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근교산 시리즈 500회 특집 역대 산행 담당 기자 에피소드

 5년간 함께 산행한 기자와 이창우 산행대장은 지금까지 딱 한 번 따로따로 집에 왔다. 2년 전 경주 토함산~울산 삼태봉을 찾았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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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와 이창우 산행대장. 장흥 천관산 정상이다.


 아름다운 감포가는 4번 국도 상의 황룡마을에서 토함산에 올라 석굴암 입구로 내려올 때까진 문제가 전혀 없었다. 이후 계획은 석굴암 주차장을 지나 도로를 따라 가다 산길로 오른 후 삼태봉으로 가는 것이었다. 도로에서 산으로 접근하길 수 차례, 산길이 없는 것이었다. 몇 차례 가시덤불을 뚫으려고 시도는 했지만 불가능했다. 이렇게 1시간. 그의 뒤를 묵묵히 걷다가 기자는 이 대장을 불러 세웠다. 그리곤 "이후 산길을 찾는다 하더라도 도로를 걷는 시간이 너무 길어 산행지로 부적합하다"라고 의견을 개진했다. 이 대장은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재차 불러 보았지만 그는 대답없이 걷기만 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벌어지자 기자는 제법 큰 소리로 다시 한번 고함쳐 보았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혼자 집에 가라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이었다. 지친 기자는 도로에 주저 앉아 1시간 정도 기다렸으나 이 대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전화통화에서 이 대장은 끝내 길을 찾지 못했다며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엔 칠흑같은 어둠속을 겨우 뚫고 나온 적도 있었다. 물론 둘일 경우 그나마 그럭저럭 내려오겠는데 그날은 여성동지 두 명이 함께 했다. 여름철이라 비 걱정만 했지 랜튼 생각은 어느 누구도 못했다. 폭우를 만나고 길을 두어 차례 잃다 보니 시간은 점점 흘러 어둑어둑. 배낭을 뒤져봐도 4명 중 어느 누구도 랜튼이 없었다. 핸드폰을 랜튼 삼아도 넘어지고 자빠지고 미끄러지고 잡풀을 헤치고, 사태난 길을 사뿐사뿐 통과하고…. 하여튼 산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그 짧은 시간에 모두 해보았다. 문득 머리 한켠에는 '아! 사고가 이렇게 나는구나,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조난상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스쳐갔지만 그래도 천하의 이창우 대장이 있는데 하며 애써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하지만 산행대장과 기자의 착찹한 마음과 달리 여성 동지 둘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용케 버텨주었다. 기자가 농담으로 밤에는 멧돼지지를 만날 수 있다고 하자 여성동지들은 "배도 고픈데 잡아 먹어야지"라고 할 정도였다. 도로에 내려오니 밤 9시5분. 주차돼 있는 곳까지 걸어서 30분. 저녁은 도로변 아무 식당에 들러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회사 앞에 도착하니 밤 12시20분. 산행도 실패하고 몸은 만신창. 그래도 살아돌아 왔으니 어찌 기뻐지 아니하리오.
이처럼 취재기자와 산행대장은 산행 중 에피소드가 참 많다. 역대 산행기자의 그것도 이참에 한번 들어보자. 정리=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 회장님, 하늘에서도 여전히 산행 즐기시겠죠? - 박병률 기자(2000.11~2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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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계속 나와도 되지. 발에 쇠심하나 박긴 했어도 체력하나는 자신있어."

칠순인 그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말대신 미소로 화답했다. 그날 그는 지리산 언저리의 주산 산행에 근교산 대원으로 처음 동참했다.

2001년의 새봄이 기지개를 켜던 어느날 근교산 취재팀에 고 김창한 '회장님'이 들어왔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고, 중동에서 돈을 벌었으며, 지금은 자식들을 출가시켰다고 했다. 그는 근교산 대원 중 역대 최고령이었다. 우리팀은 그를 '회장님'이라 부르기로 했다.

"난 말이야, 죽어도 원한이 없는데 다만 죽을 때 캑 소리 한번 하고 그냥 갔으면 해. 그래도 한 열흘 정도는 병원에서 간호를 받고 싶어. 그래야 섭섭하지 않지."

