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에 위치한 나제통문(羅濟通門)은 흔히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우리나라 정규 교육과정을 배운 장삼이사라면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는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신이나 관료들이 오가는 관로였기 때문에 민초들은 엄격히 통제됐다.
 그렇다면 민초들은 어디를 경유해 신라에서 백제로 국경을 넘었을까.
 필자는 무주 석기봉~민주지산을 산행하면서 우연히 알게 됐다.
 흔히 민주지산은 무주보다 북쪽인 영동 물한계곡에서 산행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국제신문 산행팀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산 너머 무주 설천면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5만분의 1 지형도를 준비해 가지만 들머리 찾기는 마을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산행팀은 물어 물어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
 하지만 산행 중 계속 의문이 가는 점이 있었다. 바로 지도상의 지명인 중고개였다. 그것도 윗중고개, 아랫중고개가 있는 것이었다.
 흔히 고개의 사전적 의미는 능선상에서 가장 낮은 지점으로, 산 너머 마을을 쉬이 넘나드는 지점을 의미하지만 이번 산행에서 중고개는 이런 사전적 의미의 고개와는 딴판이었다.
 운좋게도 산행팀은 이러한 의문에 명쾌하게 답을 준 스님 한 분을 만났다. 바로 아랫중고개 인근에 위치한, 단군을 모시는 신불사에서20여 년간 수도한 한산 스님이 바로 그분이다.

 스님에 따르면 이 중고개는 신라의 승려들이 중국을 오갈 때 넘어다닌 곳이란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제통문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신이나 관료들이 다녔고, 스님이나 민초들은 모두 이곳을 지났다는 것.
 구체적인 경로를 보면, 당으로 공부하러 가기 위한 신라의 스님들은 김천 직지사에 모여 뒷산인 황악산에 오른 후 백두대간길을 따라 전라 충정 경상도를 가르는 삼도봉에서 민주지산 쪽으로 능선을 갈아탄 후 석기봉을 거쳐 이곳 중고개로 하산, 이웃한 나제통문 대신 무주땅, 다시말해 당시로는 백제땅에 들어왔다.(아래 지도 참조) 이들은 이후 금산 논산을 거쳐 부여 백마강에서 배편으로 당으로 건너 갔다고 전해온다.

 이 때문에 중고개는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쉼터 역할을 한 사실에 연유돼 마을사람들이 명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지금도 사용되는 있는 설천면 내 법정리인 대불리(大佛里)나 그 아래 행정리인 불대(佛垈)마을은 모두 이곳을 스쳐간 스님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한산 스님의 설명이다. 스님은 또 석기봉 아래의 삼두마애불이나 지리서 '동국여지지'에 나오는 백운산(민주지산의 옛 이름) 기슭의 불두사(佛頭寺)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신라 때 중국으로 공부하러 갔던 원효나 의상 심지어 김유신에게 버림받아 장흥 천관산으로 귀의했던 천관녀도 모두 이 길을 밟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이 대략적인 설명이다. 아래는 산행팀이 석기봉~민주지산을 산행하고 정리한 산행기사이다. 이맘 때 석기봉은 산 중턱까지 온통 단풍나무로 가득차 황홀하다.
모처럼 역사공부도 할 겸, 단풍도 구경할 겸 석기봉~민주지산을 올라보시는 게 어떠할지... 



원효도 천관녀도 단풍 보며 쉬었을까

공부위해 중국 간 신라 스님 모두 이 길로 통행
이웃한 나제통문, 공적업무 수행 관료들만 이용
들머리 '중고개', 산 벗어난 스님들 쉬어간 곳
대불리 불대마을 등 불교지명, 여기서 유래
산 중턱까지 온통 단풍나무 군락, 이번 주말 절정
 
 

 전북 무주군과 충북 영동군을 가로지르며 중부 내륙 깊숙이 자리한 석기봉~민주지산. 노련한 산꾼들은 민주지산 하면 대개 영동 물한계곡을 떠올린다. 계곡미와 편리한 접근성 그리고 편안한 오르막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존 등산로 답습보다 새로운 루트 개척을 중히 여기는 산행팀은 영동 대신 산 너머 무주를 들머리로 길을 뚫었다.   
  
