호)로 지정되게 했다.

 "현재 조선전기 불화라고 추정되는 자료에 대한 문의가 20점 정도 요청이 와 있어요. 본업은 하던 대로 할 생각입니다. 여기에 인문학이 딱딱하지 않고 재밌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특강과 저술로 꾸준히 실천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허남식 부산시장께선 아시아드CC(이하 아시아드)가 19세 이하, 다시 말해 부산지역 주니어 골프선수들의 출입금지를 고수하고 있는 내부 규정이 과연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달포 전 이 칼럼에서 기자는 아시아드의 지분 48%를 갖고 있는 '대주주'인 부산시가 이러한 내부 규정을 알고도 팔짱만 끼고 있는지, 정말 모르는지 물었다. 시는 모르고 있었다. 이후 시는 아시아드에 이 규정을 해제하라고 수차례 권고했지만 아시아드 측은 회원들로 구성된 권익단체인 운영위원회와 협의해 고려하겠다며 원론적인 답변만 반복했다.

부산시골프협회(이하 협회)도 지난해부터 아시아드에 수차례 협조 공문을 보내는 한편 협회 회장 등 임원진이 직접 방문해 주니어 선수들의 편의를 제공해 달라며 양동작전을 폈지만 허사였다.

사기업이 운영하는 골프장이라면 그럴 수 있다. 동래베네스트가 그렇다. 하지만 이 골프장도 협회가 전국체전 등 큰 시합을 앞두고 공식적으로 요청하면 편의를 제공한다. 반면 해운대CC는 연간 2000만~3000만 원의 출혈을 감수하며, 협회가 미안할 정도로 혜택을 주고 있다.

최근에는 부산의 7개 기업이 공동으로 인수한 김해 가야CC와 양산 통도파인이스트CC도 부산지역 등록선수들에게 준회원 대우를 해주고 있다. 부산시민들의 혈세가 투입된 아시아드만 유독 문턱이 높은 것이다. 생모가 버젓이 살아있지만 이웃집 아낙에게 젖동냥을 받고 있는 셈이다.

아시아드 측은 타 골프장과 달리 회원들의 이용률이 60% 정도로 높아 회원들을 위한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부산을 비롯한 인근 대부분의 골프장도 회원들의 이용률이 60% 안팎으로 비슷했다. 운영위원회를 앞세운 옹색한 변명이었던 것이다.

해운대CC는 주니어 선수들이 자주 들락거리자 처음엔 일부 회원들이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단다. 하지만 골프장 측은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바라보자. 그들이 전국체전에서 부산에 금메달을 안겨주고, 제2의 박세리 최경주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라고 설득을 했다 한다.

낙제에 가까운 아시아드의 공공성은 그렇다 치자. 그럼 수익성은 어떨까.
업계에 따르면 아시아드와 같이 27홀 회원제 골프장의 경우 입지나 시설, 경관 등을 고려할 때 1000억 정도로 평가하며, 수익은 1년에 최소 30억 원 정도는 내야 한다고 보고 있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당기순이익을 보면 18억, 15억, 24억, 34억, 23억, 16억, 7억 원으로 시가 아시아드 지분 매각을 시도했던 2008년을 정점으로 줄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보수 비용이 특히 많이 들었다 해도 돈을 벌겠다는 악착함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마저 과거 부산관광개발(주)이 투자에 실패한 결손금의 벌충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백억 원을 넣고도 그에 상응하는 도움은 거의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다 보니 시가 올해 말 출범시킬 부산관광공사의 청사진에도 아시아드는 빠져 있다. 시의회도 이제 속사정을 알고 있지 않는가. 이럴 바엔 시의 지분을 매각하는 것이 어떨까. 그 대금이 부산관광공사에 투입된다면 그나마 튼실한 부산관광공사가 되지 않겠는가.

