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산' K2 베이스캠프 입구 둔덕에는 '메모리얼 힐'이라는 추모공간이 있다. K2에서 희생된 전 세계 산악인들을 애도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기자는 해발 5300m쯤 되는 K2 베이스캠프에서 홀로 다녀오느라 애깨나 먹었다. 이곳에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책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당사자인 영국의 아줌마 산악인 알리슨 하그리브스의 동판도 눈에 띈다. 1995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단독 등정한 그는 두 달간의 휴식 후 K2도 역시 무산소로 홀로 올랐지만 하산길에 목숨을 잃었다. 네 살, 여섯 살 난 두 아이를 두고서. 당시 첫째 아이가 공식회견장에서 아빠에게 엄마가 죽은 곳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아이와 아빠와의 K2트레킹이 현실화됐고, 이 트레킹 기록이 바로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내용이다. 당시 파키스탄은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트레킹을 지원했고, 영국의 BBC는 이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다시 한 번 전 세계 산악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인 히말라야에는 고금을 울리는 사연이 널려 있다. 지난 21일 에베레스트 등정 후 하산길에 숨진 부산 산악인 서성호(34·부경대OB)의 사연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8000m 히말라야 12좌를 올랐다. 이 중 11좌를 이번에 세계 최단기간·아시아 최초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기록을 세운 김창호와 함께했다. 자일파트너로 친형제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2008년 세계 4위봉인 로체를 3일 만에 무산소로 올라 최단기간 기록 공인도 받았다. 
 

악계에선 김창호의 이번 기록을 깰 유일한 산악인으로 서성호를 꼽고 있지만 정작 서성호는 욕심이 없었다. 그는 평소 사석에서 "그저 산이 좋아 산에 올랐고, 가장 체력이 왕성할 때 고산등반의 기회가 생겨 열심히 하다 보니 운이 따랐다"고 겸손해했다.


 기록에 욕심이 있었다면 김창호보다 먼저 할 수도 있었다. 네팔인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오른 밍마 셰르파가 지난해 초 'K2·브로드피크 상업대'를 모집했다. 밍마는 2010년 7월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 부산원정대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며, 밍마의 동생은 같은 해 10월 시샤팡마 원정 때 역시 부산원정대의 신세를 졌다. 이런 인연으로 밍마는 부산원정대의 서성호가 K2와 브로드피크를 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곤 특별 초청했지만 서성호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남은 두 개를 올라도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계에서 그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힘겹게 걸어온 그의 삶의 여정 때문이다. 어머니는 따로 살았고, 부친은 오랜 세월 중병을 앓았다. 대학 입학 후 그는 극심한 생활고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휴학 땐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과 각종 아르바이트를 닥치는 대로 했다. 동생도 건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중 부친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제대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막노동 후 달밤엔 산악부 활동을 위해 운동장을 뛰고 철봉에 매달렸다. 2006년에는 부산원정대에 뽑혀 에베레스트도 올랐다. 다행히 그해 가을 10년 만에 하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됐다. 먹고사는 일이 더 급했던 그는 이듬해 여름 예정된 K2·브로드피크 등반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때 동행해 두 거봉을 올랐다면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그는 2011년 9월, 32세로 세계 최연소, 최단기간 히말라야 8000m 14좌 기록을 보유하게 됐으리라.


 '운명'이었을까. 재취업해 보통사람처럼 살고 있는 그에게 김창호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앞두고 도움을 요청했다. 생사를 같이 했던, 가장 좋아하던 '창호형'이었기에 기쁘게 함께했다.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채 펴보지도 못한 채.


 30일 오전 9시 부산시립의료원에서 부산산악연맹장으로 영결식이 열린다. 슬프다 안타깝다. 애오라지 산이 좋아 산에 살았던 그래서 산이 돼버린 서성호의 명복을 빈다.

 

2010년 낭가파트바트 때 정상에 선 김창호와 고 서성호.

 

2011년 발토르빙하에서. 왼쪽에서부터 홍보성 부산산악연맹 회장, 고 서성호, 김창호.

