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전북 고창 선운산 하면 열에 아홉은 동백꽃을 떠올린다. 대웅보전 뒤편에 수령 500년된 이 절집의 동백숲은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노목의 기품을 자랑한다.
 밝은 햇살 사이로 만개했을 때의 붉은빛의 싱싱함과 송이째 부러지며 쓰러지는, 그래서 잔인스럽기까지 한 질 때의 안타까움으로 매년 4, 5월이면 전국에서 마치 성지순례 마냥 범부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로 시작되는 이 고장 출신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를 되뇌이면서.
 수년 전부터는 9월에도 4월 못지 않게 장삼이사들이 이 절집으로 몰려든다. 선홍빛 꽃무릇을 보러.

지천에 널린 선홍빛 꽃무릇
선운사는 9월 중순부터 마치 열병처럼 또 한 번의 순례로 홍역을 앓고 있다. 아직 울긋불긋한 색의 마술사 단풍이 제 모습을 드러낼려면 보름 이상 남았는데도.

       선운사 입구 도솔천.
       도솔천 건너편에 위치한 꽃무릇 군락지. 끝물이다.


 바로 석산(石蒜)이라 불리는 꽃무릇 때문이다. 꽃무릇은 햇살 기울고 소슬 바람이 다가오면 피어나는 전형적인 가을꽃. 하지만 고개를 숙이며 누렇게 익어가는 벼에서 풍기는 '결실' '성숙'과 같은 가을 뉘앙스와는 달리 오히려 정열을 상징하는 선홍빛이다. 생기발랄한 봄기운을 느낀다면 되레 역설적일까.
 선운사로 들어가는 길은 천년 고찰이 말해주듯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등 울창하고 빽빽한 수림에 압도된다.
 하지만 시선은 이내 왼쪽으로 이끌린다. 길 옆을 흐르는 도솔천의 시원한 물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울 건너편에 무리지어 한꺼번에 꽃부리를 펼쳐 낸 선홍빛의 꽃무릇 군락지 때문이다. 선연한 핏빛으로 뒤덮였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약속이나 한듯 너나 할 것 없이 발걸음을 멈춘다. 군락지가 워낙 넓어 삼삼오오 무리 지은 곳이 여러 곳이다. 아직도 초록빛을 고이 간직한 숲속의 활엽수와 묘한 색채대비를 이룬다.
 '출입금지'라고 적힌 금줄이 매어 있지만 전국의 내로라 하는 사진작가들은 개울을 건너 금줄을 넘어 연신 셔트를 눌러댄다. 또 하나의 볼꺼리다.
 꽃무릇은 예부터 독특한 생태적 특성과 서식 장소 때문에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수선화과에 속하는 꽃무릇은 잎과 꽃이 따로 핀다. 9월말이나 10월초 꽃이 완전히 지면 비로소 잎이 자라나 눈 속에서 겨울을 보낸 후 이듬해 여름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후 찬바람이 부는 9월이 되면 매끈한 30㎝ 정도의 초록빛 꽃대가 자라나 다시 꽃을 피운다.
 이 처럼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애달픈 사연을 가져 상사화(相思花) 혹은 이별초(離別草)라 불리며 예부터 절집에 많이 심어졌다. 이 때문에 중꽃, 중무릇으로도 지칭된다.
 절집에선 한편으론 이러한 생태가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열반의 세계에 드는 것 같다 하여 피안화(彼岸花)라 불린다. 영광 불갑사 주변도 지금 한창이다.
 유의해야 할 점 하나. 원래 상사화는 꽃무릇보다 먼저인 8월께까지 피는 연분홍빛의 여름꽃이다. 하지만 꽃무릇과 같은 속이면서 꽃색만 다를 뿐 생태습성이 유사해 상사화 부류에 포함시킨다.
 꽃모양은 상사화가 나리꽃과 비슷한데 반해 꽃무릇은 꽃송이가 갈기갈기 갈라진 갈고리처럼 생겼다.
 경내에 들어서도 꽃무릇의 행렬은 이어진다. 개울 건너편처럼 대규모 군락은 아니지만 시선 돌리는 곳마다 석산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절집 입구에서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에는 꽃무릇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쭈욱 서 있다.

         보물인 선운사 대웅보전.
                  조그만 전각인 산신당 바로 옆에도 꽃무릇이 피어 있다.

