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아(琴兒) 피천득을 떠올리면 '아사꼬'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잔잔하게 그린 '인연'이 연상된다. 이 수필은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거니와 그 애틋한 서정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같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다시 읽으면서 아마 외국인으로 미국에서 살다보니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아사꼬의 남편에 관한 묘사가 바로 그것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꼬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아사꼬에 대한 식민지 청년의 연모는 청자 연적처럼 투명한 여운을 주지만 그녀의 남편을 향한 못난 질투가 엿보인다. 


  피천득은 진주군 장교였던 아사꼬의 남편이 어떤 비극을 겪었을지 아마 상상도 못하였을 것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지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부터 FBI는 일본계 미국인을 체포하거나 감금하기 시작했고 일본 이민자들을 집단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재산을 거의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은 중국인들이 매입했다고 한다. 일본계 은행은 파산했고 따라서 일본계 이주민들도 파산했으며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들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나 황무지 등에 배치되었으며, 감시하기 편리하도록 목욕탕이나 화장실에도 문을 없앴다. 일본에서 출생한 이민자들은 잠재적 스파이로 분류돼 감금됐고,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들은 충성서약을 강요받았다. 비충성 시민으로 분류되면 감옥에 격리 수용되었고, 충성시민으로 분류될 경우 군수품 공장 노동자로 일할 수 있게 중부내륙 등지로 보내주었다.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터전을 일구었던 12만 일본계 이주민들은 이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진주만 공격 직후부터 일본계 미국인들은 적성시민으로 간주돼 군입대가 거부되었지만 이후 충성서약을 받고 부모들을 감금 혹은 격리시설에 수용시켜 인질로 삼은 뒤,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 청년들을 전투에 투입시켰다. 그들이 바로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442연대다. 그들은 전장에 투입되는 순간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공을 세웠다. 단기간에 전체 미군 가운데 가장 훈장을 많이 받은 부대가 되었다. 사상자 비율은 순수 미군의 3배에 이르렀으며, 부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된 후에도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격전지에서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모두 수용소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와 맞먹는 이 전쟁범죄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현재까지 일본계 이주민과 일본계 미국인이 2차 대전 당시 적성행위를 한 것으로 보고된 사례는 없다. 전시의 파라노이아와 인종적 편견이 일본계 이주민에 대한 범죄를 정당화시켰을 뿐이다.
 아사꼬의 남편도 광기어린 인종차별에 간신히 살아남은 진주군 장교였을지 모른다. 피천득이 상상하는 '일본인' 아니면 '미국인'이라는 이분법적 분류와 달리 아사꼬의 남편은 일본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을 것이다. 더불어 일본 태생의 부모는 수용소에 감금돼 있고, 충성서약을 마치고 442연대에 배속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진주군 장교로 전후 일본에 배치되었을 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아사꼬와 세 번째 만났을 때 이런 역사적 맥락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종적 프레임은 강박적이고 역사적 이해는 누락되어 있다. 피천득의 '인연'은 그 애틋한 서정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적인 정신이 깃든 글이라고 한다면 금아(琴兒)에게 외람된 것일까. <미국 통신원-hyung0302@hanmail.net>

 

      캐나다 벤쿠버 해양박물관에 전시된 일본의 진주만 기습 및 태평양 전쟁 관련 자료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