- 한반도 산줄기 체계 뒤집는 주장 제기, 산경표연구소 박의석 소장

 

해서임진북예성남정맥 추가

26년만에 13정맥서 한 단계 진일보

산줄기에 대한 인식 한계 넓혀

발품, 고서탐독 아마 산꾼 성과

 

<사진설명 : 박의석 씨가 부산의 한 등산학교 산경표 강의에서 직접 만든 대동여지도를 가리키며 특강을 하고 있다. 가로 3.5m, 세로 7m로 실제 대동여지도 크기와 비슷한 이 지도는 한지를 구해 우선 4번 정도 발라 빳빳하게 만든 후 전문 지도제작업체인 '고산자의 후예들'에서 구한 첩식 대동여지도를 모자이크 맞추듯 그 위에 붙여 만들었다.>

 

"우리나라 산줄기는 1대간 1정간 13정맥이 아니라 1대간 1정간 14정맥이 맞습니다. 앞으로 산서나 산행 관련 잡지 등의 표기는 모두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부산의 아마추어 산꾼이자 산경표연구소 박의석(57) 소장이 우리나라 산줄기의 체계를 뒤집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해 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는 아마추어 고지도연구가 고 이우형이 서울 인사동 헌책방에서 '산경표'를 발견한 뒤 6년 만인 1986년 한반도의 산줄기가 1대간 1정간 13정맥이라는 사실을 제기한 후 26년 만에 산줄기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한 단계 뛰어넘은 의미있는 주장이다. 국내의 산줄기는 1903년 도쿄대 고토 분지로 교수가 한반도 광물 수탈을 목적으로 도입한 지질구조선 개념을 지도에 들여앉힌 산맥체계가 지금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리 전공 교수나 교사들이 고토 분지로의 산맥체계를 관성적으로 '받아 쓰고 베끼기'를 반복해온 반면 두 번의 지리인식 체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의한 값진 성과는 공교롭게도 아마추어 산꾼들에 의해 나와 무척 이채롭다.


 25년 지독한 산꾼인 박 소장이 주장하는 하나의 새로운 정맥은 북한 땅 백두대간 두류산에서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이 만나는 개련산까지의 산줄기. 박 소장은 이를 "해서임진북예성남정맥이라 명명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정맥은 산경표의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산은 스스로 물과 고개를 가른다는 지침을 정확히 충족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정맥은 대동강의 지류인 능성강과 임진강의 상류를 가르며 백두대간과 만난다.

 

 

 박 소장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비슷한 사례는 남한 땅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만나는 주화산에서 백두대간 영취산을 잇는 산줄기를 금남호남정맥이라 부르고,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만나는 칠현산에서 속리산 말티재까지를 한남금북정맥이라 명명한 것이 북한의 사례와 아주 흡사하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산경표의 산줄기를 한반도 지형도에 옮겨놓은 기존의 지도만 꼼꼼하게 살펴봐도 의문점이 들지만 해서임진북예성남정맥이 북한 땅에 있어 학자들이나 산꾼들이 관심을 덜 가진 탓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박 소장이 새 정맥을 주장하는 근거는 또 있다. 한문에 능통한 그는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와 '산경표'를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동국문헌비고는 조선 영조 때 홍봉한 등 26인이 예(禮) 병(兵) 형(刑) 등 13개 분야(考)를 집대성한 일종의 종합백과사전. 이 중 여암 신경준이 지리분야를 정리한 것이 여지고(輿地考)이다. 여지고가 순차적으로 표기돼 한눈에 보기 힘든 반면, 이 여지고를 산의 위치, 흐름, 갈래 등을 신경준이 다시 계보적으로 편집한 것이 바로 산경표이다. 현재 신경준의 산경표는 아직 발견된 것이 없고, 이우형 등이 손에 쥔 산경표는 일제 때 조선광문회의 육당 최남선이 편수한 영인본이다.


 진실을 향한 박 소장의 발품 노력은 눈물겹다. 박 소장은 문헌을 통해 신경준이 신숙주의 셋째 동생인 신말주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신말주는 당시 신숙주의 반대 편에 몸을 담아 결국 전북 순창을 유배를 떠났다.


 순창문화원를 통해 여암의 묘는 8대 손인 순창고 신장호 교장이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박 소장은 순창을 찾아 신 교장을 만났지만 돌아온 대답은 일제 때 정인보 선생이 여암에 관한 자료를 빌려간 후 함흥차사였던 것. 대신 신 교장으로부터 그의 먼 친적이 산경표를 갖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수소문 끝에 만났지만 그것 또한 자신이 소유한 조선광문회의 산경표 영인본과 같은 것이었다. 얻은 점도 있었다. 산경표가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를 참고해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박 소장은 다시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아 사정 끝에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를 복사한 후 조선광문회의 산경표와 대조해가며 직접 산을 타며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5, 6년 전엔 본사 근교산 취재팀과도 수차례 함께했다. 10년 간 답사를 병행하며 조선광문회의 산경표와 여지고, 그리고 실제 산줄기를 비교한 결과 무려 270군데나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자료를 모아 박 소장은 육당의 산경표를 재편수한 '산경표'를 2009년 가을에 펴냈고, 최근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도 거의 국역을 끝낸 상태이다.


