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진 히말라야 원정대. 왼쪽부터 서성호, 오영훈, 김창호 대장, 전푸르나, 안치영.>


김창호(44)는 세계 산악계가 인정하는 현역 최고의 산악인이다. 그의 등반 기록 중 압권은 후배인 고 이현조와 함께한 세계 최난도 거벽인 낭가바르파트(8125m) 루팔벽 등정이다. 루팔벽은 벽 구간만 세계 최장인 4500m에 평균 경사도 60도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거대 벽. 엄청난 경사 때문에 눈이 쌓이지 않아 흔히 '벌거벗은 산'으로 불린다.

루팔벽 초등은 1970년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69)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메스너는 함께 등정한 동생 귄터를 하산길에 잃었지만 김창호는 후배 이현조와 무사히 하산했다. 1986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현존하는 등반가의 전설로 불리는 메스너는 2004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에서의 삶과 죽음의 장대한 오디세이를 담은 'The Naked Mountain'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때보다 좋은 기술과 장비가 줄기차게 나왔지만 아직도 루팔벽은 재등되지 않고 있다. (중략) 앞으로도 전 세계 유능한 산악인 1000명 중 선택 받은 이는 아마 한 두 명일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이듬해 김창호 팀은 메스너의 예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35년 만에 루팔벽을 가뿐히 올랐다. 머슥해진 메스너는 2006년 친인척 40여 명과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베이스캠프로 떠나는 트레킹 팀에 특별히 김창호를 초청, 서로가 서로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김창호와 라인홀트 메스너.>

 김창호는 부산과의 인연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5000~7000m대의 미답봉을 주로 오르내리던 그에게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가 2006년 에베레스트를 오른 후 두 번째 대상 산인 K2 등반을 앞두고 카라코람 히말라야 전문가였던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그게 인연이 돼 김창호는 2007년 K2부터 2011년 초오유 등정까지 부산원정대의 히말라야 8000m급 13좌를 함께했다.

<2010년 7월 낭가바르파트 정상에 선 김창호(왼쪽)와 서성호.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2011년 파키스탄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발토리빙하에서 부산다이내믹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김창호(왼쪽 세 번째). 왼쪽 첫 번째 홍보성 대장, 두 번째가 서성호.>

<2011년 초오유 등반 때. 왼쪽부터 김창호, 홍보성 원정대장, 서성호.>


 현재 김창호는 히말라야 14좌 중 에베레스트 등정만 남겨놓고 있다. 사실 김창호는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 기회가 한 번 있었다. '도로공사 장애인 등반대'대원으로 참여해 마지막 캠프에서 김홍빈과 함께 등정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에 나섰던, 루팔벽에서 동고동락했던 후배 이현조와 오희준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등정 도전을 포기하고 시신 수습에 나서 결과적으로 기회를 놓쳤다.

 그가 6일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함께하는 대원은 그와 지금까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34/부경대OB), 안치영, 오영훈, 전푸르나.


 김창호의 이번 등반은 히말라야 14좌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라 다소 독특하면서도 의미있게 계획을 세웠다.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대원들 힘으로 해발 제로에서 출발한다. 인도 바카할리마을에서 갠지즈강의 지류인 후글리강에서 카약을 타고 강을 거슬러고(5일/50㎞), 갠지즈강을 따라 사이클을 타고 국경을 넘어 네팔로 집인한 후 (15일/1000㎞), 도보로 베이스캠프(15일/150㎞)에 도착해 정상에 오른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통상 등반기간보다 40일 정도 더 걸리고 비용도 배나 든다. 카약과 사이클은 이번 원정의 후원사인 몽벨과 LS네트웍스가 후원했다. 

 이번 등반에서 김창호는 무산소로 도전한다. 만일 등정에 성공한다면 김창호는 아시아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등정 기록을 세우게 된다. 세계 최초 무산소 기록은 메스너이며, 김창호는 14번째가 된다. 또 5월 중순에 정상에 오를 경우 1987년 예지 쿠쿠즈카가 세운 기록(7년 11개월 14일)도 경신, 최단 기간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자가 된다.


 한편 부산원정대 대원으로 김창호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1개를 함께 오른 서성호는 현재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2개, 무산소로는 10개 올랐다. 

김 대장은 "에베레스트 정상은 기압과 산소가 평지의 3분의 1 수준"이라며 무산소·무동력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설명했다. 

원정대의 등반 루트는 에베레스트 남동쪽 능선과 로체 서벽이다.
 원정대는 오는 11일 출국한다. 정상 등극은 5월 중순으로 보고 있으며, 그럴 경우 같은 달 30일 귀국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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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산' K2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웅장한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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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 베이스캠프(왼쪽)와 베이스캠프에서 본 수시로 일어나는 작은 사태.