 

                           살아 생전의 서성호

 

 


◆부산 산악계 히말라야 등반사
                           -①도전의 시작

"한계…불가능…,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 8번째로 오른 자랑스런 한국의 '77에베레스트 원정대'.
오색 룽다가 펄럭이고 있는 가운데 에베레스트 등정 후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서 철수하기 전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초체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기에 모두들 표정이 밝다. 뒷줄 왼쪽에서 4~6번째가 각각 부산의 전명찬(작고), 곽수웅,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작고) 대원이며,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영도 원정대장.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선 티베트의 북동릉 쪽과는 달리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04년 3월 대한산악연맹 부산연맹(이하 대산연 부산연맹) 총회에서 회장으로 오른 하해룡 회장은 취임일성으로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고봉이라는 상징성 하나밖에 없는 에베레스트 대신 등반성과 후진양성을 위해 8000m급 다른 봉우리를 택하자는 일부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대산연 산하 시도연맹 중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지 못한 곳은 부산 대전 제주뿐이라는 사실을 접하고는 자존심 회복 차원에서 에베레스트로 결정됐다.

부산연맹은 부산시와 국제신문의 특별 후원으로 2006년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를 꾸려 2년 후인 2006년 5월 16일 마침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 부산연맹이 새롭게 거듭나는 토대를 구축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 베이스캠프를 떠나기 전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4~6번째가 각각 부산의 전명찬(작고), 곽수웅,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고상돈(작고) 대원이며,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영도 원정대장. 네팔 남동릉 베이스캠프에선 티베트의 북동릉 쪽과는 달리 에베레스트 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감을 얻은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는 이듬해인 2007년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 K2와 브로드피크에 이어 올해엔 마칼루와 로체를 단숨에 올라 부산 산악인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렸다.

세계의 지붕이자 자연의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히말라야는 산악인들에게 궁극적 목표이자 희망이다. 왜 산에 오르느냐는 물음에 조지 말로리는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다소 선문답적인 명언을 남겼다지만 일반 산악인들은 그런 질문을 가급적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결같이 '싫은 일을 왜 하겠어요'라고 말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인간의 한계를 몸소 체험하려 한다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그저 산에 가는 것이 좋고 오르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고 나아가 미래도 없는 법.

부산 산악인들의 지금과 같은 위상은 과거 선배 산악인들의 발자취가 큰 힘이 됐다. 그 발자취가 땀과 눈물이 뒤섞인 시행착오가 됐든 추위와 굶주림이라는 역경을 이겨내고 이뤄낸 불굴의 의지이든 선배들의 영향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와 늘 함께 해온 국제신문은 부산 산악인들의 영욕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네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히말라야의 정의  
넓은 의미 히말라야는 중앙아시아 거봉군 전체
그레이트·카라코람·힌두쿠시로 다시 세분화

 
우선 히말라야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6000만년 전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 세계의 지붕으로 우뚝 선 히말라야.

'만년설의 집'이라는 의미의 히말라야는 넓은 의미로는 인도 네팔 파키스탄 부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거봉군 전체를 의미하지만 현지에선 크게 '그레이트 히말라야', '카라코람 히말라야', '힌두쿠시 산맥'으로 구분해 사용된다.

그레이트 히말라야는 장삼이사들이 흔히 말하는 히말라야를 의미한다. 동쪽으로 부탄과 미얀마의 경계에서부터 서쪽으로 네팔 인도북부를 거쳐 파키스탄 일부까지 이르는 총길이 3000㎞에 이르는 대산군이다.

8000m급 히말라야 14좌 중 동쪽에서부터 캉첸중가(8586m) 마칼루(8463m) 로체(8516m) 에베레스트(8848m) 초오유(8201m) 시샤팡마(8027m) 마나슬루(8163m) 안나푸르나(8091m) 다울라기리(8167m) 낭가파르바트(8125m) 등 10개가 포함돼 있다. 이 8000m급 거봉 10개가 모두 네팔에서, 또는 네팔을 경유해야 등정이 가능해 일명 네말 히말라야로 부르기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샤팡마는 티베트에서, 낭가파르바트는 파카스탄에서 오른다.