 "사실 해서임진북예성남정맥의 발견은 여암 신경준의 발자취와 국내 산줄기를 발품 팔아 추적하다 부수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입니다."


 박 소장은 "현재 여암 선생의 산경표 필사본이나 영인본은 국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며 "만일 이게 발견된다면 새로운 사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 여담. 만일 여암의 산경표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면 마땅히 박 소장에게 우선 인계돼야 한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산과 한자에 동시에 능통하고 열정까지 갖춘 이는 아마 국내에선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최근 기초단체장과 지역 인재와의 관계를 곱씹어보는 자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절친한 선배와의 조우가 계기였다. 그 선배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그의 맏딸은 지난 입시 때 숙명여대에 진학했다. 입학사정관 전형의 하나인 지역핵심인재 전형이었다. 입시철이 꽤 지났건만 그는 입시전문가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딸아이의 입시에 몰입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지역핵심인재 전형은 입학정원의 10%가량을 말 그대로 지역핵심인재로 선발하는 전형. 2010년 전국에서 첫 시행된 이 전형은 당시만 하더라도 언론과 각 대학의 주목을 받았다. 이 전형의 선발 요지는 국내 각지의 숨은 인재를 발굴, 대학 구성원의 다양성을 확보하겠다는 취지이다. 먼저 학교장의 추천을 받고 이어 기초단체장의 추천을 받으면 최종적으로 대학에서 선발하는 3단계 전형으로 구성된다. 숙대는 이 전형에 앞서 총장이 전국 기초단체와 협약을 체결했다. 지난해엔 234명의 지역핵심인재들이 합격됐고, 그 중 부산은 16명으로 일곱 번째였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들을 만했다. 문제는 기초단체장의 행태였다.

 선배는 딸아이의 숙대 진학을 위해 지난해 봄 전국 대학 입학사정관들이 참여하는 설명회에 참석했다. 이곳에서 들은 숙대 입학사정관의 설명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전했다.

 기초단체장들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학교장 추천을 받고 올라온 모든 학생들의 서류를 꼼꼼히 검토했다. 몇 시간에 걸쳐 서류를 모두 검토하고 추천대상자를 선정하고 나니 결재를 받으려 수십 명의 공무원들이 복도 끝까지 줄 서 있더라는 것이다. 입학사정관의 입장에서는 감동할 만한 일이다. 서울에 위치한 남의 대학을 위해 기초단체장이 열 일을 제쳐놓고 자기 일처럼 해주었으니 말이다.

 이 대목에서 잠깐 관점을 달리해 보자. 우리는 구청장과 군수를 지역 발전을 위해 일하라고 뽑았다. 자기 지역의 인재를 눈뜨고 뺏기는 것도 대책을 세워야 할 판에 지역 현안이 담긴 결재판을 들고 몇 시간씩 공무원들을 기다리게 하면서도 지역의 핵심인재들을 수도권 대학에 보내기 위해 손수 서류를 검토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숙대에 가든 부산대에 오든 유학을 떠나든 그것은 전적으로 학생 개인의 선택이다. 졸업 후 출신 지역에 되돌아온다는 확약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기초단체장이 손수 지역핵심인재를 뽑아 인재유출에 협조하는 것은 본분을 벗어난 일이다. 그것은 직무위배다. 맞벌이와 육아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는 젊은 여성들에게는 각종 혜택을 주며 출산을 강요하면서 잘 교육시킨 인재는 왜 그토록 역외 유출에 동조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승자독식의 세상, 전국 우수 인재 유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숙대를 비난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기초단체장은 우수인재를 자기 지역으로 유치해 지역발전에 기여토록 할 임무가 있다. 굳이 기초단체장이 앞장서지 않아도 지금 서울공화국은 학생유치는 물론 뭐든 공룡처럼 삼키고 있다.

 발상의 전환이 없으면 내년에도 부산의 기초단체장과 지역 대학이 또 한번 '숙명'의 대결을 벌여야 할 판이다.

 부산지역 주니어 골프선수들과 그 부모들은 기장군 일광면에 위치한 부산 아시아드CC(이하 아시아드)를 두고 성인영화관이라 빗대 부른다. '19세 이하 출입금지'라는 내부 규정 때문이다.