무주땅 북동쪽 설천면 대불리 중고개가 들머리. 통상 고개라 하면 산이나 언덕을 쉬이 넘나드는 지점을 말하지만 이곳 중고개는 이런 사전적 의미의 고개와는 전혀 딴판이다.

알고 보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 있었다. 중고개 골짝의 단군을 모시는 신불사에서 20여 년간 수도한 한산 스님에 따르면 이곳은 신라의 승려들이 중국을 오갈 때 넘어다닌 곳이라 한다. 당시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있었지만 이는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관료들만 오가는 관로였기 때문에 민초들은 엄격히 통제됐다.

신불사 한산 스님.

산행들머리인 아랫중고개.

해서, 당으로 공부하러 가기 위한 신라의 스님들은 김천 직지사에 모여 황악산에 오른 후 백두대간길을 따라 삼도봉에서 민주지산 쪽으로 능선을 갈아탄 후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이곳 중고개로 하산, 이웃한 나제통문 대신 백제땅인 무주로 들어왔다. 이후 금산 논산을 거쳐 부여 백마강에서 배편으로 당으로 중국으로 건너 갔다. 의효나 의상 심지어 김유신에게 버림받은 천관녀도 모두 이 길을 밟았으리라.

이 때문에 중고개는 사전적 의미의 고개가 아니라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쉼터 역할을 한 사실에 연유돼 명명된 것으로 풀이된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설천면 내 법정리인 대불리(大佛里)나 그 아래 행정리인 불대(佛垈)마을 그리고 석기봉 바로 아래의 삼두마애불 모두 이곳을 스쳐간 스님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한산 스님의 설명이다.

무주 쪽에서 오른 석기봉과 민주지산은 알고 보니 단풍 산이었다. 기존의 단풍 명산과 견줘도 하등 손색이 없다. 산 아래만 단풍이 아름다운 유명 단풍 산에 비해 이곳은 해발 800m대까지 울긋불긋한 단풍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온통 단풍 천지였다. 단풍 명산 목록에 새로 추가해도 될 듯하다.

 산행은 대불리 아랫중고개~삼도봉 민주지산 갈림길~삼두마애불~석기봉(1180m)~물한계곡(속새골) 갈림길~민주지산(1242m)~윗중고개~아랫중고개 순. 걷는 시간만 4시20분 정도지만 절정의 단풍을 감상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외길이라 길 찾기는 쉽지만 거칠고 험한 하산길은 고생을 좀 해야 한다. 하여, 노란 안내 리본을 촘촘하게 묶어놨다.

아랫중고개 입구의 깔끔한 흰색 민가 옆엔 예쁜 무지개 다리 두 개가 눈에 띈다. 다리를 건너면 신불사. 산행 후 잠시 둘러보기로 하고 다리 쪽으로 직진한다. '상수도 유원지 차량 출입 엄금'이라 적힌 팻말을 지나면서 정면 저 멀리 정상부가 쌀겨처럼 엉겨 있는 봉우리가 보인다. 곧 오를 석기봉이다.

5분 뒤 '석기봉 1.5㎞'라 적힌 이정표를 따라 산으로 들어선다. 곧 창고인 듯한 슬레이트 지붕의 건물을 지난다. 길은 약간 거칠지만 반듯해 정감이 간다. 10분 뒤 계류를 건넌다. 알고 보니 바로 옆 또 다른 계류와 만나는 합수점이다. 붉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붙잡는다. 수정같이 맑은 계류에 비치는 붉은 빛과 고색창연한 초록 이끼. 이는 화려한 단풍 산의 서막에 불과하다.

계류를 건너면 이내 갈림길. 우측으로 7, 8m쯤 가면 세 갈래길. 가운데길로 발길을 옮긴다. 길섶엔 쑥부쟁이 구절초 용담 꽃향유 등 야생화와 억새가 나 좀 보라 손짓한다.



석기봉은 해발 800m대의 산 중턱 이상까지 단풍나무 군락지여서 단풍 명산 목록에 새로 추가해도 될 듯하다.

