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메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1위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에 지명도에 밀리지만 
생산량은 압도적으로 1위랍니다"

구룡포항 전경. 웬만한 어항 하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각도를 달리해서 본 구룡포항.

장삼이사들은 구룡포 하면 십중팔구 과메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구룡포에는 과메기 이외에 국내 최대를 자랑하는 두 가지 수산물이 더 있다. 다름아닌 대게와 오징어이다. 혹자들은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를 떠올리겠지만 이건 와전이고 편견이다.

대게와 오징어의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생산지는 바로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항이다. 결국 구룡포는 대게 오징어 과메기의 전국 최대 생산지이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라 불릴 만큼 구룡포는 어항이라 부르면 미안할 정도로 항구가 자체가 아주 크다. 한눈에 봐도 영덕이나 울진 후포항, 울산 정자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규모가 상당하다.

해서, 구룡포는 겨울바다의 낭만 보다는 갈매기의 호위를 받아 뱃고동을 울리며 쉴새없이 드나드는 비릿한 고깃배의 모습이 더 살갑게 다가오는 거대 어항이다.

우선 과메기를 살펴보자. 일출 명소로 유명한 호미곶이 위치한 북쪽의 대보면 등과 함께 과메기 특구로 지정된 구룡포는 국내 전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구룡포가 과메기 최대 집산지로 자리매김한 데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 포항은 낙동정맥이 고도를 낮추는 지점이라 북서풍과 염분을 머금은 영일만의 해풍이 뒤섞이며 과메기를 숙성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과메기는 구룡포항을 살짝 벗어나면 해안가에 덕장이 이어진다.

대게와 관련해선 땅을 치고 통곡할 정도. 구룡포수협에 따르면 국내 생산량의 60%가 이곳 구룡포항에서 위판된다고 한다. 하지만 브랜드가 영덕에 밀리다 보니 여기서 잡은 대게의 상당 부분이 영덕으로 올라가 영덕대게로 옷을 갈아 입니다. 마치 전남 고흥 녹동항에서 위판된 세발낙지가 목포 세발낙지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구룡포수협 관계자도 "브랜드 인지도에서 차이가 나는 건 현실이지만 분명히 생산량은 구룡포가 훨씬 앞선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강조했다.
구룡포항 대게 위판장.

오징어 또한 국내 최대 생산을 자랑한다. 흔히 오징어 하면 울릉도를 연상시키는데 실제로는 울릉도 보다 오징어를 많이 잡는 곳이 이곳 구룡포다. 구룡포수협에 따르면 오징어 생산의 절반 가량이 구룡포에 모여든다고 한다.

 오징어의 경우 워낙 많이 위판되다 보니 오징어 채낚기배에 잡히는 오징어(활어) 위판장과 그물에 의해 잡히는 (트롤)오징어 위판장 두 군데가 있다. 이렇게 오징어가 많이 생산되는데도 필부들은 오징어 하면 울릉도를 떠올리니 구룡포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밤에 등불을 밝혀 오징어를 불어모은 후 긴 낚시줄로 잡아올리는 오징어채낚이배.
구룡포항을 벗어나면 과메기와 함께 해풍에서 건조되는 오징어를 만날 수 있다. 반건조 오징어인 일명 피데기이다.

한마디로 구룡포는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에게 밀리면서 그야말로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싱싱한 대게와 오징어, 과메기를 가장 싸고 맛있게 맛볼 수 있는 곳이 다름아닌 구룡포항인 것이다.

여기서 국내 유일 등대박물관과 유명 일출 명소로 '상생의 손'이 반기는 호미곶이 불과 30㎞에 불과해 해안드라이브 코스로 일품이다.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인 구룡포항을 벗어나면 과메기 덕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이 줄곧 이어진다. 해안드라이브길로 일품이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동해안 최대 어장인 구룡포가 어업 생산량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은 일차적으로 구룡포 사람들 책임이 크다"며 "앞으로는 브랜드 인지도를 올리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유정란 때 살해된 황보인 손자 노비가 구해
후손들이 서원 세운 후 뒷마당 양지에 비 세워 

바깥에서 본 광남서원. 제법 규모가 크다.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이자 동시에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중종 37년인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북 순흥에서 고려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이라 부른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다. 회재 이언재를 모신 경주 옥산서원, 퇴계 이황을 기리기 위한 안동 도산서원 등이 대표적인 예.