 아시아드는 사실 2002년 아시안게임 개최를 명분으로 온갖 특혜를 받으며 초단기간에 만들어진 골프장이다. 산악형 골프장이 대부분인 국내에선 드물게 당시 그린벨트였던 저지대 목장부지의 구릉지 마운드를 있는 그대로 활용해 조성한 덕분에 시설과 경관이 빼어나 지금도 꽤 비싼 회원권 가격이 유지되고 있다.

 아시아드는 편평한 페어웨이 상에 미세한 숨은 업다운이 널려 있어 티샷이 잘 맞아도 세컨드 샷 때 스탠스 잡기가 까다로워 주니어 선수들에겐 최고의 연습라운딩 장소로 손꼽힌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아시아드는 현재 부산시가 48%의 지분을 갖고 있으며 나머지는 코오롱건설(30.67%) 등 15개 민간기업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시 지분의 시가는 300억 원 안팎. 기업으로 치자면 시가 대주주인 셈이다. 그런데도 시는 아시아드의 해괴망측한 내부 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팔짱을 끼고 방관만 하고 있다. 골프 문외한인 낙하산 사장만 달랑 앉힌 채.

 골프 선수를 둔 부산지역 학부모들과 일선 지도자들은 "전국체전 때면 선수들에게 메달을 요구하면서 퍼팅연습장 사용은 물론 그린피 할인은 언감생심이고 그린피를 주고도 라운딩을 할 수 없다"며 "시민들의 혈세로 특혜를 줬으면 시민들에게 보답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아시아드 측도 이런 외부의 비판은 인정하면서도 내부 규정을 들어 방법이 없다고 한다. 민간기업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누구 하나 총대를 메지 않으려는 관료조직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시아드 회원들도 "학생선수들이 퍼팅장에서 연습해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옆에서 배울텐데"라는 반응이다. 수억 원을 투자한 회원들을 위한 과잉 배려가 아닌가 싶다.

 잠시 기장군 정관면의 해운대CC의 주니어 선수들에 대한 처우를 살펴보자. 향토기업인 (주)경원개발에서 운영하는 이곳은 2년 전부터 부산시골프협회에서 추천한 우수 선수 40명에게 그린피의 50%를 할인해준다. 라운드를 안 해도 퍼팅장 사용은 기본이다. 여기에 기장군에서 유일하게 골프부가 있는 월평초등학교 선수들에게는 손님들의 라운드가 끝날 무렵인 오후 4시께부터 무료 개방한다. 평일 주말 예외 없이. 최근에는 소위 '돈이 안 돼' 골프장들이 꺼리는 부산시골프협회장배 학생선수권대회도 열었다. 부산서 혜택을 받은 만큼 성의껏 베풀고 있는 것이다. 시민의 혈세가 투입된 군림하는 골프장과 부모된 입장에서 주니어 골프 선수들을 배려하는 골프장, 과연 부산시가 지분을 갖고 있는 골프장이 어디인지 묻고 싶다.

 지자체가 골프장을 가질 경우 공공성과 영리성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아시아드의 경우 영리성은 둘째 치고 공공성 측면에선 거의 제로에 가깝다. 차라리 나머지 지분 52%를 매입, 퍼블릭골프장으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면 한다. 이게 현실적이지 않다면 48% 지분을 팔아 차라리 동물원 조성에 매진하라. 이럴 경우 재임 기간 중 허남식 시장의 최고 치적이 되리라 확신한다.


올해 47세인 이 사람, (주)화목건설 김용완 회장의 장남이다. 세칭 'SKY'대학을 나왔으니 요셋말로 스펙도 괜찮다. 지금쯤 경영 일선에 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될 그가 지난해 12월 월간 '더 골프'가 선정한 '한국을 대표하는 티칭 프로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임진한 고덕호 등 국내 내로라하는 스타급 프로들과 함께. 부산에선 두 사람이 뽑혔다. KPGA 중앙경기위원이자 연산골프연습장 대표인 최재철 프로야 자타가 공인해 이견이 없지만 사실 이 사람은 무명에 가깝다.

 부산 해운대구 좌동 화목데파트 2층 '하모니 더 골프'에서 365일 골프와 씨름하는 김규동(부산외대 사회체육학부 겸임교수) 대표 이야기다. 보장된 탄탄대로를 뒤로한 채 골프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그를 만나 '별난 삶'을 들어봤다.