 일반인들에게 세계 최고봉은 에베레스트(8848m)이지만 산악인들에게 세계 최고봉은 K2(8611m)라는 말이 있다. 해발고도는 낮지만 거대한 피라미드 꼴의 날카로운 이 산의 등반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히말라야 8000m급 거봉들 중 K2의 등정률이 가장 낮은 30% 정도에 불과하다. 지난 1985년의 경우 등정을 시도한 26개의 원정대 중 겨우 9팀만이 성공했을 뿐이다.

 K2는 산세가 험한 것 이외에 상습적인 돌풍을 위시한 기상이변이 잦다. 히말라야의 대부분 8000m급 거봉들은 서로가 서로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지만 K2는 파키스탄 북부지역의 카라코람 산군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비교적 떨어져 있어 사실상 독립봉우리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K2와 직접 부딪히면서 일종의 소용돌이가 자주 발생해 산악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산 자체가 험한 데다 기상이변까지 상습적으로 일어나기에 산악인들로서는 난공불락인 셈이다.

 지난 1986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등정한 오스트리아의 살아 있는 전설 라인홀트 매스너가 "K2의 어느 루트라도 다른 산의 어려운 루트보다 힘들다"고 말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국내 산악인들의 경우 지난 1986년 장봉완 등 3명이 올랐지만 같은 해 함께 등반한 9개 원정대 대원 중 18명이 목숨을 잃어 '죽음의 산'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14년만인 2000년에 와서야 영호남 합동대(박정헌 등 8명)를 시작으로 한국산악회 황기용, 엄홍길 14좌 추진위(엄홍길 한왕용 등 5명) 등에서 14명의 대원이 잇따라 등정, 한 시즌 등정국가 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했다. 이듬해인 2001년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위해 박영석이 동국대 산악부를 이끌고 올랐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이야 사실 '히말라야 14좌 등정'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 위해 K2에 도전장을 던졌겠지만, 큰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여타 산악인들은 K2에 도전하는 것이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죽음으로의 여정에 다름 아니다. 해서, 박영석의 K2 등정 이후 6년간 국내 어느 원정대도 감히 넘보지 못했다. 워낙 등반 자체가 힘들다 보니 도전조차 두려운 것이 K2의 현실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 지난해 '2007 다이나믹 K2-브로드피크 부산 원정대'의 김진태 김창호 대원과 여성원정대의 오은선 대원이 잇따라 등정에 성공했다. 국내 원정대로서는 각각 6, 7번째였고, 개인으로선 21, 22, 23번째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지난 1일 K2 등반에 나섰던 경남 울산지역 산악인인 황동진(45) 등반대장, 김효경(33) 박경효(29) 대원 등 3명이 등정 후 하산하다 실종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원정대는 곧바로 시신 수습에 나섰지만 불가항력적임을 깨닫곤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곤 지난 14~16일 경남 김해 조은금강병원에서 경남산악연맹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안타깝게도 시신없는 상태로 진행되는 장례여서 빈소가 아닌 분향소 형태로 치러졌다.

 지난해 K2 부산원정대의 지원조와 함께 K2 트래킹을 떠나 K2 베이스캠프에서 원정대원들과 이틀밤을 함께 하며 취재를 다녀온 기자는 이번 원정대의 비보를 듣고는 한동안 잊었던 '죽음'이라는 단어가 새삼 떠올랐다.

 곧바로 기자는 지난해 K2 부산원정대의 홍보성 대장과 통화를 했다. 그는 착찹한 심정으로 "조금 전 조형규 경남산악연맹 회장과 통화를 하며 현지 소식을 듣고 위로의 말을 건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 대장은 산악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히말라야 8000m 거봉은 산신의 허락의 없으면 절대로 등정할 수 없다'는 경구가 이토록 가슴에 와닿은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K2로 가는 길은 사실 죽음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나 사상자를 많이 냈으면 유럽의 산악인들은 K2를 두고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고 불렀을까.