  '검은 암석의 땅'을 의미하는 카라코람은 파키스탄 북부지역의 산군으로, 여기에는 '죽음의 산' K2(8611m) 브로드피크(8047m) 가셔브롬2(8035m) 가셔브롬1(8068m) 등 히말라야 14좌 중 4개가 포진해 있다. 총길이는 약 500㎞.

그레이트 히말라야에 비해 위도가 5도 정도 북쪽에 위치한 까닭에 고온다습한 인도양 기후의 영향을 덜 받아 매우 건조해 동식물이 생존하기 어려운 불모지대다.

또 다른 산군인 힌두쿠시는 파미르 남부에서 파키스탄 북부를 거쳐 아프가니스탄 중앙부로 뻗은 600㎞의 산맥.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따라 길게 도열돼 있다 보면 된다. 힌두쿠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넘어 인도를 침공했다 전해온다. 힌두쿠시의 최고봉은 티리치미르(7700m)로, 이곳에는 7000m급 산들이 많다.


#초창기 한국 히말라야 진출
학술조사·개척등반서 60년대 이후 극한 알피니즘 눈길
곽수웅 전명찬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부산 대표 참가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77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들. 벽에 걸린 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대원들은 비행기에서 술을 마셔 대부분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 대원들은 기자회견 후 청와대에 초청받고 지금으로 치면 올림픽 금메달에 해당되는 훈장까지 받는 칙사대접을 받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히말라야로의 진출은 자국내에서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그 등반영역을 확장하는 순으로 나타난다.

해외등반에 관심을 갖게 된 196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의 등산문화는 한국산악회와 대학산악부를 중심으로 국토규명 학술조사로 출발했다. 이후 설악 한라 지리산 등지에서의 적설기 등반과 암장 개척등반이 주를 이루면서 이러한 열기가 부산을 비롯한 지방으로 확산됐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 점차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내 산악계는 고전적 등반에서 탈피, 극한 등반을 추구함과 동시에 새로운 등반 대상지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점차 해외원정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히말라야 원정은 1962년 다울라기리2봉(7751m) 정찰대가 시초이다. 이 원정대는 다울라기리 남쪽 접근로의 발견과 6700m 무명봉을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0년부터 시작된 8000m급 히말라야 14좌는 티베트에 위치한 시샤팡마(8027m)만 미답봉으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이미 초등된 상태였다. 그만큼 출발점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늦었다는 것.

두 번째 원정은 1970년 한국산악회 추렌히말(7371m) 동봉 원정대. 이때 첫 등정에 성공하면서 히말라야 원정사에 처음 이름을 올리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같은 해 로체샤르(8382m)를 시작으로 1971, 1972, 1976년 세 차례에 걸쳐 마나슬루(8163m)에 도전장을 던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마침내 1977년, 대산연이 파견한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지구의 용마루에 올라섰다. 세계에서 8번째 등정국가로, 고 고상돈 대원은 58번째 등정자로 기록됐다. 서구 산악계가 1950년 8000m급인 안나푸르나를 초등할 때까지 55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반면 한국은 히말라야의 장을 연 지 불과 15년만에 개척기를 마감하고 세계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당시 김영도 대장을 비롯해 18명의 대원이 참가한 원정대에 대륙산악회 곽수웅(33), 청봉산악회 전명찬(25·작고)이 참가, 부산산악계의 역량을 펼쳤다. 안타까운 점은 엑셀시오알파인클럽 송준송(31)이 1976년 설악산에서 훈련 도중 눈사태로 동료대원 2명과 함께 사망해 부산 산악인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77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부산연맹의 대원으로 참여한 곽수웅(33 현 대륙산악회 고문, 왼쪽) 전명찬(25, 작고) 대원이 부산역에 도착한 후 환영식을 갖고 있다. 젊은 시절 곽수웅 씨는 현 롯데 자이언츠 4번 타자 이대호를 아주 닮았다.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한 곽수웅 대륙산악회 고문은 "당시 대원선발 과정이 워낙 까다로워 우스갯소리로 시험쳐서 뽑았다고 할 정도로 엄격했다"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54명이 5차 훈련까지 거친 끝에 18명으로 최종 결정됐다"고 기억했다.