 발걸음을 대웅전 뒤편 동백숲으로 옮겼다. 비록 동백꽃은 진지 오래지만 그래도 선운사를 대표하는 동백숲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5000여 평이나 되는 산비탈에 군락을 이룬 동백숲은 여전히 웅장했지만 이곳에서도 꽃무릇은 예의 선홍빛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일행을 맞고 있다. 터줏대감격인 동백 앞에서도 전혀 어색함이 없이 조화를 이룬다.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 아주 조그만 전각인 산신당 바로 옆에도 꽃을 피워 이채롭다.
 경내에서 만난 한 스님은 "7, 8년 전부터 사찰 차원에서 꽃무릇을 심기 시작했다"며 "이제 9월이면 선운사 전체가 꽃무릇으로 붉게 물들 것"이라고 일러줬다.
 동백꽃 단풍과 함께 꽃무릇은 이제 선운사를 대표하는 명물 '트로이카'로 자리매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꽃무릇은 일부분, 볼 것 많은 선운산 도립공원
전각이 모여있는 선운사 경내는 화려하지도, 작지도 않은 조용한 절집의 아늑한 정취가 살아있다. 보물인 대웅보전과 금동보살좌상 등을 구경한 후 도솔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다고 전해오는 진흥굴.
        여덟개의 긴 가지가 우산처럼 뻗어있는 천년기념물 제354호인 장사송. 진흥굴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아직도 푸름을 간직한 숲길을 10여 분 걸으면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다는 진흥굴이 나온다. 인위적으로 판 흔적이 보이는 진흥굴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진흥굴 바로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354호인 장사송이 위풍당당 서 있다. 수령이 600년이며 키가 무려 23m인 장사송은 17m나 되는 여덟개의 긴 가지가 우산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 모습이 인상적이다.

         기도효험이 빼어나다는 도솔암.
       도솔암 내원궁에서 바라본 선운산 천마봉. 입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천마를 닮아 명명됐다고 전해온다. 이 모습은 수 년전 손창민 주연의 MBC 드라마 '신돈'에 자주
       등장하곤 했다.
         사진 상의 기와 지붕이 선운산 도솔암이다. 이 도솔암 뒤에서 바라보면 천마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보물 제1200호인 도솔암 마애불상.


 장상송에서 10여 분쯤 더 가면 깎아 지른 기암절벽 옆에 자리잡은 도솔암이 나온다. 지장보살을 모신 도솔암 내원궁은 기도 효험이 빼어나다고 일찌기 유명세를 타 기도객이 전국에서 줄을 잇는 곳.
 도솔암 바로 옆에는 절벽 한면에 17m에 달하는 거대한 마애불이 눈길을 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 양 옆에는 멋들어진 소나무가 각각 협시불처럼 자리하고 있어 운치가 있다.
 선운사를 품고 있는 산은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는 도립공원 선운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운사에 오면 경내만 둘러볼 뿐 선운산의 진가를 찾으려 하질 않는다.
 도솔암에서 산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영화 '남부군'의 촬영지로 유명한 용문굴과 서해안의 지는 해가 환상적인 낙조대, 선운산 최고봉인 천마봉이 차례로 이어져 멋진 산행코스로 추천할 만하다. 1시간이면 넉넉하게 둘러볼 수 있다.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도솔암 뒤편 바위로 올라가면 정면의 천마봉과 그 우측의 낙조대 등 선운산의 수려한 산세를 조망할 수도 있다.

#추천 맛집
 고창 선운사에 오면 반드시 맛봐야 하는 음식은 이곳 특산물인 풍천장어와 복분자술. 선운산 입구에 들어서면 길 양편에 저마다 '원조'라는 이름을 앞세운 커다란 간판이 눈에 띈다.
선운사 입구의 인천강에서 잡히는 풍천장어는 특히 뛰어난 영양식품으로 각광받아 왔다.
 하지만 요즘 식당에서 내놓는 장어는 대부분 양식 장어. 손님이 자연산을 원할 경우에만 특별히 내놓는다. 양식장어의 경우 ㎏당 4만원인데 반해 자연산 장어는 ㎏당 20만 원으로 가격차가 제법 난다.


 식당마다 메뉴와 가격은 대부분 같다. 장어구이(1인분) 1만8000원, 장어쌈밥정식 1만9000원, 복분자주(360mℓ) 1만원. 담백하고도 달콤한 장어에 복분자술을 한 잔 곁들이면 술맛까지 달 정도로 궁합이 맞다.
 선운사 입구의 풍천가든(063-562-7520)은 대파를 깔고 그 위에 장어를 얹어져 맛이 깔끔하다. 야외 불판에서 먹으면 장어도 안타고 더 맛이 있다. 청원가든(063-564-0414), 유신식당(063-562-1566)도 제법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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