 대학시절 그는 공부에 별 뜻이 없었다. 친구들이 진로를 두고 고민할 때 아버지 사업만 물려받으면 되는 그로서는 먼나라 이야기였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일종의 특혜였다.


 골프와의 인연은 대학 졸업 후 운명처럼 다가왔다. "곧바로 아버지 회사에 출근하기 좀 뭣 해서 미국서 공부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지요. 아버지도 바람 한 번 쐬고 오라고 허락하셨지요."

 당시 유학생 친구들은 예외 없이 골프를 하고 있었다.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현지에서 미국인 코치에게 레슨을 받았다. 

 귀국 후 그는 가족들의 변화에 깜짝 놀았다. 그가 집을 비운 6개월 사이 골프를 전혀 하지 않던 아버지, 자형, 동생이 모두 골프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레슨에 동행한 그는 미국과 한국의 티칭 방법이 크게 달라 놀랐다. 임펙트 이후까지 오른발을 지면에서 떨어뜨리지 말라는 한국 코치의 설명에 이의를 제기하니 무조건 따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때부터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요." 골프 관련 서적을 뒤지며 독학을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기술적 분석을 기술한 책은 많았지만 운동 역학과 인체의 바이오메카닉을 접목시킨 책이 없었다. 요즘 부쩍 부각되는 멘탈 부분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었다.

 "미국의 후배에게 골프 관련 책을 부탁했지만 이 또한 운동 역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한 부분이 태부족해 도움이 안 됐어요. 대학 체육과에서 배우는 운동 역학 교재가 그나마 나았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뒤늦게 발견한 'Search for the perfect swing'과 'The physics of golf'라는 두 원서가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서 1968년도에 출간된 전자는 2002년에야 '완벽한 골프스윙'으로 번역됐고, 후자는 1998년 '물리를 알면 골프가 보인다'로 국내에 번역돼 나왔지만 '물리학'으로 분류돼 있어 찾지 못해 모두 원서로 봤다. 기자에게 원서와 번역서를 모두 보여주며 김 대표는 "전자가 본격 골프 공부의 계기가 됐다면 후자는 골프를 생업으로 해야겠다는 결정타를 날렸다"고 말했다.

 스윙 연습과 이론 공부는 오랫 동안 지속됐다. 2001년 한 지인이 영상스윙분석프로그램인 'C스윙'을 미국서 보내와 연습장에서 노트북으로 지인들의 시윙을 분석해줬다. "당시로선 첨단이었고, 10년간의 제 골프 공부가 작은 절실을 맺을 때였죠. 반면 아버지는 절더러 '미친 놈'이라며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렸죠."

 지도자의 길도 우연히 다가왔다. "해박한 이론과 스윙분석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타면서 주니어선수 부친이 아이를 가르쳐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모 골프연습장 텅빈 3층 한 켠에서 레슨이 시작되자 금세 학생이 8명으로 늘었다. 차츰 수입이 늘자 전문 지도자가 될려면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2002년 미국골프지도연맹(USGTF) 마스터 티칭프로도 됐다. 2004년에는 부산외대 사회체육 골프전공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는 7년만인 지난해 8월 스포츠 심리학 박사학위도 땄다. '문무'를 겸비한 것이다.

 지금의 실내골프연습장은 2009년 열었다. "아버지 도움 없이 은행 대출을 받았어요. 임대료 또한 꼬박꼬박 냅니다. 늦을 땐 회사에서 독촉전화가 올 정도입니다." 

 9개 타석에 트레이닝실, 스윙분석실, 재활치료실, 피팅룸, 샤워실, 심리상담실도 갖췄다. 프로 및 주니어선술들을 위해 스윙뱅크 3D 스윙분석(1000만 원), 타구 분석을 위한 플라이트 스코우프(1400만 원), 퍼팅분석을 위한 SAM Puttlab(1350만 원), 일종의 트레이닝기구인 파워 플레이트(1000만 원), 발의 압력 검사기기인 풋 스캐너 밸런스(990만 원) 등도 갖췄다. 이 정도면 국내 최고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수들 위주지만 아마추어들도 사용 가능하다.

 그를 거쳐간 주니어선수는 지금까지 50여 명. KLPGA투어 프로는 4명, KPGA프로는 2명이다. 지금은 6명의 학생 선수가 배우고 있다. 2010년 아시안게임 단체 개인 2관왕인 김현수 프로와 지난해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박유나 프로가 가시적 성과를 낸 제자들이다.