곽 고문은 "국가적 차원의 원정대인 만큼 각 시도 연맹 소속 대원들을 골고루 선발하려 했지만 훈련이 워낙 힘들어 결국 서울 부산 충북 충남 경북연맹의 대원들이 네팔로 떠났다"며 "등정에 성공한 고상돈 대원도 고향은 제주였지만 충북연맹 소속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부산 산악인의 히말라야 최초 도전은 1972년 2차 마나슬루 원정대(대장 김정섭)의 대원으로 참가한 청봉산악회의 송준행(32)이다. 그러나 손준행은 등반 도중 캠프3(6500m)에서 발생한 눈사태로 일본인 1명 등 대원 5명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로 세르파 10명도 숨졌다. 히말라야 등반 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 참사였다.

부산 산악계는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등정에 자극받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부산연맹과 부산학생산악연맹 그리고 전통의 산악회들이 히말라야로 잇단 출사표를 던지게 된다.

에베레스트 남동릉 캠프2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대원과 세르파. 뒤로 보이는 지점이 사우스콜이다.

77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사다리를 이용해 빙하지역을 오르고 있다.

# "히말라야 부산원정대 뭉쳤다" 서미트클럽 결성
   
2000년대 들어 부산 산악계는 지금까지 히말라야로 원정대를 지속적으로 파견하고 있다. 네팔지역 5개 팀, 카라코람 쪽인 파키스탄 2개 팀, 중국 지역 4개 팀 등 모두 11개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향했다.

무엇보다 눈길 끄는 점은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이 주도하는 '다이내믹 원정대'의 등장이다. 부산시와 국제신문의 특별후원으로 결성된 '다이내믹 원정대'는 지자체에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거봉 14좌 완등이란 목표를 세우고 2006년부터 에베레스트 K2 브로드피크 마칼루 로체 등 5개 거봉을 올랐다.

참가 대원들이 점차 늘면서 원정대원으로서의 경험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을 방지하고 대원들의 노하우를 결집시키는 방안이 논의되던 끝에 친목단체인 '서미트 클럽'이 최근 결성돼 지역 산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7월 창립 발기인대회를 가진 '서미트 클럽'은 지난 8월 31일 부산의 진산 금정산에서 창립 기념산행을 가졌다.

클럽은 대한산악연맹 부산시연맹에서 '다이내믹 부산'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원정대를 구성해 파견한 '2006 에베레스트', '2007 K2 & 브로드피크', '2008 마칼루 & 로체' 그리고 '2001 초오유' 원정대원들을 주축으로 구성됐다.

초대 회장은 2004~2006년 부산연맹 20, 21대 회장을 연임한 하해룡(59·대륙) 부산연맹 명예회장이 맡았다. 회원은 2001년 초오유 원정대장 김복우(55·봐인), 2006~2008 다이내믹 부산 원정대장 홍보성(52·부경대OB)을 비롯, 조창래(49·대륙) 박종일(47·상봉) 김진태(45·상봉) 하영호(44·다솔) 신용우(44·청봉) 김창호(39·부경대OB) 김희수(37·한오름) 권경일(36·대륙) 박정용(32·부산빌라알파인클럽) 정용석(32·한오름) 유향미(30·동주대OB) 서성호(28·부경대OB) 박주원(28·다솔) 이세현(23·해양대) 등. 원정대 취재를 동행한 언론계의 이흥곤(국제신문) 김백수 임혁규(이상 KNN)도 포함됐다.

서미트 클럽은 해외 거봉 등반의 인재풀외에도 고산등반과 도전 정신을 추구하는 청장년층을 위한 각종 등반 자료와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계획이다.
문의 박종일 총무(010-5780-3939)

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사진 제공=곽수웅 대륙산악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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