산행이 깊어지면 대원사이에 이런저런 사적인 대화들이 오간다. 회장님은 '잘 죽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리고는 "그러려면 산이 최고야. 그래서 내가 산을 타는 것이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리산으로 떠났던 그해 가을,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논의 끝에 산행을 포기하자 그는 "진교에도 좋은 산이 있는데 가보자"며 우리 손을 이끌었다. 그런데 그가 간 곳은 예순이 넘은 여동생의 집이었다. 그녀는 "우리 옵빠 오셨네"라고 반기며 갓 잡은 전어를 내놓았다. 아, 그날 입 안에서 살살 녹던 전어의 맛! "건강해야 한다"며 몇 번이고 손을 잡던 남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올 봄 나는 회장님의 부고를 뒤늦게 들었다. 지난해 가을 타계하셨다는 것이다. 산행을 하러 집을 나서던 중 정말로 '억'소리 한번에 쓰러졌고, 열흘가량 병원 신세를 진 뒤 그렇게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했다. 그의 마지막길을 뵙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영남알프스 태극종주, 지리산 사계…. 회장님. 우리가 어렵게 개척했던 길 잊지 않았죠?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brpark@kookje.co.kr

# 대장님, 웬만하면 아는 길로 가면 안될까요? - 조봉권 기자(1998.9~2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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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냉기가 가시지 않은 1999년 3월초였다. 아침부터 비가 왔다. 비를 맞으며 경남 하동군 악양면 미동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비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내렸다. 구재봉~칠성봉 등산로가 정비되기 전, 산길은 말 그대로 무공해였다.

애초 목표대로 구재봉(767.8m)을 거쳐 칠성봉(900m)까지는 빗속을 뚫고 잘 갔다. 산 위에는 이창우 산행대장과 나 두 사람뿐이었고 비를 그을 곳이 없어 3월 찬 빗물에 밥을 말아먹다시피 도시락을 비웠지만 성취감으로 가슴은 뿌듯했다.

그런데 이창우 산행대장은 그 장대비 속에서도 또 '새로운 루트'를 고집했다. 그는 이미 알려진 칠성봉 하산로를 외면하고 능선을 따라 계속 나아갔다. 지도상에는 사람들이 덜 다니는 다른 하산길이 나와 있었고 취재팀은 그 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우리가 그 하산길의 입구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비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내렸다.

나는 초짜 산행기자였다. 칠흑같은 어둠에 갇히고 주위에는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을 때, 랜턴의 배터리는 반드시 달랑달랑해진다는 '법칙'을 그 때 처음 배웠다. 빗속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낭떠러지에 막혀 포기하기를 몇 차례, 드디어 절벽 아래 토굴을 발견해 몸을 의탁한 시각은 밤 9시 30분쯤이었다. 12시간 동안 3월 초 찬 빗 속을 헤맨 셈. 대장은 멀쩡했지만 나는 탈진했다.

1998년말부터 2년 몇개월 동안 '다시 찾는 근교산' 담당기자였던 내게 이창우 산행대장은 "그 때 유독 험산 잡산 개척코스를 많이 다녔다"며 미안해 하곤 한다. 하지만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 주산~미숭산에서 만난 수백 마리 반딧불이들의 그 황홀한 군무를, 내가 강해졌다는 것을 느꼈던 지리산과 영남알프스의 기억을, 다시 찾는 근교산에서 보낸 모든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bgjoe@kookje.co.kr

# 끝없는 황사먼지 폭탄… 세탁기가 막힐 뻔 - 김용호 기자(2002.2~2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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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은 유난히 황사가 심했다. 그해 4월께, 그러니까 근교산 취재를 맡고 얼마 안돼서 일이다. 그날 취재 목적지는 경북 현풍의 비들산(291회)이었다. 비슬산은 많이 들어봤어도 비들산은 금시초문이었다. 이창우 산행대장의 설명에 따르면 비들산은 비슬산 바로 옆 산으로 현지 주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산행 시작은 순조로웠다. 들머리도 쉽게 찾았다.

고행은 산행을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 첫번째 작은 봉우리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나뭇가지마다 켜켜이 쌓여있던 황사먼지가 산행팀을 괴롭혔다.

최소 수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는지 등산로는 길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잠시 뒤 이 산행대장은 길이 없다면서 능선을 타고 무작정 오르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건드릴 때마다 황사는 폭탄이 터진 것처럼 뿌옇게 먼지를 일으켰다.

침을 뱉어도 그때 뿐 입 안에서는 먼지 알갱이가 맴돌았고 산행안내 리본을 매달기 위해 한번 쉴 때마다 가져간 식수로 입을 헹궜다. 앞서가는 이 산행대장이 나뭇가지를 건드리며 털어놓은 먼지는 고스란히 기자에게 돌아왔다. 1시간여를 황사속에서 헤매는 바람에 안경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게 변했고, 먼지에 목이 잠겨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관기봉에 이르러서야 겨우 배낭을 풀었다.

짙은 녹색의 배낭은 먼지가 앉아 뿌옇게 변했고, 검정색 바지는 땀과 먼지에 얼룩이 져 군복처럼 보였다. 그날 입은 등산복에서 나온 구정물은 공군 훈련소에서 빨래할 때 본 이후 최고로 더러웠다.