 K2 등반이나 K2 트래킹을 위해선 스카르두라는 곳에서 일정상 1박을 한다. 대개 전통의 K2모텔에 묵는다. 파키스탄 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인더스강을 굽어보는 전망좋은 이곳은 K2 브로드피크 가셔브롬 등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발토르 빙하 일대를 등반하는 산악인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대변하듯 기나 긴 복도에는 지난 수십년간 각국 원정대들의 등반을 알리는 사진이나 그림엽서, 지역 신문기사들이 전시돼 있다. 한국인으로 세 번째 히말라야 14좌에 오른 한왕용의 마지막 남은 가셔브롬 2와 브로드피크 등반 계획을 알리는 커다란 포스터도 걸려 있다.
 하지만 한 켠에는 지난 1996년 3명의 한국인이 브로드피크를 등정한 후 하산길에 불귀의 객이 됐다는 현지 파키스탄의 신문이 눈에 띈다. K2와 브로드피크 베이스캠프는 도보로 1시간30분밖에 걸리지 않아 통상 원정길에 오르면 두 봉우리를 함께 등반한다.

 발토르 빙하에서 풀이 있는 마지막 야영지인 우르드까스에선 박영석이 동료 산악인 2명을 추모하는 동판이 암벽에 걸려 있다. 그리고 야영지 끝자락에는 작은 비석들이 서 있는 묘지군이 눈에 띈다. 원정대나 트래커들의 짐을 나르는 현지 포터들의 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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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영지 우르드까스에서 본 현지 포터들의 묘지(왼쪽). 우측은 박영석 씨가 동료 산악인 두 명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추모동판. 역시 우르드까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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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드까스에서 본 오스트리아인들의 추모동판(왼쪽)과 우르드까스 전경.

 K2 베이스캠프 입구 쪽 둔덕에는 '메모리얼 힐'이라는 추모공간이 있다. 작은 돌탑 주변에는 여러 개의 동판이 눈에 띈다. K2에서 희생된 전 세계 산악인들을 애도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이곳에는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책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당사자인 알리슨 하그리브스의 동판도 눈에 띈다. 여성 산악인으로 지난 1995년 에베레스트를 무반소로 단독 등정한 그는 두 달간의 휴식 후 K2도 역시 무산소로 단독 등정에 성공했지만 하산길에 생을 마감했다. 네살, 여섯살 두 아이를 두고서.
 당시 여섯 살난 아이가 공식회견장에서 아빠에게 엄마가 죽은 곳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아이와 아빠의 K2 트래킹은 현실화됐고, 이 트래킹 기록이 바로 '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내용이다. 당시 파키스탄은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트래킹을 지원했고, BBC는 이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K2가 죽음의 산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전 세계인들에게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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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2 베이스캠프 입구 쪽 둔덕에 위치한 '메모리얼 힐' 작은 돌탑에는 여러 개의 동판이 걸려
           있다. 돌탑 가운데 밤색 동판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엄마의 마지막 산 K2'의 당사자인
           알리슨 하그리브스의 것이다.

 K2에서의 죽음의 흔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K2 베이스캠프에서 이틀밤을 보낸 기자는 시도때도 없이 들려오는 산사태의 굉음에 괜시리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리속에 맴돌았다. 고소 캠프 구축을 위해 베이스캠프를 오가던 한 대원은 작은 산사태가 일어나 국적 불명의 시신 한 구가 떠내려오는 걸 봤다고도 했다.

 그리곤 귀국 후 부산원정대와 함께 K2 등반을 하던 세르파 니마 누루부가 캠프4에서 출발한 지 3시간만인 해발 8200m 지점에서 일순간 미끄러져 3000m 추락해 실종됐다는 사고 소식을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고 지점은 이번 경남 울산 원정대원들이 실종된 바로 그 지점이다. 세르파 니마 누루부는 1년 전인 2006년 부산원정대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함께 등정한 친구이자 동생같은 존재였다.

 부산원정대에 따르면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 후 카트만두에 집이 있는 세르파 니마 누루부가 대원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 후 디저트를 먹으며 대원들은 "앞으로 부산원정대가 도전할 나머지 8000m급 거봉들도 함께 하자"고 제의하자 옆에 있던 부인이 "K2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는데 운명의 신이 결국 그의 남편인 니마를 K2에서 앗아갔다는 것.

 이 처럼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오가고 그 흔적이 곳곳에 베어 있는 K2로의 여정.
 그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K2는 세계 등반사에 자신의 이름을 확고히 새긴 기라성 같은 산악인들의 목숨을 가뭇없이 삼켜버린 '죽음의 산' 답게 인간의 의지만으론 결코 등정할 수 없는, 산신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위엄이 넘쳐 흘렀다.

 K2 트래킹으로 인해 거의 7월 한달을 그곳에서 보낸 2007년 여름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경남산악연맹 악우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오버랩되면서 다시 머리속을 맴돈다.

 그 험한 곳을 왜 갔어요. 갔다면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지.
 