 하지만 양반과 상놈의 서열이 분명했던 조선시대 때 노비의 비(碑)가 존재하는 서원이 있어 눈길을 끈다. 과메기로 유명한 구룡포에 위치한 광남서원(廣南書院)이 바로 그것이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행정구역상으로 포항시 구룡포읍 성동3리.

 문무대왕 수중왕릉인 경주 양북면 용당리 앞바다에서 31번 해안국도를 따라 가다 구포휴게소를 지나자마자 도로 좌측에 '성동 메뚜기마을', '광남서원'이란 팻말이 서 있고 서원 앞 너른 주차장에는 포항 대형 지도가 눈에 띈다.
                 광남서원 입구의 대형 지도. 지도 아래 현위치라 적힌 표기된 글도 보인다. 

 광남서원은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충정공 지봉 황보인과 그 장자인 참판공 황보석, 그 차자인 직장공 황보흠을 기리기 위해 지방유림과 그 후손들이 세웠다.

 황보인(1387~1453)은 조선 태종 14년 1414년에 천시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8년 1436년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후 1440년엔 평안 성길도 관찰사가 돼 약 10년간 김종서와 함께 6진을 개척했고 문종 2년 1451년 영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좌하다 결국 1453년 수양대군에게 살해됐다.

 황보인을 기리기 위한 광남서원에 그렇다면 왜 노비의 비가 세워져 있단 말인가. 사연은 이랬다.

 원래 역적은 3대를 멸하지 않는가. 계유정란 때 역적으로 몰린 황보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들도 살해를 당했지만 손자가 충직한 노비 덕택에 살아났다.
 다름아닌 단량이라는 노비가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일출 명소로 유명한 호미곶이 위치한 포항 대보면의 오지 중 오지인 집신골에 피난을 내려와 거주하다 이보다 남쪽인 지금의 구룡포읍 성동으로 이주하여 대를 이어가게 됐다.

 세월이 흘러흘러 황보인과 그의 아들도 복관되자 정조 15년 1791년에 후손들이 '세덕사'라는 서원을 지었고, 순조 31년 1831년 나라로부터 '광남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

 서원을 들어서면 좌측에 '영의정 충정공 지봉선생 신도비'라 새겨진 신도비가 있으며 강당인 숭의당과 제당인 충종묘와 사우삼간 등이 있다.

       서원 입구에 위치한 황보인의 신도비. '영의정 충정공 지봉선생 신도비'라 새겨져 있다.

광남서원의 본 건물.

'광남서원'이라 적혀 있다.



 충비(忠婢) 단량을 기리는 비(碑)인,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라고 적혀 있는 비가 경내 뒷쪽 한켠에 세워져 있다. 무심코 왔다간 놓치지 쉬운 곳에 있지만 서원에 노비의 비(碑)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계급사회인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는 것이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의 설명이다.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라' 적힌 노비 단량의 진짜 비석.
          단량의 비.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 '진짜' 단량의 비는 담벼락 아래 양지바른 지점에 서 있지만 이후에 만든 '가짜' 단량의 비는 반듯한 전각 안에 소중히 모셔져 있다. 세월의 풍파를 겪고, 앞으로도 겪을 진짜 화강암 비는 여견히 바깥에 놓여 있고, 반들반들한 까만 대리석에 말끔하게 음각된 가짜 비는 전각 내에 서 있으니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어찌된 사연인지 서인만 부소장에게 물어보니 "이게 바로 우리 공무원의 수준이자 현실"이라고 자탄했다.

                
                진짜 단량의 비는 담벼락 아래 비바람 등 대자연에 노출돼 있고(사진 위) 바로 옆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가짜 비(사진 아래)는 보물단지마냥 전각 안에 고히 보관돼 있다. 이 어찌
                운명의 장난인가. 이게 바로 우리 공무원들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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