 언제 보람을 느끼느냐는 물음에 그는 "제자들이 우승했을 때보다 선수로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찾아와 연습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감을 갖고 할 수 있겠다며 눈물을 흘릴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주니어선수들의 부모와 아마추어 골프들을 위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선수로 성공하는 확률은 1%입니다. 나머지 99%는 실패 이후 가야할 길을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일반인들은 즐겁게 운동을 하세요. 프로도 아닌 데 왜 그렇게 우거지상을 하며 운동을 하는 지 모르겠어요." (051)703-7274

         친구이자 라이벌인 청야니와 최나연이 LPGA 투어 하나은행 챔피언십 3라운드 5번 홀에서 함께 이동하고 있다.      

지난 9일 인천 스카이72 골프장에서 막을 내린 LPGA  투어 하나은행 챔피언십 마지막 3라운드.
 전반 9번 홀까지 대만의 골프 여제 청야니가 한국의 최나연과 양수진을 각각 3타 차, 2타 차로 비교적 여유있게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청야니가 잠시 방심했을까. 이후 10번, 11번 홀(이상 파4)에서 파로 쉬어가는 사이 최나연은 두 홀 연속 약 4m짜리 버디를 성공, 한 타 차로 추격했다. 양수진도 10번 홀에서 버디를 낚아 청야니에 2타 차로 추격에 동행했다. 당연히 갤러리들의 환호가 이어졌고, 분위기는 일순간 최나연과 양수진 쪽으로 옮겨가는 양상이었다. 

 12번 홀(파3)에서 모두 파를 한 후, 챔피언조의 세 선수는 13번 홀 티잉그라운드에 서 있었다. 13번 홀은 우 도그레그 내리막 파5(553야드) 홀. 우측으로 꺾어지는 지점부터 그린까지 홀 우측으로 긴 워터 헤저드가 있어 티샷이 부담스러운 이 홀은 구조상 정상적으로 투온이 불가능하다. 

 방송에서도 "티샷을 페어웨이 우측으로 날리면 세컨 샷의 거리가 짧아지지만 물을 건너쳐야 하기 때문에…"라는 설명이 들렸다.

 갤러리의 바람대로 최나연과 양수진은 티샷을 13번 홀 페어웨이 정중앙에 안착시켰다. 다음은 청야니 차례. 일순간 대회 진행요원들이 갤러리들에게 비켜달라고 손짓하는 모습이 화면이 잡혔다. 당연히 갤러리들의 웅성거림도 보이고 들렸다.

 TV중계를 보던 필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계진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겠지만 정확한 상황을 알 지 못했는지 특별한 설명은 하지 않고 그냥 청야니의 드라이버가 로프트 10도, 길이 45인치, 에스플렉스라는 사실만 짧게 언급했다.

 TV 화면은 13번 홀 티잉그라운드와 그 주변을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대략  6, 7초(어쩌면 더 길었는지도 모르겠다) 정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청야니의 티샷. 이때 화면은 페어웨이 쪽에서 티잉그라운드를 잡았다. 근데 청야니가 정면으로 보지 않고 우측을 향해(화면 상으론 왼쪽) 티샷을 날리지 않는가. 어라!!! 정말 이상하고 궁금했다.

 그 다음 화면이 문제였다. 화면은 13번 홀 페어웨이를 비추고 있었지만 볼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정황상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중계진의 멘트 또한 대충 얼버무리기식이었다. 아래와 같이.

 -해설자 : 청야니가 10번 홀부터 샷이 흔들렸다.
 -캐스터 : 청야니도 심리적 상태에 따라 샷의 영향을 받는 것 같다.
 -해설자 : (다른 선수가 맹추격해오는 이런 상황에선) 모든 선수의 샷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중계를 보는 사람도 이상했지만 중계하는 사람도 얼마나 궁금하고, 어색하고, 그래서 식은 땀이 났을까요.

 이후 화면은 '전반 홀 하이라이트'를 보여주었다. 막간을 이용해 중계방송팀(카메라팀과 방송중계팀)이 이전의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 홀 하이라이트'가 끝나자 화면에는 멀리서 잡은 두 홀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13번 홀과 14번 홀을 롱샷으로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았지만, 이는 필자의 생각일 뿐 정확하지는 않다. 