 슬프다. 안타깝다.
 애오라지 산이 좋아 산에 살았던 그래서 산에 묻힌 산사나이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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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2 등정 후 하산하다 불의의 사고로 희생된 황동진 원정대장과 박경효 김효경 대원의 분향소가
       지난 14~16일 김해 조은금강병원에 차려졌다. K2 원정대 제공.
 

산을 향한 초인의 고뇌 "이번에도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히말라야 8000m급 히말라야 14좌와 얄룽캉 그리고 지난해 5월 31일 로체샤르마저 오른 엄홍길은 지난 5월 28일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한 데 이어 최근에는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마음의 숲, 272쪽)를 펴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면서 느꼈던 삶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란다.


 엄홍길이 세간에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 88년. '서울 올림픽 기념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가, 정상을 밟게 되면서부터다. 물론 그 이전인 85, 86년에도 에베레스트에 두 차례나 도전했지만 경험 미숙으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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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시 '엄홍길 기념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필자.


 첫 등정의 기쁨도 잠시, 엄홍길에겐 이후 좌절과 절망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인 89년부터 92년까지 안나푸르나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등에 도전했으나 6회 연속 등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93년 초오유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불운의 사나이'라는 오명을 벗고 홀연히 일어섰다. 산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우직함, 겸손함이 좌절을 극복하고 빛을 발하는 버팀목이 된 것이다.
 이후 95년 한 해에 마칼루 브로드피크 로체 등 3개 거봉을 오르는 등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도중 안나푸르나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4전 5기 끝에 힘겹게 넘어섰다. 2000년 '죽음의 산' K2를 올라 세계에서 8번째 히말라야 14좌에 등극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31일 로체샤르마저 올라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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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거봉의 종지부를 찍은 지난해 5월 로체샤르에서의 엄홍길 대장.


 #38전 20승 18패, 성공률 겨우 반타작 넘어

 엄홍길은 작심한 듯 이 말부터 시작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저는 실패가 성공만큼이나 많습니다. 이제까지 언론이 실패는 크게 부각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성공 사례만 대대적으로 보도해 왔기 때문입니다. 필부들에게 엄홍길이는 히말라야에 갔다 하면 성공만 하는 탄탄대로의 산악인으로 각인된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히말라야 8000m 거봉과의 전적(?)은 '38전 20승 18패'로 승률 5할이 약간 넘는다.
 "에베레스트는 세 번 오르고 세 번 실패했고, 안나푸르나는 4전5기, 캉첸중가와 낭가파라바트는 각각 세 번만에, 이번에 16좌의 종지부를 찍은 로체샤르는 3전4기만에 성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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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 지역을 통과하는 엄 대장(왼쪽)과 등반에 앞서 제단앞에서 안전한 등반을 기원하고 있는 엄 대장. 모두 로체샤르에서다.


 그리곤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선 성공에서 얻은 지혜보다 실패에서 깨우친 앎이 더 소중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듬던 고통스러운 장면이 떠오른 듯 처음 만날 때의 예의 순박한 눈빛이 일순간 일그러진다.

 #히말라야는 살아있는 신(神)

 흔히 히말라야 8000m급 거봉들은 산신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다고 하던데.
 "공감합니다. 히말라야는 살아 움직이는 위대한 신처럼 느껴져요. 해서 히말라야는 도전해 들어오는 인간의 마음가짐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때문에  한순간의 자만심이나 오만함은 많은 사람의 불행을 가져올 수 있어요. 수도자와 같은 마음으로 산과 하나가 돼야 비로소 등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엔 안 그렇지만 일단 산에 들어가면 젊은 대원들을 틀어잡습니다. 한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그게 곧 죽음이니까 어쩔 수 없이 독재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대원들을 차분하게 만들어야죠."
 22년 동안 히말라야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 만의 철학인지라 실감나게 다가왔다. 순간 최근의 로체샤르에선 산신이 허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던가 하는 사실이 몹시 궁금했다.
 "예, 느꼈어요. 로체샤르는 4번만에 성공했어요. 지난해 원정 때는 정상 200m를 앞두고 눈사태 우려 때문에 발길을 돌렸고, 2003년에는 150m 앞에서 눈사태를 당해 대원 2명을 잃은 뒤 철수한 아픈 기억이 있지요. 로체샤르는 베이스캠프에서 3500m가 넘는 수직 빙벽이 떡 버티고 있어 보는 순간 정이 확 떨어집니다. 대원들에게 내색은 안했지만 '과연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빙벽을 오르는 순간에도 수시로 낙석이 떨어져 그냥 운명을 하늘에 맡겼었죠."
 하지만 이런 로체샤르가 드디어 길을 열어주고 있구나 하는 영감을 받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등반 도중 세르파 한 명이 500m 아래로 추락을 했는데 약간의 골절상만 입고 살았어요. 통상 이 정도면 100% 사망이거든요. 근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거죠."
 엄 대장은 그때부터 산신이 원정대를 도와주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그를 짓눌렀던 무거운 짐이 눈녹듯 사라졌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등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일이 계속 발생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풀려 점점 자신감이 생겼단다. 하지만 그로 인해 원정 기간이 점차 길어져 계획했던 두 달을 넘어 세 달째 접어 들면서 초조함이 생겼다.
 "그래도 저는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기회는 올 거라고 확신했죠. 그게 적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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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이 맨 앞에서 등반을 하며 대원들을 이끌고 있다. 로체샤르에서.