10분 뒤 아름드리 낙엽송도 대자연의 법칙에 머리를 조아리고 황갈색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다시 10분 뒤 일순간 산길이 왼쪽으로 90도 꺾이면서 된비알로 변하지만 그것도 잠시. 산죽과 더불어 완경사 오르막이 이어진다.

크고 작은 돌들이 널브러진 지계곡을 지나면서 주변이 온통 단풍 천국으로 변한다. 계곡을 중심으로 양측 산사면까지 포함하면 폭이 족히 30m쯤 되는 산 속이 온통 단풍나무 천국이다. 온 산이 불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형국이 수 백m 이어진다.

이창우 대장도 "단풍 명산은 보통 산 아래나 계곡 주변에 한 두 그루씩 화려하게 빛을 발하지만 이처럼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곳은 아주 드문 경우"라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산길은 급경사길로 돌변한다. 단풍은 다소 뜸하지만 계곡 쪽 먼 발치엔 여전히 눈에 띈다. 25분쯤 길 좌측으로 집채만한 바위가 보일 무렵 단풍은 이제 거의 빛이 바랬다. 곧 갈림길. 왼쪽 민주지산 대신 우측 삼도봉 방향으로 간다. 곧 50m 암벽에 높이 6m의 머리가 셋인 삼두(三頭)마애불을 만난다. 좀처럼 보기 드문 형상이다. 마애불 아래에는 너른 터와 약수물탕이 있어 오래 전부터 기도처로 이용돼 온 것으로 보인다.

50m 암벽에 높이 6m의 머리가 셋인 삼두(三頭)마애불.


석기봉 정상.

삼두마애불에서 50m쯤 바위 사이로 오르면 석기봉. 정상석이 없는 이곳에 서면 우측 정면으로 정상 부분에 삼도 대화합기념탑이 약간 보이는 삼도봉과 그 우측으로 웅장한 백두대간 산줄기가 용틀임하며 내달린다. 삼도봉 우측 뒤로 저 멀리 대덕산과 초점산이 희미하게 확인된다. 뒤돌아 서면 정면 뾰족한 봉우리가 민주지산이고 그 우측 뒤 V자 홈이 난 봉우리가 각호산과 배걸이봉이다.

                     석기봉에서 민주지산 가는 길.

왼쪽 민주지산 쪽으로 내려선다. 밧줄에 연이어 의지해 내려오길 세 차례. 이어지는 산길에도 없어도 될 지점에 유달리 밧줄이 매어져 있다. 적설량이 특히 많은 이곳은 겨울 내내 빙판길이라 안전을 위해서라고 이 대장은 말한다.

석기봉에서 민주지산까지는 외길로 대략 1시간10분 걸린다. 산길 왼쪽은 무주, 오른쪽은 영동이다. 돌길 또는 침목계단길을 오르내리고 산죽길로 내달린다. 무명 봉우리를 하나 넘는데 이곳이 대략 중간 지점이다. 또 물한계곡으로 빠지는 탈출로가 셋 있지만 벤치가 둘 있는 정상 직전 탈출로(속새골 갈림길) 외에는 등반 통제구역이란 안내판이 서 있다.

민주지산 정상 직전 영동 물한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

영동군이 세운 정상석과 삼각점 앞에 서면 방금 지나온 석기봉과 삼도봉이 보이고, 정북으로 뿔 달린 호랑이가 살았다는 각호산과 배걸이봉, 그 왼쪽 뒤 푹 꺼진 도마령 뒤로 천마산 천마령이 손에 잡힌다. 이 대장은 "날이 맑을 경우 가야 황악 금오 덕유산과 무주리조트의 슬로프도 보인다"고 말했다.

    
하산은 15m쯤 되내려가 방금 온 좌측 대신 직진 오름길로 향한다. 우측으로 길게 뻗은 능선을 타고 원점회귀하기 위해서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럭저럭 막힘없이 열려 있다. 이곳은 앞선 등로와 달리 겨울산. 바람이 차거니와 낙엽이 수북이 깔여 있다. 대신 바싹 마른 낙엽 밟는 소리가 정겹다.

