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한자가 터줏대감처럼 굳굳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절집이다.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한자로 '아무개 山, 무슨 寺'라고 적힌 일주문을 시작으로 줄곧 대웅전(大雄殿) 비로전(毘盧殿) 명부전(冥府殿) 등이라 적힌 편액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편액은 그래도 그나마 좀 나은 편.
 문제는 기둥에 장식으로 내걸린 현판에 적힌 글귀인 주련(柱聯). 한시(漢詩)의 연구(聯句)나 부처님의 진리, 당대 선지식의 절창이 주를 이루는 이 주련을 두고 호사가들은 인간과 인생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장삼이사의 입장에선 사실 '그림의 떡'. 한문깨나 하는 사람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거의 두 손을 들고 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속된 말로 '쇠귀에 경읽기' 아닌가.

 이러한 모순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있다. 이 암자는 들어서면서부터 편액이나 주련이 모두 한글로 적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웬지 포근하게 다가온다.

 천년고찰 범어사 산내 암자인 금강암(金剛菴)이 바로 그렇다. 범어사에서 금정산 북문으로 가는 초입에 위치해 있는 금강암은 범어사 일주문에서 넉넉잡아 15분이면 닿는다. 한글로 '금강암'이라 적힌 조그만 팻말이 길섶에 보여 찾기도 어렵지 않다.

금강암에서 본 주련을 잠시 인용하면 이렇다.

'즐거움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괴로움도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밉고 고운마음 모두 벗어버리면
 언제나 고요한 참마음이라네'

 '자비로운 그 손길이 참다운 불심이요
  꾸밈없는 큰 미소가 더없는 진리로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자로 된 부처님 말씀보다 이처럼 마음에 쏙쏙 와닿는, 읽기 쉬운 한글로 된 주련이 아마도 일반 신도의 가슴에 오랫동안 각인돼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할 듯싶다. 

 
 - 잠시 금강암의 연혁을 살펴보자.
 금강암은 범어사가 1901년 선찰대본산으로 지정되기 전 당시 주지였던 오성월 스님이 범어사를 참선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1890년 당시 한국 최고의 선승이었던 경허 스님을 모셔 선원을 최초로 개원한 곳이다. 그러니까 금강암 내 금강선사는 범어사 최초의 선원이었던 것이다.
 이후 지금의 계명암과 내원암 등 산내 암자에 선원이 개설돼 20세기 초에는 범어사에는 9개의 선원이 운영됐다 한다.

 - 그렇다면 금강암의 한글 편액과 주련은 누구의 솜씨일까.
 금강암은 이후 평범한 작은 암자로 유지돼다 1980년 후반부터 서벽파 스님이 주석하면서 일신우일신하게 된다. 맏상좌였던 정여 스님이 금강암 감원(절의 살림살이를 하는 스님)을 맡으면서 중창불사 계획을 세워 1984년 8월부터 1991년 4월까지 8년간 불사를 단행했다. 그 결과, 큰법당을 비롯 종무소 요사채 해우소 등 가람으로서의 골격을 새롭게 갖췄다.

 정여 스님은 1991년 3월 법당 회향을 앞두고 대웅전 등에 걸린 한문으로 된 편액이나 주련이 너무 어려워 일반 신도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암자 내 모든 편액과 주련을 과감하게 한글로 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한 지역 불교계 인사는 "당시 금강암 한글 편액과 주련은 우리나라 최초였으며 획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금강암 감원으로서의 역할을 끝낸 정여 스님은 1991년 음력 4월 초파일을 보내고 다음날 저녁 아무에게도 귀띔을 하지 않고 방을 비우고 홀연히 잠적했다. 스님은 쌍계사 금당선원에서 1000일 동안 절문을 나서지 않고 애오라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후 1995년 7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스님은 "감원으로 8년 동안 불사를 하면서 사바세계와 물건값을 흥정하는 등 마음 에 때가 너무 많이 끼어 1000일 동안 용맹정진에 들어가 참선으로 그 때를 깨끗이 지우고 왔다"고 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 정여 스님과 기자와의 작은 인연 하나.
 기자는 지난 2002년부터 약 1년간 문화부에서 음악과 종교를 담당했다. 당연히 범어사는 기자의 출입처 중의 하나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범어사는 재무승 국고보조금 횡령사건 등으로 한동안 바람 잘 날이 없을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담당기자로서 당연히 이와 관련한 내용을 기사로 작성했다. 하지만 일부가 사실과 달라 혈기 왕성한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매일 아침 7시에 그것도 3일 연속 항의 전화를 받았다.
 기억컨데 어느날 범어사에서 대책회의가 열려, 그 내용을 골자로 그날 곧바로 기사를 작성했다. 하지만 그 대책회의 이후 상황이 돌변해 그만 기사내용의 일부가 오보가 돼 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기자로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책회의 내용을 제보한 그 어떤 분이 상황이 변한 것까지 챙겼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보자 또한 절집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또한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수습은 해야 했다.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선은 그 젊은 스님이 매일 아침 전화를 걸 태세였다. 
 종교를 소재로 기사를 쓰는 것은 잘 해야 본전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싶다. 

 고민끝에 기자가 사실을 불교계 한 지인에게 털어놓자 그는 웃으며 "그 스님 정말 참을성이 많구만. 새벽 4시에 예불을 올리고 나서 민간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무려 3시간을 참았네"라고 농을 건넨 후 스님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스님이 바로 정여 스님이었다.

 부산시청 앞 여여선원을 찾아간 기자가 당시 선원장이던 정여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눈을 감고 다소곳이 경청하던 스님은 직접 찾아가자며 즉석에서 범어사에 전화를 걸어 주지 스님과의 약속을 정했다. 그리곤 직접 쓰신 시집 한 권도 주셨다.
 약속일은 다음날 오전 8시. 정여 스님과 기자 그리고 당시 범어사 주지스님 세 사람은 주지실에서 마주 앉았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얼굴을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대화가 오가자 당시 주지 스님은 "바쁘신 기자님께서 아침 일찍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의외로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해줘 오보 건은 그날 매조지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이 있은 지 6년 뒤인 지난 3월 6일 정여 스님은 범어사 주지실의 주인으로 변신했다.
 무식한(?) 신도들을 위해 지난 1991년 법당 편액과 주련을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한글로 바꾼 선각자 정여 스님. 스님은 6년 전 매서운 찬바람이 귓가를 때리던 겨울 아침 기자를 위해 기자와 함께 범어사 산문을 들어선 그 사실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까. 사뭇 궁금해진다.

지난 3월 범어사 주지로 선임된 정여 스님이 경내 탑전에서 취임법회인 진산식을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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