 #잊지 못할 4전 5기 안나푸르나

 파란만장한 히말라야의 고난과 환희를 엮은 자전적 기록인 '히말라야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에서 엄홍길은 '안나푸르나만큼 처절하고 피눈물 나는 기억은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얼만큼 버거웠으면 그랬을까.
 "아다시피 안타푸르나는 5번만에 올랐어요. 한마디로 저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을 부르는 악몽과도 같은 산이었어요. 세르파 나티와 까미, 그리고 한국 최고의 여성 등반가였던 지현옥을 잃는 아픔도 겪었지요. 특히 지난 98년 네 번째 도전 때는 7500m 지점에서 추락하는 2명의 세르파를 구하려다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중상을 당했죠.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도 베이스캠프까지 2박 3일 걸리는 고행길을 나홀로 6일 간의 죽음을 넘나드는 오체투지로 기적같이 돌아왔지요. 결국 국내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담당의사는 앞으로 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죠. 산악계에서도 '이제 엄홍길이는 끝났구나'라는 말이 회자됐대요. 하지만 저는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는 재활로 결국 10개월 만인 이듬해 봄 안나푸르나를 등정했어요."
 지금까지 오른 히말라야 16좌 중 개인적으로 어렵기의 순서를 매긴다면.
 "역시 안나푸르나가 가장 어려웠고 다음으로 칸첸중가 로체샤르  K2 얄룽캉 마칼루 에베레스트 가셔브롬1 로체 다올라기리 낭가파르바트 시샤팡마 브로드피크 마나슬루 초오유 가셔브롬2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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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이 로체샤르 등반에서 대원들을 이끌고 있다.(왼쪽) 우측은 지난 2006년 네팔 딩보체에서 조우한 '다이나믹 부산 에베레스트 원정대' 홍보성 대장과 무사등반을 기원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스페인팀과의 독특한 조우는 행운"

 히말라야 완등 기록을 보니 스페인 원정대와 무려 5번나 함께 등정을 했던데.
 "후아니토 오아르사발. 저보다 세 살 많은 그는 세계에서 6번 째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 등반가죠. 지난 90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의 첫 만남 이후 92년 낭가파르바트, 95년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에서 또 다시 조우했죠. 그런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저의 등반 경력이나 등반할 때 저의 모습을 유심이 관찰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듬해 봄 마칼루를 같이 등반하자는 거예요. 그것도 개인장비를 갖추고 네팔까지만 오면 된다는 호조건이었어요."
 화끈한 성격으로 속도 위주의 경량 등반이 체질화 된 그들은 엄홍길과 등반 스타일이 비슷해 찰떡궁합이었다. 마칼루 이후에도 엄 대장은 그들과 함께 저렴한 경비로 브로드피크 로체 가셔브롬1 안나푸르나를 차례로 올랐다. 이렇게 히말라야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자 국내에선 비로소 엄홍길을 위한 히말라야 14좌 추진위가 생겨 숨통이 튀였다.
 "만일 스페인팀을 만나지 못했다면 현재의 이같은 영광은 늦쳐졌거나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죠. 그런 면에서 전 인복이 많은 것 같은데요."

 #거봉 등반은 이제 그만…유족들 도울 터

 "저와 함께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동료는 항상 마음 속의 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민간 문화재단인 '히말라야 휴먼문화재단'(가칭)을 만들어 히말라야 등반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유족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엄 대장은 지금도 그들이 가끔 꿈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또 청소년들을 위해선 산악 및 탐험 캠프 등을 만들어 산에서 배운 노하우를 전수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히말라야 8000m급 등반은 이제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더 이상 등반에 나선다는 것은 오만이고 산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의 몫으로 돌리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겠습니다."

글=이흥곤 hung@kookje.co.kr
사진 일부=엄홍길 원정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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