민주지산 정상.

민주지사에서 본 석기봉(가운데 뾰족한 봉)과 그 왼쪽이 삼도봉이다.

30여 분 뒤 만나는 갈림길에선 우로 내려선다. 상행길만큼은 못 하지만 길 주변의 단풍이 한 번 더 시선을 끈다. 갈림길에서 15분이면 사거리 안부에 선다. 오른쪽은 불대마을, 왼쪽으로 내려선다. 급경사길로 변하면서 일순간 길이 사라지지만 왼쪽 계곡 쪽 싸리나무에 가려진 산길이 숨어 있다. 산행팀은 입구의 싸리나무를 꺾고 길을 연 다음 노란 안내리본을 촘촘하게 매달아 놓았다. 5분쯤 뒤 물 마른 계곡에 닿고, 여기서 15분이면 산을 벗어난다. 입구에 '민주지산 1.8㎞'라 적힌 이정표가 서 있다. 여기서 윗중고개마을을 거쳐 아랫중고개까지는 5분 걸린다.


# 떠나기전에 - 일제 때 왜곡된 민주지산 한자 여태 통일 안돼

민주지산이라는 이름은 수수께끼다. 반계 유형원이 쓴 지리서 '동국여지지'에는 이곳이 백운산으로 표기돼 있지만 이후 일제에 의해 왜곡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일제가 어떤 근거로 이름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지금도 민주지산의 한자 표기는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국립정보지리원 발행 지형도에는 '잘 면(眠)' 자를 써서 眠周之山(면주지산)이라 표기돼 있다. 혹자는 '면'자를 '민' 자로 읽기도 한다는 데 옥편을 찾아보면 근거없는 얘기다. 한 발 양보해 만일 '민' 자로 읽기도 한다면 '둘레 주(周)' 자와 곁들여 '주변이 함께 졸고 있다'는 뜻으로 백두대간을 넘보며 용틀임하는 이 산줄기가 졸고 있으니 일제의 의도와 대략 일치한다. 또 '둘레 주' 자 대신 '주인 주(主)'를 조합해 眠主之山이라 하면 '주인이 잠들다'는 뜻이 돼 역시 일제의 의도가 엿보인다.

'옥돌 민(珉)' 자를 쓴 珉周之山은 '주변에 옥에 버금가는 돌만 두루 깔렸다'는 의미겠으나 일제에 의해 개명됐다기 보다 호사가들이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또 '옥돌 민(珉)'를 따로 빼 '왕과 백성이 두루 살펴본다'는 의미로도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백과사전에는 '산 이름 민(岷)' 자도 보인다. 흠 잡을 데 없는 무난한 이름 같지만 왠지 2% 부족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고백컨대 기자는 민주지산이라 해서 처음엔 무슨 민주화의 성지쯤 되는 산인 줄 알았다.

출처가 불분명한 민주지산 대신 원래의 이름인 백운산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이 시점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첨언 하나. 충청 경상 전라도 등 세 도를 가른다고 해서 명명된 백두대간 삼도봉과 석기봉은 모두 민주지산에 속하는 봉우리다. 혹자는 민주지산의 북쪽에 위치한 각호산까지 포함시키는 데 산세로 봐서 별개의 봉우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첨언 둘. 들머리 아랫중고개에서 무지개 다리를 건너면 신불사 봉황대. 한산 스님은 지세로 봐서 봉황이 터를 잡은 곳이란다. 지도 상에는 진벌로 표기된 이곳은 백제시대 병사들의 진지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송림을 배경으로 인공연못과 정자를 조성해 놓아 경관이 빼어나다.