 필자 생각으로는 그 막간에 카메라팀과 중계팀의 소통이 되지 않은 듯했다. 

 해서, 중계카메라와 PD가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후 풀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두 홀을 보여주면 중계진이 감을 잡자 않을까 생각했겠지만 그날따라 캐스터와 해설자는 전혀 이를 포착하지 못한 듯 했다. 

 다음 화면에서 그 사실이 적나라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갑자기 바뀐 화면에선 청야니가 페어웨이에서 세컨 샷 준비를 하고 있었다.

 -캐스터 : 볼이 13번 홀 페어웨이 오른쪽에 와 있네요.(실제, 청야니는 이날 13번 홀에서 14번 홀의 페어웨이를 향해 좀처럼 볼 수 없는 역주행 샷을 날렸다) 무리하게 그린까지 공략할 것 같지 않은데요.
 -해설자 : 아이언으로 가능하겠네요. (지금 보니 청야니의)티샷이 멀리 날아갔기 때문에 화면상으로 확인이 안 됐네요. 직선거리로 240~220야드 되겠네요.

 14번 홀 페어웨이에서 청야니가 친 세컨 샷은 13번 홀의 그린 프린지와 러프의 경계쯤에 섰다. 
 이 장면에서도 거의 모든 신문과 통신은 오보를 했다. 당일 연합통신은 물론이고 다음날 11일 자 중앙일보 등 거의 모든 신문은 청야니가 투온을 시켜 이글 찬스를 잡았지만 결국 버디를 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와 스포츠조선만 이 대목에서 '(세컨 샷으로)하이브리드 클럽을 들고 220야드를 날려 물을 건너 그린을 살짝 넘기며 이글 찬스를 만들었다'고 비켜갔다.

 결국 청야니는 이글을 놓치고 버디를 했고 최나연과 양수진은 힘겹게 쓰리온 후 버디를 했다. 

 J골프의 13번 홀 중계는 천신만고 끝에 이렇게 지나갔다.

 이쯤에서 그 중계를 보지 않은, 다시 말해 LPGA 하나은행 챔피언십 마자막날 13번 홀의 경기를 못 본 사람들을 위해 사실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날 청야니는 13번, 파5홀에서 최나연과 양수진처럼 티샷을 하면 남은 거리가 250야드가 돼 투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웃한 14번 홀로 티샷을 날렸다. 이렇게 할 경우 220야드 정도가 남아 장타자인 청야니는 투온이 가능하다.

 문제는 OB 말뚝의 유무. 대회가 열리지 않을 때 13번 홀과 14번 홀의 경계에는 OB말뚝이 있었지만 LPGA 경기위원회는 대회 기간 이곳의 OB말뚝을 뽑아냈기 때문에 청야니의 13번 홀에서 14번 홀로의 역주행 티샷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청야니가 1, 2라운드 때는 이 사실을 알고도 역주행 티샷을 날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 단 한 번의 사용을 위해 히든카드로 남겨 놓았던 것이다. 세계랭킹 1위다운 코스공략 전략이다..
 
 재밌는 점은 대회가 끝난 지 이틀 후인 11일 자 중앙일보에는 청야니의 13번 홀 역주행 티샷과 관련, 눈길 끄는 기사가 실렸다. 잠시 내용을 인용, 요약, 나름 보충하면 이렇다.

 대회조직위원회에 따르면 대회 전 열리는 프로암 대회(프로암은 본 대회가 열리기 전, 참가 선수와 대회 스폰서들이 라운드를 함께하는 일종의 행사. 프로가 한 수를 지도하면 라운드 후 스폰서들은 통상 격려금을 선수들에게 하사한다) 때 청야니는 동반자인 하나은행 김정태 은행장에게 13번 홀에서 티샷을 한 번 더 해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한 후 14번 홀 페어웨이 쪽으로 티샷을 날렸다는 것. 이후 청야니는 세컨 샷을 하지 않았고, 그 볼은 캐디가 주워오며 그린까지의 거리를 확인한 것이다.
 김 행장은 며칠 후 청야니의 경기를 보며 당시의 상황을 이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J골프의 이날 영상은 전 세계 150개국 1억3300만 가구에 방송됐다고 중앙일보는 경기 다음날인 11일 자 신문에 보도했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13번 홀 상황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서.

청야니 13번 홀 티샷 상황도=스포츠조선 캡처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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