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1일 롯데전 승리 투수인 SK 고효준(27)이 요즘 프로야구계에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고효준은 지난 2002년 청주 세광고를 졸업하고 2차 1순위로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데뷔 7년차의 중고 신인으로 올해 최강 SK의 선발투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그는 2002년 한 시즌만 뛰고 곧바로 방출됐다. 승패 없이 겨우 3이닝만 던졌다. 트레이드 이유는 여러가지로 전해온다. 왜소한 체격(키 179㎝, 몸무게 72㎏로)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근성이 없다라고도 들린다.
고효준은 올해 벌써 2승을 챙겼다. 0점대의 방어율(0.93)은 히어로즈 좌완 이현승과 공동 선두이고 탈삼진도 선두권이다. 그야말로 괄목상대이자 대기만성의 전형이다.
롯데 구단의 트레이드 변이 궁금했다. 기대했던대로(?) 당시 고효준의 심장이 좋지 않아 내보냈다고 궁색한 변명 아닌 변명이 돌아왔다.
고효준은 SK로 이적된 후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고, 이후 부상 등으로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지난 2년간은 거의 등판도 못했고 결혼 후 생활고까지 겹쳐 김성근 감독에게 울면서 트레이드까지 요청했었지만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지금의 고효준 선수가 새롭게 태어나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자, 이제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고효준이 방출된 시기는 롯데의 제10대 사령탑인 백인천 감독이 있을때다. 지금도 백 감독 이야기는 롯데에 전설처럼 남아 있다.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백 감독은 2002년 6월21일 전임 우용득 감독 해임과 동시에 새로운 사령탑에 취임했다. 당시 롯데는 팀 재건을 위해 백 감독에게 전권을 줘 팀을 맘대로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다. 온라인 상에서는 이를 두고 롯데를 해부실험하던 시기라고 회자되고 있다.
이게 패착의 단초였는데 당시 구단에서 누구 하나 태클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프로야구 타격왕 출신인 백 감독은 전형적인 일본스타일의 야구를 추구했다. 발빠르고 잘 갖다맞히는 타자들을 선호했고 SK 김성근 감독 못지 않게 훈련도 많이 시켰다. 또 워낙 거물출신이다보니 자신의 눈에 차지 않으면 '선수도 아니라'고 직설적인 혹평을 하기도 했다.
백 감독은 시키는 대로 안하고 야구 잘하는 선수보다 야구 못해도 말 잘 듣는 선수들을 중용했다. 한마디로 "내 말 들어"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렇다 보니 코치들은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감독님이 이렇게 하라신다"로 전달자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백 감독은 취임 한달 만에 SK와 전격적인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조경환과 외국인 선수 매기를 보내고 윤재국, 박남섭, 에르난데스를 받았다. 이 트레이드가 백 감독 시절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남았다. 바로 조경환을 보냈기 때문이다. 고려대학 시절 국가대표 4, 5번을 쳤던 부산고 출신의 조경환은 당시 차기 롯데의 주장으로 유력하던 팀의 주축이었다. 트레이드 전 조경환은 3할, 26홈런에 타점도 100타점에 육박하는 중심타자였다. 백 감독은 조경환을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다고 결국 내보냈다.
그 후에도 백 감독은 꾸준히 선수를 보내고 데려왔다. 2003년 8월6일 물러날때까지 1년 조금 넘는 기간 7차례나 트레이드를 했다.
뿐만 아니다.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트레이드설이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에이스 손민한 문동환 이대호 등이었다. 다른 팀의 선발급 투수와 바꾸려는 시도를 했지만 부산출신의 간판을 내주는데 부담을 느낀 프론트는 그나마 마지막 자존심으로 이를 막아냈다고 전해온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체격이 큰 이대호에게는 살을 뺄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방법이 좀 남달랐다. 사직구장 스탠드를 오리걸음으로 오르내리게 했다. 오리걸음 후유증이었는지 단정할 수 없지만 이대호는 2002년 10월 무릎 연골 파열로 수술을 받았다. 결국 1년 여동안 백 감독은 많은 것을 남겨두고 롯데를 떠났다. 15연패에 꼴찌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내려놓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