# 교통편 - 대중교통 당일치기 불가, 승용차 이용해야

대중교통편은 당일치기로 불가능하다. 부산서 무주로 바로 가는 시외버스는 없다. 굳이 적어 본다면 열차를 이용해 대전역~대전터미널로~무주시외버스터미널~설천면 소재 공용터미널. 여기서 택시를 이용해 들머리로 이동해야 한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 고속도로 무주IC~무주(무주리조트 구천동) 방면 우회전~영동 무주 안국사~싸리재터널~영동 상주~구천동 무주리조트 안국사~성주 설천 반디랜드 30번 국도~성주 설천 반디랜드 우회전~남대천과 나란히~설천면~반디랜드 지나~GS구천동주유소 지나~삼도봉 장터 방향 좌회전(훼미리마트)~삼도봉 민주지산~내북마을(대불리 신불사) 방향 좌회전~석기봉 안내판~아랫중고개(무지개다리) 순.

글 사진=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문의=국제신문 산행팀
이창우 산행대장


'동남권 삼도봉' 품은 원효의 화엄도량
봄 진달래· 여름 계곡 · 가을 단풍·겨울 눈꽃
부산 울산 경남 경계… 보기보다 벅찬 코스
하산길 울창한 숲 도통골 폭포·소 더위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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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봉(일명 불광산)을 지나 대운산 가는 도중의 전망대(왼쪽)와 대운산 정상.
 
 
 세 지자체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를 의미하는 삼도봉(三道峯). 백두대간에는 실제로 삼도봉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가 셋 있다.

우선 지리산 서부능선 상의 삼도봉(1550m). 경남(하동) 전남(구례) 전북(남원)의 경계에 솟아있다. 3도 경계라는 사실 이외에는 별 특징이 없다.

충북(영동) 경북(김천) 전북(무주)을 가르는 삼도봉(1177m). 이웃한 지자체가 완전히 달라 '오리지널'이라는 수식어가 흔히 붙는다. 정상에는 3개 도민들이 지역 간 화합을 다짐하기 위해 세운 대화합 기념탑이 서 있다. 오리지널 삼도봉의 남쪽 바로 아래에 위치한 또 다른 삼도봉(1249m)은 경북(김천) 전북(무주) 경남(거창)의 경계에 솟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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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수염(왼쪽)과 꿀풀.

부산 인근에도 찬찬히 찾아보면 이와 유사한 삼도봉이 속한 산이 하나 있다. 바로 대운산 660봉이다. 흔히 주봉은 울산과 경남 양산의 경계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주봉의 남서쪽에 위치한, 지금도 기장 장안사 쪽에선 불광산이라 불리는 660봉이 부산 기장, 울산 울주, 그리고 양산 웅상의 경계를 이루며 삼도봉 역할을 하고 있다.

원효의 마지막 수도처로 알려진 대운산은 전형적인 육산. 양산 웅상의 명곡이나 기장 장안사 인근 척판암, 그리고 울주 상대주차장 등 어디로든 접근이 용이해 영남알프스 못잖게 지역 산꾼들이 즐겨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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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중나리(왼쪽)와 속은노루오줌.

단지 가깝다는 이유만은 결코 아니다. 봄이면 연분홍 진달래가,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이, 가을이면 만산홍엽 단풍이, 겨울이면 동해와 인접해 연신 내리는 눈으로 사시사철 꾸준히 산꾼들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 특히 여름이면 주 계곡인 상대계곡을 비롯, 도통골 박치골 내원암 계곡 등은 전국의 많은 산꾼들로 붐빈다.

하지만 부드럽고 그윽한 겉모습과 달리 실제 속살로 파고 들면, 암팡진 산세로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근히 체력을 고갈시킨다. 이창우 산행대장은 "빼어난 절경은 아니지만 일부 구간에선 기복이 심해 여름철에는 상당한 체력을 요한다"고 말했다.

   
산행은 울주군 온양읍 상대 제3주차장~능선 안부~장안사 갈림길~첫 이정표~잇단 척판암 갈림길~능선 삼거리~벤치에 이어 660봉~시명산·대운산 갈림길~대운산 정상~헬기장~제2봉·도통골 갈림길~도통골~무명 폭포와 너른 소~대피소(화장실)~임도~제3주차장 순.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5시간10분으로 한여름 산행지로는 다소 벅찬 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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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대운산 등산안내판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15m쯤 떨어진 지점, 왼쪽에 산길이 열려있다. 들머리다. 입구에는 리본이 많이 달려있다.