가덕도 응봉산~웅주봉(314회) 취재 산행때 공사장용 코팅장갑을 끼고 가시덤불을 헤쳤던 일이나 민주지산~삼도봉(322회) 취재를 마친 뒤 자동차의 배터리가 방전돼 한겨울 추위에 발을 동동 굴렀던 일도 잊기 어렵다. kyh73@kookje.co.kr


# 초보산꾼, 수도~가야산 종주서 탈진 또 탈진 - 배병주 논설위원(1993.1~1994.8, 1996.1~19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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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근교산 시리즈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3년이었다. 중간에 1년여 공백기를 가지기는 했지만 한 테마를 가지고 10년 넘게 연재를 이어간 사례는 우리 언론사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물론 이런 '대기록'을 세운 것은 독자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시리즈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기자는 산에 대해선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길에 석굴암 관광을 위해 토함산을 오른 것이(당시에는 석굴암 순환도로가 없었음) 당시 기자의 유일한 산행 경력이었다. 이런 초보자가 어찌 근교산 시리즈를 시작할 엄두를 냈는지 지금도 그 무모함에 아찔한 생각이 들곤 한다.

초보 산행기자의 산행은 실수의 연속이었다. 산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기가 일쑤였고, 잘못 들어선 길에서 굴러떨어지는 등 실수연발이었다. 기사마감이 임박해 우중산행에 나섰을 때는 안개에 길을 잃어 산 속에서 헤맨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수도~가야산 종주산행. 산행 시간만도 12~14시간이 걸리는 데다 산길마저 험해 기자에게는 극기체험 코스나 다름없었다. 1000~1300m급의 봉우리 7개를 넘어야 하는 데다 도상거리만 40㎞에 달해 기자에게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걸어가면서 용감하게 산행을 시작했지만 후박령을 넘어서자 무릎에 통증이 오는 게 아닌가. 하산지점인 경북 성주군 백운동까지는 아직 3~4시간 더 걸어야 하는데 말이다. 동행자의 도움을 받아 뒷걸음질까지 해가며 산행을 마치기는 했지만 기자에게는 이 산행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하지만 기자는 이 같이 아픈 추억보다 미답의 산길을 독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었던 즐거움만 기억하고 싶다.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근교의 무명산을 지역 산악동호인들에게 돌려주었다는 뿌듯함이 더 크기 때문이다. bjbae@kookje.co.kr


# 이틀연속 같은 산 등반 "해가 나와야 사진을 찍지" - 조해훈 문화전문기자(1997.3~19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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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어느 매체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산 취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갖고 있는 국제신문의 '근교산' 취재 횟수가 500회를 맞았다니 그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기자가 근교산 초반기에 잠시 취재를 맡았지만 그 명성에 보탠 것은 거의 없다. 기자가 그동안 산 취재와 관련, 외부에 글을 많이 쓴 탓에 재미있는 에피소드 등을 다 써먹었지만 미약한 기억을 떠올려본다.

지난 97년 여름이었다. 기자는 경남 밀양 삼각산(887m) 등산코스를 취재하러 갔다. 그날 아침부터 먹구름이 끼는 등 날씨가 심상찮았다. 장마철 기후가 그런 것이어서 비를 맞으며 취재를 하면 되므로 기사는 별 문제가 없었다. 비가 아무리 많이 내리더라도 사진도 우산을 쓰고 찍으면 괜찮았다. 우기에 산 정상에서 도시락을 먹는데 가릴 만한 게 없어 그야말로 '빗물에 밥을 말아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았던가.

산행 코스 안내를 해주시는 분과 둘이서 산에 올랐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후두둑' 소리내며 빗방울이 떨어졌다. 산 정상 부근에 가서 도시락을 먹기로 하고 올랐다. 나무며 풀이 물기를 많이 머금은 탓에 산 특유의 습기냄새가 났다. 기분 나쁜 냄새가 아니라 마치 '녹색의 내음'이라고나 할까, 우기에 산행을 해본 사람들은 그 냄새를 알 것이다.

산 중턱을 지나자 구름과 안개가 섞여 날렸다. 마치 빗물이 몸 속에 스며들어 고인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마침내 힘들게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큰일이다. 비축해 놓은 기사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안개가 시야를 가린 탓에 어렵사리 하산하면서도 사진을 찍기 위해 수없이 뒤를 돌아보았으나 보이는 건 안개 뿐이었다. 다음날 기사를 써놓고 휴가를 받아 다급한 마음에 사진을 찍기 위해 혼자서 삼각산 등산을 한번 더 했던 것이다. massjo@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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