처음부터 오르막의 연속이다. 한적한 숲 발 아래는 까치수염 노루발 등이 눈에 띈다. 13분 뒤 너른 터이자 능선 안부. 왼쪽은 상대마을, 오른쪽으로 간다. 10m쯤 뒤 다시 갈림길. 오른쪽 능선길 대신 뚜렷한 왼쪽길로 간다. 이내 지계곡. 건너면 갈림길. 왼쪽은 명례마을 하산길, 오른쪽으로 간다.

무덤과 사거리 안부를 잇따라 지나면 비로소 우측에 대운산이 숲 사이로 얼핏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등로는 대운산을 향해 시계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셈이다.

지형지물 하나없는 평범한 산길이 계속된다. 등로 왼쪽은 장안사(부산 기장), 푹 꺼진 오른쪽은 상대계곡(울산 울주) 방향이다. 등로 한 지점에선 장안사 주차장과 척판암을 품은 봉우리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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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골 하단부에는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3단 폭포와 너른 소가 기다린다. 예상치 못한 이 명소에 50대로 보이는 산꾼들이 동심으로 돌아간 듯 수영을 즐기고 있다.
 
그늘이 시원한 절개지 삼거리에 서면 비로소 확 트인 대운산 제2봉과 그 왼쪽 대운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서 17분 뒤 V자 소나무 앞 삼거리서 첫 이정표. 왼쪽 시명산 방향으로 간다.

4분 뒤 다시 척판암 갈림길. 골바람이 시원하다. 두 번째 척판암 갈림길을 지나면서 오름길이 시작된다. 깔끔한 월성 김씨 묘를 지나 100m쯤 더 가면 능선 삼거리. 척판암을 품은 봉우리의 산줄기와 등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정표 기둥만 달랑 서 있다. 그 옆으로 한전 기장지점에서 걸어놓은 대운산 플래카드가 보인다. 이 길은 통상 장안사쪽에서 척판암을 거쳐 대운산 또는 시명산으로 향하는 등로이다.

직진한다. 하늘을 가린 울창하고 넓은 숲길이 이어진다. 까치수염 군락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30여 분. 보랏빛 꿀풀 군락지를 지나면 된비알이 기다린다. 도중 입구에 리본이 걸린 오른쪽 갈림길이 하나 열려 있지만 무시하고 힘든 오름길을 택한다. 밧줄도 매어져 있다.

된비알이 끝날 무렵 벤치 둘. 여기서 2, 3분 뒤 만나는 정점이 부산 울산 양산의 경계지점이자 일명 삼도봉인 660봉이다. 사위가 꽉 막혀 있다. 왼쪽이 부산 기장, 정면에서 2시 방향까지 경남 양산, 오른쪽이 울산 울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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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갈림길. 직진하면 시명산, 대운산을 향해 우측으로 내려선다. 2분쯤 지나 왼쪽 뒤로 시명산 가는 길이 하나 더 나온다. 참고하길. 이때부터 부산을 벗어나 등로 왼쪽은 양산, 오른쪽은 울산이다.

시명사와 상대계곡으로 각각 빠지는 사거리를 지나면 바람이 시원한 벤치에 닿는다. 다시 내리막길. 나무 사이로 보이는 대운산 정상이 아득하다.

등로는 내려섰다가 다시 오름길로 이어진다. 고행길이 한 번 남은 셈이다. 숲 속 한 켠의 털중나리꽃이 반갑다. 17분쯤 땀을 바짝 흘리면 돌탑이 나타나고 여기서 우측으로 5분 더 가면 마침내 대운산(742m) 정상. 정상석을 등지고 10시 방향의 봉우리가 시명산, 정상석 뒤 저 멀리 동해 바다는 흐린 날씨 탓에 아쉽게 희미하다.

왼쪽 대운산 제2봉 방향으로 내려선다. 정상에 서 있는 등산안내도 상의 ③번 길이다. 정상석 뒤 상대마을로 직진하는 길은 ④번이다. 두 길은 계곡물이 불어나는 지점에서 만난다. 흔히 원효가 도를 닦았다는 도통골 큰바위 인근의 용심지(암자터)는 ④번 길에 있다.


곧 헬기장. 우측 저 멀리 소나무 한 그루가 선명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제2봉이다.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10분 뒤 갈림길. 직진하면 제2봉이니 오른쪽 상대마을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급경사길이어서 밧줄이 매어져 있다. 15분쯤 뒤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사실상 급경사길은 끝. 이때부터 두 갈래로 지계곡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숲이 울창한 데다 너른 암반 위로 흐르는 계류가 여느 이름난 계곡 못지 않다.

이렇게 10여 분. 용심지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정상에서 1.8㎞ 지점. 산행 막바지다.

다시 10분 뒤 산길을 벗어나면 첫 번째 대피소. 이때부터 임도. 3분 뒤 도통골의 백미 폭포와 너른 소에 닿는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7, 8명의 산꾼들이 팬티만 입은 채 물놀이할 정도로 깊고 넓다. 여기서 두 번째 대피소를 지나 들머리인 주차장까지는 대략 30분 걸린다.


# 떠나기전에- 660봉, 불광산 정상으로 봐야 합당 
 
기장 장안사나 척판암에 가보면 아직도 관광안내판에 불광산(佛光山)이란 이름이 나온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이곳 오래된 읍지에 불광산이라 적혀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대운산뿐 아니라 장안사를 둘러싸고 있는 시명산 삼각산도 이 불광산에 포함된 듯하다.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이후 이 불광산이 대운산 삼각산 시명산으로 각각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기장 장안사쪽에선 척판암을 품은 봉우리를 지금도 불광산이라 부른다. 오래 전과 달리 협의의 불광산인 셈이다.

이창우 대장은 "지금처럼 대운산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 주변 산세를 고려해볼 때 660봉을 불광산 정상으로 봐야 합당하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 날머리 도통골은 원효가 도를 닦았다는 골짜기. 이 도통골이 한국전쟁 당시 부산과 가장 가까운 파르티잔의 소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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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엔 관광도. 영남 최고의 명당이라는 내원암(왼쪽)과 내원암 주차장 내 50년 된 팽나무. 줄기 모양이 코끼를 형상을 하고 있다.

상대마을의 한 팔순 노인에 따르면 1951년 말 대운산에는 50여 명의 북한 패잔병들과 50여 명의 토착 파르티잔이 있었는데 그 본부가 도통골 끝자락이었다. 이들의 대장은 홍길동으로 불리는 인물로 워낙 신출귀몰한 기습을 해와 수 차례에 걸친 경찰의 토벌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이듬해 봄 산불을 질러 파르티잔을 괴멸시켰다. 그 영향으로 도통골을 비롯한 대운산은 지금도 아름드리 나무가 드물다.

# 교통편-남창서 상대마을까지 마을버스 이용

해운대역 맞은 편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울산행 버스를 타고 남창에서 내린다. 오전 5시부터 15~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800원. 지하철 2호선을 탈 경우 해운대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남창에서 하차한 후 길건너 맞은 편에서 대운산(상대마을) 가는 마을버스를 이용한다. 오전 7시40분, 9시10분, 10시10분, 11시10분. 900원. 대운산 제3주차장에서 남창행 마을버스는 매시 30분에 출발한다. 막차는 오후 7시30분. 남창에서 해운대 터미널행 버스는 자정까지 있다.

기차를 이용해도 된다. 부전역에서 남창행 동해남부선 통일호 열차는 오전 6시20분, 7시5분 두 차례 있다. 1시간 걸리고 2800원. 남창에서 부전역행 열차는 오후 6시2분 단 한 차례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부산과 울산을 잇는 14번 국도를 타면 된다. 송정해수욕장 입구 지나~울산 온양~기장군청 지나~울산 울주군 온양읍 입간판 지나~장안사 입구 지나~상대 하대 대운산(입구에 '산여울' 간판)~대운산 내원암 계곡~굴다리 통과~대운산 제3주차장 순. 주차비 무료.

글·사진 = 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문의 = 국제신문 산행팀 (051)500-5168
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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